Sovereign of the Infinite Clones RAW novel - Chapter (119)
#119
소리 없는 전쟁 (1)
에나멜 대륙, 엘븐 킹덤의 수도 드라샤.
여기, 대자연과 교감하며 하나가 된 이가 있었다.
‘아— 바람 좋고, 햇빛 좋고, 그늘도 좋고. 이게 힐링이지.’
커다란 나무 그늘에 대자로 드러누워 멍하니 있는 모습.
겉보기에는 그저 게으른 백수처럼 보였지만, 그것 또한 자연과 함께 호흡하며 일체화하는 수련의 일부였다.
‘움직이기 귀찮네. 역시 가끔은 이런 시간도 있어 줘야 한다니까. 사람에게 여가 시간이 괜히 필요한 게 아니야.’
···조금 사심이 깃들어있긴 하지만, 이 과정을 통해 자연 친화력을 더욱 성장시킬 수 있으니 수련이라는 말도 절대 틀린 건 아니었다.
그렇게 고요 속에 물아일체를 온몸으로 표현하는 엘프, 해리스는 나무로 만들어진 길쭉한 무언가를 품 안에 꼭 껴안으며 바닥을 뒹굴었다.
“흐아아··· 좋구나···.”
그저 끌어안고만 있어도 뭔가 따뜻하고 포근한 느낌이 들며 몸이 노곤하게 늘어진다.
그렇지 않아도 자연에 과하게 몰입하는 경향이 있었는데, 이 물건과 함께하니 그게 걷잡을 수 없는 상태에 이를 정도였다.
‘세계수가 직접 하사한 가지로 만든 거니까 말이지.’
라포리를 통해 가공을 부탁한 그 가지가 마침내 늘씬하게 빠진 활이 되어 해리스에게 돌아온 것이다.
활줄을 풀어둔지라 그저 굴곡 있는 나뭇가지 같은 그것은, 단순히 가지고만 있어도 소유주의 여러 능력을 증폭하는 능력이 있었다.
그중에 자연 친화력이 포함된 건 너무나 당연한 일이었고.
‘평화롭네. 심연이 열린 이온 대륙과 거리가 멀어서 그런지 에나멜 대륙은 평상시와 그리 다를 게 없단 말이지.’
거기다 세계수의 영향 덕분인지 광기의 영향도 그리 크지 않은 편이었다.
아예 없는 건 아니지만 평상시 전력으로도 충분히 대응할 수 있는 수준.
그야말로 축복받은 땅이라 할 수 있었다.
‘음?’
그때, 한동안 빈둥거리던 그의 감각에 이쪽으로 다가오는 이의 기척이 느껴졌다.
자연과 하나 되어 한껏 예민해진 기감은 상대를 곧장 파악할 수 있게 해주었고, 그에 해리스는 슬그머니 감았던 눈을 뜨며 그쪽을 바라보았다.
역시, 그에게 용건이 있는지 이쪽으로 곧장 다가오는 이는 그도 아주 잘 아는 상대였다.
“흐아암— 데시벨.”
우우웅—
해리스의 부름에 중급으로 성장한 소리의 정령, ‘데시벨’이 안락한 휴식을 위해 주변에 펼쳤던 방음 장막을 해제했다.
동시에 고요한 세상에 서서히 소리가 입혀지고···.
~♪
멀리서 신나는 음악 소리가 은은하게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요새 드라샤에 한창 유행처럼 번진 경쾌한 음악.
해리스의 적극적인 개입으로 유입된 새로운 문화의 여파가 피부로 느껴지는 상황이었다.
그는 음악을 들으며 상체를 천천히 일으켰다.
한동안 실컷 늘어져 있었더니 나태함에 대한 욕구도 어느 정도 충족시켜 상쾌하기 그지없었다.
그리고 시원하게 기지개를 켜고 있을 무렵, 마침내 씩씩한 걸음으로 다가온 이가 그에게 말을 걸었으니—.
“···그, 오랜만이네요? 항상 이곳에 있는 것 같던데, 여기가 마음에 들었나 봐요?”
당당한 태도와 대비되는 쭈뼛거리는 인사를 건넨 이는 바로 푸른 머리에 푸른 눈동자를 가진 엘프 여성, 샤피론 실베스티였다.
‘오랜만이라니. 당장 오늘 아침에도 마주하지 않았나?’
그녀와는 축제에서의 공연 이후, 생각 이상의 무난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마주치면 인사 정도는 나누는 사이가 됐다고 할까.
무슨 심경의 변화가 있었는지, 해리스에 대한 그녀의 태도가 라이벌을 대하는 것처럼 변한 탓이 컸다.
‘아니, 그 정도가 아니라 한동안은 몰래 따라다니며 이쪽을 관찰할 정도였지.’
그것도 어찌나 열성적이었는지, 모범생처럼 눈을 초롱초롱 빛내며 뭔가를 메모하는 모습까지 보일 정도였다.
본인은 들키지 않았다고 생각한 것 같지만, 자연 친화력이 극도로 상승한 그의 감지를 벗어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래도 최근에는 잠잠해졌다 싶었는데. 또 무슨 용무가 생겼나 보군.’
첫 마디 이후로 바로 말을 잇지 못하고 그의 눈치만 살피는 모습을 보아하니···.
뭔가 아쉬운 소리를 하러 온 것 같았다.
“안녕하세요, 샤피론 양. 이쪽이 마음이 편해서 말이지요. 자연과의 교감이 더 잘되기도 하고.”
“그, 그렇죠. 교감, 중요하죠···.”
어색하게 웃으며 그의 말에 동조하는 샤피론은 이젠 양손까지 마주하고 손가락을 꼼지락거리기 시작했다.
“그래서, 혹시 무슨 용무가 있나요?”
“아!”
이쪽이 먼저 말을 꺼내자 그녀는 잠시 멈칫하더니, 이내 조심스럽게 본론을 입에 담았다.
“그, 저희가 이번에 대륙 정상 회의 사절단에 포함되었잖아요? 그래서··· 준비를 조금 하고 싶은데···.”
이온 대륙에 있는 주신교단의 성지, 로셀리아 대신전에서 대륙 정상 회의가 예정되어 있었다.
그 사안이 사안인 만큼 에나멜 대륙의 나라들도 그곳에 참여하게 되었는데, 그 사절단의 수행 인원으로 해리스와 샤피론이 함께 포함된 것이다.
“준비요?”
“으··· 아, 아무래도 다른 대륙이고 하다 보니 여기랑 여러모로 다를 수밖에 없잖아요? 그런데 엘븐 킹덤의 얼굴이 될 저희가, 사소한 실수라도 하는 날엔 국제 문제로까지 비약될 수 있는 일이고! 그래서···.”
원래 이온 대륙 출신이었던 데다, 최근에 세계수의 가지로 만든 활을 받고 정령들이 모두 중급으로 진화한 해리스.
마찬가지로 중급 정령을 소환할 수 있으며, 드라샤 아카데미 최고의 유망주임에도 불구하고 외부 경험이 전무한 온실 속 화초 샤피론.
능력 자체는 수행원으로 삼기에 부족하지 않은 둘이었던 만큼, 이번에 경험을 쌓게 하기 위한 취지로 둘 다 사절단 멤버에 포함된 상태였다.
“당신은 이온 대륙 출신이니까···. 잠깐 도움을 조금 받을 수 있을까 싶어서 말이죠? 물론! 맨입으로 부탁하겠다는 건 아니에요! 제대로 대가도 준비했으니까요!”
민망한 표정의 그녀가 해리스와 눈을 마주치지 못하고 횡설수설했다.
하긴 최근엔 나아졌다고 해도 전까지 해왔던 행실이 있는데, 이제 와서 도움을 요청하는 건 상당히 부끄러웠으리라.
그래도 그녀의 마음은 이해할 수 있었다.
평생을 지내왔던 엘븐 킹덤에서 처음으로 벗어나 외부로 향하는 것이다.
그것도 완전히 다른 대륙으로 향하는 것이었으니···.
‘긴장되기도 하고, 어떻게든 완벽한 모습을 보이고 싶겠지.’
하물며 이번 사절단의 책임자는 그녀의 아버지, 라포리 그랜우드이지 않은가.
‘저번 임무가 마지막 대외 임무라고 했던 것 같은데. 결국 또 이렇게 되었네.’
하긴 지금 정세에 쉽게 은퇴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새로 하이 엘프가 된 세실리는 아직 한창 교육 중이고, 다른 이들도 각자 맡은 일이 있었다.
결정적으로 이온 대륙에 대한 경험이 제일 많은 이가 라포리였던지라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지금 마주한 사안이 워낙 위중했으니까.
물론 그의 사정은 지금 중요한 게 아니었다.
“저희는 같은 일행이니, 그런 문제라면 기꺼이 도와드려야죠! ···그래서 그 대가가 뭔가요?”
돕는 건 돕는 거고, 챙길 수 있는 건 전부 챙겨야 하는 법이었다.
***
“음— 좋아! 이 정도면 아주 훌륭하군!”
넓은 작업 공간을 가득 채운 최신식 설비들.
신식이라 해봤자 자동화 설비 하나 없는 수작업 공간이었지만, 그것도 모두 가장 비싼 물건들로 도배하면 때깔 자체가 다른 법이었다.
며칠 전에 이세계로 전송된 드워프, 하워드는 공방을 이리저리 꼼꼼히 살피며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휴버트가 미리 공방을 준비해 두긴 했지만, 그가 직접 공간에 자리하며 느껴지는 감상은 또 달랐던지라···.
그렇게 이리저리 손을 보길 며칠, 마침내 만족스러운 공간이 완성되었다.
‘드워프의 종족 특성 때문인지, 「장인정신」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여기서 더 추가로 건들 부분은 없어서 다행이었다.
“만족스러워한다니 다행이군. 하워드.”
“그래, 이 정도면 최상의 작업 환경이군! 역시 함께하기로 한 보람이 있어!”
휴버트와 하워드가 정겹게 대화하며 악수했다.
당연하지만 주변의 시선을 다분히 의식한 요식행위였다.
이 자리에는 휴버트가 평소에 데리고 다니던 세 명의 호위들뿐만 아니라, 상회 직원 몇몇도 파견 나와 있었으니까.
‘앞으로 일의 편의를 위해서는 하워드를 우리 상회 소속이라고 못 박아 두는 게 좋겠지.’
필요한 재료가 있을 때마다 일일이 휴버트가 심부름할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간단한 일은 부하 직원들을 통해 해결할 수 있도록 해두는 게 여러모로 편했다.
‘또 나중엔 자오닉에게도 찾아갈 생각인데, 드워프라고 언제까지고 숨기고만 있을 수도 없지. 차라리 대놓고 상회 차원에서 보호하는 게 안전할 거야.’
이미 휴버트 상회는 타라크에서 제법 자리를 잡은 상태였고, 동업자인 할리의 위상은 예전과는 차원이 달라진 상황이었다.
거기다 주신교단과의 친분이라는 보험까지 남아있는 상황이었으니, 어지간한 이들은 건드릴 생각도 못 할 터.
‘아주 좋군. 이제 지구의 지식을 체화하기만 하면 되겠어.’
그리고 종족과 「장인정신」의 시너지 덕인지 이론적인 부분은 이미 전부 하워드의 머릿속에 있었으니, 남은 것은 실전을 통해 그것을 하나하나 맞춰나가는 것뿐이었다.
“앞으로 하워드가 필요하다고 하는 건 다 구해주도록. 금액은 신경 쓰지 말고. 그냥 나나 할리를 대하듯 해라.”
“예! 알겠습니다, 상회주님!”
공방 건물을 관리하고 경비를 맡을 이들이 고개를 꾸벅 숙였다.
이들도 나름 엄선한 인재들로 구성한 만큼, 어지간한 일들은 알아서 처리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럼 난 이만 가보도록 하지. 앞으로 잘 부탁하네, 하워드.”
“아— 맡겨두라고. 나는 바로 작업에 들어가야겠어!”
그렇게 다시 하워드와 인사를 나눈 휴버트는 공방을 나서 타라크의 시내로 발걸음을 옮겼다.
오늘 하워드의 공방 건을 마무리 지으며 한결 여유가 생겼지만, 상인에게 휴일이 어디 있겠는가.
아바타들의 보급과 잡일까지 도맡은 그였지만, 주 업무는 상회를 키우는 일이었던 만큼 항상 부지런히 움직일 필요가 있었다.
‘그래도 브로코슬락 클랜과 연계하면서 일이 한결 편해진 건 사실이지.’
다른 조직의 뒷공작을 방어하고 정보를 수집하는 데에는 뱀파이어들만 한 인재가 없었다.
덕분에 상회가 커지는 데 한층 탄력을 받았으니, 이미 그것만으로도 그들은 밥값을 톡톡히 하는 중이었다.
그렇게 휴버트가 호위들을 거느리고 바쁘게 걸음을 옮기던 찰나.
그의 본능에.
무언가 위화감이 느껴졌다.
‘뭐지?’
휴버트는 곧장 그 자리에서 멈춰 주변을 둘러보았다.
온갖 물건을 쌓아놓고 파는 상인과 무장하고 돌아다니는 용병, 바쁘게 움직이는 사람들까지···.
평소와 같은 풍경.
딱히 이상한 점은 눈에 띄지 않았다.
하지만 분명 평소와는 뭔가가 달랐다.
보이진 않으면서 느껴지는 것이 있는데, 그것이 무엇인지 알 수가 없었다.
“상회주님···?”
휴버트가 갑자기 멈춰 서서 인상을 찌푸리고만 있자, 조용히 뒤를 따르던 네 명의 호위들이 그를 의아하게 바라봤다.
점점 가속하기 시작하는 사고 속에서, 전신을 뒤덮은 위화감은 점차 커져만 갔고···.
그 이성을 무시한 본능의 경고에.
그는 마침내 원인을 깨달을 수 있었다.
‘네 명?’
아주 자연스럽게, 세 명의 호위들 틈에 누군가가 끼어있었다.
창백한 피부에 붉은 눈과 붉은 머리라는 아주 강렬한 인상을 가진 이가.
누구의 제지도 받지 않은 채, 바로 옆에 서서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제법 실력이 있는 호위들조차 그 존재를 인식하지 못했는지, 그들은 걱정스러운 얼굴로 자신만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감이 좋은 녀석이군.”
그리고 휴버트는 본능적으로 그 존재의 정체를 알 수 있었다.
‘뱀파이어?’
아마 하인즈 2세의 영향 탓이었으리라.
위화감을 감지할 수 있었던 것 또한 마찬가지일 테고.
···이제 와서 눈치채 봐야 이미 늦었지만.
“아···? 쿨럭···!”
휴버트의 코와 입에서 피가 폭포수처럼 흘러나왔다.
자기 몸에서 일어난 변화였음에도 뒤늦게서야 그 원인을 파악할 수 있었다.
그가 인지할 수 없는 공격에, 심장을 포함한 내부가 완전히 파괴당했다는 것을.
“상회주님!”
“뭐야? 갑자기 왜!”
그가 힘없이 그 자리에서 쓰러지자 호위들이 그를 붙잡고 당황하기 시작했다.
흐릿해지는 휴버트의 시야에, 그 자리에 있던 정체불명의 뱀파이어는 이미 흔적도 없이 사라진 후였다.
‘···뭐지? 어째서 뱀파이어가 나를···?’
가속한 사고 덕에 시간이 오래 지난 것처럼 느껴졌지만, 일이 벌어진 건 찰나에 불과했다.
거기다 기본 생명력이 원체 강했기에 지금 몇 초나마 버티고 있을 뿐, 이건 하인리히의 신성력으로도 어떻게 할 수 없었다.
그렇게 어떻게 손쓸 틈도 없이··· 그를 지탱하던 생명의 끈이 끊어지던 순간.
《일격으로 사망에 이르는 피해를 입었습니다. 「즉사 면역」이 발동하여 피해를 치명상으로 경감합니다.》
《이후, 하루 동안 「즉사 면역」이 봉인됩니다.》
휴버트가 기사회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