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overeign of the Infinite Clones RAW novel - Chapter (147)
#147
용사 파티 (1)
“저는 주신의 뜻을 받드는 첫 번째 검, 하인리히 세인트 랜드가드라고 합니다. 바쁘신 와중에도 이렇게 시간을 내어 방문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만나서 영광입니다, 성자님. 저는 아제리온 제국의 이세아 프리스틴입니다. 주신께 선택받은 대륙의 구원자께서 부르시는데 당연히 와야지요.”
로셀리아 대신전의 한 응접실에서 두 남녀가 마주한 채 서로 인사를 주고받았다.
면담을 위해 후보자와 성자의 일대일 자리가 마련된 것.
“성자님? 시작하기에 앞서 먼저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만···.”
하지만 본격적인 대화가 시작되기도 전에 이세아가 처음 꺼낸 화제는, 할리에게서 감지된 꺼림칙한 기운과 이질감에 대한 것이었다.
‘그래도 나름 잘 숨겼다고 생각했는데, 역시 만만치 않군.’
물론 그것에 대해 그가 할 말은 이미 정해져 있었지만.
“그분에 대해서는 걱정하실 필요 없습니다. 이미 저희도 인지하고 있는 사실이기도 하고, 무엇보다 확실하게 믿을 수 있는 분이거든요.”
“역시 그랬군요. 교단에서 그리 판단했다면 괜한 걱정이었네요.”
그렇게 당당하게 그녀의 우려를 불식시킨 후, 주제는 다시 본론으로 돌아왔다.
불사왕에 대항할 ‘용사 파티’의 주축은 성자이자 용사인 하인리히였기에, 이 건은 그가 전권을 가지고 진행 중이었다.
이번 일에 한해서는 성녀조차 그저 조력자일 뿐, 모든 결정은 전적으로 그의 개인 판단에 맡겨진 것이다.
“···그래서 저를 높이 평가해주신 점은 정말 감사합니다만, 여러 사정 때문에 직접 힘이 되어드리진 못할 것 같습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그리고 지금.
하인리히는 세 번째로 진행된 면담에서 세 번째 거절을 맞이하고 있었다.
‘애초에 다들 내켜 하지 않을 거라는 건 알고 있었으니까. 대부분 정치적인 이유로 추천받아 온 거기도 하고.’
차분하게 말을 잇던 이세아가 공손히 허리를 숙이며 사죄했다.
그 정중하고 진심으로 미안해하는 기색이 역력한 모습에는 누구라도 마음이 누그러질 수밖에 없는 분위기가 있었다.
하물며 그녀의 외양은 어리고 가녀린 소녀의 모습이지 않은가?
실제 나이와는 별개로 직접 대할 때 마음이 약해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그에 하인리히도 그녀의 마음을 이해한다는 듯,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생활 연기의 달인답게 그 속마음은 달랐지만.
‘이 얼굴로 나보다 연상이라고? 역시 아무리 봐도 이 여자, 지구 출신인 것 같은데.’
그는 설득을 위해 대화를 나누면서도 천천히 그녀를 분석했다.
나이를 먹지 않는 얼굴과 동양적인 외모에, 이름조차 묘하게 한국적이다.
바로 얼마 전에 지구의 각성자인 앤드류를 만나기도 했던 만큼, 단순히 우연이라고 치부하고 넘어가기엔 걸리는 점이 많았다.
‘그래서 할리와 악수할 때 한 번 확인하기도 했었는데···.’
그녀와 악수를 나누었던 것은 짧은 순간에 불과했으나, 할리의 예민한 감각이 그녀의 몸 상태를 파악하기엔 충분한 시간이었다.
물론 상대는 대마법사인 만큼 따로 기운을 운용하지는 않았지만, 이미 생명체의 몸에 관해선 권위자나 다름없는 그에겐 큰 문제가 아니었다.
근육의 미세한 떨림과 체내에 흐르는 생체 전기, 심장 박동을 비롯한 내부 조직의 움직임, 그리고 혈압, 체온, 호흡 등의 변화까지.
인간의 신체는 그 자체만으로도 많은 정보를 품고 있었고, 「돌연변이」와 「육체변이」 등을 통해 한계를 넘어선 할리는 그것을 분석할 수 있는 능력이 있었다.
그렇게 해서 나온 결과가 바로—.
‘애매해. 하필 마법사라서인지 앤드류처럼 신체에 두드러진 특징이 없어. 카르마로 정신력이나 마력 관련 능력을 상승시켰다면 할리가 알 방법이 없으니.’
증거 불충분이었다.
초기에 이 험한 세상에서 살아남기 위해선 약간이나마 신체 능력을 올리는 게 유리했을 텐데, 그녀는 그저 조금 건강한 일반인 수준에 불과했다.
물론 지금 수준에서야 마력과 강화 마법을 이용하면 어지간한 전사 이상의 신체 능력을 보이겠지만, 이세계 진입 초반에도 그러진 않았을 거 아닌가?
‘5황녀 쪽에서 손을 썼는지 과거에 대한 기록도 확실하지 않고. 이 세계는 고위층이 아니면 개인 정보가 지구처럼 체계적으로 관리되지도 않으니···.’
그녀가 귀족위를 받은 건 고작 3년 정도에 불과했다.
찾을 수 있는 그 전의 기록은 약 8년 전, ‘어린 황녀가 재능 있는 평민 마법사를 데려와 후원했다’는 게 전부일 뿐.
‘후원받은 지 고작 5년 만에 제국의 귀족위를 받을 정도로 성장했다는 건 확실히 대단하긴 하지만.’
그야말로 자수성가의 표본과도 같은 인재였다.
그리고, 그래서 더 의심이 갔다.
그 와중에도 둘의 대화는 계속해서 이어지고 있었다.
“···아마 성자님께서도 아시겠지만, 제 사정이 그리 좋지 않습니다. 아무래도 모든 이들이 대의를 따르진 않을 테니 말이죠.”
그녀는 솔직하게 자신의 사정을 털어놓았다.
주신교단은 정보력도 만만치 않은 세력인 만큼, 이미 알고 있을 거라 여겼는지 말을 돌리지도 않았다.
‘황태자 때문이란 말이지.’
그녀의 말을 듣자 문득 사이먼 황태자의 그 뺀질뺀질한 얼굴이 떠올랐다.
정상 회의 내내 은근히 정치질을 걸어오며 거슬리게 하던 그의 언행과 뒷조사를 통해 알게 된 그의 악행도.
‘황태자와 5황녀의 황위 경쟁이라. 거기다 황태자가 훨씬 유리한 상황이라고···?’
문득 그의 뇌리에 나쁜··· 아니, 정의로운 생각이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아직은 구상 단계일 뿐이었지만, 일단은 기억해 뒀다가 나중에 꼭 써먹기로 다짐했다.
“알겠습니다. 교단은 절대 개인의 희생을 강요하지 않지요. 나중에 마음이 바뀌시면 언제든 연락해 주십시오.”
“네, 정말 죄송합니다. 저도 여건이 되었다면 꼭 함께했을 텐데. 마도를 추구하는 자로서, 그것을 악용하는 흑마법사는 용납할 수 없으니까요.”
그렇게 자리가 파해지며 그녀의 의례적인 말을 듣는 순간.
그의 머릿속에 어떤 생각이 번뜩이며 스쳐 지나갔다.
“아! 프리스틴 자작님? 그러고 보니 한 가지 조언을 구하고 싶은 게 있습니다. 저희 교단 쪽에선 도저히 결론이 나오지 않은 문제라 대마법사의 고견을 듣고 싶군요.”
“그런 거라면 상관없습니다만. 여긴 마탑의 맹주님도 계신 걸로 알고 있는데, 마법적 자문은 그 분께 여쭤보시는 게 낫지 않을까요?”
“하하하, 물론 그분께도 이미 부탁드렸었습니다. 최대한 많은 분들의 의견을 듣고 싶어서 말이지요.”
하인리히는 대충 둘러대며 예복에서 펜과 수첩을 꺼내 들었다.
그리고 수첩을 한 손에 든 채 천천히 무언가를 그려 나가며, 대수롭지 않은 말투로 그녀에게 입을 열었다.
“저희 사이에서도 의견이 분분한 문제인데, 아직까지 딱히 결론이 나오지 않은 상태입니다. 신학사들은 물론 자문을 청했던 마법사와 주술사들도 확신을 내릴 수 없다는군요.”
“그런 문제라면 제가 큰 도움은 되어드리지 못할 것 같습니다만···.”
“괜찮습니다. 간단히 의견만 내어 주셔도.”
마침내 작업을 끝마친 그가 다시 진지한 표정으로 이세아를 바라보며 말을 꺼냈다.
“혹시 불사왕 한니발 스트라우스가 쓰고 다니던 가면에 대해 아십니까?”
“예, 나무로 만든 웃는 가면이라고 하더군요. 세상을 멸망시키려는 자가 웃는 얼굴이라니, 악취미가 따로 없지요. 그야말로 모두를 조롱하려는 광인의 사고방식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흠흠, 그렇죠. 그리고 이게, 그 가면의 개략적인 도안입니다.”
가볍게 헛기침한 하인리히가 그녀에게 수첩을 내밀었다.
“제가 그림에는 재주가 없어서 세세한 부분에는 차이가 있겠지만, 전체적인 인상은 비슷할 겁니다. 이걸 보시고 어떤 마법적 의미가 있는지 떠오르는 대로 말씀해 주시면 됩니다.”
“그렇군요. 하긴, 가면은 의식에 자주 사용되는 매개체이기도 하···.”
그리고 수첩을 받아 그림을 본 그녀의 몸이.
마치 시간이 멈춘 듯, 그 자리에서 굳어버렸다.
“···! 어, 이건···!”
저도 모르게 벌어진 입에서 새어 나오는 새된 목소리.
시종일관 차분한 기색을 유지하던 이세아의 표정이 격렬히 요동쳤다.
그 자리에서 가볍게 그린 만큼 세세하게 묘사되지는 않았지만, 그 특징은 확실히 알아볼 수 있었다.
휘어진 눈매, 짙은 눈썹, 자글자글한 주름, 커다란 주먹코.
한국인이라면 모를 수가 없는 가면이었다.
“왜 그러시죠? 뭔가 아시는 게 있나요?”
“아, 아뇨···? 아무것도 아닙니다. 제가 잠깐 착각한 것 같습니다. 그··· 어렸을 때 살던 마을에서 잠깐···.”
“흐음, 이와 비슷한 가면이 있었다는 말이군요? 혹시 그 마을이 어딘지 알 수 있겠습니까? 불사왕의 연고지가 그 지역일지도 모르···.”
“아뇨, 아뇨! 그, 동네의 어린애가 심심풀이로 만들었던 거라! 예, 장난감 대용이었죠. 그러곤 금방 질려서 그대로 부숴버렸지만요. 그냥 옛 추억이 떠올라 과하게 반응해 버렸군요. 하하···.”
면담 내내 일체의 동요도 없던 그녀가 당황하는 모습에 흥이 나, 저도 모르게 너무 괴롭혀 버렸지만—.
‘딱 걸렸어.’
이로써 그는 확신할 수 있었다.
‘역시, 이 여자도 지구의 각성자였구나.’
하지만 하인리히는 겉으로 내색하지 않고 아쉽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쉽군요. 뭔가 단서라도 있었으면 했는데.”
“···예, 이것에 어떤 특별한 의미가 있는지는··· 전 잘 모르겠군요. 도움이 되지 못해 죄송합니다.”
그녀의 동요는 빠르게 가라앉았다.
예상치 못한 순간에 상상도 할 수 없었던 정보를 접해 순간적으로 평정심을 잃긴 했지만, 그녀 또한 극의에 이른 대마법사.
냉정을 되찾고 신색을 회복하는 것도 순식간이었다.
‘하긴, 8년 이상 지구 문명과는 담쌓고 살아오다 갑자기 하회탈이 들이밀어지면 놀랄 만하지.’
그것도 그냥 나타난 게 아니라, 이 세상을 멸망시키려는 절대 악이자 죽음의 화신인 불사왕의 가면으로 등장했으니.
한국인이라면 당연한 반응이었다.
‘그래, 한국인이라면 말이지.’
첫 번째로 마주한 지구인인 앤드류는 미국인이었다.
그런데 두 번째로 마주한 이가 자신과 같은 국적의 사람이라니, 우연도 이런 우연이 어디 있단 말인가.
‘어차피 한스의 가면에 대한 정보는 금방 퍼질 수밖에 없어. 그걸 본 게 한두 명도 아니고.’
그런 정보를 이렇게 유용하게 써먹었으니, 이 정도면 굉장히 흡족한 결과였다.
이걸로, 그녀를 어떻게 써먹을지 확실히 결정할 수 있었으니까.
***
이 세계는 인터넷도 통신망도 없는 세상이었으나, 과학 대신 이능이 발달한 만큼 어떤 소식이 각 지방에 전파되는 속도 자체는 느린 편이 아니었다.
물론 보통이라면 정보에 예민한 상인 길드나 지역 유지 등의 상류층이 자기 이익을 위해 적당히 제어함으로써, 대중에게까지 소문이 퍼지는 시간을 조절하는 편이었지만···.
이번에 알려진 불사왕의 부활에 대한 소식은 그 성격이 달랐다.
처음엔 사회의 안정을 위해 통제했던 그 정보는 어느 순간 더는 감출 수 없을 지경이 되었고, 결국 언데드의 준동과 몬스터 광기 폭주 사태를 기점으로 대대적으로 공표되기에 이르렀다.
기득권들도 현 체제를 유지하기 위해선 사회에 공포가 만연하는 걸 감수하고, 확고부동한 ‘적’에게 주민들의 불만을 집중시키는 게 더 낫다고 판단한 것이다.
그로 인해 이 세상 모든 악의 근원, 불사왕에 대한 이야기가 사람들에게 급속도로 퍼져나가기 시작했다.
“자네, 그 소식 들었나? 제국 북쪽에 있는 로한 공국이 결국 멸망했다는군.”
“허어— 나라가 멸망해? 설마 그거···.”
“물론 그 ‘불사왕 한스’가 벌인 짓이지. 그가 직접 몬스터들을 이끌고 쳐들어가 쑥대밭으로 만들어버렸다는데, 죽은 사람만 수십만이라 하네!”
“···허 참, 세상 불안해서 살 수가 있나. 제발 이곳은 안전해야 할 텐데.”
그 소식은 이번 로한 공국 몰락을 계기로 과장을 담아 더 빨리 확산되었고—.
“제시 엄마, 그 얘기 들었수? 글쎄 저번에 마을 댐이 무너진 게, 부실 공사가 아니라 그 한스의 추종자들이 몰래 벌인 일이라 하오!”
“아이고, 그런 쳐 죽일 놈들이 있나. 그것 때문에 피해를 본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데! ···가만? 듣고 보니 작년 농사를 망친 것도 좀 수상한데, 그것도 놈들이 밭에 독이라도 뿌린 거 아녀?!”
“어머, 어머! 세상에! 정말 그런가?”
아예 모든 불행한 일을 그에게 전가하는 사람들까지 생겨날 정도였다.
“으어엉~ 나 이름 바꾸면 안 돼? 애들이 한스라고 막 뭐라고 그래···.”
“크흠, 아무리 그래도 이름을 바꾸는 건···.”
“그래! 그러는 게 좋겠다. 당신도 고집 좀 그만 부리시오! 그깟 흔해빠진 이름이 뭐라고. 이러다 애 잡겠소!”
“···어쩔 수 없지. 음, 그럼 바꿀 이름으로 하인즈는 어떠냐?”
그것은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았으며, 보수적인 성향의 부모들조차 서둘러 자식을 개명시키기에 이를 정도였으니.
그의 악명은 상상 이상으로 부풀려져 사람들의 뇌리에 각인되고 있었다.
대도시를 넘어 중소 도시와 작은 마을은 물론 산골의 화전민촌에 이르기까지.
심지어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 그 이름이 퍼지기 시작한 건 에나멜 대륙도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결국.
《업적 달성! 모두의 원망과 증오를 한 몸에 받는 ‘세계의 적’이 되었습니다.》
《아우테리카 차원의 살아 있는 지성체 절반 이상이 당신을 적이라 판단했습니다. 보상으로 특전 「여분의 목숨」을 부여합니다.》
《업적을 달성해 세계에 큰 영향을 끼쳤습니다. 카르마가 추가로 상승합니다.》
정식 공표 이후, 서서히 대륙을 뒤덮어 가던 한스의 영향력이 마침내 어떤 임계점을 넘어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