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overeign of the Infinite Clones RAW novel - Chapter (1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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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0
용사 파티 (4)
회의실을 울리는 하인리히의 묵직한 한마디에 모두가 일제히 굳어버렸다.
신성력이 가득 담겨 절로 경건해지는 목소리는 둘째 치고, 그 말에 담긴 뜻에는 그만한 파급력이 있었던 것이다.
“주신께서··· 말씀이십니까?”
“허어—.”
웅성거리며 경탄을 토하는 대신전의 수뇌부들.
신이 실존한다는 것은 아우테리카의 누구나가 인정하는 사실이었으나, 가진 격의 차이가 워낙 큰지라 그 의지를 필멸자들이 느끼는 데에는 한계가 있었다.
그리고 그 사정은 성직자들도 그리 다르지 않았다.
신앙심이 강해질수록 점점 연결이 강해지고 그 존재감을 선명하게 느낄 수 있게 되긴 하지만, 신의 뜻을 약간이나마 헤아리기 위해선 성녀 정도의 수준은 되어야 했으니까.
그런데 지금 하인리히가 주신에게 직접 계시를 받았다는 말을 꺼냈으니 그들도 놀랄 수밖에 없었다.
긴장한 표정으로 마른침을 삼키는 이와 손수건을 꺼내 땀을 닦는 이, 기도하듯 두 손을 모으고 그를 바라보는 이들까지···.
모두가 마음가짐을 바로 하고 자세를 고쳐 앉은 채 그의 입에서 나올 다음 말을 기다렸다.
‘효과가 좋긴 하네···. 좀 부담스럽긴 하지만.’
하인리히는 반짝이는 눈으로 자신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성녀의 눈빛을 애써 무시하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이상하다 여기지 않으셨습니까? 그간 불사왕 한니발 스트라우스가 보였던 모순된 행동이 말입니다.”
조금 뜬금없다고 여겨질 수 있는 말이었지만, 그들은 별말 없이 성자가 던진 화두에 집중했다.
당연히 그 사실은 모두가 느끼고 있었다.
그저 상대가 일반적인 상식으로 이해할 수 없는 존재였던지라, 그 사고 패턴의 분석에 별다른 성과가 없었을 뿐이었으니.
“이번 대의 불사왕은 전대들과 확연히 다릅니다. 대륙을 죽음으로 물들이겠다는 강박에 얽매여있지 않지요.”
“확실히 그렇게 느끼긴 했습니다만···.”
“그를 움직이는 행동 원리는 오로지 스스로의 흥미입니다. 저번에 대신전에 쳐들어왔을 때도 엘븐 킹덤의 해리스 님이 그 흥미를 충족시켰기에 순순히 물러난 것이지요. ···거기에 굳이 하나를 더하자면, 대중의 관심을 끄는 것 정도라고 할 수 있겠군요.”
시작은 한스의 특이점을 그들에게 상기시키는 것부터였다.
“···확실히 일리가 있습니다. 저희가 심연의 문을 조사하기 위해 파견됐을 때, 불사왕은 우리를 충분히 죽일 수 있었음에도 그러지 않았죠. 마치 자신이 한 짓에 대한 증인이라도 남기려는 듯이.”
과거 남부 황무지에 파견되었던 팔라딘 하나가 조심스럽게 하인리히의 말에 동조했다.
“생각해보면 그런 경우가 한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불사왕이 전 대륙에 끼친 해악이 크긴 하나, 정작 그가 직접 모습을 드러낸 장소의 피해는 의외로 적었지요. 얼마 전 제국의 토베아 시에서 일어난 습격 사건도 마찬가지입니다.”
“기본적으로 대륙을 파괴하려는 행보를 보이긴 하지만, 정작 본인이 자리한 곳에선 개인의 흥미가 더 우선 된다···?”
“바로 그렇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 점을 이용할 수 있습니다.”
“어떻게 말입니까?”
과거의 일들을 억지로 끼워 맞춰 현재의 주장에 신빙성을 더한다.
거기다 지금 하인리히는 어떤 개소리를 해도 설득력을 부여해 줄 주신의 권위를 등에 업고 있으니, 이들을 납득시키는 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그는 저에게 커다란 흥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처음 그의 심장을 찔러 물리쳤을 때부터 시작된 그 관심은, 제가 성자가 되자 더욱 커졌지요.”
그 점은 다른 이들도 잘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실제로 불사왕이 그를 의식하는 행동을 자주 보이기도 했으며, 정상 회의 습격 사건 때는 오로지 하인리히만을 대화상대로 인정하는 모습을 보였었다.
마지막에 자신에게 화살을 날린 해리스를 대할 때를 제외하면.
“저는 그의 흥미를 유발할 수 있는··· 한 가지 내기를 제안할 생각입니다.”
“네? 내기··· 말입니까?
그 말이 끝나자마자 순간 청중들의 반응이 미묘해지는 것이 느껴졌다.
‘이럴 때 필요한 건 역시 뻔뻔함이지.’
그는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목소리에 힘을 담아 말을 이었다.
“불사왕은 대륙을 정복하는 과정 자체도 하나의 놀이로 여기고 있습니다. 그럼 거기에 어울려주며 흥밋거리를 더해주는 대신, 한 가지 ‘규칙’을 추가하면 되는 것이지요.”
“···그것이 로한 공국 방면을 침공하지 않는 것인가요?”
그의 말을 경청하던 이들이 하나둘 미간을 찌푸리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일이 그렇게 형편 좋게 풀릴 리가 있겠느냐는, 지극히 당연한 의문 때문이었겠지만···.
“물론 저쪽의 요구 조건에 따라 추가 변동이 있을 수 있습니다만, 기본 골자는 그렇습니다.”
“···그런 조건을 불사왕이 받아들이겠습니까?”
“받아들일 겁니다.”
그가 마음먹은 이상, 한다면 하는 거다.
‘다소 억지를 부리는 한이 있어도, 다른 방법이 없으니 어쩔 수 없지.’
지금 믿는 것은 오로지 주신의 위광뿐이었다.
“불사왕과 협상이라니···.”
불편한 듯한 기색의 이단심문관장이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지만, 아무리 그의 권한이 강하다 해도 신의 선택을 받은 성자까지 어찌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하물며 지금은 주신의 이름을 들먹이며 밑밥까지 깔아둔 상황이지 않나.
“하지만 지금 당장이라도 언데드들이 남하하면 어떻게 하지요? 곧바로 대비하지 않으면, 자칫하다간 공국만이 아니라 제국도 위험해질 수 있습니다.”
“괜찮습니다. 불사의 군대는 움직이지 않을 겁니다.”
“그걸 확신하시는 이유도 혹시?”
“···주신께서 알려 주셨습니다.”
이제 슬슬 뭐라고 설득할 논리도 떨어져 그냥 무작정 밀어붙였다.
어떤 근거도 없는 막무가내 주장이었으나, 성자가 그렇다는 데 뭐 어쩌겠는가?
‘아 몰라, 그렇다면 그런 줄 알라고.’
그의 단호한 대답에 교단의 수뇌부들은 그저 눈만 껌벅였으나.
시종일관 조용히 그를 바라보던 성녀는 그제야 초롱초롱한 눈으로 박수를 치며 감탄을 내뱉었다.
짝짝짝!
“역시 성자님이시군요! 주신께선 모든 걸 알고 계시지만, 부족한 저희는 그 뜻을 온전히 헤아릴 수 없지요. 저도 그 편린만 어렴풋이 느낄 뿐인데 정말 대단하세요!”
“하하하. 별말씀을···.”
그는 양심의 가책을 무시하며 그저 뻔뻔한 웃음만 흘렸다.
아마 주신과의 감응 수준은 하인리히보다 성녀가 더 높을 터였다.
그는 신과 연결된 영맥 대부분을 오직 신성력 수급 용도로만 사용하는 중이었으며, 지금까지 주신에게서 느낀 감정 또한 ‘흥미’ 말고는 아무것도 없었다.
지금 이 순간에도 그건 마찬가지였고.
하지만 그렇게 성녀가 진심으로 감복한 듯 호들갑을 떨자, 그 분위기에 휩쓸리듯 주변의 반응도 서서히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모두 성자인 하인리히가 거짓말을 했을 가능성에 대해서는 일말의 고민조차 하지 않는 모습이었다.
“그럼 일단 성자님께서 말씀하신 것을 전제로 일을 진행하도록 하지요. 제국 측도 바보가 아니니 쉽지는 않겠지만, 일단 최대한 시간을 끌어 보겠습니다.”
대륙에서 첫손에 꼽히는 조직이라기엔 황당하게 느껴질 정도의 의사 결정이었으나, 이것은 그만큼 그들이 성자인 하인리히를 믿고 있다는 방증이었다.
성자가 직접 주신의 이름까지 꺼내든 순간, 그것은 교단 내에서 절대적인 법칙이나 다름없어진 것이다.
‘최근엔 불사왕에게 대응하느라 인류의 대변자 같은 모습을 보이긴 했지만···.’
이들의 본질은 결국 종교단체였으며, 이 자리에 있는 전원은 그 신앙심이 절정에 이르렀다고 인정받은 수뇌부들이었다.
‘쉽게 말해서, 여기 있는 사람들은 나 빼고 전부 광신도들뿐이라는 거지.’
그리고 광신도에게 신의 말씀은 곧 진리였으니 이런 반응은 당연한 것이었다.
“그럼 부탁드립니다. 제국의 회군을 막는 건 잠깐이면 될 겁니다. 그들도 곧 저희의 뜻대로 따르게 될 테니까요.”
“예? 혹시 그것도 주신께서 계시를···?”
그 의문에 하인리히는 그저 지그시 눈을 감으며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것도 자주 하다 보니, 어쩐지 진짜로 방금 막 주신의 계시가 내려온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한니발 스트라우스··· 다음엔 제국을 노리려는 것 같은데, 나 하인리히가 있는 한 네 뜻대로 되진 않을 거다!’
굳은 결의와 경건한 믿음이 휘몰아치는 회의실.
한껏 자신의 역할에 몰입한 용사가 주먹을 불끈 쥐며 의욕을 불태웠고.
그런 그의 모습을 회의장 내의 이들이 믿음직스럽다는 듯이 바라보았다.
하도 혹사당한 탓에 기어코 마비됐는지, 신기하게도 더는 양심의 가책이 느껴지지 않았다.
***
한창 하인리히가 주신의 이름을 팔아 사기를 치고 있을 무렵.
대련을 마친 할리는 반가운 인연들과 오랜만의 재회를 나누고 있었다.
“안녕하세요, 할리 님. 그때 헤어진 후로 얼마 지나지도 않았는데, 전보다 더 커지셨네요.”
“으하하핫! 이거 오랜만이야, 아가씨! 얼굴이 반질반질한 게 그동안 잘 지냈나 보구만?”
“다 할리 님 덕분이죠. 저도 이제 하이 엘프라구요?”
반갑게 그를 맞이하는 세실리 그랜우드와.
“간만에 뵙습니다. 음··· 그런데, 아니, 아닙니다.”
할리의 변화에 뭔가를 느꼈는지 미묘한 반응을 보이는 라포리 그랜우드.
“오랜만입니다, 할리.”
“아아— 반갑구만, 해리스! 후하핫!”
오랜 친구라는 설정의 해리스까지.
“과, 과연 이온 대륙이로군요. 그간 예상보다는 평범하다 생각하고 있었는데··· 딱 제가 상상했던 대로···.”
그의 위압적인 몰골에 압도당한 듯한 샤피론이 슬그머니 해리스의 뒤로 숨으며 작게 중얼거리긴 했으나, 그녀가 이상한 건 하루 이틀이 아니었기에 가뿐히 무시했다.
“할리 님, 제가 저번에 약속했었죠? 제가 하이 엘프로 개안하게 되면 제대로 다시 가호를 드리겠다고. ···지금의 할리 님에게 얼마나 도움이 될지는 모르겠지만, 그래도 없는 것 보다는 나을 거예요.”
그와 눈을 마주하며 배시시 웃는 세실리.
이번엔 그가 저번처럼 쪼그려 앉을 필요도 없었다.
자연스럽게 세실리의 발밑에서 일어난 바람이 그녀의 몸을 부드럽게 띄워 한순간에 그와 눈높이를 맞추었으니까.
화아악—
이어서 그녀의 입술이 할리의 이마에 닿는 것과 동시에, 그때와 마찬가지로 포근한 기운이 그의 몸에 깃들기 시작했다.
또한··· 하이 엘프의 자격을 얻은 해리스가 함께 있었기 때문인지, 이번엔 그 에너지의 성질까지 확실히 파악할 수 있었다.
‘이거 단순한 자연력이 아니라 신성력과 그 성질이 비슷한데? 하이 엘프는 본인을 매개로 직접 세계수의 기운을 끌어올 수 있는 건가. 과연 세계수 교단의 제사장이라고 할 만하군.’
그리고 잠시 시간이 흘러, 그것이 온전히 할리의 몸에 깃들자—.
《「대자연의 가호」로 인해 개체의 속성 친화력과 저항력이 대폭 상승합니다.》
그때와는 다르게 이번엔 할리의 눈앞에 메시지 하나가 떠올랐다.
특별한 스킬이 생기거나 한 것은 아니었지만, 이렇게 시스템까지 공언해 줄 정도면 그 효과도 생각 이상으로 크다고 봐야 하리라.
‘해리스도 하이 엘프가 되면 곧 쓸 수 있게 될 텐데, 이거 몇 번이나 할 수 있는 거지? 어디 보자··· 일단 할리 몫은 아꼈고, 당연히 한스는 안 될 테고.’
당연히 이런 생각으로 이어진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현상이었다.
또 그녀의 선물은 거기서 그치지 않았는데, 그녀가 세계수에게 하사받았던 가지의 일부로 만들어진 장신구가 바로 그것이었다.
“라포리 님의 조언을 받아서 할리 님의 취향에 맞게 만들었어요.”
세실리의 말에 뒤쪽에 가만히 서 있던 라포리가 묵직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과연 그 말대로, 목걸이나 허리띠에 걸 수 있게 조각된 그 장신구는 사나운 맹수 머리를 그대로 옮겨놓은 것처럼 흉악하고 생동감 넘치기 그지없었다.
딱 할리의 취향대로.
“으하하하! 이거 정말 마음에 드는구만. 굳이 이렇게까지 해 주지 않아도 되는데 말이지!”
물론 말만 그렇게 할 뿐, 그 온갖 저항력과 더불어 추가 방어력까지 부여하는 장신구은 어느새 그의 허리춤에 단단히 고정되어 있었다.
아마 그것이 앞으로 그 자리에서 떨어질 일은 어지간해선 없을 터.
“그나저나, 할리 님을 여기서 보게 될 줄은 몰랐군요. 그 짧은 시간 만에 이렇게 강해지시다니.”
그렇게 세실리와의 일이 마무리되자, 가만히 그를 바라보던 라포리가 나직이 입을 열었다.
오랜 세월을 살아온 하이 엘프답게 어느 정도 할리를 꿰뚫어 보았는지, 그는 뭔가를 걱정하는 기색이었지만···.
“···뭐, 할리 님도 생각이 있으시겠지요. 주신교단에서도 별말 없는데 제가 뭐라고 왈가왈부할 입장도 아니니. 그런데 여기까지 오셨다는 것은, 혹시 결사대에 참여하기로 하신 겁니까?”
그는 가볍게 어깨를 으쓱이더니 곧바로 화제를 돌렸다.
역시 주신교단의 성자라는 최고의 뒷배가 있으니 이렇게 편하다.
“음? 아아—! 그거···.”
그리고 그 질문에 할리는 뒷머리를 긁적이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