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overeign of the Infinite Clones RAW novel - Chapter (151)
#151
제국의 난 (1)
“그건 상황을 좀 지켜봐야 할 것 같은데, 일단 난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있소! 불사왕의 골통을 직접 부술 수 있다니, 이거보다 더 화끈한 싸움이 어디 있을까! 으하하핫—!”
할리는 라포리의 물음에 시원하게 답하면서도 어느 정도의 여지는 남겨두었다.
‘일단 지금 중요한 건 무대니까.’
공주를 구하기 위한 모험을 떠난 용사가 하나둘 동료를 모아 마왕의 음모를 분쇄하고, 마침내 그가 기다리는 마왕성에 도착해 그를 쓰러뜨리는 동화와도 같은 이야기.
그런 전개를 위해선 용사와 마왕이 편하게 자웅을 겨룰 수 있는, 동시에 그것을 모두에게 과시할 수 있으며 온전히 그의 통제하에 놓인 반상(盤上) 위의 전장이 필요했다.
‘고전이 꾸준히 사랑받는 것에는 이유가 있는 법. 용사 파티도 그 시나리오에 엮어 넣는 게 더 극적이겠지.’
하지만 그 전개의 설득력을 위해서는 ‘불사왕’의 흥미를 끌 만한 이름값이 있으면서도 제국이 함부로 경거망동하게 하지 못하게 할, 예컨대 납치당한 공주 포지션의 희생양이 필요했는데···.
다행히 그 역할에 딱 들어맞는 인물 하나가 이미 준비되어 있었다.
본인에게 출연 동의를 받진 않았지만.
“···그렇습니까? 아무튼 이렇게 만나서 다행입니다. 중요한 논의가 얼추 끝나 가는지라, 저희도 조만간 에나멜 대륙으로 돌아갈 생각이었거든요.”
무엇보다 해리스가 하이 엘프의 자격을 얻기도 했으니, 개안 의식을 위해서는 세계수가 있는 곳까지 한 번 찾아갈 필요가 있었다.
물론 연합군과 결사대 문제도 있으니 금방 다시 오긴 해야겠지만 말이다.
‘다른 사절단들도 슬슬 돌아갈 때가 됐지. ···물론, 제국 측도 마찬가지고.’
***
아제리온 제국의 수도 제론.
다그닥 다그닥—
넓게 포장된 길을 달려 황궁으로 향하는 마차 안에서 한 사람이 밖을 내다보았다.
자그마한 체구에 푸른 로브를 두른 검은 머리의 여성.
성지의 로셀리아 대신전에 방문했다가 돌아온 이세아였다.
‘평화롭네.’
그녀는 지금의 혼란스러운 정세와는 상관없다는 듯 평소와 같은 거리를 바라보며 멍하니 생각에 잠겼다.
이곳은 제국의 수도인 만큼 아직 전쟁의 여파가 닿지 않았으나, 아마 이것도 그리 오래 가진 못할 터였다.
지금의 평화를 지키기 위해선 많은 이들의 희생과 노력이 필요하겠지만···.
그녀는 지금, 그에 힘을 보태 달라 요청받았음에도 거절하고 돌아가는 길이었다.
자신이 있어야 할 곳으로.
‘···이기적인 생각이라고 욕먹어도 할 말 없지.’
하지만 이 세상 사람이 아닌 이세아에게는 대륙 전체의 안위보다 이곳에서 만든 작은 인연이 더 소중했다.
물론 불사왕을 막지 못하면 그녀가 지키고자 하는 것을 포함한 모두가 위험해진다는 것은 알고 있지만, 그 일은 자신이 아니더라도 할 사람이 많지 않겠는가?
먼저 나서서 지켜줄 이들이 많은 ‘세계’와는 다르게 지금 5황녀 라일리에게는 그녀가 꼭 필요했다.
아직은 모은 세력의 질적인 면과 결속력에 대해서는 황태자 측보다 많이 뒤떨어지는 편이었던 것이다.
‘그래도 줄곧 제국 내에만 있다가 지구로 돌아가게 될 줄 알았는데, 사이먼 때문에 성지도 방문해 보네.’
물론 그렇다고 황태자에 대한 그녀의 평가가 나아진 것은 아니었다.
그녀는 5황녀의 세력이 커지기 시작한 후부터 벌어진 그의 뒷공작을 질리도록 겪어본 당사자였으니까.
정말 피를 토하는 노력으로, 실제로 피를 토하기도 하며 어떻게든 전부 막아내긴 했지만 말이다.
그리고 마침내 황궁에 도착해 곧바로 5황녀 궁으로 향한 그녀는 자신이 아직도 이 세상에 남아있는 이유와 마주할 수 있었다.
“프리스틴 자작님? 생각보다 일찍 돌아오셨군요?”
금실과 같은 찬란한 머릿결과 보석처럼 빛나는 청록색 눈동자, 이세아와는 반대로 늘씬한 키에 성숙한 몸매를 지닌···.
온몸에 고귀함과 위엄을 두른 5황녀, ‘라일리 카르테 아제리온’이 티 테이블에 앉은 채 부드러운 미소와 함께 그녀를 맞이했다.
“모두 수고하셨습니다. 프리스틴 자작님과 할 얘기가 있으니, 이만 나가보세요.”
부드러운 존대임에도 진득하게 묻어 나오는, 지배하기 위해 태어난 자의 위압감.
황녀의 그 나직한 명령에 주변에서 시중을 들던 시녀들이 공손히 인사하며 밖으로 물러갔다.
우웅—
둘만 남게 되자 이세아는 가볍게 손을 휘저어 평소처럼 방 내부에 보안을 위한 결계를 덧씌웠다.
황궁 내부에서는 함부로 마법을 사용하면 안 되지만, 황녀의 개인 호위이기도 한 그녀는 예외였다.
그렇게 모든 작업이 끝나고.
두 사람의 시선이 다시 마주친 순간···.
“세아~! 잘 갔다 왔어? 교단에서 뭐래? 설마 세아의 유능함을 알아보고 강제로 결사대에 들어오라고 강요하진 않았겠지?”
5황녀 라일리가 후다닥 달려와 그대로 이세아를 끌어안았다.
“하아, 라일리. 일단 진정··· 우붑!”
한숨을 내쉬던 이세아는 자신을 끌어안고 정수리에 볼을 비비는 황녀를 제지하다, 오히려 그 품 안에 더 깊이 파묻힌 채 버둥거렸다.
“히힛— 역시 인형 같은 것보다 이쪽이 더 좋아. 아아~ 치유된다.”
“···그믄··· 흐르그···.”
이세아는 자신을 가두듯 끌어안는 황녀의 품에 갇혀 발음이 뭉개지면서도, 기어이 몸을 비틀어 그 품에서 빠져나왔다.
“아~ 왜! 세아 없는 동안 많이 답답했단 말이야! 테리는 세아보다 안는 맛이 없다구!”
그러자 입술을 삐죽이며 칭얼대는 황녀, 라일리.
‘테리’는 이세아가 생일 선물로 주었던 곰 인형으로, 그녀가 잘 때마다 끌어안고 자는 애착 인형이었다.
“하아, 몸만 커서는 아직도 애야.”
“흐흥! 밖에서는 나도 도도한 황녀님인데? 이런 모습을 볼 수 있는 건 세아 앞에서 만이니까, 영광으로 생각하라구?”
라일리는 슬쩍 머리를 쓸어 넘기며 오만한 웃음과 함께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이세아는··· 170을 훌쩍 넘는 장신의 미녀를 흐릿한 눈으로 올려다보며, 다시 한번 세상을 원망했다.
‘처음 만났을 때만 해도 작고 귀여웠는데···!’
그야 그럴 수밖에 없었다.
그들이 처음 만났을 땐, 황녀는 또래보다도 유독 작았던 11살 꼬맹이에 불과했었으니까.
물론 지금은 어느 순간부터 쑥쑥 자라기 시작한 황녀에게 키도 몸매도 외모의 성숙함도 전부 추월당했지만 말이다.
그 이후로는 관계가 역전되어 줄곧 이런 취급이었다.
분명 만남의 시작은 이런 형태가 아니었는데.
-“와, 뭐야? 방금 순간이동 한 거야? 여기 결계 때문에 아무나 못 들어올 텐데. 혹시 대마법사?”
운이 좋다고 해야 할지 나쁘다고 해야 할지.
이세아는 이세계에 전이되자마자 귀족가의 사유지에 떨어진 것도 모자라, 정원에서 혼자 놀고 있던 어린아이와 마주하게 되었다.
-“다른 세계에서 왔다고? ···이 세계 사람이 아니야?”
그리고 아무나 들어올 수 없는 곳이란 말을 들은 순간, 그녀는 즉각 상황을 파악하고 모든 것을 솔직히 털어놓았다.
살기 위해서는 눈앞의 소녀에게 호의를 얻는 방법밖에 없다고 판단한 것이다.
그렇게 호기심으로 눈을 반짝이는 소녀와 이런저런 대화를 주고받다 나온 말이, 이 낯선 세계에서의 본격적인 시작이 되었다.
-“재밌어! 그러니까 이곳에 대해 아무것도 모른다는 거지? 그럼 내가 도와줄게! ···대신 한 가지 조건이 있어.”
일반적인 경우였다면 운 나쁘게 전이 되자마자 처형당하는 꼴이 되었을지도 모르겠지만.
그녀는 명백히 운이 좋았다고 봐야 했다.
-“···나랑, 친구가 되어 줄래?”
-“친구는 무슨, 쪼끄만 게. 언니라고 불러.”
-“언니? 언니는··· 무서운데.”
시종일관 활기차던 아이가 조심스럽게 꺼내든 제안.
그때는 아이의 정체도 사정도 알 수 없었지만, 곱상하게 자란 듯한 어린 소녀의 표정에 담긴 외로움을 이세아는 차마 외면할 수 없었다.
-“···하아, 그래. 그러면 그냥 세아라고 불러.”
-“세아? 그게 이름이야? 이름 예뻐!”
-“그래, 고마워. 넌 이름이 뭐니?”
-“라일리! 내 이름은 라일리야!”
치열한 황궁에서 형제자매들의 견제를 피해 잠시 외가에 내려왔던, 아제리온 제국의 5황녀 라일리 카르테 아제리온(11세)과.
막 이세계로 떨어져 앞날을 걱정하던 지구의 고등학생 이세아(18세)가 처음 조우한 순간이었다.
이후 때론 친구처럼, 때론 자매처럼 지내오길 8년.
지금은 이미 여러 가지를 추월당한 입장이긴 했으나, 그녀는 여전히 라일리를 친동생과 같이 소중하게 여기고 있었다.
마음을 터놓고 지낼 사람이 없었던 라일리가 그녀를 의지했던 것처럼, 이세아도 낯선 이세계에서 처음으로 손을 내밀어 준 그 아이에게 심적으로 상당히 의지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발터 후작이 개수작을 부리려다 나한테 딱 걸렸지. 큰 오라비가 자리를 비운 틈에 공이라도 세우려고 했던 것 같은데, 오히려 경이나 치지 않을는지 몰라? 히힛!”
이세아는 자신을 붙잡고 자리를 비웠을 때의 일을 조잘조잘 떠드는 라일리를 웃으며 바라보다 살짝 마음이 불편해졌다.
아무리 라일리를 친동생처럼 아낀다지만, 애초에 다른 세상 사람인 그녀는 언제까지고 여기에 남아있을 수가 없었다.
‘그래도 시간 차가 있으니까, 아직 좀 더 있다가 가도 괜찮을 거야.’
마음속에 내세운 마지노선은 딱 10년, 지구 시간으로는 1년이었다.
이 세계에서의 시간으로는 대충 2년 남짓 남은 상황.
그 안에 이 아이가 안전하게 살아갈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 놓아야 했다.
‘만약 내가 떠나고 나면 친구 하나 없는 라일리가 지금처럼 웃을 수 있을까? 지금도 나 말고는 본 모습을 드러내지도 않는 아인데···.’
물론 대마법사인 그녀의 조력이 있었다지만, 고작 19세의 나이로 황태와 상대할 수 있을 정도의 세력을 꾸린 황녀의 수완도 절대 보통은 아니었다.
그 천재성은 이미 제국 내에 소문이 자자할 정도였으며, 밖에서 불리는 그녀의 별명은 무려 ‘철혈 황녀’였으니까.
지금처럼 그녀 앞에서는 저렇게 칠칠치 못한 모습을 보인다지만 말이다.
하지만 그런 것과는 별개로··· 마음을 터놓고 지낼 사람이 없다는 것은 큰 걱정거리였다.
이세아도 몇 번이고 황녀와 친하게 지낼만한 사람을 만들어 보려 했으나, 어렸을 때의 기억 때문인지 ‘이 세상 사람’ 자체에 대한 거부감이 너무 컸다.
‘아직 시간은 많이 남았으니 천천히 고민해 보자. 그러고 보니까 내가 고2에 이곳에 왔으니, 돌아갈 쯤에는 고3이구나. 가만, 그러면 수능도 봐야 하나? 수능이 몇 개월 남은 시점이지?’
그 전까지 하던 심각한 고민과 비교하면 사소할 뿐이었지만···.
아우테리카 차원의 위대한 대마법사인 동시에 지구의 9년 차 여고생인 그녀에게는 나름 심각한 문제였다.
***
“자, 올리비아. 그간 조사해 왔던 내용들을 보완한 최신 정보야. 황궁을 비롯한 인근의 수비 사항과 관련 책임자부터, 수도 내에 머무르고 있는 귀족들의 인적 사항들까지. 이거 정리하느라 고생 좀 했다고?”
[이것이··· 그 앤드류라는 사내가 조사한 정보이옵니까···? 제법 쓸 만하군요···. 좋은 인재가 될 것 같사옵니다···.]“쳇.”
올리비아는 생색을 내려던 시아나를 무시하며 빼곡하게 기재된 서류를 순식간에 훑어 나갔다.
그 정보들을 위해 며칠 밤낮을 지새운 앤드류 위버의 피나는 노고가 있었지만, 사악하고 무자비한 불사의 군단 간부들은 그런 건 신경도 쓰지 않았다.
“아 참! 왕께서 나중에 앤드류를 네 아래에 보내실 것 같던데. 걔 인간이니까 다룰 때 주의해야 한다는 건 알지?”
[걱정 마시지요··· 반항할 것 같으면 죽음보다 더한 공포를 체험시켜 주면 되겠지요···.]“아니, 괜히 험하게 굴리다 망가져 버리면 아까우니까 조심히 다루라고! 인간은 먹을 거랑 수면을 보장해 주지 않으면 금방 죽어버리니까!”
[아··· 당연한 말을···. 저도 그렇게까지 거칠게 다룰 생각은 없사옵니다···. 원활한 영양 공급을 위해, 하루 세끼의 식사와 세 시간의 수면 시간을 보장하지요···.]“어— 세 시간?”
올리비아와 대화를 나누던 시아나가 잠시 멈칫했다.
그래도 앤드류와 그간 함께한 인연도 있는데, 이쯤에서 한마디 해 주는 게 좋을 것 같았다.
[아··· 용변과 세척 시간을 잊었군요···. 흐음··· 그래도 인간은 여가시간도 조금 필요할 테니, 하루에 18시간만 일하면 되겠사옵니다···.]“저기, 그렇게 일을 시키면 오히려 점점 능률이 떨어질 것 같은데? 좀 더 풀어줘도 되지 않을까?”
[괜찮사옵니다···. 원래 그런 건 채찍질하다 보면 늘게 되어 있사오니···.]그쯤에서 시아나는 확실히 마음을 굳혔다.
올리비아는 인간의 한계에 대해서 뭔가 착각하고 있는 게 틀림없었다.
물론 하려면 할 수는 있겠지만, 장기적으로 보면 그건 결코 좋지 못할 터였다.
그 점을 지적하기 위해 그녀가 입을 열려던 순간···.
[육체가 있다고 하루 6시간이나 휴식이라니··· 부럽사옵니다···.]‘역시 그만두자. 미안, 앤드류.’
조용히 들려오는 올리비아의 혼잣말에 그녀는 고이 마음을 접었다.
생각해 보니 어차피 육체노동도 아닌데, 그리 가혹한 조건은 아니지 않겠는가?
편안히 자리에 앉아 능력만 사용하면 되니 하루 6시간 휴식이면 충분한 것도 같았다.
본인도 모르게 한 지구인의 미래에 먹구름이 들이찬 것과 별개로, 두 간부는 다시 본래의 주제로 돌아가 앞으로의 일을 논의했다.
불사왕이 내린 명을 완수하기 위해.
그렇게, 성자 하인리히가 ‘예지’한 대로.
불사왕 한니발 스트라우스가 제국을 습격하기 위해 움직이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