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overeign of the Infinite Clones RAW novel - Chapter (164)
#164
하회탈 라이즈 (4)
라일리 황녀가 불사왕의 성에 잡혀 온 지도 어느덧 이 주일이 가까워지고 있었다.
하지만 과연 인간은 적응의 동물이라 해야 할지, 어느새 이곳에 익숙해진 그녀는 처음과 달리 그럭저럭 평온한 생활을 영위하는 중이었다.
어차피 당장 걱정만 하고 있어봐야 아무것도 변하지 않는다.
그러니 일단은 쓸데없는 근심거리들을 전부 내려놓고 마음의 안정부터 찾기로 한 것이다.
그리고 그런 황녀의 태도 변화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인물이 하나 있었으니···.
“흐흠—? 그럼 헤스페론은 본명이 아니었다는 말인가요?”
“어, 네. 그렇죠? 그래도 이세계로 가는 건데, 새로운 시작에 걸맞은 멋진 이름 하나 정도는 있어야 하지 않나 싶어서···. 아하핫!”
바로 얼마 전부터 이곳에 새로 입주하게 된 이세계인, 자칭 헤스페론이었다.
“그럼, 본명은요?”
“하승훈입니다만, 그냥 헤스페론이라고 불러주시면 됩니다. 그쪽이 더 폼 나니까요!”
“하스··· 흠, 좋아요. 그건 그리 중요한 문제가 아니니.”
라일리는 눈앞의 맹해 보이는 사내를 못마땅한 눈초리로 흘겨보았다.
검은 머리에 검은 눈을 한 그는 이세아와 같은 인종의 사람이었지만, 가진 성격은 전혀 달랐다.
그녀가 다소 냉정해 보이는 겉모습과는 달리 총명하고 성실한 우등생 타입이었다면, 이 남자는 똑똑해 보이는 외견을 하고서도 허술하고 어리바리한 면이 강했다.
불사왕에게 감금당해 언제 어떤 일을 당할지 모르는 심각한 상황인데, 저렇게 아무 걱정 없이 태평하게 웃는 모습을 보면 괜히 근심에 빠져있던 자신만 바보 같아질 정도.
하지만 그런 그도 놀라울 정도로 이세아와 닮은 면이 한 가지 있었는데···.
파지직—
바로 마법에 대한 압도적인 재능이었다.
“오오! 됐다, 됐어! 라일리, 여기 여기!”
“또, 또. 존칭 똑바로 붙이세요!”
“앗, 미안합니다! 들떠서 그만. 그런데 이것 봐요. 이건 전에 했던 것보다 더 쉬운데요?”
헤스페론의 손바닥 위에서 하얀 스파크가 꿈틀거렸다.
이것도 인연이겠다, 그냥 이세아를 가르칠 때가 생각나 가볍게 한 수 베풀 생각이었건만···.
그의 성장 속도는 그때의 그녀보다 더 가팔랐다.
‘···혹시 지구인이란 이들은 선천적으로 마법에 대한 재능을 타고나는 걸까?’
그렇지 않고서야 이건 말이 안 되는 일이었다.
누구는 십 년 동안 아직도 초급에 머물러 있는데, 이 인간들은 양심도 없는지 연달아 그녀를 제치고 지나가려 하고 있었다!
‘으으, 아무리 내가 최선을 다하지 않았다고 해도 그렇지. 그래도 십 년인데.’
하지만 이건 그녀가 그의 특수성을 알지 못했기에 생긴 오해였다.
틀림없이 ‘헤스페론’은 마법을 처음 배우는 것이 맞았으나···.
‘이 정도야 뭐. 아무리 흑마법과는 방향성이 다르다지만 기초 마법 정도로 헤매면 한스의 이름값이 아깝지.’
무려 불사왕인 한스와 사고를 공유하는 그였다.
물론 육체적인 제약 때문에 고위 마법까지 따라 할 수는 없겠지만, 지금은 마법의 기초를 다지는 단계가 아닌가?
거기다 「사악한 지혜」, 「금단의 지식」, 「마도의 길」, 「마력 지배」 등 마법 계열 스킬들까지 간접적으로 도움을 주는 상황이다.
노벨상 수상자가 슈퍼컴퓨터까지 켜놓고 옆에서 정답을 알려주는데, 고작 중학생 수준의 문제에서 쩔쩔맬 리가 없는 일.
“···참 잘했어요. 그럼, 다음 단계로 넘어가죠. 후우— 세아보다 더한 사람이 있을 줄은 몰랐는데.”
참고로 전송 초기에 이런 보조도 없이 황녀를 추월했던 이세아는 그냥 천재가 맞았다.
그리고 라일리 황녀와 헤스페론이 그렇게 둘만의 시간을 보내고 있을 때.
같은 공간에 갇혔던 사이먼 황태자는 무엇을 하고 있었느냐—.
“황태자 전하? 제가 분명 청소에 침구류 세탁, 정원 손질까지 끝내 두라고 했던 것 같은데···. 제 말이 말 같지 않으셨나 봅니다?”
“크윽— 나, 나는 아제리온 제국의 황태자다! 이런 일을 해 봤을 리가 없지 않느···.”
“또 말대꾸를 하시는군요? 역시 체벌이 부족했던 걸까···. 어쩔 수 없네요.”
“아, 아니. 그런 게 아니라 난···.”
“우후훗! 자, 이리 오세요. 새사람이 되도록 확실하게 교육해 드리죠. 원래 성장에는 아픔이 동반되는 법이랍니다?”
“아니! 라일리는 가만히 두면서 왜 나만!”
전 감시자인 앤드류의 괴롭힘으로부터 해방되었다는 기쁨을 만끽하기도 전, 이번엔 리리스라는 가명을 사용 중인 시아나의 장난감이 되어 힘겨운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찰싹—
작은 승마 채찍을 휘두르며 즐거운 미소를 짓는 시아나.
제국 귀족으로 위장하기도 했던 그녀에게 황태자를 마음대로 가지고 놀 기회란 굉장히 뜻깊은 것이었다.
물론 라일리 황녀는 황태자가 뭔가 또 밉보일 짓이라도 했다고 생각할 뿐이었지만, 사실 거기에도 불사왕의 입김이 닿은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마왕성 대전 한가운데에 놓인 왕좌.
한스는 그 위에 앉은 채 내부 곳곳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한눈에 살펴보고 있었다.
‘흐음, 포로들 쪽은 딱히 신경 필요 없겠군. 헤스페론이 있으니 문제가 생기면 곧바로 알 수 있겠지.’
마왕성 내의 추종자들을 관리하는 일은 전부 시아나에게 맡겨두고, 심연에 푹 담겨 순조롭게 숙성 중인 살마의 관리는 아크리치 드웰에게 일임하면 될 터였다.
역시, 그가 당장 필요한 일은 딱히 없었다.
[그럼 내가 자리를 비운 동안 나머지 일은 너에게 위임하겠다. 올리비아.] [걱정하지 마시옵소서···. 왕께서 하명하신 대로 따르겠나이다···.]한스의 나직한 명령에 올리비아가 공손히 고개를 조아렸다.
갑자기 어디로 자리를 비운다는 것인지, 왜 자신들을 두고 가는 것인지 당연히 모든 것이 의문이었지만···.
그녀는 감히 불사왕에게 반문하지도 못하고 그저 수긍할 뿐이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성을 둘러본 한스는.
그대로 그 자리에서 모습을 감췄다.
***
야심한 밤.
후우웅—
희미한 달빛만이 비추는 어두운 밤바다 위를 조용히 스쳐 지나가는 검은 그림자 하나가 있었다.
밤의 어둠에 동화되어 기척도 없이 빠른 속도로 이동하는 무언가.
당연히 그 정체는, 지구로 넘어온 불사왕 한스였다.
‘아직 가 본 적이 없는 곳이니 함부로 공간 이동을 할 수도 없고. 번거롭지만 일단은 이렇게 하는 수밖에.’
그는 공간을 넘어 부산까지 이동한 직후, 곧바로 동남쪽으로 방향을 잡고 바다를 건너기 시작했다.
레이더나 위성 등에 감지당하지 않기 위해 저공비행으로 천천히 이동하고 있었지만, 물론 그 ‘천천히’의 기준은 한스 입장에서일 뿐이었다.
부산에서 출발한 지 10분 만에 대마도를 지나치고, 20분이 넘어서자 슬슬 일본 열도의 모습이 가시권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부산에서 30분이면 후쿠오카까지 도착하고도 남겠군. 하긴, 서울에서 부산까지보다 더 가까우니.’
일본에서 세 번째로 큰 섬인 규슈의 후쿠오카는 부산과 거리가 가장 거리가 가까운 대도시였다.
그래도 기념할 만한 하회탈의 첫 일본 진출이니, 어느 정도 규모가 있는 곳에서 시작하고 싶어서 선정한 장소.
‘첫 해외여행이기도 하고.’
도중에 밀입국 등을 감시하기 위해서인지 미약한 방범 결계가 느껴졌으나, 그는 숨 쉬듯 자연스럽게 무시하고 안으로 들어섰다.
그리고 이 야심한 시각에도 환하게 빛나는 항구로 향하려던 순간.
‘음? 이건?’
이곳과 조금 떨어진 장소에서 그에게 굉장히 친숙한 기척이 감지되었다.
‘···한번 가 볼까.’
일반적으로 한스에게 익숙하다는 것은 절대 좋은 신호가 아니었다.
아무래도 일본 땅을 밟기도 전에 일부터 시작하게 될 것 같다고 예감하며, 그는 곧바로 기운이 느껴지는 곳으로 이동했다.
촤아아— 철썩—
그렇게 도착한 장소는 바다 한가운데에 떠 있는 제법 커다란 배 한 척이었다.
안 그래도 어두운 밤바다에서 주기적으로 몰려오는 파도에 천천히 흔들리면서도, 마치 유령선처럼 빛 한 점 없이 가만히 부유해 있는 선박.
그 내부에서 그가 아니었다면 쉽게 알아챌 수 없을 정도로 미약한 흑마력과 죽음의 기운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
‘과연, 나름 신경 썼는지 결계도 꼼꼼하게 설치되어있군.’
하지만 한스는 마치 안방에라도 들어가듯 자연스럽게 배 안으로 진입해 선실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직후 그가 안에서 마주한 것은 딱 예상했던 그대로였다.
누가 봐도 사악한 의식인 피의 주술진이 사방에 그려져 있었으며, 기괴한 형상의 촉매들이 여기저기 배치되어 음산한 분위기를 더하고 있었다.
거기다 중심부의 제단에 배가 갈라진 채 제물로 바쳐진 이들의 시신들까지.
‘어떻게 흑마력을 사용하는 놈들은 이렇게나 하는 짓이 똑같은 건지.’
그간 아우테리카에서 잡아들였던 놈들도 그렇고, 한국에서 사냥했던 놈들도 그렇고.
기운의 특성상 자연스러운 일이겠지만 한탄이 나오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
그때, 제단 주변을 둘러싸고 저들끼리 낄낄거리며 떠들던 십여 명의 남녀가 뒤늦게 그를 발견하고 소란을 피우기 시작했다.
경계, 경고, 긴장, 살의 등···.
그래봤자 하나같이 한스에게 비비기에는 일천한 수준이었으나, 그는 곧바로 놈들을 처리하지 않고 잠시 고민에 빠졌다.
[흐음, 이거 난감하군.]“%*#%&!”
“@&*#%#?”
놈들이 뭐라고 떠들긴 하는데, 그 말을 하나도 알아들을 수 없었으니까.
자연스럽게 의사소통이 되는 곳에 너무 익숙해져서 잠시 잊고 있었다.
물론 지금이야 당연히 갑자기 침입한 그를 경계하는 내용이겠지만, 그래도 당분간 일본에서 활동할 생각이었는데 원활한 의사소통은 필수이지 않겠는가?
‘정황만으로 함부로 판단하다간 실수할 수도 있으니.’
원래 무슨 활동을 하든 해외에서는 언어가 필수인 법.
하지만 이것도 사실 그리 큰 문제는 아니었다.
[크크큭— 필요하다면 지금부터 배우면 되겠지.]언어를 모르면 배우면 될 뿐.
간단한 일이었다.
고오오오—!
적어도 그에게는.
“허업!”
“큭!”
선실 내부를 가득히 채우는 거대한 존재감.
긴장한 채 기세를 돋우던 놈들이 일제히 심장을 붙잡고 비틀거렸다.
어떻게든 반항하려고 노력하지만, 체내의 흑마력이 제멋대로 날뛰며 통제를 벗어나고 손발조차 마음대로 가누지 못한다.
그 도마 위에 올라온 생선이나 다름없는 모습을 바라보며, 놈들에게 천천히 다가간 한스가 그대로 한 녀석의 머리를 움켜쥐었다.
“끄아아악!”
그리고 순식간에 머릿속의 기억을 읽어 들였다.
다만 평소와 다른 점이라면 강렬한 사건 등을 비롯한 기억을 뒤지는 게 아니라, 놈의 언어 계통을 위주로 훑어 내리고 있다는 것.
그러나 하나의 언어를 습득하는 일이 그렇게 쉬울 리가 없었다.
‘아무래도 정신력뿐만 아니라 다른 능력도 좀 올려야겠는데. 기억력과 추론력, 사고력 같은 것들을···.’
어차피 한 번 올려두면 두고두고 도움이 될 것들이다.
마침 그에겐 매우 풍족한 포인트가 남아있었고, 그것은 지금도 꾸준히 증가하는 중이니 아낄 필요도 없었다.
‘마침 본격적으로 마법을 배우고 있기도 하니, 시기상으로도 나쁘지 않군.’
그렇게 본체가 열심히 포인트를 소비하는 동안, 한스는 느긋하게 주변을 둘러보았다.
순식간에 눈앞에서 한 명이 희생되자 겁을 먹은 기색으로 위축된 이들.
갑작스러운 봉변에 그들의 눈빛에는 억울함까지 담겨있었다.
‘···뻔뻔스럽게도 말이지.’
그는 슬쩍 시선을 돌려 제물이 되어 희생된 이들의 시신을 한 번 바라보고는, 다시 본격적인 ‘학습’ 절차에 들어갔다.
다행히 그를 가르쳐 줄 원어민 강사는 아직 많이 남아있었다.
그것도 아주 헌신적인 이들이.
***
환한 조명이 켜져 항상 밝은 항구와는 달리 외곽에 있어 음산한 분위기가 감도는 창고 지역.
그곳에서 접선한 일단의 무리가 의미심장한 대화를 주고받았다.
“어이, 이번 물건들 상태는 어때?”
“한번 확인해 봐. 싱싱한 것들로 준비했으니.”
그 말에 한 무리의 일당이 직접 컨테이너를 열고 안을 살펴보고는 이내 만족스러운 웃음을 지었다.
그곳엔 공포에 질려 떨고 있는 젊은 남녀들, 심지어 미성년자로 보이는 이들까지 속박된 채 널브러져 있었다.
“푸히힛— 매번 고맙군. 우린 직접 나서기 힘든 입장이라 식사 한 번 하는 것도 일인데 말이야. 덕분에 굉장히 편해졌어.”
“우리야 돈만 주면 무슨 일이든 하지. 앞으로도 자주 이용해 달라고.”
그렇게 순식간에 거래가 마무리되고, 핏빛 안광이 번들거리는 마인과 전신에 문신이 가득한 인간이 화기애애하게 악수를 나눴다.
하지만 그때.
그들의 훈훈한 분위기 사이로···.
[과연, 이제 어느 정도 알아들을 수 있겠군. 역시 효과가 좋아.]지저 깊은 곳에서 울려 퍼지는 듯한 서늘한 목소리가 섞여 들었다.
“뭣?!”
“누구냐!”
몇 겹이나 되는 보안과 통제가 겹친 이곳은 외부인이 접근할 수 없는 곳이건만.
본능적으로 위기를 감지한 이들이 경계심을 높이며 소리가 들려온 방향으로 고개를 돌리자.
스으으으—
냉기가 섞인 스산한 공기가 밀려옴과 동시에 그림자 속에서 무언가가 천천히 모습을 드러냈다.
어둠과 동화된 듯 시커먼 몸체와, 그 때문에 더욱 돋보이는 기괴한 웃음의 나무 가면.
그리고 그 속에서 도깨비불처럼 타오르는 한 쌍의 푸른 안광까지.
[크흐흣— 하지만 조금 부족한 것 같기도 한데. 너희가 도움을 좀 주었으면 좋겠구나.]바다를 건너온 ‘화회탈’이 마침내 일본에 상륙하는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