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overeign of the Infinite Clones RAW novel - Chapter (166)
#166
그 시각 서쪽에선 (2)
유페르쉬의 뱀파이어들에게 「정제혈정」을 주입하는 작업은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온갖 세계의 흡혈귀들에게서 우성 인자만을 뽑아내 궁극의 진화를 이룬 하인즈 2세의 피.
그곳에서 독성이라 할 수 있는 사념까지 완벽히 제거한 혈정은 그야말로 뱀파이어들에겐 최고의 영약이었다.
체내에 주입되는 순간 그것에 영향받은 흡혈인자를 극적으로 변화시키며, 긴 세월 동안 정체되었던 진화를 단번에 이끌어낸다.
물론 그 과정에서 특화되는 방향 또한 혈정의 주인인 하인즈가 어느 정도 유도할 수 있었다.
저택 지하의 넓은 공간.
“끄으윽···!”
“하아— 하아—.”
한 차례의 「정제혈정」 수혈이 끝난 직후, 하인즈는 진화의 여파에 끙끙 앓는 뱀파이어들을 스윽 훑어보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제대로 활동하기 위해서는 우선 태양에 대한 면역력부터 키워야겠지.’
그건 그가 처음 「정제혈정」을 사용했을 때부터 신경 쓰던 부분이었다.
사실 뱀파이어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잔혈급들은 햇빛에 너무 취약해 특별한 혈마법이라도 사용하지 않는 한 낮에 운용하는 데에 많은 제약이 따랐다.
여전히 음지에 숨어서 살아간다면 그런 약점도 어떻게 잘 회피할 수 있을지 모르겠으나, 전면적으로 나서기로 한 상황에서까지 그럴 수는 없는 노릇이다.
일단 영역을 선포한 이상 지킬 것은 지켜야 하지 않겠는가?
‘이렇게 하더라도 완전하게 극복하기는 힘들겠지만, 일단은 페널티를 완화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하겠지. 어차피 다른 능력치도 전체적으로 증가할 테고.’
또 아무리 뱀파이어가 뿔뿔이 흩어져 사는 소수 종족이라고 해도, 두 거대 클랜의 구성원들이 한자리에 모이자 그 수는 무시할 수 없을 정도였다.
서번트나 슬레이브를 제외하고 기사급이라 할 수 있는 잔혈만 수백이 넘는데 그들 모두가 이전보다 훨씬 강해진 상태이니···.
‘순혈도 수십은 되고 말이지. 얼마 전에 있었던 두 클랜 간의 전쟁만 아니었어도 백은 되었을 텐데.’
그 난리 통에 가장 많은 뱀파이어를 죽인 게 바로 하인즈 본인이었으나, 그는 애써 진실을 외면하며 지하실 문을 나섰다.
끼익—
“고생하셨습니다, 로드.”
“테오도르, 지금 안에 있는 게 남부 쪽에서 온 녀석들이라고 했던가?”
“예, 맞습니다. 요즘 남부도 어수선해서 합류하는 게 조금 늦었지요. 지금 남은 조는 며칠 후에 도착할 동남부와 극동부 두 개 조뿐입니다.”
“흐음, 이제 정말 얼마 남지 않았군.”
그는 문 옆에서 대기하고 있던 테오도르와 대화를 나누며 복도를 거닐었다.
‘그러고 보니 요즘 부족 연맹이 조금 시끄러운데. 조만간 할리를 움직여서 한번 방문해봐야겠어.’
남부는 사막을 끼고 있는 지리적 여건도 그렇고, 여러모로 정보를 얻기 힘든 폐쇄적인 면이 강해 그간 알게 모르게 등한시하게 되는 부분이 있었다.
기본적으로 부족 단위로 거주해 뱀파이어들이 잠입하기도 힘들며, 하필 남부에 흔하게 널린 주술사들도 올리비아가 다루는 유령들과 천적이었던 것.
‘영혼을 다루는 방면으로는 사제들보다 한 수 위라고 했던가. 사념이 억제되며 지능이 떨어진 유령이 그들의 제령술에 대응하기엔 한계가 있겠지.’
그렇다고 거기에 수고를 더 쏟아붓기엔, 척박한 환경 탓에 인구도 많지 않고 폐쇄적이라 세상에 미치는 영향력이 적은 계륵 같은 곳이었다.
‘사실 문제가 있어도 해결은 할리의 몫이라 생각하고 미루고 있던 면도 있지.’
그동안 여러 가지 이유로 미루고 있었는데 이제 할리도 훌륭하게 기반을 다졌으니 슬슬 남부에 방문할 계획을 짜야 할 것 같았다.
그 또한 하나의 훌륭한 서사가 될 테니까.
‘대모험 끝에 용사의 동료가 되었던 할리는 마침내 마음의 고향, 칼코스에 도착하게 되는데. 하지만 그곳에서 그를 기다리는 것은···!’
그렇게 속으로 딴생각하면서도, 이미 멀티태스킹이 일상이 된 하인즈는 겉으로 내색하지 않고 자연스럽게 테오도르와 대화를 나누었다.
“국외 지부의 상황은 어떻지?”
“밖에 나가 있는 아이들은 최대한 요충지에만 남기는 선에서 정리하고 있습니다. 물론 로드의 은총을 받은 녀석들로 전원 교체한 건 당연한 일이지요. 다들 몰라보게 성장해서 각 지점마다 필요한 인원수를 줄이는 데에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탈리아 왕국에 전력을 모으고 있다지만, 그간 마련한 기반들을 버리고 오는 것도 아까운 일이다.
혈문을 통한 기동력을 최대한 살리기 위해서도 일정 수의 혈족들은 어느 정도 각 지역에 남겨둘 필요가 있었다.
“탈리아 왕국 전역에도 골고루 배치를 마쳤습니다. 혈문도 촘촘하게 깔아 놨으니 이제 왕국 내라면 어디든 곧바로 이동할 수 있지요. 효율도 크게 향상되어서 근방의 라펠라 시 정도면 그리 크지 않은 자원으로도 충분히 이동할 수 있을 정도입니다.”
테오도르가 뿌듯한 기색으로 입을 열었다.
혈문은 유페르쉬 클랜이 가지고 있던 고유 혈마법 중 하나였으니 그 태도는 당연한 것이었다.
하지만 거기에 대충 고개를 끄덕이며 치하해 준 하인즈는 또 딴생각에 빠져 있었는데···.
‘라펠라 시라···. 그러고 보니 디아나 남매가 있는 곳이었지? 슬슬 한 번 만나러 갈 때가 되긴 했지.’
아우테리카에 온 초기에 인연이 있었던 어린 남매가 거주하는 곳이 그곳이었다.
헤어지면서 일 년에 한 차례 정도는 얼굴을 비추겠다고 했는데, 저번에 방문한 이후로 어느새 시간이 제법 흘러 있었다.
‘그리 멀지도 않은 거리인데 말이지. 이게 집에서 독립한 사람들이 느끼는 감정인가.’
자신이 이런 경험을 할 수 있으리라곤 생각도 못 했었거늘.
그는 미묘한 간질간질함을 느끼며 고개를 끄덕였다.
조금 귀찮긴 했지만, 솔직히 그리 나쁘지는 않은 기분이었다.
‘쇠뿔도 단김에 빼야 하는 법. 생각난 김에 지금 바로 가 볼까?’
당장 중요한 일은 대충 끝났고, 마침 혈문도 준비되어 있다고 하니 이번 기회에 그걸 직접 이용해 보는 것도 괜찮을 터였다.
***
“엇? 로드? 어, 어서 오십시오!”
“라펠라 시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이쪽으로 나가시면 됩니다!”
온통 피로 이루어진 마법진과 인간의 두개골을 비롯한 장식품들.
당장이라도 악마를 소환할 수 있을 것 같은 방 한가운데의 핏빛 기류에서 모습을 드러낸 하인즈는 꾸벅 고개를 숙이며 긴장하는 이들에게 손을 한번 흔들어 주고는 곧바로 밖으로 걸음을 옮겼다.
‘확실히 혈마법답게 음산한 분위기이기는 한데, 이용 방식 자체는 교단의 게이트랑 큰 차이는 없군.’
평범한 주택으로 위장된 은신처를 나서자, 과연 그에게도 익숙한 라펠라 시의 경관이 눈앞에 펼쳐졌다.
아직은 이전과도 다를 바가 없는 평범한 인간 도시 그 자체였으나, 조만간 이곳도 커다란 변화에 직면하게 될 것이다.
“···아무리 그래도 이건 너무 비싸지 않수? 거 조금만 깎아 주시오.”
“이 양반이 뭘 모르시네. 지금 몬스터 때문에 어딜 가나 마찬가지요!”
“우리 왕국은 윗분들이 대처를 잘해서 환란을 비껴갔다고 들었소만?”
“그래도 물건을 운송하던 상인들이 몸을 사리면서 시세가 오르는 건 어쩔 수 없지. 주변 무역로가 막히기도 했고.”
하인즈의 귀에 물건을 두고 흥정하는 이들의 대화 소리가 흘러 들어왔다.
그간의 노력 덕분에 탈리아 왕국의 피해가 덜하다곤 하지만, 이 난세에 아무런 영향을 받지 않을 순 없었다.
여러모로 생활이 팍팍해질 수밖에 없는 현실에 마주치는 사람들의 얼굴에는 저마다 근심의 그늘이 드리워져 있었다.
당연히 그들은 현 사태에 대한 불만을 토해냈고, 그에 따른 원망은 자연스럽게 한 존재에게로 귀결될 수밖에 없었다.
“이게 다 그 한스인가 하는 불사왕 때문이라는 거잖아.”
“그러고 보니 내 고향 마을에도 한스라는 놈이 있었는데, 평소 눈빛부터 심상치 않은 놈이었지. 글쎄 무슨 일이 있었냐면···.”
“세상에! 사실 내가 아는 한스도···.”
바로 이 세상에 강림한 절대 악, 불사왕 한스였다.
하인즈는 사방에서 들려오는 ‘한스’에 대한 저주를 흘려들으며 허허롭게 거리를 거닐었다.
이 세상의 모든 한스들에게 미안하긴 했지만, 이제 그도 개명 시도는 포기한 지 오래였다.
‘이제 와서 무슨 소용이겠냐 싶기도 하고. 역시 처음부터 이름을 잘 지었어야 했는데.’
이후 그 욕구가 절정에 치달았을 때 탄생한 이름이 바로 막내인 ‘헤스페론’이었다.
멋진 작명을 위해 조사를 거듭하다가 결국 그리스 신화까지 도달한 후에야 나온 이름이었는데···.
‘이제 와서 생각해 보면 그건 너무 힘이 들어갔던 것 같기도 하고.’
냉정해진 지금 생각해 보면 그건 또 허세가 많이 낀 것 같아 미묘한 기분이었다.
그렇게 딴생각과 함께 느긋하게 도시 전경을 구경하며 디아나의 숙부가 운영하는 식료품점에 가까워질 무렵.
와장창— 와르르!
“아이고, 그만하시오! 이래 난장을 쳐 버리면 우린 어쩌란 말이오!”
“흐아앙—!”
“이리와, 라피야. 괜찮아, 괜찮아. 뚝!”
그가 향해야 할 방향에서 시끄러운 소란이 느껴졌다.
단순히 그뿐만 아니라, 여러 사람이 떠드는 소리 사이로 하인즈가 아는 이들의 목소리도 함께 들려오고 있었다.
‘이건?’
다음 순간.
아무도 인지하지 못한 사이, 그는 이미 식료품점 앞에 모여 웅성거리는 사람들 사이에 자연스럽게 섞여 있었다.
“쓰읍, 뭐야? 숨겨둔 돈 더 없어?”
“일단 이것들부터 가져갈까? 그래도 통째로 넘기면 값 좀 나올 텐데.”
“그래, 나중에 빼돌릴 수도 있으니 일단 비싼 것들부터 챙기자고. 수레 가져와!”
가게를 뒤집으며 난리를 피우고 있는 여섯 명의 험상궂은 사내들.
하지만 그 소란에도 상가를 순찰하던 경비병들은 난감한 표정으로 머리만 긁고 있을 뿐이었다.
하인즈는 정확한 사태 파악을 위해 귀를 활짝 열고 주변의 정보를 수집했다.
그리고 때마침.
“이놈들! 여기까지 와서 무슨 행패냐!”
초췌한 안색의 가게 주인 볼트와 그를 불러온 것으로 보이는 디아나가 거칠게 숨을 몰아쉬며 인파를 헤치고 황급히 다가왔다.
“아? 아저씨 이제 오셨네. 뭐긴 뭐야, 돈 받으러 왔지.”
“나머지도 곧 갚는다고 하지 않았나! 이렇게 가게까지 와서 장사도 못하게 하는 건 무슨 경우야!”
“아? 계산해 보니 아저씨가 저번에 지불한 돈으론 이자 탕감하기도 빠듯하더라고. 더 기다려줘 봤자 앞으로도 마찬가지일 것 같으니, 그냥 우리가 알아서 챙겨 가기로 했어.”
“무슨 그런 말도 안 되는!”
말싸움 끝에 흥분한 볼트가 사내들에게 달려들자, 그들 중 하나가 거칠게 그를 밀어 바닥으로 내팽개쳤다.
“억!”
“자, 작은아버지!”
쓰러진 그를 디아나가 부축하고, 떨어진 곳에 옹기종기 모여 있던 나머지 가족들도 눈물을 글썽이며 서둘러 그 주위에 몰려들었다.
“하 참, 거 이래봬도 우리도 나름 신사적으로 대하고 있는 거라고? 예전 같았으면 확 다 그냥 통째로 잡아다가···!”
“야, 야. 경비병 있어.”
“쓰읍— 퉤!”
사내들은 경비병들을 슬쩍 보고는 다시 하던 작업을 이어갔다.
저들끼리 하는 이야기를 들어보니 아예 가게를 통째로 다른 곳에 팔아넘길 생각인 것 같았다.
그곳에서 생계를 이어가던 일가족에게는 날벼락이 따로 없는 일.
울분이 담긴 눈으로 사내들을 노려보며 입술을 깨무는 볼트와 세 아이를 끌어안으며 눈물을 삼키는 부인, 무서운 분위기에 계속해서 울음을 터트리는 라피와 그것을 달래느라 여념이 없는 아론까지.
그리고 그 틈에서, 못 본 새 많이 자란 디아나가 고개를 푹 숙인 채 주먹만 꼭 쥐고 몸을 바들바들 떨고 있었다.
‘흐음— 어린 딸, 라피가 원인을 알 수 없는 병에 걸려서 급전이 필요했다고···.’
그 사이 구경꾼들의 대화에서 얻은 정보를 조합한 하인즈는 차분히 상황을 정리했다.
그것 때문에 주변에 열심히 돈을 빌리고 다니다가 결국 사채에까지 손을 댔다고.
저쪽에 선 경비병들이 나서지 않고 있는 이유도 알 수 있었다.
어이없게도 저 사내들의 행위가 불법적인 행패가 아니라, 미리 관청에까지 신고 된 ‘정상적인’ 추징 행위였다는 것이다.
아무래도 그쪽에 저놈들의 뒤를 봐주는 공무원이 있는 모양이었다.
‘거참, 손볼 곳들이 한둘이 아니네.’
사실상 이 나라는 자신의 것이나 다름없지 않은가.
이제 막 어떻게 경영하면 좋을지 환상에 부풀어 있는데 이런 상황을 목격하니 기분이 썩 좋지는 않았다.
충분히 상황을 파악한 하인즈는 자신의 기척을 감추던 「존재부정」을 해제하며 천천히 앞으로 나섰다.
“···킁?”
직후, 고개를 푹 숙이고 있던 디아나가 몸을 움찔하며 코를 킁킁거렸다.
그리고 천천히 고개를 들어 눈물이 가득 맺힌 시선을 이쪽으로 향했다.
“···아저씨?”
서러움이 가득 담긴, 그러면서도 반가움을 감출 수 없는 울먹이는 목소리.
안타까움을 절로 자아내는 얼굴이었지만, 그때 하인즈는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다.
‘···여전히 비정상적인 후각이군. 아무리 봐도 그냥 타고날 수 있는 능력이 아니야.’
이전에는 이 세상에 대해 잘 몰라서 그러려니 했지만, 이제 겪을 만큼 겪은 지금은 알고 있었다.
디아나가 가진 능력은 이 세상에서도 굉장히 이질적이라는 것을.
제법 큰 세력들을 이끌고 있는 지금도 디아나와 비슷한 능력을 가졌다는 이는 들어본 적이 없었다.
···그래, 지구 출신 각성자들의 ‘고유스킬’을 제외하고는 말이다.
‘하지만 디아나는 지구인이 아니지. 흐음, 역시 곁에 두고 좀 더 지켜봐야겠어.’
그런 속마음을 품은 채.
하인즈 2세가 차가운 미소와 함께 앞으로 나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