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overeign of the Infinite Clones RAW novel - Chapter (168)
#168
그 시각 서쪽에선 (4)
주모자였던 교육 강사를 심문한 2차 조사 결과.
그의 범행 동기는 디아나의 재능에 대한 질투심과 그녀가 지불한 돈에 대한 탐욕이었다.
배움에 목이 말랐던 디아나는 가르쳐 주는 족족 모든 지식을 스펀지처럼 빨아들였고, 그것은 부족한 능력으로 일선에서 물러난 그의 열등감을 자극하기에 충분했다.
그런 상황에서 그녀가 제법 고액인 강습료도 흔쾌히 지불하니, 아예 돈까지 노리고 작정해서 이번 일을 꾸민 것이다.
“쯧, 한심하군. 놈들은 알아서 처리해라.”
“예! 로드.”
하인즈는 대충 손을 휘저어 보고하러 왔던 뱀파이어를 물렸다.
마침 눈앞에서 거슬리게 하기에 치웠을 뿐, 그의 입장에서 놈들은 더 이상 신경 쓸 가치도 없는 피라미에 불과했으니까.
이후의 일은 순풍에 돛단 듯 빠르게 진행되었다.
만약을 대비해 최고의 의료진을 수배해 라피의 몸 상태를 다시 검사했고, 거액의 기부금과 함께 교단의 사제에게 재차 확인하도록 지시했다.
또 관리들을 닦달해 최대한 빨리 이민 절차를 밟을 수 있도록 사전 준비를 갖춰뒀다.
사실 이 나라에서 그가 원해서 되지 않는 일은 하나도 없었으니, 모든 일이 순조로운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에헤이— 당신도 이제 이런 건 다 버리라니까. 앞으로 가야 할 길이 얼만데. 이게 다 짐이야!”
“아휴, 그래도 아까워서 우째 버린대. 그냥 저쪽 빌리 엄마한테라도 가져다줘야겠네.”
“그게 좋겠군. 처분하기 곤란한 건 이번에 신세 진 사람들한테 싹 다 나눠줘 버리자고.”
그리고 볼트 일가도 이번 일로 도시에 정이 떨어졌는지 흔쾌히 디아나를 따라나서기로 했다.
물론 힘들 때 조금씩 도와준 이웃도 전혀 없는 건 아니었으나, 그보다는 돈 문제에 매정하게 그들을 내친 이들이 훨씬 더 많았다.
모두가 힘든 시기이니 이해는 한다만, 그래도 그간 주변에 적지 않게 베풀며 살아왔던 만큼 상처도 클 수밖에 없는 일.
이미 어색해진 관계를 안고 계속 이곳에서 지내느니, 차라리 전부 훌훌 털고 디아나와 함께 은인인 하인즈의 일이나 도우면서 새 출발을 하기로 한 것이다.
그렇게 눈코 뜰 새 없이 부지런히 움직인 지 며칠이 지나고.
결국 남은 모든 자산을 처분하고 자잘한 빚도 청산한 일가족은 마침내—.
단출한 짐만 짊어진 채 마탑의 전송 마법진 앞에 서 있었다.
“···꿀꺽.”
“옴마야, 살다 보니 이런 곳도 다 와보네···.”
“오빠빠빠! 쩌기 저거 빛나! 이뻐!”
“안 돼, 라피야! 여, 여기 것들 함부로 만지면 큰일 나! 진짜로!”
그들은 공무원들의 전폭적인 지원에 힘입어 빠르게 수도 탈라리아로 상경하고, 이후 물 흐르듯 진행된 일정에 어느새 이곳까지 오게 되었다.
평범하게 살아온 이라면 일생 인연이 없었을 마탑의 깊은 곳에.
하인즈라는 사람이 범상치 않은 인물이라는 건 충분히 예상하고 있었지만, 국가 기관까지 움직이면서 필요한 모든 일이 프리패스로 통과되는 모습에는 어안이 벙벙해질 지경이었다.
심지어 다른 영지도 아니고 타국으로 가는 것이었는데···.
“자, 모두 마법진 위에 올라가 주세요. 슬슬 가동을 시작하겠습니다.”
그때, 거만함과 괴팍함의 대명사인 마탑의 마법사가 친절한 목소리로 그들에게 안내의 말을 전했다.
이 또한 적응되지 않기는 마찬가지였다.
“너무 긴장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저희 로카펠리 마탑은 공간계 마법으로는 대륙 제일이거든요. 이송 중 문제가 생길 확률은 제로에 가깝습니다!”
그 말엔 확률이 제로가 아니라는 무서운 의미가 숨어있었으나, 잔뜩 긴장한 그들은 깊이 생각할 겨를도 없이 뻣뻣한 걸음으로 마법진 위에 올라섰다.
우우웅—!
그리고 그것을 기다렸다는 듯, 화려하게 발광하는 빛과 요란한 진동음과 함께.
지이이잉—!
탈리아 왕국 라펠라 시의 평범한 다섯 가족이 툴크 왕국 북부 아오니아 백작령 타라크로 전송되었다.
***
아무나 사용할 수 없는 데다 권력으로 어떻게 할 수도 없는 신전의 게이트와는 달리, 마탑을 통한 공간 이동은 돈만 있으면 쉽게 이용할 수 있는 이동 수단이었다.
다만 거기엔 두 가지 커다란 단점이 있었는데.
첫 번째는 한 번 이용하는 데만도 입이 떡 벌어지는 금액이 필요하다는 것이었고···.
“저런, 두 분 다 괜찮으시오?”
“···후우, 이제 괜찮아졌습니다.”
“···저도요···.”
두 번째로는 게이트와 달리 탑승감이 매우 좋지 않다는 것이었다.
오죽했으면 도착지의 마법사들이 전송 직후 익숙하다는 듯 양동이 하나씩을 건네줄 정도일까.
그에 어려서인지 그럭저럭 참을 만했던 세 아이와는 다르게, 두 어른은 파리한 안색으로 벤치에 늘어져 있다가 바깥 공기를 좀 쐬고서야 기력을 회복하는 중이었다.
“아깐 경황이 없어 제대로 인사도 하지 못했구려. 그럼 다시 자기소개를 하도록 하지. 나는 휴버트 상회를 이끄는 상회주, 휴버트라고 하오.”
그리고 그들이 겨우 몸을 가누자, 그제야 제대로 나누지 못했던 인사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앞으론 내가 직접 여러분이 이곳 타라크에 잘 정착할 수 있도록 챙길 생각이니 걱정할 필요 없소. 하인즈 님과 난 보통 막역한 사이가 아니거든.”
“아! 상회주님이셨군요. 처음부터 좋지 않은 모습을 보여 죄송합니다. 저는 볼트라고 합니다. 말씀 편하게 해 주십쇼.”
악수를 위해 가볍게 뻗어진 손을 초췌한 안색의 볼트가 두 손으로 공손히 맞잡았다.
휴버트가 딱히 권위적으로 나온 건 아니었으나, 그 저자세는 저도 모르게 나온 본능적인 행동이었다.
고급스런 명품으로 치장된 복장과 몸 곳곳에서 번쩍거리며 존재감을 과시하는 보석 장신구들.
얼핏 보면 졸부처럼 품위 없는 요란함이었으나, 오랜 장사로 단련된 눈치를 가진 볼트는 저것들이 전부 보통 물건이 아니라는 걸 알아볼 수 있었다.
‘설마 저게 다 마도구인가? 세상에, 그럼 대체 몸에 얼마를 두르고 다니는 거지?’
또 조금 떨어진 채 자연스럽게 이곳을 둘러싸고 있는 우락부락한 경호원들과 절도 있어 보이는 수행원들은 또 어떤가.
날 선 기세를 품은 채 슬쩍슬쩍 이쪽으로 향하는 예리한 시선에는 저도 모르게 모골이 송연해질 지경이었다.
“아, 이거 미안하군. 얼마 전에 안 좋은 일이 있어서 경호 수위를 좀 올렸는데, 불편하더라도 조금만 양해해 주시오.”
“아이고, 아닙니다! 누가 뭐라 해도 안전이 최고지요, 예!”
휴버트에게서 자연스럽게 흘러나오는 위압감에 절로 태도가 공손해졌다.
그것은 하인즈의 살벌한 핏빛 카리스마와는 결이 다른, 그야말로 부유함에서부터 비롯한 황금빛 카리스마였다.
작은 식료품점을 운영하는 게 고작이었지만 그 또한 상인은 상인.
원래 상인에게는 돈 많은 놈이 갑인 법이었다.
휴버트는 다른 가족들과도 하나하나 인사를 나누며 디아나에게 슬쩍 시선을 돌렸다.
역시나 그녀는 그의 정체를 알아챘는지 눈을 동그랗게 뜬 채 입술만 오물거리고 있었다.
‘그래도 눈치껏 아는 척하지 않고 있네.’
어차피 앞으로 함께 해야 하는 관계인 만큼, 그녀에게는 미리 며칠 전에 하인즈가 사정을 대충 둘러대 둔 상태였다.
자신은 뱀파이어라 같이 가기 힘드니 다른 방법으로 먼저 가서 변장하고 기다리고 있겠노라고.
그렇게 ‘하인즈의 또 다른 모습’이 된 휴버트는 디아나를 보고 슬쩍 한쪽 눈을 감으며 신호를 보냈다.
“자, 잘 부탁드려요.”
그 신호를 읽은 디아나는 어색하게 웃고 모르는 척 시치미를 떼며 그와 인사를 나누었다.
그녀는 하인즈가 얼굴을 바꿀 수 있다는 것도 알고 기척을 감추는 것도 직접 본 적이 있는 상태였다.
개체가 다르니 냄새에 조금 차이가 있긴 하나, 생각해 보면 이렇게까지 정체를 감추는데 완전히 똑같은 게 더 이상한 노릇이었다.
그렇게 저 혼자 알아서 납득한 그녀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이제 다들 괜찮아진 것 같으니 슬슬 이동하도록 하겠소. 마차를 준비해 뒀는데, 도중에 힘들다 싶으면 언제든 마부에게 말씀하시오.”
“배려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상회주님.”
볼트 일가가 옹기종기 모여 하나의 마차에 탑승하기 시작했다.
크고 화려한 마차에 들떠서 방방 뛰는 라피와 그것을 진정시키는 디아나.
휴버트는 그 광경을 보며 천천히 턱을 쓰다듬었다.
‘생각해 보면 디아나의 능력은 휴버트의 「감정」과 비슷할 정도로 이쪽 업계에서 효율적인 능력이란 말이지.’
골목 가게나 다름없는 식료품점에서 일할 때도 신선한 물건을 들여놓는 데에 큰 도움을 줬다던 그녀였다.
훨씬 커다란 휴버트 상회에서 그 능력을 활용할 방안은 그야말로 무궁무진하리라.
‘원래라면 경력 문제로 있는 능력도 제대로 써먹기 힘들 테지만···.’
하지만 그가 누군가?
이젠 타라크를 넘어, 툴크 왕국 북쪽 지역에서 최대의 상단으로 거듭나고 있는 휴버트 상회의 주인이 아닌가!
그의 전폭적인 지지가 있다면 감히 아무도 그녀를 건드릴 수 없을 터였다.
그와 인연이 있어 신뢰도도 높고 유능하기까지 한 인재.
그녀가 품고 있는 비밀은 어차피 당장 알아낼 방법도 없으니 지금 신경 쓸 일이 아니었다.
‘킁킁— 냄새가 나는군.’
그것도 아주 진한 돈 냄새가.
휴버트는 반짝이는 눈으로 디아나를 바라보며 훈훈하게 미소 지었다.
***
하나의 국가를 경영한다는 것은 간단한 문제가 아니었다.
권력에는 응당 무거운 책임이 따르는 법이었고, 그에 따라 역사 속의 왕들이 단명하는 건 그리 드문 일도 아니었다.
사법, 행정, 경제, 치안, 군대, 외교 등.
간단한 일을 결정할 때조차 생각해야 할 조건은 끝이 없었고, 무언가를 선택할 때마다 파생되는 결과 또한 예상할 수 없이 무궁무진했다.
잘못된 선택이라도 하는 날에는 단순히 개인의 문제로 끝나지 않고 나라 자체가 휘청거리는 일이 비일비재했으니, 그야말로 스트레스의 온상지이자 수명 단축의 지름길이라 할 수 있었다.
‘그것도 하나부터 열까지 직접 챙겼을 때나 해당되는 말이지만.’
집무실 의자에 앉은 탈리아 왕국의 실질적인 지배자, 하인즈 2세가 느긋하게 와인잔을 기울이며 보고서를 가볍게 훑었다.
“흐음, 확실히 전보다 낫군.”
그는 서류를 하나씩 읽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원래 일이란 전문가에게 맡기는 게 가장 확실한 법이었다.
국가 경영이라곤 게임으로밖에 해 본 적이 없는 그가 괜히 국정에 깊게 개입했다간 멀쩡한 나라도 순식간에 말아먹어 버리지 않겠는가.
그래서 그는 전체적인 방향성을 제시할 뿐, 절대로 세세한 부분까지 참견하지 않았다.
“···쯧, 이건 좀 그런데.”
물론 그러는 와중에도 여러 가지 이유로 생각했던 방향과 엇나가는 기획서는 나오기 마련이었다.
하지만 앞서 말했듯, 그에게 전문가들이 놓친 문제를 해결할 능력이 있을 리 만무했으니···.
여기서 그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당연히 한 가지밖에 없었다.
-이러이러한 부분이 마음에 안 드니, 그 부분까지 생각해서 다시 해 와.
바로 될 때까지 아랫사람을 굴리는 것.
이 또한 국정 개입이라면 개입이었으나, 그는 절대 되지도 않는 정책을 억지로 밀어붙이는 게 아니었다.
다만 똑똑한 친구들이 더 좋은 방안을 생각해 올 수 있도록 독려해 줄 뿐.
세상만사엔 항상 여러 갈래의 길이 있는 법이었고, 사람에겐 극한의 상황에 처하면 어떻게든 돌파구를 찾아내는 잠재력이 있었다.
‘하면 할 수 있는 양반들이니까. 지금까지 편하게 놀고먹었을 테니 이럴 때라도 열심히 일해야지 않겠어?’
당연하지만 신분제 사회인 이곳에서 국정 운영의 전문가라 할 수 있는 이들은 극히 한정되어 있을 수밖에 없었다.
다름 아닌 국가의 최고위층이자 지식인이라 할 수 있는, 왕족과 귀족을 비롯한 고위 관료들이었다.
브로코슬락 클랜의 지배하에 있으면서 그저 관성처럼 같은 정책만 반복해 오던 무기력한 그들이, 드디어 그 재능을 꽃피울 수 있는 자리가 마련된 것이다!
···그들이 정말 그것을 바랐을지는 모르겠지만.
‘그거야 내 알 바 아니지.’
그는 그저 그들이 활약할 수 있는 판을 깔아주었을 뿐이니까.
그렇게 탈리아 왕국 고위층들의 피와 땀과 눈물에 젖은 기획서가 하나둘씩 수리되기 시작하고.
기어코 그 글자 한 자 한 자에까지 그들의 원망과 한탄, 울분이 묻어나올 때가 되어서야—.
마침내 이온 대륙의 극서부 탈리아 왕국에서.
뱀파이어 클랜 연합, ‘하이브리드’가 역사의 전면에 그 모습을 드러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