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overeign of the Infinite Clones RAW novel - Chapter (184)
#184
이세계의 지구인들 (1)
‘···어떻게 여기에?’
전혀 예상치 못했던 만남에 라일리 황녀는 멍하니 하인리히를 올려다보았다.
오늘 하루만 해도 많은 일이 있었다.
사이먼 황태자와의 마찰부터 시작해서 밴시 퀸 올리비아의 개입과 방해,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어코 성공했던 극적인 탈출과 이후 바깥에서 직면한 목숨의 위기까지.
그런데 그 절체절명의 상황에 갑자기 나타나 구해준 것이 무려 용사이지 않은가?
그녀가 이런 반응을 보이는 것도 그리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아!”
하지만 그녀의 혼란도 그리 오래가지는 않았는데···.
그런 것을 따지기보다 지금 당장 해야 할 일이 뇌리를 스쳤기 때문이었다.
“아, 구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성자님! 그런데, 일단 이 사람부터 먼저 좀···! 부탁드립니다!”
상상도 못 한 조우에 순간적으로 당황하긴 했으나, 지금 상황에서 성자를 만났다는 것은 정말 둘도 없는 행운이었다.
당장 생명의 은인인 것은 둘째 치고, 아무리 치유보단 전투 쪽에 치중된 용사라지만 그 또한 정상급의 성직자란 건 틀림없는 사실이었으니.
헤스페론의 상세가 위중한 지금에서는 그야말로 최적의 인선이라 할 수 있었다.
“당연히 그래야지요. 제게 맡겨주십시오.”
물론 그녀의 말이 없었더라도, 정의로운 성자는 처음부터 눈앞의 부상자를 외면할 생각이 없었다.
“흐음— 제법 위중한 상태긴 하지만, 생명에는 큰 지장이 없을 테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될 것 같습니다. 상당히 튼튼하신 분이로군요.”
“그런가요···? 다행이네요, 정말···.”
성법을 사용해 치료를 시작한 하인리히가 나직한 감탄을 토하자, 곁에서 조마조마한 심정으로 그것을 지켜보던 라일리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마침내 모든 위기가 지나갔음을 실감한 그녀가 그제야 긴장이 풀린 듯 몸을 축 늘어뜨렸다.
정말이지, 여러 가지로 피곤하기 그지없는 하루였다.
“다시 한번 도움에 감사드립니다, 성자님. 아, 그러고 보니 저희가 여기 있는 걸 어떻게 아시고···.”
그리고 그렇게 여유가 생기자, 문득 아직 모든 의문이 풀리지 않았다는 데까지 생각이 미친 그녀가 조심스럽게 질문을 던졌다.
그저 우연이라고 치부하기엔 지금의 만남이 너무 극적이지 않나?
하지만 그에 하인리히가 뭐라고 답을 하기도 전에···.
우우웅—
또 한 번의 변화가 일어났다.
진동음과 함께 근처의 허공에서 한순간에 밀집하는 어마어마한 마력.
하급 마법사인 라일리로선 감히 가늠할 수도 없는 엄청난 에너지가 한순간에 특정 구조를 이루더니, 곧 공간이 일그러지며 그곳에서 일단의 사람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살벌하면서도 압도적인 개성으로 단번에 주위 시선을 사로잡는 거대한 체구의 야만 전사.
음울함이 물씬 느껴지는 분위기로 기다란 창을 어깨에 걸친 창기사.
···그리고 그 낯선 사람들 사이에 끼어있는 한 자그마한 소녀까지.
“성자님! 공간 이동 마법은 그리 간단한 게 아니라구요. 그렇게 갑자기 먼저 가버리시면···!”
그동안 줄곧 보고 싶었던, 반가운 얼굴이 그곳에 있었다.
“···세아?”
“어?”
집중하기 위해 감고 있던 눈을 뜨자마자 하인리히에게 툴툴거리던 이세아가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에 멈칫하곤,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두 사람의 시선이 마주하며 짧은 침묵이 흘렀다.
한바탕 난리를 겪으며 꼬질꼬질해진 상태긴 했으나, 그녀가 상대의 모습을 알아보지 못할 리가 없었다.
“···라일리?”
오직 불사왕에게 납치당한 황녀를 구하겠다는 일념만으로, 가진 모든 카르마 포인트를 쏟아붓고 용사 파티에까지 자진해서 참여하지 않았나!
몇 년이 걸리더라도 반드시 구출하고 말겠노라고 매일 같이 다짐하고 있던 참이었는데···.
그 대상이 지금 이 자리에 있네?
···왜 여기 있지?
평소처럼 성자의 인도에 따라 로한 공국의 수도에 방문했다가 그곳 사람들을 돕던 중, 갑자기 사라진 하인리히를 따라왔을 뿐인 그녀로선 이 갑작스러운 만남에 벙찔 수밖에 없었다.
‘그러고 보니 오늘은 성자님이 평소와 좀 다르긴 했는데.’
곧 그녀에게 기쁜 일이 생길 거라느니, 앞으로 좋은 인연을 마주하게 될 것 같다는 둥 뭔가 의미심장한 말들을 꺼내긴 했다.
그것들이 복선이었던 걸까.
하지만 그녀가 멍하니 굳어있던 시간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세아 언니—!”
와락—
후다닥 달려와 품에 안기는··· 아니, 그녀를 품 안에 끌어안는 라일리의 모습에 지금 상황이 전부 현실이라는 것을 확실히 체감할 수 있었으니.
그 ‘언니’라는 호칭은 좀 비현실적이긴 했지만 말이다.
그보다 지금은···.
“냄새나, 라일리. 떨어져.”
“엑! 너무해! 두 달 만에 만나서 한다는 말이 그거야?”
뭐, 사정이야 어찌 되든 좋은 일이겠지.
피식 웃은 이세아가 결국 그녀를 마주 끌어안으며 토닥여 주었다.
복잡한 건 나중에 생각하기로 하고 일단은 당장의 기쁨을 온전히 즐기기로 했다.
조금 뜬금없긴 했으나, 어쨌든 지금이야말로 그녀가 바라던 목표가 이뤄진 순간이지 않은가.
‘···아, 맞다. 내 포인트.’
물론 정말 조금··· 아주 살짝, 카르마가 아까운 건 어쩔 수 없는 문제였다.
***
감격의 재회 시간을 가진 것도 잠시.
이세아는 곧 그들 모두를 데리고 공간이동을 통해 다시 로한 공국의 수도, 로한으로 이동했다.
하인리히가 급하게 이동하는 바람에 큰일이 터진 줄 알고 부랴부랴 뒤따라오긴 했는데, 이미 상황이 모두 끝났으니 더는 여기서 시간을 보낼 이유가 없었던 것이다.
“으하하! 뜻밖에 횡재했군! 이놈들은 워낙 조심성이 많아서 강자는 피하고 약자만 노린단 말이지. 그것 때문에 소재도 귀하고 말이야!”
그 와중에 야만 전사 할리가 순식간에 그리핀을 해체해 부산물을 챙기기도 했으나, 어차피 그 정도는 늘 있는 일이었던지라 딱히 대수롭지도 않았다.
물론 그 자리에서 심장을 뽑아 마석을 씹어 삼키고, 발라낸 마물의 고기까지 야무지게 구워 먹는 모습은 아직도 적응되지 않긴 했지만.
‘오러를 사용한 것도, 마법을 사용한 것도 아닌데 마나를 움직여 열을 발생시키다니. 그 녹색 눈, 언제 한 번 조사해 보고 싶은데···. 좀 더 친해지면 넌지시 말해 볼까? ···역시 과거사와 연관이 있을 테니 아무래도 실례겠지?’
사실 눈을 제외하더라도 할리라는 존재는 천생 마법사인 이세아에게 흥미로움 그 자체였다.
‘용인’은 황녀의 도움으로 수많은 마법 지식을 접하고, 나중엔 마탑들과의 학술 교류까지 종종 참여했던 그녀에게도 생소한 생명체였으니.
심지어 거기에 정체를 알 수 없는 모종의 시술까지 더해진 상태라면 더 말해 무엇하랴.
아마 그가 지금처럼 강하지 않았더라면 연구에 미친 마법사들이 그를 결코 가만히 내버려 두지 않았을 터였다.
하지만 무사히 로한에 도착한 이후.
제국 주둔군을 통해 황실에 라일리 황녀의 무사 귀환을 알리고, 그녀와 함께 숙소로 돌아온 이세아는 할리보다 더한 관심을 끄는 존재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러니까, 그 사람이 지구에서 온 이세계인이라고?”
좀 더 집중적인 치료를 하겠다며 하인리히가 데려간 부상자가 바로 그 당사자.
처음 마주했을 때는 라일리에게 정신이 팔려 딱히 신경 쓰지 못했는데, 그가 자신과 동향 사람이었다고 하니 당연한 일이었다.
“응, 이름은 헤론···이 아니라 헤스페론. 이상한 이름이지? 새로운 시작을 기념해서 스스로 지은 거래. 푸흡!”
“흐음—?”
“본명은 하스···운? 이라고 했던 거 같은데, 잘 모르겠네. 뭔가 어려운 발음이었어.”
이세아는 연신 조잘거리는 라일리를 가늘게 뜬 눈으로 지그시 바라보았다.
8년을 함께해 왔지만 그녀가 누군가에 대해 이렇게 즐겁게 이야기하는 것은 처음이었다.
애초에 이세아 자신을 제외한 모두에게 은근히 벽을 세우는 이 아이가 다른 사람을 이리 편하게 대하다니.
뭔가 자식의 성장을 보는 듯 대견하면서도 시원섭섭한 기분이랄까.
“뭐··· 그래서 세아 언니 생각도 나고, 마침 거기선 할 것도 없었으니까···.”
그 와중에도 그녀의 말은 계속해서 이어지고 있었다.
불사왕의 성에 갇히고 그를 만나게 된 후로 있었던 일들을.
당연히 그 대부분의 시간을 마법 수련으로 보냈던 만큼, 자연스럽게 이야기는 그것을 위주로 흘러갈 수밖에 없었다.
처음엔 뭔가의 인연을 느껴 마법을 가르치기 시작했는데, 마치 과거의 이세아를 떠올리게 하는 그 재능에 깜짝 놀라버렸다던가.
“···그 성장 속도가 너무 빠르다 보니 결국 내가 더는 가르칠 게 없어진 거 있지? 자존심 때문에 중간에 멈추지도 못하고, 결국 나중엔 아는 것들을 필사적으로 쥐어짜 내야 했다니까?”
헤스페론의 능력에 대해 열변을 토하는 라일리.
그리고 이세아는 그녀가 왜 그 이야기를 이렇게 열심히 했는지 금방 알 수 있었다.
“···그래서 말인데? 세아 언니가 그 사람을 좀 봐주면 안 될까~? 제국··· 아니, 대륙 최고의 천재 마법사 이세아 프리스틴 님에게 그 정도는 아무것도 아닐 테니까! 응?”
“흐흠?”
이세아는 아부와 함께 배시시 미소 짓는 금발의 미녀를 바라보며 슬쩍 고개를 기울였다.
어쩐지 말이 길어진다 싶더니 처음부터 이걸 부탁하려 했던 모양이었다.
‘···그래, 나도 벌써 이 세계로 온 지 8년이 넘었지. 내가 언제까지나 이 아이의 옆에 있어 줄 수는 없으니, 대신 곁을 지켜줄 다른 사람이 필요하긴 했는데···.’
말을 들어보니 자신 못지않은, 어쩌면 그 이상의 재능을 지닌 사람이라는 것 같았다.
거기에 그녀의 가르침까지 더해진다면 어쩌면 정말 몇 년 안에 라일리를 충분히 지켜줄 수 있을 만큼 성장 할지도.
하지만 여기서 문제는, 결국 그 또한 지구인인 건 마찬가지라는 사실이었다.
‘나중엔 그도 라일리의 곁을 떠날 날이 오겠지. 조금 시간을 벌 수는 있겠지만.’
물론 그때쯤이면 지금과는 상황이 많이 달라져 있을 것이다.
사실 라일리가 혼자 돌아온 시점에서 이미 황위 경쟁은 거의 끝났다 봐도 좋을 정도였으니.
흔들리던 파벌은 단단히 결집해서 오히려 주변 세력들을 빠르게 흡수할 테고, 간신히 그들을 붙잡아두는 데에 그쳤던 이세아의 활약도 그 현상에 힘을 더할 터였다.
아마 몇 년까지 갈 필요도 없이 일 년 내로 황태자는 오갈 곳 없는 신세가 되지 않을까?
‘그런데 하필이면 나 이후로 정을 붙인 존재가 또 이계인이란 거지. 이곳 출신의 사람들에게 두는 거리감은 여전한데 말이야.’
그동안 파벌을 꾸리고 아랫사람들을 거느리면서 많이 나아졌다고 생각했는데, 아무래도 아직 그 의식의 기저에 깔린 거부감은 여전한 듯싶었다.
그래도 아직은 시간이 제법 남아있기도 하니, 그 문제는 앞으로 차차 방법을 찾아 봐야겠지.
“뭐, 좋아. 그가 큰 공을 세운 것도 사실이니까. 그렇다 해도 지금 하는 일 때문에 그리 많은 시간을 할애하진 못하겠지만.”
그러나 이런저런 복잡한 생각과는 별개로, 이세아는 라일리의 부탁에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라일리를 구해준 은인에게 가르침을 주는 것쯤이야 큰 보답도 아니었다.
당연히 따로 이것저것 챙겨줄 생각이기도 했고.
또 약간의 사심을 더하자면···.
라일리가 자기 다음으로 의지하게 된 그 이방인을 좀 더 가까이서 살펴보고 싶은 마음도 단단히 한몫했다.
아무래도 동성보다는 이성과의 관계에서 문제가 생길 확률이 더 높지 않은가!
그 남자가 라일리처럼 예쁜 아이에게 흑심을 품지 않으리란 보장이 없었다.
‘아직 라일리는 어리니까. 그가 괜히 허튼 생각 하지 않게 스승으로서 소소하게 경고도 좀 해주고 말이지.’
150센티를 조금 넘는 작은 소녀가 170을 훌쩍 넘는 장신의 미녀를 바라보며 근엄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좋았어! 역시 세아 언니야!”
“그러고 보니 무슨 심경의 변화가 있었기에 아까부터 자꾸 언니라 부르는 거야? 전에 그렇게 말했을 때는 싫다더니.”
“헤헤헤, 그냥 좀? 생각해 보니 별로 어려운 일도 아닌 데 내가 너무 유난을 부렸던 것 같더라고.”
배시시 미소 지은 라일리는 다시 이세아를 끌어안으며 그녀에게 어리광을 부렸다.
속으로는 일이 잘 풀렸다는 만족감에 쾌재를 부르면서.
‘됐다! 이걸로 어느 정도는 은혜를 갚을 수 있겠어. 아직 많이 부족하긴 하지만, 그건 앞으로 차차 갚아 나가면 되겠지! 또 언니도 헤론도 동향 사람과 함께라면 앞으로 향수병을 이겨내는 데도 도움이 될 거야.’
헤스페론에 대한 이야기를 이세아에게 했던 것 또한 이미 사전에 그와 합의가 된 사안이었다.
불사성에 함께 있으며 그들은 많은 대화를 나누었고, 그 중엔 라일리가 자신이 아는 지구인을 소개해주겠다는 내용도 있었던 것.
물론 처음부터 이세아와 접촉할 생각이었던 헤스페론은 흔쾌히 그것을 받아들이며 자신에 대한 정보 공개를 허용했다.
어차피 그의 신상이라 해 봐야 날조된 것들밖에 없기도 했고.
그렇게 다사다난했던 하루가 훈훈한 상봉으로 마무리되었다.
그리고 다음 날이 밝았을 때.
“이거 참, 구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아! 제 이름은 헤스페론입니다. 진짜로 죽는 줄 알았는데, 덕분에 살았습니다.”
“별말씀을. 그 또한 전부 주신의 뜻이겠지요. 저는 하인리히라고 합니다.”
“크하하핫! 거 형씨 겉은 비리비리해 보이는데 상당히 튼실하구만! 아, 난 할리라고 부르면 된다고!”
마침내 부상으로 정신을 잃었던 헤스페론이 깨어나, 일행은 그와 정식으로 통성명을 나눌 수 있었다.
마치 세 명과 같은 ‘한 사람’이 포함된 상태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