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overeign of the Infinite Clones RAW novel - Chapter (190)
#190
정착자 (1)
“황녀님 덕분에 좋은 곳에서 푹 쉬다 가는군요. 그동안 신세 많이 졌습니다.”
“신세라니요. 제 생명의 은인이신데. 오히려 더 신경 써 드리지 못한 것 같아서 죄송할 따름이지요.”
황궁의 정문 앞.
떠나가는 용사 파티를 배웅하기 위해 이곳까지 나온 라일리가 하인리히와 작별 인사를 나누었다.
이번에도 성자의 요청으로 거창한 송별회는 없었으나, 직접적으로 그에게 은혜를 입었던 황녀가 황실의 대표로서 그들을 전송하고 나선 것이다.
그녀는 하인리히를 시작으로 다른 이들과도 하나하나 대화를 나누며 무운을 빌어주었다.
그리고 전날 이미 실컷 회포를 나누었던 이세아의 손을 잡고 또다시 한동안 아쉬워하던 라일리는···.
“하아— 헤론, 역시 당신이 제일 걱정이네요.”
마지막으로 헤스페론의 앞에 서서 깊은 한숨부터 내쉬었다.
“아하핫! 그게 무슨 말이십니까, 황녀님? 저처럼 믿음직스러운 사람이 또 어디 있다고! 어젠 스승님도 제 재능에 깜짝 놀라 감탄을 금치 못하셨다니까요? 큰 문제 없을 테니 너무 걱정하지 마십쇼!”
옆에서 그 정돈 아니었다는 이세아의 작은 투덜거림이 들려왔지만, 그는 그것을 가볍게 넘기며 헤픈 웃음과 함께 당당히 가슴을 두들겼다.
뒤쪽에서 황녀를 수행하는 인원들이 지켜보고 있었기에 평소와 달리 제법 예의를 갖추긴 했으나, 그 말투는 여전히 친구를 대하듯 가볍기 그지없었다.
그에 몇몇 수행원들이 가볍게 미간을 찌푸렸지만···.
“···그래요, 뭐. 당신도 보통 사람은 아니니 알아서 잘하겠죠. 어차피 그리 오래 있는 것도 아니고.”
라일리는 그의 말투엔 신경도 쓰지 않고 그저 천천히 고개만 끄덕일 뿐이었다.
“다만—.”
그러나, 그녀의 말은 거기서 끝난 게 아니었으니.
“그런 과한 자신감은 좀 고칠 필요가 있어 보이는군요. 뭔가 착각하고 있는 것 같은데, 당신은 이제 고작 하급 마법사일 뿐이랍니다? 저분들과는 차원이 다른 약자란 소리죠. 그런데 그런 이들마저 최선을 다해야 하는 전장에 따라가면서 그 근거 없는 자신감은···.”
걱정을 덜어 주려고 부린 허세가 오히려 어마어마한 잔소리가 되어 돌아온 상황.
헤스페론은 언제 자신만만했냐는 듯 곧바로 쭈그러들어 그녀의 말을 경청할 수밖에 없었다.
“굳이 나서서 뭘 하려고 할 필요 없어요. 당신은 그저 덤으로 딸린 짐 덩어리일 뿐이니까. 있어봤자 별 쓸모도 없고 나서더라도 방해만 되니, 그저 있는 듯 없는 듯 몸을 사리면서 배울 거만 배우고··· 헤론? 제 말 듣고 있나요?”
“아, 예! 물론입죠. 옙.”
멍하니 그녀의 말을 듣던 그가 미묘한 표정으로 황급히 대답했다.
‘아니, 아무리 그래도 그건 조금 말이 심하지 않나···.’
하지만 괜히 반박했다간 잔소리 시간만 길어질 테니 굳이 뭐라 항변하지는 않았다.
쉬지 않고 말을 늘어놓는 그녀의 눈동자에 어린 걱정을 보니, 왜 그런 말을 하는지도 알 것 같았으니까.
···이후.
라일리는 다른 이들과 나눈 대화 시간을 전부 합한 것보다 몇 배는 길게 잔소리를 퍼붓고 나서야 후련하다는 듯 뒤로 물러났다.
혼이 빠진 것처럼 멍한 표정의 헤스페론만 남겨두고서.
“···그럼, 저희는 이만 가 보겠습니다. 조만간 다시 뵙도록 하지요.”
“네, 성자님. 부디 무탈하시기를.”
그렇게 예상 이상으로 길어졌던 작별 인사가 마침내 끝이 나고.
준비된 마차를 탄 일행은 게이트를 이용하기 위해 수도 외곽에 위치한 제론 대신전으로 향했다.
어쩔 수 없는 경우라면 모를까, 잘 깔린 교단의 인프라를 사용할 수 있는 상황에서조차 굳이 이세아를 고생시킬 필요는 없지 않겠는가?
‘인원이 한 명 늘면서 공간 이동하는 데 신경 쓸 게 좀 더 많아지기도 했을 테고.’
라일리 황녀가 걱정했던 대로 헤스페론은 당분간 용사 파티와 함께 움직이기로 했다.
정확한 기간을 따지자면··· 약 열흘 정도가 되겠지.
‘딱 2차 정상 회의가 열리기 직전까지만 이쪽에 함께 있기로 했으니.’
첫 번째 이유는 대마법사인 이세아에게서 효율적으로 가르침을 받아 마도의 길을 제대로 다지기 위함이었다.
물론 지금도 그의 기본기 자체는 흠잡을 구석이 없었다.
「마법학개론」이라는 스킬이 있기도 했으며, 아무리 계통이 달라도 그 불사왕의 영향력이 있는데 고작 기초 수준에서 허덕일 리가 없지 않나.
거기다 라일리가 황태녀의 자리에 오르는 것도 이제 시간문제였으니, 그녀가 원한다면 과거 이세아가 받았던 수준 이상의 교육을 황궁 내에서 제공할 수도 있을 터였다.
‘하지만 그 모든 걸 감안하더라도 이세아에게 직접 배우는 것보단 못할 거야. 이쪽이 훨씬 더 효율적으로 성장할 수 있겠지.’
그도 그럴 것이, 어찌 보면 지금의 헤스페론과 그녀는 동류라고도 볼 수 있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소위 ‘천재’라 불리는 부류 말이다.
‘물론 그냥 타고난 천재인 이세아랑은 좀 결이 다르긴 한데···. 그래도 결과만 비슷하면 그게 그거 아니겠어?’
중첩 적용된 온갖 성장 보정, 막대한 카르마를 쏟아부어 만들어낸 우월한 스테이터스, 「마도의 길」과 「사악한 지혜」 등의 스킬을 가진 한스의 간접적인 조력.
이것이야말로 만들어진 천재 마법사, 헤스페론의 진면목이었다.
‘그런 이 몸에게 일반적인 커리큘럼은 시간 낭비일 뿐이지.’
선배인 이세아가 앞서 마법을 배우면서 느꼈던, ‘굳이 없어도 되는’ 부분을 날리고 핵심만을 압축해 전수해준다면 학습에 필요한 시간을 극적으로 절약할 수 있었다.
거기다 대마법사의 경지에 오른 그녀의 노하우까지 더해질 테니···.
‘좋군. 물론 모든 지식을 고작 열흘 만에 전부 습득할 수는 없겠지만, 어차피 황궁으로 돌아가더라도 그녀는 꾸준히 만나게 될 테니까. 벌써 조급해할 필요는 없겠지.’
덜컹—!
마침내 수도를 가로질러 이동한 마차가 제론 대신전에 당도했다.
황궁의 화려한 마차에서 내리자마자 곧바로 게이트 룸으로 안내되는 일행들.
또한 헤스페론이 용사 파티를 따라나선 두 번째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었는데—.
“그럼 대사제님, 레스크 왕국 글라탄 영지로 부탁드립니다.”
“알겠습니다, 성자님. 자, 일행분들도 이쪽으로 오시지요. 게이트를 가동하겠습니다.”
매우 우연찮게도, 성자 하인리히가 이끄는 일행의 다음 목표 장소가 바로 레스크 왕국이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곳은.
용사 파티의 일원인 창기사 지오스 칼킨의 고향이자···.
그가 말한 자칭 ‘이세계인’이 은거하고 있는 땅이었다.
***
제국의 수도 제론에서 있었던 전투 끝에, 성자 ‘하인리히 세인트 랜드가드’와 불사왕 ‘한니발 스트라우스’ 사이에 성립된 내기.
그 기본 골자는 무작위로 선정된 장소를 습격하는 불사왕의 병력과 아무런 사전 정보 없이 그것을 막아내야 하는 용사의 싸움이었다.
그야말로 창과 방패의 싸움이라 할 수 있을 터.
룰 자체는 불사왕쪽이 압도적으로 유리했으나, 이 내기를 통해 일반 백성들의 피해를 극적으로 줄일 수 있다는 점에서 용사 측에도 그리 나쁜 조건은 아니었다.
아직도 광기에 젖은 몬스터들에게 몸살을 앓고 있는 이들은 별로 동의하지 않겠지만.
‘물론 그 습격을 사전에 알아챌 수 있는 이의 존재가 선결되어야 가능한 일이기도 하지.’
그게 아니라면 그저 일방적으로 당하고 말 뿐이었으니까.
그리고 여기서 말하는 ‘습격’은 단순히 대규모 공습만을 뜻하는 것이 아니었다.
“···찾았어요.”
레스크 왕국 글라탄 자작령의 중심 도시, 글라탄 시.
많은 사람이 오가는 대로와 조금 떨어진 골목에서 지그시 눈을 감고 있던 이세아가 짧은 한마디와 함께 안광을 번뜩였다.
“어디죠?”
“링크할게요.”
그녀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일행의 정신이 연결되며 특정 좌표들이 머릿속에 떠오르기 시작했다.
“···세 곳입니까?”
“일단 제가 찾은 곳은 그래요. 하나는 저쪽 광장에 있는 시계탑인 것 같은데, 나머지 둘은 직접 가 봐야 알겠네요.”
이번 습격의 유형은 도시 내로 밀반입한 마도구로 대규모 의식을 시행해 벌이는 무차별 테러였다.
지금까지도 몇 번 있었던 방식으로, 그 종류 또한 습격자들의 성향에 따라 가지각색이었다.
물리적으로 주변을 날려버리는 폭발형부터 인간에게 치명적인 기운을 퍼뜨리는 오염형, 아예 일대의 생명체들을 공물로 바쳐 버리는 제물형까지.
그 외에도 온갖 기상천외한 형태가 있는 게 이번 유형이었다.
“다만, 아직 의식이 시작된 게 아니라 그 종류는 정확히 밝혀내지 못했어요. 지금은 그저 마력의 흐름이 수상한 장소만을 골라낸 게 전부라.”
“좋군요. 앞으로도 그냥 계속 몰랐으면 좋겠네요.”
“크흥! 그럼 곧바로 움직이도록 할까? 아예 의식이 시작되기 전에 박살 내 버리자고! 세 곳이라고 하니 우리 셋이 흩어지면 되겠군! 아가씨는 여기서 만약을 대비하고 말이야!”
“······.”
할리의 말에 조용히 옆에 서 있던 지오스가 창을 단단히 틀어쥐었다.
불사왕의 부하··· ‘적’들과의 전투를 앞두자, 그는 여느 때와 같이 두 눈을 살기로 일렁거리며 금방이라도 튀어 나갈 듯 연신 몸을 들썩거렸다.
“잠깐만 기다려 주시죠. 일단 확실하게 확인부터 하죠.”
하지만 하인리히는 그런 그들을 제지하며 고개를 내저었다.
당장 일이 벌어진 상황이라면 모를까, 남의 영지에 오면서 아무 연락도 없이 함부로 난장을 피울 수는 없는 노릇.
그는 시선을 옆으로 돌려 연신 손수건으로 식은땀을 닦고 있는 사내를 돌아보았다.
미리 보낸 연락을 통해 영지 측에서 보내온 기사, 이 도시의 치안 책임자였다.
“···확실히, 저희 영지의 시설이 있는 장소는 아닙니다. 전부 그냥 평범한 장소여야 했을 텐데···.”
이세아를 통해 좌표를 공유받은 기사가 품에서 지도를 꺼내 살피더니 한숨과 함께 질끈 눈을 감았다.
용사 파티가 방문하며 사전에 이상을 파악하게 되었다고는 하나, 지금 상황 자체도 딱히 그에게 좋은 소식은 아니었다.
설령 이번 일이 잘 마무리되더라도 도시의 방비가 뚫렸다는 사실은 명백했으니, 그도 이후의 책임을 피할 순 없었던 것이다.
‘후우— 그래도 지금이라도 발견해서 다행인가. 만약 진짜 대참사가 벌어졌더라면?’
그 피해 정도에 따라 다르겠지만, 아마 그에 대한 처벌도 단순히 징계 수준으로 끝나진 않았겠지.
확실히 이번은 그나마 운이 좋았다고 봐야 했다.
“아! 저희 치안 병력을 지원하겠습니다. 확실하게 처리하려면 병력은 많으면 많을수록 좋을 테지요.”
“아뇨, 많은 병력이 움직이게 되면 놈들이 뭔가 잘못됐다는 것을 눈치챌 겁니다. 그렇게 되면 최후의 발악으로 무슨 짓을 벌일지 알 수 없지요.”
“그, 그럼···?”
하인리히는 불안한 듯 자신을 바라보는 기사를 향해 부드럽게 미소 지어주며 진중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흐음, 그래도 혹시 모르니 대비는 해 두는 게 좋겠지요. 일단 목표 지점 주변에는 소수 정예만 포진시키고, 나머지 병력은 사태 발생 시 근방 주민들의 대피 유도를 부탁드려도 되겠습니까?”
“아! 그 정도는 문제없습니다. 그, 그런데 사태 발생이라 하시면···?”
기사는 왠지 모를 불안감에 말끝을 흐리며 눈앞의 성자를 조심스레 바라보았다.
그의 입가에 걸린 미소는 아까와도 별다를 바 없이 자애로웠으나, 어쩐지 전과는 달리 오싹함이 느껴지고 있었다.
“당연히—.”
그렇게 입을 연 하인리히가 말을 채 끝맺기도 전.
“카하하핫! 쳐들어간 우리가 놈들을 몽땅 박살 내는 거지!”
그 뒷말을 이은 것은, 살벌한 웃음을 터트리며 등에 걸어둔 전투 도끼의 손잡이를 움켜쥔 할리였다.
“···흐으.”
거기다 긴 창을 들고 으스스한 웃음을 흘리는 지오스 칼킨까지.
꿀꺽—
그에 기사는 저도 모르게 꿀꺽 침을 삼키며 슬쩍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과연 결사대의 일원들답게 이상한··· 아니, 비범하다고 생각하면서.
“뭐죠? 왜 그런 눈으로 절 보시는지?”
“아, 아무것도 아닙니다.”
저도 모르게 옆으로 돌아간 그의 시선에 이세아가 인상을 찌푸리자, 기사는 냉큼 다시 고개를 돌리며 식은땀을 훔쳤다.
저들과 함께하는 이 꼬마 아가씨도 평범해 보이지 않기는 마찬가지였으니까.
***
이미 놈들이 숨어있던 위치를 파악한 이상, 그들을 정리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스카칵—!
하인리히의 광검은 언제나 시원하게 적을 베었고.
“크하핫! 덤벼라 이놈들!”
할리는 평소처럼 호쾌하게 적들을 찢어발겼으며.
“뒤져라!”
흑마법사를 마주해 눈이 돌아간 지오스는 분노를 터트리며 그들의 몸에 구멍을 뚫어 주었다.
혹시 모를 이상 상황을 파악하는 것은 후방 지원을 맡은 이세아의 몫.
놈들도 이대로 허무하게 당할 수는 없다는 듯 마법진 폭주부터 자폭 공격까지 쓸 수 있는 수단은 전부 다 사용했지만···.
이미 수 개월간 반복된 전투를 거치며 그 수법에 익숙해진 일행들에게는 의미 없는 발악일 뿐이었다.
“뭔가 이번엔 지금까지에 비해 쉬운 편이었네요. 급하게 준비하기 시작했는지 조금 미흡한 느낌이라고 해야 하나.”
마침내 큰 피해 없이 사건이 마무리되고 파티가 다시 한자리에 모이자, 이세아가 뭔가 미심쩍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으하핫! 뭐, 큰 피해 없이 막아냈으니 좋은 거지! 이번엔 놈들이 미처 준비를 마치기도 전에 우리가 들이닥친 거 아니겠나?”
“흐음, 그럴 수도 있겠네요. 하긴, 이럴 때도 있는 거겠죠.”
“하핫, 모두 수고하셨습니다! 전 옆에서 구경만 했는데도 굉장히 떨리던데, 역시 여러분은 대단하시군요!”
그렇게 다른 일행들이 한창 시끄럽게 떠들던 와중.
“성자님.”
전투가 끝남과 동시에 다시 음울한 표정으로 돌아온 채, 무언가를 골똘히 고민하던 지오스가 조용히 하인리히에게 다가왔다.
그리고 그가 이어서 한 말은.
하인리히가 내심 바라 마지않았던 한 마디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