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overeign of the Infinite Clones RAW novel - Chapter (201)
#201
2차 대륙 정상 회의 (2)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지. 자네, 원래는 용병이라지? 내 비밀리에 의뢰를 하나 하고 싶네만.”
자신의 거처로 할리를 데려온 대주술사 모르나가 그에게 마실 것을 내어주며 꺼낸 첫마디였다.
“뭐, 나야 조건만 맞는다면 얼마든 환영이지! 그런데 아까부터 신경 쓰이는 게 하나 있는데, 일단 그거 먼저 물어도 되겠소?”
“끄끄끌— 물론, 얼마든지.”
그의 시선이 구석 자리에 앉아 멍하니 이쪽을 바라보는 젊은 여성에게로 향했다.
절대 무시할 수 없는 육중한 근육 덩어리가 한껏 존재감을 발산하고 있건만, 그녀는 마치 그가 보이지 않는다는 것처럼 시선이 미묘하게 엇나가 있었다.
“···저 아가씨는 저기서 뭘 하는 거요? 주술사라 귀신이라도 보는 건가?”
“아아— 저 아이는 내 보좌관인데, 그냥 혼자 어제의 풍경을 보고 있는 것뿐이라네. 신경 쓰지 마시게나. 끄끅끅끅!”
“거참, 알 수 없는 양반이로구만. 뭐 그건 그렇다 치고, 그래서 갑자기 이런 식으로 나에게 의뢰를 제안하는 저의가 뭐요?”
그는 모르나에게 직설적으로 질문을 던졌다.
이미 그녀가 할리를 추천했었다는 것과 남부의 상황까지 다 알고 있는 마당인데 이제 와서 의뢰라니, 영 구린 냄새가 나지 않는가.
“끄흠··· 주술사라는 존재는 말일세, 이성이 중시되는 마법사와는 달리 감성이 굉장히 중요하게 작용하지.”
“허어— 그래서?”
“단적으로 말해, 나 정도 되는 주술사는 다른 이들은 알 수 없는 것도 더 잘 느낄 수 있다는 뜻일세. 자네의 몸에 남은 이런저런 흔적들은 물론, 인연과 운명 등의 추상적인 개념까지.”
자신의 몸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음에도 할리는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애초에 그의 과거사는 ‘할리의 대모험’을 통해 주변인들은 다 알고 있는 이야기이기도 한데다, 요즘 워낙 설치고 다닌 터라 딱히 이제 와 숨길 일도 아니었다.
“이미 알고 있는 것 같지만, 자네를 결사대에 추천했던 것도 자연스럽게 만나기 위한 과정일 뿐이었네. 어차피 그건 당사자가 원치 않는다면 거절할 수도 있는 문제 아니었겠나?”
“거참, 굳이 그렇게까지 해서 날 만날 필요가 있었소? 아니, 애초에 1차 회의 때는 그냥 멀리서 지켜보기만 하고 말았던 거 같은데?”
“···끄흐흘, 그게 그리 간단한 상황이 아니었단 말이지···.”
갑자기 표정이 어두워진 모르나가 씁쓸하게 헛웃음을 흘렸다.
“내가 자네를 보고자 했던 이유도 거기에 있네. 툴크 왕국에서의 활약상을 들었을 때부터 느낌이 딱 왔거든. 자네야말로 지금 칼코스가 처한 문제를 해결해 줄 수 있다는 것을!”
예컨대 그저 ‘대주술사로서의 직감’일 뿐이라는 소리였다.
그리고 그녀는 할리를 직접 마주한 순간 그 직감은 확신이 되었고, 기회를 노리다가 지금에서야 접촉하게 되었다며 말을 덧붙였다.
‘칼코스의 문제라는 건 쿠데타를 말하는 거겠지? 아무래도 이 노인은 그쪽과는 반대 입장인가 보군.’
그의 예상대로 의뢰 내용은 대륙 남부에서 은밀히 진행되고 있는 문제를 해결해 그 주모자를 처치하는 것이었으며.
그에 대한 보수가 바로 대주술사로서 해줄 수 있는 주술 전반과 그 외의 도움이었다.
“일단 자네의 관심을 끌려고 투왕 이야길 꺼내긴 했네만, 사실 그건 그리 추천하지 않네. 대전사의 각인까지 새겼으면 각인을 새기는 조건에 대해선 알고 있겠지?”
“그에 합당한 업 말이군! 대전사가 되는 게 오우거를 단신으로 처리하는 거였지?”
“끄끅끅··· 오우거라, 그야말로 최소한의 기준이군. 물론 지금의 자네라면 그 이상이더라도 쉽게 해내겠지만 말일세.”
작게 실소하던 모르나가 다시 진지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일단 자네의 몸에 흐르는 생명력은 투왕의 각인을 새기기엔 충분해. 솔직히 용인이라는 걸 감안해도 납득이 가지 않을 정도긴 하지만···. 허 참, 처음 봤을 때보다 더 괴물이 되었군. 그동안 뭐 몸에 좋은 거라도 주워 먹었나?”
그녀가 대주술사가 되어 접한 문헌에는 용인에 대한 정보도 남아 있었다.
그것에 따르면 그들은 인간보다 더 튼튼한 몸을 가지고 있는 건 사실이었으나, 그 강함의 원천은 타고난 마력에 대한 재능이지 할리처럼 무식한 생체력이 아니었다.
“···뭐 그건 넘어가더라도, 시술받는 당사자에게 가해지는 부하도 상상 이상이라고 하네. 전승으로는 대전사의 각인을 새길 때보다 백배는 더 고통스러웠다고 하더군. 수백 년 전의 마지막 투왕이 직접 남긴 기록이니 믿을 만할 걸세. 끄끅끅.”
하지만 그 말에도 할리가 시큰둥한 표정을 짓자, 그녀는 무안한 표정으로 입맛을 다셨다.
“무엇보다 결정적인 건, 아까 얘기했던 합당한 업이지. 투왕의 각인은 조건을 만족시키지 못했을 때 부작용 정도로 끝나지 않아. 그냥 그 자리에서 바로 죽어버릴 테니까.”
“거 아까부터 말을 빙빙 돌리는데, 뜸 좀 그만 들이쇼! 나 바쁘다고 하지 않았나?”
“끄잉, 거 노인네의 즐거움을 뺏어가는구만.”
잠시 툴툴거리던 모르나는 할리의 눈총에 마지못해 입을 열었다.
당연하지만, 그녀가 말한 업의 조건은 거의 불가능에 가까울 정도로 어려운 시련이었다.
“···바로 성체 이상의 드래곤을 직접 사냥하는 것일세! 그것도 그냥 다수의 싸움에 끼는 것 정도론 안 돼. 치명상을 입히는 건 기본이고 자네의 손으로 그 마지막 숨통을 끊는 것까지 만족해야 업으로 인정되지!”
—일반적인 경우였다면 말이다.
“물론 자네가 용인이고 요즘 드래곤은 찾아보기도 힘든 만큼, 비슷한 급의 상대면 무엇이든 상관없···.”
“아, 뭐. 그건 됐고! 어쨌든 해 줄 수는 있다는 거지?”
“···엉? 그거야 그렇네만···. 하지만 아까도 말했듯 업을 만족시키지 못하면··· 아니, 잠깐.”
묘하게 자신만만한 할리의 태도에 고개를 갸웃하며 말을 잇던 그녀가 일순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기묘한 귀기가 서린 눈빛으로 그를 가만히 바라보고는···.
“아니 이건 또 뭐야?”
저도 모르게 떨떠름한 목소리가 새어나왔다.
“용인이라기에 용의 업이 끼어있어도 그러려니 했는데, 이건 그냥 용이 아니라 용살(龍殺)이잖아?”
“허? 그걸 알아본다고?”
과연 대주술사라고 해야 할까.
그에게 처음 각인을 새겨주었던 주술사 노파는 오우거 부산물을 보고서도 반신반의했건만, 모르나는 그저 집중해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그가 조건을 만족했는지 여부를 파악할 수 있는 것 같았다.
“용인이 용을 죽였다고? 그것도 이 정도 수준이면 그냥 성체 드래곤이 아니구만? 치명타는 물론 숨통을 끊은 것도 맞고. ···자넨 대체 정체가 뭔가?”
시종일관 뭔가 달관한 분위기를 풍기던 그녀도 이번엔 진심으로 당황했는지 얼떨떨한 표정으로 눈만 끔벅였다.
‘그때 그게 이렇게 도움이 되는군.’
광룡 헤라토스와의 싸움에서 놈의 가슴팍으로 파고들어 심장은 물론 드래곤 하트까지 죄다 뜯어먹었던 할리였다.
필요한 조건을 만족한 것도 당연한 일.
“크하핫—! 그거야 뭐 어찌 되든 좋은 일 아닌가! 어쨌든 이걸로 대충 서로 원하는 바를 알았으니, 좀 더 자세한 이야길 해 보자고!”
때마침 그도 부족 연맹의 상황을 보고 어떻게 개입할지 벼르던 참이었다.
평소 남부 야만 전사를 표방하고 있던 만큼 조만간 방문할 생각이기도 했고.
그러니 이참에 칼코스의 고위직인 모르나에게 정보를 얻어 남부에 카르마 빨대를 꽂는 것도 나쁘지 않을 터였다.
“아 참, 노인장. 선금은 별도인 거 알지?”
물론, 계산은 확실히 하고 나서.
***
대주술사 모르나는 이런 복잡한 방법을 사용해야 할 정도로 운신이 자유롭지 못한 상태였다.
지금처럼 대신전 내부에 있지 않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을 정도로, 그녀의 행적이 실시간으로 감시와 통제를 받고 있었던 것이다.
‘독재가 문제 되어 축출되었던 전대 대족장이 부족 연맹을 집어삼키는 중이란 말이지? 그것도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으면서?’
그녀의 이야길 들어보니 그 수준도 범상치 않았다.
각 부족의 족장들에게서 인질과 약점을 잡은 건 물론, 정신 제압까지 동원할 정도로 심각한 상황이라고 하니···.
‘아무리 족장을 비롯한 고위층들만을 노렸다곤 하지만, 이 정도까지 철저하게 정보를 통제했다는 건 확실히 보통이 아니군.’
그 와중에 대주술사인 모르나도 가족과 제자가 인질로 잡혀 함부로 움직일 수 없는 처지가 되었다고 한다.
더불어 그녀가 부족 연맹의 대표로 참여할 수 있었던 것은, 정신 제압이 통하지 않은 고위층 중에선 그녀가 가장 협조적이어서라고.
‘보좌관이 따로 감시자로 붙긴 했지만 말이지. 그나저나 그렇게까지 한다는 건, 놈들에게 확실히 켕길만한 뭔가가 있다는 소리겠지?’
회의 장소는 주신교단의 성지 한복판이자 성자와 성녀가 함께 있는 대신전이었고, 참가자들 중에는 대마법사들을 포함해 여러 분야에서 경지에 오른 이들도 많았다.
당연히 무언가 문제 있는 이라면 꺼려질 수밖에 없는 환경.
그 와중에 모르나가 교단이 아닌 할리를 선택한 것은 본인의 말대로 ‘대주술사의 감’인지 뭔지가 단단히 한몫한 것일 터였다.
하긴··· 그렇지 않아도 주술사들의 존재 때문에 주신교단의 영향이 크지 않은 남부인데, 지금처럼 대륙이 멸망의 기로에 선 상황이면 큰 도움을 받기도 힘들었겠지.
‘그런 면에서 그 할머니가 의뢰 상대를 잘 찾아오긴 했어.’
내부자의 도움으로 정보 문제도 해결된 이상, 이제 그에겐 더 이상 거리낄 것이 없었다.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은 비밀이지만··· 사실 남이 만들어 놓은 판을 박살 내는 것이야말로 자신의 주특기가 아니던가?
‘전 대족장 발테온.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혼란을 틈타 온갖 더러운 수작을 부리며 야욕을 부리는 자. 대놓고 냄새가 나는군.’
···그것이 할리가 직접 움직인 것이든.
‘그러고 보니 시아나가 그랬었지. 남부에 숨어있는 간부가 심연의 문을 열었다고.’
때마침, 부득이하게, 매우 우연찮게도— 불사왕이 직접 움직인 것이든 말이다.
‘잡았다, 요놈.’
길게 찢어진 할리의 입가에서 날카로운 이빨이 사납게 번뜩였다.
***
웅성웅성—
거대한 회의실에 모인 사람들이 저마다 무리를 짓고 두런두런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친근한 듯 다른 무리에게 먼저 말을 걸거나 경계하며 교류를 피하기도 하고, 본심을 숨긴 채 웃으면서 상대의 약점을 찾거나 허세를 부리며 자신을 부풀리는 등.
말 그대로 복잡한 현 세계정세를 한눈에 볼 수 있는 현장이었다.
그리고 그때···.
덜컹—
커다란 문이 열리며 또 한 무리의 사람들이 회의실 안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고급스러우면서도 화려한 의상을 갖춰 입은 이들.
그 선두에는 황금을 실로 뽑은 듯한 찬란한 금발과 보석처럼 빛나는 청록색 눈동자를 지닌 아름다운 여인이 그들을 이끌고 있었다.
“아, 오셨습니까? 황녀님. 좋은 아침입니다.”
“역시 오늘도 아름다우십니다! 이거 눈이 부실 지경인데요? 허허허!”
그녀가 모습을 드러내자 주변에서 저들끼리 대화를 나누던 이들이 슬금슬금 그쪽으로 몰려들기 시작했다.
이미 요 며칠간 꾸준히 인사하며 나름의 친분을 다지기도 했으나, 그건 모두가 비슷한 상황이었다.
이런 자리에서 중요한 것은 강자와 ‘남들보다 더’ 친해 보이는 것이었으니, 이건 매우 자연스러운 현상이라 할 수 있었다.
그녀야말로 대륙 최강국인 아제리온 제국, 그곳의 현 1순위 황위 계승권자인 라일리 카르테 아제리온이었으니까.
“모두 반갑습니다. 논의할 게 많아 늦게까지 늘어질 수 있다고 들었는데, 어떻게 다들 잠은 잘 주무셨는지 모르겠군요.”
“하하하! 물론이지요! 제가 체력 하나는 자신 있습니다.”
“황녀님께선 괜찮으십니까? 나중에 피곤해지시면 제가 교단 측에 휴식 시간이라도 요청하도록 하지요.”
슬쩍 옆에 따라붙으며 듣기 좋은 말만 반복하는 이들.
그들도 각자가 온 곳에서는 최고위층에 속하는 이들인 만큼 노골적으로 굽실거리진 않았으나, 차기 황제라는 이름값은 평소 그들의 높은 콧대를 무너뜨리기엔 충분했다.
라일리는 입가에 미소를 띠면서도 사무적으로, 그렇다고 너무 차갑지도 않게 그들을 대했다.
기회주의자들을 다독여 제 편으로 만드는 것은 그녀가 요 몇 년간 숨 쉬듯 해왔던 일이지 않은가.
타국 사람들을 대하는 것도 그리 다를 게 없었다.
그렇게 속으로는 각자의 꿍꿍이를 품고 겉으로는 화기애애한 대화가 오가던 대회의장에.
덜컹—
다시 한번.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엇?”
“저들은···.”
그리고 그 소리에 문 쪽으로 고개를 돌렸던 이들은 제국 측 사절단이 들어왔을 때와는 다르게, 딱딱하게 굳은 표정으로 하나둘 입을 다물었다.
순식간에 번진 반응에 언제 화목한 분위기가 흘렀냐는 듯, 곧 싸늘한 정적이 감돌기 시작한 대회의장.
저벅저벅—
그 침묵 속에서 문을 통해 안으로 들어오는 무리의 발자국 소리가 나직이 울려 퍼졌다.
하나같이 어두운 복장을 한 채 내부로 들어서는 그들의 선두에는, 어둠을 실로 뽑은 듯한 칠흑 같은 흑발과 보석처럼 빛나는 핏빛 눈동자를 지닌 아름다운 남성이 있었다.
그저 보는 것만으로도 압도되는 위압적인 존재감을 흘리면서.
꿀꺽—
“······.”
“으음, 과연···”
그의 뒤편에서 열을 맞춰 선 채 따라오는 이들의 분위기도 심상치 않긴 마찬가지.
그들이 한 발짝씩 걸음을 옮길 때마다, 왠지 모를 싸늘한 한기와 함께 은은한 피비린내가 느껴지고 있었다.
‘그렇군. 저들이.’
사람들의 중심에 있던 라일리 황녀가 그들을 바라보며 조용히 눈을 빛냈다.
그래, 저들이야말로 새로운 변화의 한 축을 담당하는—.
탈리아 왕국의 사절단이자 뱀파이어 클랜 연합, 하이브리드의 뱀파이어들이었으니까.
어둠 속에 숨어 살던 그들이 마침내 빛의 상징인 주신교단의 심장부에서 그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