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overeign of the Infinite Clones RAW novel - Chapter (202)
#202
2차 대륙 정상 회의 (3)
싸늘해졌던 대회의장의 분위기는 탈리아 왕국 사절단이 한쪽 구석에 착석하고 약간의 시간이 흐른 후에야 서서히 풀리기 시작했다.
웅성웅성—
“크흠, 그래서 말입니다···.”
“아아— 그렇군요.”
다시 하나둘 저들끼리 대화를 나누기 시작하는 군중들.
다들 뱀파이어의··· 강자의 청력이 어느 정도 수준인지 알고 있었기에 대놓고 그들에 대해 떠들지는 않았으나, 사람들은 각자의 대화에 집중하지 못하고 연신 구석을 힐끔거렸다.
‘탈리아 왕국의 새로운 지배자, 하인즈 하이브리드 2세. 브로코슬락 클랜 출신의 뱀파이어로서 성혈의 위(位)에 오른 자.’
이곳의 참가자들은 하나같이 각국을 대표하는 이들인 만큼 이미 충분한 정보를 숙지한 상태였다.
당연히 하나의 왕국을 집어삼킨 뱀파이어 집단에 관해선 물론이고, 그 수장인 하인즈에 대해서도 알 만큼 알고 있을 수밖에.
물론 아까의 경직되었던 분위기는 미리 상대를 알고 있다고 어찌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다.
애초에 뱀파이어란 타인의 피를 갈취하며 생을 이어가는 포식자였으니.
그런 상대에 대한 꺼림칙한 감정에 더해, 그들에게서 자연스럽게 흘러나오는 불길한 기세가 본능을 자극함으로써 나온 자연스러운 반응이었다.
또한 그뿐만이 아니라···.
스윽—
“음? 프리스틴 자작님?”
“잠시 실례하겠습니다, 황녀님.”
조용히 발걸음을 옮긴 이세아가 사람들의 중심에 서 있던 라일리 황녀의 뒤편으로 바짝 다가붙었다.
그에 라일리가 의아하다는 눈빛을 보냈지만, 그녀는 그에 아랑곳하지 않고 뻔뻔하게 자리를 지켰다.
여전히 뱀파이어들··· 정확히는 하인즈 2세를 경계하면서.
설령 무슨 일이 벌어지더라도 즉각 대응할 수 있도록.
‘···강해. 초격은··· 막을 수 있을까? 대신전의 결계도 있으니 어쩌면 가능할지도. 그래도 시간만 끌면 이후엔 교단에서 나설 테니 그 방향으로 대비를···.’
저들에게 생각이 있다면 교단의 심장부에서 문제를 일으킬 리가 없겠으나, 원래 마법사란 만약의 사태를 대비해 미리 준비하는 자였다.
또 얼마 전엔 자신이 옆에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라일리가 불사왕에게 납치당하는 불상사가 있지 않았던가.
그런 만큼 매사 각별한 주의를 기울이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
그때, 조용히 자리에 앉아있던 하인즈의 눈길이 슬쩍 이쪽으로 향했다.
별다른 의미는 없었다는 듯 금방 스쳐 지나가긴 했지만, 그 짧은 순간 이세아의 머릿속엔 온갖 종류의 마법이 구조를 이뤘다 해체되길 반복했다.
‘···칫, 놀라게 하고 있어.’
그 찰나의 시선이 지나간 후.
그녀는 가볍게 숨을 고르면서도 경계를 늦출 생각은 하지 않았다.
극의를 넘어서며 트인 직감이 저 상대에게선 잠시간의 방심도 허용되지 않는다고 경종을 울리고 있었으니까.
그리고 이는 그녀뿐만 아니라 이 자리에 있는 강자들이 공통적으로 보이는 현상이었다.
“끄흐흘—. 과연 대단하구만.”
뒤쪽에 예의 그 감시역인 보좌관을 달고 있는 칼코스의 대주술사 모르나부터 시작해서.
“흐음··· 이거 흥미롭군. 이만한 존재감이라. 역시 명성대로야.”
이젠 문헌으로만 남은 성혈의 등장에 호기심을 참지 못하고 눈을 빛내는 마탑 연맹의 맹주에.
“정말, 이쪽 대륙은 하나같이 만만한 게 없군요. 그동안 고생 많으셨겠습니다, 라포리 님.”
“하하하··· 저야 그간 교단과 대화를 한 게 전부이지 않겠습니까. 저보다야 앞으로 고생하실 리디아 님이 더 걱정이지요.”
에나멜 대륙에서 건너온 엘븐 킹덤의 하이 엘프들과.
“킁! 이거 영 찝찝한데. 정말 괜찮은 거 맞아?”
와일드 랜드의 수인 대표 라이오넬 등.
그 외에도 각국 사절단의 호위로 온 강자들은 하나같이 긴장을 놓지 않은 채, 마치 폭탄이라도 보는 것처럼 뱀파이어 무리를 예의 주시했다.
그리고 그렇게 모두의 주목을 한 몸에 받는 하인즈는···.
‘어느 정도 예상하긴 했는데, 이건 생각 이상이네. 역시 기세는 조금 감출 걸 그랬나?’
그런 태평한 생각을 이어가며 진중한 표정으로 천천히 턱을 쓰다듬었다.
기선제압을 위해 일부러 존재감을 과시하긴 했는데 너무 과했었나 싶어서.
아는 얼굴이 보여 별생각 없이 이세아에게 시선을 향했다가, 한순간에 폭발적으로 활성화되는 그녀의 의념에 그도 서둘러 눈길을 피해줘야 했을 정도였으니.
정말 그가 어지간히 위협적으로 느껴진 모양이었다.
“쯧, 무슨 구경거리라도 되는 것처럼 이쪽을 힐끔거리기나 하고. 감히 하이 로드님께 하는 짓들이 무례하기 그지없군요.”
“뱀파이어가 이렇게 양지에 나와 성지에서의 행사에 참여한 건 전례가 없는 일이니 그럴 만도 하지. 특히 하이 로드는 전설이나 다름없는 성혈이시지 않은가?”
“그건 그렇긴 하지만 말이죠···.”
그들의 위세를 보여주기 위한 병풍 겸 수행인으로 따라온 프리지아 브로코슬락이 혀를 차며 투덜거리자, 마찬가지로 보좌관으로 따라온 뮬로가 그녀를 타일렀다.
아무리 하인즈 2세가 성혈이라지만 세력을 과시하기 위해선 진혈급에 해당하는 강자도 몇몇은 이곳에 동행할 필요가 있었다.
뮬로는 정보를 담당하는 만큼 이런저런 일로 쓸모가 많을 것 같아 데려왔고, 무투파인 프리지아는 최근 반란 모의자들을 쓸어버린 직후 할 일이 없어 빈둥거리기에 적당히 집어 왔다.
‘내가 일하는데 밑에서 노는 꼴은 못 보지. 또 프리지아는 한때 귀족 영애 행세를 하며 지냈으니 대외 활동에도 익숙할 테고.’
정작 당사자들은 개국공신인 브로코슬락 출신을 총애한다며 오히려 기뻐했지만.
그래도 서로 만족한다면 좋은 일 아니겠는가?
물론 명색이 국가를 대표하는 사절단이니만큼, 이 자리엔 실질적으로 실무를 볼 이들도 같이 따라온 상태였다.
“아, 교단 측이 입장하는군요. 이제 회의를 시작하려나 봅니다. 그럼 중앙 원탁까지 모시겠습니다, 하이 로드. 함께 가시죠.”
1차 회의 때엔 대표로 참석했었던 브라이트 공작.
전보다 훨씬 젊어진 듯 팽팽한 피부를 가진 그가 하인즈에게 공손히 고개 숙이며 한 손을 대회의실 중앙으로 뻗었다.
그간의 공로를 인정받아 단번에 순혈의 뱀파이어가 된 그는 회의의 실무 책임자로 2차 회의에도 함께하는 중이었다.
“흐음, 그럼 가볼까.”
그렇게 하인즈가 움직이는 것과 동시에.
각자 무리를 지은 채 곳곳에 흩어져 있던 각 세력의 대표들이 하나둘 중앙으로 모여들기 시작했다.
그들과 거리가 가까워지자 탐색하는 듯 경계하는 듯한 시선들이 순식간에 사방을 오갔지만.
다행히 큰 소란 없이 모두 각자의 자리에 앉을 수 있었다.
그렇게 잠깐의 시간이 지나고.
“한창 바쁘실 터인 지금, 이렇게 시간을 내 주신 모든 분께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회의장의 안으로 들어선 리에스타와 하인리히, 코델리아 추기경이 중앙에 둥그렇게 둘러진 테이블의 빈 곳에 나란히 앉은 직후.
“그럼, 2차 대륙 정상 회의를 시작하겠습니다.”
1차 회의 때와 마찬가지로 코델리아 추기경의 짧은 인사말과 함께 본격적인 회의가 시작되었다.
***
회의가 진행되는 내내 하인즈는 가만히 팔짱만 끼고 있었다.
아직까진 딱히 그가 나설만한 일이 없었으니.
회의의 진행은 1차 때와 크게 다를 바가 없었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전체적인 주제는 이 힘든 상황에서 어떻게든 힘을 모아 위기를 헤쳐 나가자는 게 전부였던 것이다.
첫 번째로 이전에 논의되었던 대륙 연합군이 본격적으로 창설되었고, 교단과 마탑 등의 공조를 통해 즉각 어디든 파병할 수 있는 체계도 다졌다.
그렇게 결정된 그들의 첫 파병지는 수도만 남아 근근이 버티고 있는 로한 공국.
그렇지 않아도 힘든 상황이었던 그들은 얼마 전에 출몰한 백색 거인에게 치명적인 피해를 입어, 이젠 추가적인 지원이 없다면 현 상황을 유지하는 것마저 힘들 지경이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여러분의 도움에 감사드립니다.”
그 결정에 데니스 로한 대공자가 해쓱한 얼굴로 애써 미소 지으며 깊이 고개를 숙였다.
이젠 국토를 수복하는 건 어림도 없어진 만큼, 연합군의 목적은 단순히 로한의 난민들이 무사히 제국으로 피신할 수 있게 돕는 게 전부였지만···.
그가 지금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이런 것 말고는 아무것도 없었으니까.
다음으로 논의된 화제는 바로 그 ‘백색 거인’에 대해서였다.
“이번에 저희 공화국에서도 그 거인이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최대한 빨리 대응해 토벌하긴 했지만, 그 과정에서 민간은 물론 수많은 장병의 희생이 있었지요.”
그 문제에 대해 처음으로 발언한 중년 여인, 제피아 공화국의 부통령 케일라 맥클레어가 딱딱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그녀는 얼마 전에 발생한 참사에 상당히 골머리를 썩여야 했는지, 거칠어진 손으로 연신 관자놀이를 주무르며 피곤한 듯 한숨을 내쉬었다.
“성자님께선 불사왕의 공격 목표를 미리 예지할 수 있다고 들었습니다. 혹시 그 거인의 출몰을 미리 알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요? 그것만 사전에 파악할 수 있으면 앞으로의 피해를 훨씬 더 줄일 수 있을 겁니다.”
“···부끄럽습니다만, 아직 제가 많이 부족한지라 예지할 수 있는 일의 범위가 넓지 않습니다. 심연의 상흔을 넘어 침략해 오는 거인은 아직 제 역량 밖이라고밖에 말씀드릴 수 없군요.”
“그렇습니까···. 어쩔 수 없지요. 괜한 말을 해서 죄송합니다, 성자님. 그걸 예지하기도 쉬운 일은 아니실 텐데, 괜한 투정으로 심려를 끼쳐드렸군요.”
그 말을 끝으로 케일라가 가볍게 고개를 숙이며 사과하자 하인리히도 마주 고개를 숙이며 내심 고민에 빠졌다.
‘최소한 놈의 등장 직후에 곧바로 그 사실을 파악할 수만 있다면 용사 파티가 직접 나설 수도 있을 텐데.’
그가 미리 ‘예지’할 수 없는 사건에 용사 파티가 빠르게 개입하는 것에는 한계가 있었다.
문제가 발생하고 그 사실이 교단에 전해진 후, 그걸 다시 교단에게서 전달받은 하인리히가 이세아를 통해 목적지의 좌표를 산출해 이동할 시간이면···.
‘운이 좋다면 늦지 않게 찾아갈 수도 있겠지만, 그렇게 운에 기대느니 차라리 각국이 최선을 다해 대응하는 게 훨씬 더 빠르지.’
이건 그에게도··· 정확히는 할리에게도 아쉬울 수밖에 없는 일이었다.
백색 거인을 직접 처리할 수 있으면 놈의 핵도 추가로 섭취할 수 있을 텐데, 그만한 기회를 놓치는 것도 영 아까운···.
“방법이 있습니다.”
하지만 그때.
그의 상념을 끊고 들어오는 목소리가 있었으니.
“여러 시행착오 끝에 최근에서야 가능하게 된 수단이지요. 정확히 말하자면 미리 예지하는 건 아닙니다. 그저, 놈이 지상으로 넘어오기 위해 심연의 상흔을 통로로 이용하는 순간—.”
바로 그의 옆에 앉아있던 주신교단의 성녀, 리에스타였다.
“그 순간을, 제가 포착할 수 있습니다.”
말을 마친 그녀의 금빛 눈동자에 한순간 밝은 이채가 감돌았다.
그 눈을 보는 순간 문득 그의 머릿속에 한 가지 생각이 떠올랐다.
‘그러고 보니, 리에스타한테 그런 능력이 있었지.’
엄청나게 광범위한, 마(魔)를 추적하는 축복.
한때 그걸 피하겠다고 한스가 온갖 생고생을 했었다.
덕분에 지금은 거의 완벽한 은폐 능력을 얻어 지구에서도 쏠쏠하게 써먹고 있다지만.
‘그런데 세상에 퍼진 광기 때문에 그걸 사용하는 데에도 상당한 제약이 생겼다고 하지 않았나?’
거기다 거인은 신성력에 대한 저항력도 강해서 쉽지 않았을 텐데.
아무래도 그간 그녀도 놀고만 있지는 않았던 모양이었다.
“오! 과연 성녀님이십니다!”
“확실히, 그럴 수만 있다면 지금보단 훨씬 더 피해를 줄일 수 있겠군요.”
“그럼 가장 효과적으로 거인에게 대응할 수 있는 방법은···.”
그리고 그 희소식에 다른 이들도 모두 기뻐하고 있을 때, 하인리히는 아까 하던 생각을 마저 이어서 하고 있었다.
‘어라? 이렇게 되면 정말로 거인이 등장하기 직전에 곧바로 알 수 있잖아?’
그것도 놈이 등장하는 정확한 좌표까지 실시간으로 파악할 수 있게 되었다.
다만 이 경우에 그걸 가장 효율적으로 사용하기 위해선 한 가지 문제가 선결되어야 했는데.
생각 끝에 어느 한 결론에 도달한 하인리히가 고개를 돌려 옆자리의 리에스타를 바라보자.
마침 그녀도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는지,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그를 응시하고 있었다.
“그러니 성자님? 저도 성자님과 함께 행동할 수 있도록 허락해 주시겠어요?”
사람들의 희생을 줄이기 위해 직접 위험 속으로 뛰어들겠다는 말을 담담하게 내뱉는 성녀.
이미 성자가 이끄는 결사대에 성녀까지 참가하겠다는 것은, 그만큼 교단의 굳은 결의를 보여주는 거나 다름없었다.
하지만 다른 이들과는 달리 그녀의 말을 들은 하인리히가 가장 먼저 떠올린 생각은 조금 뜬금없는 것이었다.
‘···정말 어지간히도 행정 업무가 하기 싫었나 보구나.’
물론 불현듯 떠오른 것일 뿐이니, 정말 그런 이유 때문은 아닐 것이다.
···약간은 포함되어 있을지도 모르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