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overeign of the Infinite Clones RAW novel - Chapter (207)
#207
혼돈의 서막 (2)
라디오 대신 틀어진 TV 소리가 아스라이 들려오고.
와장창—!
테이블에 놓여있던 집기들이 바닥으로 우수수 떨어져 내렸다.
“···젠장! 갑자기 이건 무슨···!”
나는 버둥거리던 손으로 간신히 테이블을 잡아 몸을 기대며 이를 악물었다.
어느새 깔끔하던 거실 바닥이 엉망이 되었으나, 지금은 그런 사소한 것에 신경 쓸 때가 아니었다.
갑작스럽게 시작된 심연의 정신 침식.
불사왕이 된 한스는 따로 뭘 하지 않더라도 정신 공격에 면역 수준의 저항력을 가지고 있었지만, 지금의 침식은 외부 공격이 아니었기에 그런 방어도 딱히 도움이 되지 않았다.
‘놈의 눈을 마주한 직후부터 한스의 심장에서··· 내면에서 심연이 동조하고 있어. 이 정도 반응은 파편을 흡수했을 때 이상이다.’
물론 자체 정신 방어가 무용지물이 되었다고 해도 큰 문제는 아니었다.
막대한 카르마를 투자해 성장한 그의 정신 능력치에 다른 아바타들에게서 끌어올 수 있는 리소스까지 합하면, 문제가 생기는 게 이상할 정도의 초월적인 정신력을 가지게 되니까.
그걸로 날뛰는 침식을 적당히 억누르며 본체 쪽으로 역류하지 않도록 방향을 틀어버린다면 아무런 문제도 없었다.
애초에 한스가 그 위험한 불사왕의 힘을 자기 멋대로 사용할 수 있었던 것도 이런 사기적인 특성 때문에 가능한 일이지 않았던가.
“큭, 하필 지금!”
···그것이 평소였다면 말이다.
정신적 자원이야 차고 넘치고 있지만, 그걸 온전히 발휘하기엔 지금 한스의 내면이 너무 위태롭고 불안정했다.
‘젠장, 억누를 수 없어. 하필 정신세계가 손상된 직후에!’
내면에서부터 온갖 부정적인 요소들이 폭발하듯 터져 나온다.
이미 몇 번이나 겪었고 이후로도 꾸준히 차단하고 있던 마이너스 감정들이, 삽시간에 몇 배나 증폭되어 「마인드 허브」의 한계선까지 치밀어 올랐다.
‘이대로 가다간 역류한다···!’
한순간에 수많은 생각이 머릿속을 스쳤다.
소환 해제?
아니, 그건 문제를 뒤로 미루는 행위다.
이미 한스의 내부에 폭탄이 깃든 상황이니, 이후 재소환하자마자 같은 일이 반복될 것이다.
그리고 그땐 ‘문제가 생긴 한스’가 무방비한 본체 바로 옆에 존재하게 되겠지.
‘기운을 제대로 억누르지 못해 사방에 위치가 노출되는 건 덤이고! 한스를 영원히 봉인할 게 아니라면 그건 최악의 선택이다.’
아무리 집에 결계가 설치되어 있다곤 하나, 당장 한스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고 있는 기운을 생각하면 이 정도로는 어림도 없을 터.
역시 이 문제는 아우테리카··· 그것도 불사성에 있는 지금 해결하는 게 최선이었다.
‘그렇다고 내 정신이 오염되면 본말전도니, 그것만은 어떻게든 막아야 한다.’
이미 한계선을 넘어선 침식이 「마인드 허브」의 경계를 두들기는 상황이었다.
나는 모든 아바타의 움직임을 일제히 멈추고 그 정신을 오롯이 한스에게 집중했다.
율령자에게 손상된 정신세계를 감싸 피해가 더 커지는 것을 방지했으며.
풍랑을 만난 돛단배처럼 이리저리 흔들리던 「명경지수」에 힘을 실어주었고.
「페르소나」를 제어하는 동시에 「마인드 허브」의 보안을 더욱 강화했다.
그 과정에서 역류하는 심연 속에 뭔가 정보가 포함되어 있다는 것을 깨달았지만, 지금은 그것에 신경을 분산할 일말의 여유도 없었다.
‘이대로는 진짜 위험한데. 뭔가 타개책이···.’
하지만 그런 저항도 기껏해야 시간을 버는 것이 고작이었으니.
상황은 여전히 막막할 정도로 암담했다.
그렇게 최선을 다해 돌파구를 찾고 있을 때.
‘···잠깐, 저건?’
문득 율령자가 놓고 간 구슬이 한스 내면의 의식에서 감지되었다.
주변은 한창 격변이 휘몰아치고 있건만, 그것은 주위의 이상 따윈 상관없다는 듯 그저 고요하게 제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정신계 능력 증폭. 그게 이런 일에도 도움이 될지는 모르겠다만··· 그래도 없는 것보단 낫겠지.’
실상 이 사달이 난 것도 다 저 물건 때문이지 않은가?
지금 사태를 수습하는 데 도움만 된다면 그것이 무엇이든 가릴 틈이 없었다.
‘어? 이거 생각보다 괜찮을지도?’
그런데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사용한 그 물건이 기대했던 것 이상의 성능을 보여주었다.
확실히 올바른 사용 방법이 아니어서인지 극적일 정도의 효과는 아니었으나, 최소한 역류를 막고 그 사이를 차단하는 데 도움을 줄 수준은 됐던 것이다.
‘한스 내면에 부풀어 오른 심연을 정리하는 건 나중이다. 일단은 경계를 공고히 해서 역류를 막는 게 우선이야. 이것만 마무리하면···!’
이후 한동안 심연과의 지겨운 힘겨루기가 이어졌다.
그렇게 침식에 대응한 지 얼마나 지났을까.
사실 실질적으로는 그리 길지 않은 시간이었지만, 정신세계에서 워낙 고단한 사투를 벌인 탓인지 마치 한참은 지난 듯한 기분이 들었다.
“후우—.”
온몸이 나른하고 땀범벅이 되어 찝찝하다.
이런 기분이 느껴진다는 것 자체가 의식을 외부로 돌릴 여유가 생겼다는 증거겠지.
‘해냈다···.’
그래, 결국 성공한 것이다.
심연으로부터 촉발된 오염을 차단하고, 의식의 경계에 추가 방벽을 쌓아 그것이 넘어오지 못하게 하는 작업이.
찌잉—
그러나, 미처 그것에 안도하기도 전.
쿠당탕!
갑작스럽게 머리를 울리는 현기증에 비틀거리던 나는 엉망이 된 바닥에 그대로 꼴사납게 나뒹굴었다.
“윽, 으극.”
갑자기 발생한 사태에 무리해서일까?
본체로 역류해 오는 오염은 확실히 막아낼 수 있었으나, 그 과정에서 가해진 정신적인 충격과 피로는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어떻게든 사고를 이어가려 해도 머릿속의 흐름이 뚝뚝 끊겨 생각이 연결되지 않았다.
온통 꿈을 꾸는 듯 몽롱하고, 제대로 집중이 되지 않아 단편적인 생각만이 뇌리를 맴돌았다.
《고유스킬이 성장하여 가능성을 개화합···》
하지만 그 단락들이 미처 제 형태를 갖추기도 전에.
나는 의식이 아득히 멀어지는 것을 느끼며 그대로 어둠 속으로 잠겨 들었다.
***
그로부터 잠깐의 시간이 지난 후.
철컥—
문고리가 돌아가는 소리와 함께 엉망이 된 거실에 한 인영이 들어왔다.
가볍게 주변을 둘러본 그는 이내 바닥에 쓰러진 사내를 바라보곤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
“하아— 이건 예상 못 했는데.”
그리고 거실에 들어온 그, ‘휴고’는 자신과 똑같은 얼굴을 한 한성현을 챙겨 침실에 눕혀두고 이리저리 상태를 체크했다.
‘안전한 곳에서 아바타만 굴리다 보니 이런 상황은 생각도 못 했네. 정신에 무리가 가면 이런 일이 생기는 것도 당연한데 말이지.’
이렇게 본체에 충격이 오는 상황 자체가 처음이다 보니 적잖이 당황스러웠다.
다행히 상세를 살펴보니 그리 심각하진 않아, 이대로 며칠만 푹 쉬면 금방 털고 일어날 것 같았지만···.
‘아니, 이거 그런 게 문제가 아니잖아?’
갑자기 그의 등줄기를 타고 식은땀이 흘렀다.
실상 진짜 문제는 이제부터 시작이었다.
‘후우, 침착하자. 일단 상황을 정리해 볼까.’
생성된 지 얼마 되지 않아 아직 ‘개성’이 약한 휴고는 모든 뒷정리를 마치고 평소처럼 안마의자에 앉아 생각에 잠겼다.
모든 사람에게는 크든 작든 각자 여러 가지 일면이 있었다.
그것은 상황이나 장소에 따라 바뀌기도 하고, 대하는 상대에 따라 달라지기도 한다.
일터에 있을 때, 가족과 함께할 때, 취미생활을 할 때, 친구들과 만날 때···.
사회에선 누구보다 공명정대한 사람이 집안에서는 사소한 걸로도 화를 내는 폭군일 수 있고, 많은 사람을 살해한 피도 눈물도 없는 악한이 제 자식만큼은 누구보다 사랑하는 가장일 수도 있다.
너무나 당연한 일이기에 굳이 이중인격 따위의 틀로 나눌 필요도 없는, 사람이라면 당연히 가지고 있는 다양하고 복합적인 감정의 발로.
‘그리고 「페르소나」를 통해 아바타들에게 부여된 개성은 ‘한성현’이란 개인의 감정에서 비롯된 거지.’
각 아바타는 한성현이 가진 일면이자 심상의 투영이었다.
모두가 다른 것처럼 보여도 여전히 틀림없이 그 본인이었고, 심지어 본체가 기절한 지금도 계속해서 기억을 공유하는 중이었다.
다만, 각자가 가진 개성에 따라 표출하는 바가 다를 뿐.
특히 그의 첫 번째 아바타인 한스는··· 그가 가진 모든 부정적인 일면을 담고 있는, 말하자면 감정의 쓰레기통이나 다름없는 존재였다.
가족을 잃은 슬픔, 세상에 대한 원망, 범인에 대한 분노, 미래에 대한 절망 등.
물론 평범한 존재가 그런 감정들만 가지고 있다면 큰 문제라고 볼 수 있었으나, 아바타인 한스는 그 경우가 달랐다.
‘애초에 언데드라 궁합이 잘 맞기도 했고, 그런 부정적인 감정들이 오히려 ‘불사왕의 심장’을 제어하는 데는 더욱 도움이 되기도 했으니까.’
또 어차피 「마인드 허브」를 통해 아바타의 개성과는 별개로 그것을 객관적으로 통제할 수도 있었으니, 지금까지는 딱히 문제가 될 만한 일이 없었다.
‘지금까지는, 말이지.’
「아바타」의 주인이자 「마인드 허브」의 주체가 될 한성현이 건재했다면.
그리고 그 한스가 한창 심연의 침식에 오염된 직후가 아니라면 말이다.
“하하하··· 이거 참.”
어색하게 웃으며 뒷머리를 긁적이던 휴고가 침을 꿀꺽 삼키곤, 이내 짧은 한숨 같은 한 마디를 내뱉었다.
“···조졌네.”
그 짧은 감상은 한스를 제외한 모든 아바타가 공통적으로 떠올린 생각이었다.
***
‘쓸데없는 걱정을.’
내면에 차오른 심연을 억누른 한스가 속으로 짧게 읊조렸다.
아무리 역류를 막는 것에 주력하느라 고생했다지만, 한스라는 개체에 집중적으로 할당되었던 정신력 수치도 절대 만만하지 않았다.
이번 일로 추가적인 심연의 오염이 발생한 건 어쩔 수 없으나, 그 정도야 이전에도 있었으니 별로 달라질 것도 없었고.
‘이 몸은 죽음을 초월한 지배자이자 정명한 왕이니. 절대 누군가의 뜻대로 놀아나지 않는다.’
그것이 심연이든 거인의 뒤에 숨어있는 어떤 존재든 간에 말이다.
그가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옆에서 호들갑을 떠는 드웰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왕이시여! 괜찮으십니까? 죄송합니다! 저 건방진 거인 놈을 좀 더 확실하게 봉해놨어야 하는데. 설마 저 상태에서도 왕께 수작을 부리려 할 줄이야!]그 말에 주위를 살펴보니 역시 시간이 많이 지나지 않은 듯, 주변의 모습은 아까와도 딱히 달라진 게 없었다.
[괜찮으니 닥치고 있어라, 드웰. 이 몸이 생각할 게 있으니.] [헙! 아··· 알겠습니다, 왕이시여.]한스는 거슬리게 옆에서 떠드는 그에게 싸늘한 한마디를 던지며, 다시 고개를 돌려 이마에 구멍이 뚫린 거인의 머리를 바라보았다.
핵이 파괴된 여파로 서서히 부스러지는 거대한 머리통.
‘하! 사명? 주? 웃기는 소리.’
그는 그것을 바라보며 내심 비웃음을 흘렸다.
아직 이번에 얻은 정보를 전부 분석한 건 아니었지만, 그래도 상황은 대충 알 것 같았다.
아무래도 ‘죽음’도 ‘광기’도 누군가의 의도에 따라 움직이게 설계된 모양이었으니.
아마 방금 거인의 수작 또한 그 뜻대로 움직이지 않는 불사왕을 원래대로 돌려놓기 위한 절차였을 터.
자신이 아바타가 아니었으면 정말 그놈의 의도대로 놀아나는 꼴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네놈이 뭐 하는 놈인지는 관심 없다. 그저 이 한니발 스트라우스의 앞길에 방해된다면 치워버릴 뿐. 그 역천의 서약 놈들처럼 말이지.’
처음부터 그의 목적은 오직 하나였다.
‘안방극장’을 통해 막대한 카르마를 수급하고, 그것을 이용해서 지구의 번천회를 말살하는 것.
그는 오로지 그것만을 위해 움직이고 있었다.
‘그런데, 직접 상대해 보니 그 번천회가 만만하지 않더란 말이지.’
거인의 머리를 바라보던 한스의 사고가 자연스럽게 그쪽으로 흘러갔다.
거기서 자연스럽게 이어진 결론은 하나.
‘역시, 더 많은 카르마가 필요하다.’
지금처럼 미적지근한 방법이 아닌, 좀 더 확실하게 카르마를 수확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전에도 몇 번이고 떠올린 적이 있지만, 자신은 절대 선한 존재가 아니었다.
이미 한참 전에 망가져 버린 한성현이란 인간은— 필요하다면 눈 하나 깜짝이지 않고 수많은 사람을 학살할 수 있는 그런 인간이었다.
‘당연한 일. 애초에 이 몸이 지금까지 죽인 게 몇 명인데.’
아무리 「마인드 허브」의 여과가 있다고 하나, 사람을 죽였다는 사실 자체는 사라지지 않는다.
하지만 이미 직간접적으로 죽인 사람의 수만 해도 까마득할 지경인데도, 그는 그동안 딱히 이렇다 할 충격을 받은 적이 없었다.
그것이야말로 이미 처음부터 정상이 아니었다는 걸 증명하는 게 아니겠는가?
그런데도 끝까지 민간의 피해를 줄이려고 들었던 것은··· 그저 자신을 합리화하기 위한 핑계이자 자기만족일 뿐이었다.
스스로가 가진 아주 작은 인간성을 지키기 위한 발버둥.
‘웃기는 일이지.’
그러나.
지금, 그 족쇄가 풀렸다.
‘효율성을 개선할 필요가 있겠군.’
지금 그가 취하고 있는 방침은 비효율적이기 짝이 없었다.
안방극장, 좋다.
용사와 마왕의 대적, 훌륭하다.
그럼 지금의 시나리오가 마음에 드느냐?
‘아니, 그럴 리가!’
지금 이게 뭐 하는 짓이란 말인가?
소꿉놀이도 아니고, 찔끔찔끔 잔챙이들만 보내면서 장난이나 치고!
RPG 게임에서 차근차근 부하들을 던져줘 용사를 키우는 마왕조차 이렇게 어설픈 공세를 취하진 않았다.
보라! 지금 불사성에 바글바글 쌓여있는 전력들을.
오갈 데 없이 그저 쌓여만 가는 불사의 군대를.
이게 대체 무슨 낭비란 말인가?
역시, 지금의 방식은 영 마음에 들지 않았다.
[드웰 맥케인.] [예! 불사왕이시여! 드웰, 여기 대령했나이다!]왕의 반응이 뭔가 평소와 다르다는 걸 느꼈을까.
옆에서 있는 듯 없는 듯 존재감을 죽이던 드웰이 넙죽 엎드리며 외쳤다.
한스는 바닥에 부복한 그를 잠시 응시하곤, 짧은 한마디를 내뱉었다.
[간부들을 소집하라.] [예! 곧바로 명을 이행하겠습니다!]군기가 바짝 든 듯 말이 끝나기 무섭게 자리에서 사라지는 드웰.
그렇게 실험실에 혼자 남은 한스는 재가 되어 사라져 가는 거인의 머리를 다시 바라보다가, 이내 시선을 천장으로 돌렸다.
그곳엔 불사성의 기본 인테리어인 검은 돌밖에 없었지만.
그는 마치 누군가에게 말을 걸듯 나직이 속삭였다.
[이 몸은 한니발 스트라우스.]한스··· 아니, 불사왕 한니발 스트라우스가.
[이 세상에 종언을 가져올 자이니라.]본격적으로 대륙을 향해 검은 손길을 뻗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