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overeign of the Infinite Clones RAW novel - Chapter (209)
#209
설상가상 (1)
성지 한가운데에 자리한 로셀리아 대신전은 아우테리카 최대 종교인 주신교단의 중심지로, 다른 지역에 있는 대신전과도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방대한 규모를 자랑했다.
교황과 성녀를 비롯한 다수의 수뇌부가 여기 머무는 건 물론, 취급하는 정치·행정·정보 등의 업무도 대륙적이었으니 어찌 보면 당연한 일.
거기다 외부로 파견 나가는 성기사단과 이단심문관의 본부까지 대부분 이곳에 위치했으니 더 말할 것도 없었다.
그리고 그 넓은 부지 한 편엔 외부에서 방문한 귀빈을 위한 숙소 건물들도 다수 준비되어 있었는데···.
“후우— 역시 지치네.”
그중 한 곳, 아제리온 제국 사절단의 숙소에서.
막 회의를 마치고 돌아온 라일리 황녀가 앓는 소리를 내며 집무실의 소파에 쓰러지듯 몸을 파묻었다.
점심 무렵에 시작된 회의가 늦은 밤이 되고서야 끝난 탓에 온몸이 노곤했지만, 오늘 갑자기 나온 안건이 워낙 시급한 사안이었던지라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라일리 황녀님? 체통을 지키시지요. 여긴 황녀궁이 아니랍니다?”
“으응? 에이, 상관없잖아. 어차피 여긴 우리밖에 없고. 그렇지 않아도 피곤한데 편하게 하자고, 세아 언니.”
그 모습을 본 이세아가 인상을 찌푸리며 한마디 했으나 라일리는 그에 아랑곳하지 않고 아예 소파에 드러누워 버렸다.
교단 측은 회의에 참여한 이들에게 독립된 숙소 건물을 한 채씩 내주었고, 그 덕에 각 사절단은 다른 세력의 눈치를 보지 않고 좀 더 편하게 휴식을 취할 수 있었다.
거기다 그녀들은 숙소에 도착하자마자 수행인들을 모두 해산시킨 상태.
그 때문에 지금 이 자리엔 라일리가 편하게 대할 수 있는 사람만 남아 있었으니 문제 될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래도 헤론도 있는데 너무 흐트러진 모습을 보이는 건 좀···.”
“음? 저 말입니까? 에이, 스승님. 뭘 새삼 이제 와서! 저도 불사성에서 벗어나기 전까지 줄곧 같이 있으면서 이미 볼 꼴 못 볼 꼴 다 본 사이지 말입니다? 저 정도야 아무것도 아니죠!”
이세아의 입에서 자신에 대한 말이 나오자 집무실까지 쫄래쫄래 따라왔던 헤스페론이 냉큼 끼어들었다.
왠지 모르게 아까부터 멍한 기색이었는데 그렇다고 완전히 정신이 나간 건 또 아닌 모양이었다.
“호오—? 그건 또 무슨 사이일까.”
물론 그가 아무 생각 없이 내뱉은 말에 이세아의 눈초리가 가늘어지며 날카롭게 빛나고.
“아니··· 잠깐, 헤론! 못 볼 꼴은 또 뭐죠? 그 정돈 아니지 않나요? 그냥 환경이 열악해서 생긴 어쩔 수 없는 문제잖아요! ···그, 그리고 처한 상황이 상황이었고!”
라일리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붉어진 얼굴로 분통을 토해내긴 했지만.
그래도 그렇게 일었던 잠깐의 소란은 그리 오래 가지 않고 금방 진정되었다.
잠깐 숨도 돌릴 겸 잡담처럼 떠들긴 했으나, 그런 사소한 일에 더 신경 쓰기엔 그들 앞에 다가온 현실이 만만치 않았던 것이다.
“불사의 군대의 대규모 강습···. 언니는 어떻게 생각해?”
“···솔직히, 지금도 아슬아슬하지. 사방에서 날뛰는 몬스터들과 불쑥불쑥 튀어나오는 백색 거인, 거기다 주기적으로 발생하는 불사의 군대의 습격까지. 그런데 그 습격이 더 거세진다면···.”
사실 지금까진 불사왕이 강림한 것치곤 나름대로 선방하는 중이었다.
그의 등장 이후 발생한 인명피해는 결코 적은 수준이 아니었으나, 일단 로한 공국을 제외한 나라들은 존립이 위태로울 만큼의 피해를 보진 않았으니까.
하지만 성자 하인리히의 말대로 대규모 공습이 시작된다면, 아마 대부분의 국가가 지금의 사회를 유지하는 데 상당한 난관에 부닥치게 될 터였다.
어쩌면 휘청거리는 걸 넘어 로한 공국처럼 무너지는 나라가 생길지도 모르지.
‘물론 아예 정권이 바뀌어 버린 탈리아 왕국은 예외로 두고.’
멍하니 그녀들의 대화를 듣던 헤스페론이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평소에도 맹한 구석이 있었지만, 지금의 그는 그것이 유독 심해진 모습을 보이고 있었는데.
그건 다 그의 사고 한편에서 이어지는 전에 없던 격렬한 토론이 그 원인이었다.
-한니발 스트라우스 : 곧 모든 준비가 끝나가는구나. 공격 시기는 언제로 잡는 게 효과적이라 보는가? 반대 의견은 받지 않겠다.
그 포문을 연 것은 지금 벌어진 모든 일의 원인.
불사왕 한니발 스트라우스였다.
-하인즈 2세 : 나는 부정적인 입장이다만, 정 공격해야 한다면 정상 회의가 끝난 이후가 좋을 듯하군. 너무 빨리 일이 터지면 이쪽이 준비하고 있던 계획이 흐트러진다.
-하인리히 : 아니, 역시 지금이라도 멈추는 게 옳아. 한스는 너무 급하게 움직이고 있어. 우리에겐 아직 시간이 많이 남아있는데, 굳이 이렇게까지 할 필욘 없지 않나!
-할리 : 배고픈데 밥 먹고 하자! 이번 야식엔 고기 10인분을 추가해야겠다!
-휴버트 : 쯧, 어차피 무조건 강행할 생각이겠지? 그렇다면 최근 거슬리는 상인 연합이 있는데, 이참에 그것들을 정리하는 데 이용하는 게 효율적이라 생각한다.
-해리스 : 아··· 귀찮은데···. 역시 전부 그만두지 않을래···?
-하워드 : 아오, 저 답답한 놈! 진짜 할 거냐? 그럼 최소한 타라크 근처에서 일 터트리진 마라! 지금 한창 중요한 순간이니까. 오랫동안 공들였던 게 이제 곧 완성된다고!
-휴고 : 어우 씨, 정신이 없네. 한스야 제발!
···역시 다들 개성이 뚜렷한 만큼 각자 성향에 따라 다양한 반응을 보여주고 있었다.
심지어 이젠 그 폭주를 말리는 것도 포기했는지 몇몇 아바타들은 타협안까지 내놓고 있을 지경이었으니.
그야말로 이기적이고 자기중심적이기 그지없는, 너무나도 ‘한성현’스럽기 그지없는 모습들이었다.
‘내 몸이 깨어있을 때라면 굳이 이런 과정도 필요 없이 자연스럽게 하나처럼 움직였을 텐데···. 역시 이건 좀 힘드네.’
머리가 잠든 상태로 팔다리만을 이용해 억지로 움직이려다 보니, 단순히 걷는 것만으로도 휘청거리는 기분이었다.
앞으로 가고자 하는 바는 모두 같지만, 보폭도 무게 중심도 전부 제각각 따로 놀아 여간 골치 아픈 게 아니었다.
-헤스페론 : 진짜 안 하면 안 될까···? 에휴, 이젠 나도 모르겠다. 우리 적당히 하자, 적당히.
그렇게 그도 소심한 의견을 남기고 다시 시선을 앞의 여성들에게로 돌렸다.
그의 뇌 내 회의는 제법 길게 이어지고 있었으나, 그것이 현실 세계에 미치는 영향은 아주 미미했기에 그들은 아직도 앞선 대화를 이어가던 중이었다.
“그래도 불사왕의 습격은 성자님께서 미리 예지할 수 있다 하셨으니까. 남은 건 각국에서 좀 더 열심히 하는 수밖에 없을 거야. 거기에 대응할 수 있는 전력을 빨리 확인해 봐야겠는데···.”
“···라일리, 정말 내가 없어도 괜찮겠어? 만약 내가 없을 때 무슨 위험한 일이라도 생기면.”
“난 괜찮아. 사실 세아 언니가 더 걱정이지. 나야 여기서 돌아가면 황궁 안에만 틀어박혀서 보호받을 텐데 위험할 게 뭐 있겠어?”
이미 황위 계승도 굳히기 단계에 들어갔다.
그녀와 맞서던 정적들은 하나둘 꼬리를 내리기 시작했고, 황궁 마탑의 탑주인 로렌스 후작을 위시한 중립파는 이미 그녀를 지지하기로 한 상황.
적어도 황궁 내에서만큼은 안전이 보장된 거나 다름없었다.
“그리고 헤론도 있으니까 여차하면 어떻게든 되지 않을까? 그때 무리한 것 때문에 아직 순간이동은 무리라고 하지만···. 무려 그 불사왕의 손에서 탈출한 능력자잖아?”
“으응? 아하하··· 이거 참 부담스럽네.”
라일리가 그를 슬쩍 보며 말을 잇자 헤스페론이 멋쩍은 듯한 웃음을 흘렸다.
이세아도 그 시선을 따라 그를 바라보다가 깊은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하아— 아직 헤론에게 가르칠 것도 많이 남았는데. 결사대로 활동하는 게 생각보다 위험하지 않은 것 같다고 생각한 지 얼마나 지났다고 이런 일이 연달아서···.”
백색 거인의 출몰에 이어서 불사의 군대 시즌 2까지.
거기다 불사왕과의 싸움을 제대로 끝맺기 전까지는 이런 상황이 계속될 것이 불 보듯 뻔했다.
“···설마 여기서 일이 더 커지진 않겠지?”
실소하듯 튀어나온 이세아의 한마디.
혹시나 하는 노파심에 저도 모르게 튀어나온 말이었지만, 아주 놀랍게도 그녀의 한마디는 세상의 진리 하나를 꿰뚫고 있었다.
설마가 사람 잡는다는 것을.
그렇게 사흘이 더 지나고.
마침내 2차 대륙 정상 회의의 마지막 날이 코앞으로 다가왔다.
***
하늘을 찌를 듯이 드높게 치솟은 세계수.
엘프들의 신앙의 상징인 이 거대한 나무는 에나멜 대륙 어디에 있든 단번에 눈에 들어올 정도로 어마어마한 크기를 자랑했다.
그런 초월적인 모습을 하고 이 땅에 실재하는 만큼, 당연히 다른 종족들에게도 경외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었다.
애초에 에나멜 대륙의 이종족들은 각자의 신앙을 배척하지 않고, 정기적인 교류까지 가져왔던지라 서로 간의 거리감도 적은 편이었다.
인간이 주류를 차지한 이온 대륙과는 달리 여러 종족이 각자 모여 국가와 사회를 구성한 이종족들의 낙원.
하지만 모든 종족이 이곳에서 환영받는 것은 아니었는데—.
그 대표적인 배척받는 종족 중 하나로 뱀파이어가 있었다.
그들은 타인의 피를 갈취해 살아간다는 이질적인 생태 때문에 인간뿐만이 아니라 대부분의 지성체가 꺼리는 종족이었다.
그 때문에 대부분의 뱀파이어들은 종족 대이주 당시에도 이온 대륙에 남는 걸 선택했다.
어차피 숨어서 다른 종족에 기생해 살 수밖에 없었으니, 그들에게는 이종족들보단 인간이 훨씬 더 매력적인 사냥감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 뱀파이어에 맞먹을 정도로 배척받는 종족이 바로···.
라이칸스로프, 소위 말하는 늑대인간이었다.
“크히히힛~! 이제 시작이다. 아가들아! 킥!”
보름달이 떠오른 밤.
거리가 상당히 가까운 듯, 세계수가 제법 크게 보이는 한 야산에서 경박한 사내의 목소리가 울려 퍼지는 것과 동시에.
크르르—
크워억! 컹—!
야성에 물든 맹수들의 섬뜩한 울음소리와 함께, 그의 주변에 핏빛 안광이 하나둘 빛나기 시작했다.
“그럼~ 광대 놀음을 시작해볼까? 크르르르—!”
그리고 하이톤이었던 그의 목소리도 말을 이을수록 점점 굵어지더니, 끝에 가선 짐승의 으르렁거리는 소리로 변했다.
얼핏 보면 수인(獸人)과 비슷하지만, 그들과는 근본적인 부분에서부터 다른 존재들.
라이칸스로프는 사냥감의 심장을 뽑아먹는 것으로 잠재력이 성장하는 종족으로, 태생적으로 흑마력을 타고나는··· 실상 반 이상은 마물이나 다름없는 존재였다.
그 영향으로 몬스터뿐만이 아니라 같은 지성체의 심장까지 노리는 흉포성을 가져, 어딜 가더라도 환영받지 못하는 종족이기도 했다.
만약 한스가 지구에서 번천회의 ‘완전 진화 생물 프로젝트’를 발견하지 못했더라면 할리도 이들과 같은 모습을 하게 되지 않았을까.
“크학학학—! 자, 평화에 찌든 돼지들의 배를 가르러 가 보자!”
그렇게 기괴한 웃음을 터트리는 선두의 괴인을 따라.
무수한 검은 그림자가 어둠을 틈타 에나멜 대륙의 산맥을 가로질렀다.
***
이온 대륙 동부 제피아 공화국.
“준비는 모두··· 끝났는가···?”
“그러하옵니다, 로드. 명령만 내려주신다면 언제든 시작할 수 있나이다.”
어둠이 가득한 넓은 공동에서 갈라진 노인의 목소리와 고혹적인 여성의 목소리가 천천히 문답을 나누었다.
“어떻게··· 시간에 맞출 수 있었군···.”
“이 모든 게 로드께서 계셨기에 가능한 일이옵니다. 보통이라면 어림도 없는 일이었을진대···.”
어둠 속에서 여성의 실루엣이 왜소한 노인의 그림자 앞에 엎드려 경의를 표했다.
“상황은··· 알고 있겠지···?”
“네, 유페르쉬와 브로코슬락이 손을 잡고 하위 클랜들을 집어삼켰지요. 설마 그렇게까지 할 줄은 몰랐습니다만, 놈들은 그 선택을 후회하게 될 것이옵니다.”
노인의 느릿한 물음에 그녀가 자신만만하게 대답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그들은 이번 일을 위해 정말 오랜··· 무척이나 오랜 시간을 투자해 왔다.
그 과정에서 로드께서 역천의 서약이라는 해충들과 손을 잡는 것도 망설이지 않았을 정도지 않았던가.
“대체 무슨 생각으로 그런 무리수를 뒀는지는 모르겠으나, 그 많은 혈맥을 강제로 합병해서 모두 아우른다는 건 어불성설이지요. 뱀파이어 클랜 연합 하이브리드라니, 제가 정말 흡혈왕이라도 되는 줄 착각하는 얼간이 아니겠사옵니까.”
비웃음을 가득 담은 목소리로 조롱을 일삼는 여성.
왜소한 노인은 그렇게 신랄하게 상대를 깎아내리는 그녀를 가만히 내려다보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럼··· 곧바로 시작하라···.”
“명을 받들겠나이다.”
그리고 그 말과 함께.
오랜 세월 대륙 동부 지역에 잠들어 있던 전설, 오바이포 클랜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또한 수상한 세력의 움직임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으니.
“빨리빨리 움직여, 이 멍청이들아!”
“커헉! 아, 알겠습니다, 대족장!”
“칫, 혁명가 놈만 아니었으면 일을 더 빨리 마무리할 수 있었을 텐데!”
대륙 남부의 부족 연합에서는 물론.
“준비는?”
“일단 명하신 대로 끝내 놓았습니다. 그런데 공작 각하, 정말 이대로 진행해도 괜찮을지···.”
“허허, 이게 다 우리 제국을 위해서다. 황태자 전하께서 돌아오실 때까지 시간을 벌어야 하지 않겠느냐. 설마, 자네도 그 천한 핏줄에게 황위가 어울린다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
“다, 당치도 않으신 말씀입니다!”
아제리온 제국의 수도 제론에 이르기까지.
그렇지 않아도 환란이 예정된 아우테리카의 사방팔방에서 그동안 미뤄졌던 혼돈의 씨앗이 한꺼번에 싹을 틔우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