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overeign of the Infinite Clones RAW novel - Chapter (210)
#210
설상가상 (2)
선선한 바람이 상쾌하게 불고, 따뜻하면서도 포근한 공기가 몸을 감싼다.
어머니의 배 속에 있는 아기가 이런 기분일까.
자신의 주변을 빈틈없이 둘러싼 절대적인 안정감과 충족감이 치명적으로 그를 유혹했다.
이성을 바로 세우고 제대로 마음만 다잡는다면 충분히 저항할 수도 있겠으나, 지금은 굳이 그렇게까지 할 필요를 느끼지 못했고.
결국, 그는 그 매력에 홀랑 넘어가 그대로 그것에 깊이 침잠했다.
그렇게 시간의 흐름도 잊은 채 그저 무의식 속을 부유하고 있을 때···.
“···스 님? 해리스! 괜찮으세요?”
반복되는 외부의 자극에 그의 정신이 서서히 육체로 돌아오기 시작했다.
“요즘 많이 힘드신가 봐요? 전부터 그런 감이 있긴 했지만, 최근 들어 유독 심해진 것 같네요. 좀 위험해 보일 정도로.”
“아···.”
평소처럼 언덕 위의 나무 그늘에 누워 있던 해리스가 게슴츠레하게 뜬 눈 사이로 눈동자만을 굴려 자신을 부른 이를 바라보았다.
파도가 물결치는 듯한 푸른 머리와 호수와 같은 파란 눈동자.
이런저런 일로 자주 어울리다 보니 친해지게 된 엘프 소녀, 샤피론 실베스티였다.
그런데 그가 눈을 뜨고서도 멍하니 바라보고만 있자, 고개를 갸웃하던 그녀가 이어 고개를 끄덕이더니 뭔가 이해한다는 눈빛을 보냈다.
“흐흠, 하긴! 하이 엘프로서의 교양을 쌓는 게 쉬운 일은 아니겠죠? 물론 저야 어릴 때부터 그에 관한 교육을 받았으니 낙승이겠지만요!”
그렇게 말한 그녀가 으스대듯이 어깨를 으쓱였다.
“후후후, 해리스 님도 긴장하시는 게 좋을걸요? 제가 하이 엘프가 되면 금방 역전할 테니까! 이미 몇 번이나 이미지 트레이닝을 거쳐서 준비도 완벽하답니다?”
“······.”
물론 그녀의 망상은 세계수에게 선택받지 못하면 아무 의미 없는 공염불일 뿐이었지만, 해리스는 어른스러운 마음으로 굳이 그 점을 지적하진 않았다.
···사실, 지금은 입을 여는 것도 귀찮았다.
그러나 한창 신나서 조잘대던 그녀는 그의 반응을 뭔가 다르게 받아들인 듯.
갑자기 입을 꾹 다물고 살며시 그의 눈치를 살피는가 싶더니, 이내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며 조심스럽게 몇 마디를 덧붙였다.
“그··· 그러니까 힘내시라는 그런 뜻인데···. 무, 물론 바닥부터 시작해서 벌써 그렇게까지 성장하신 것도 대단하고요? 어··· 그리고···.”
“아핫—.”
그 어설픈 위로에 저도 모르게 실소가 새어 나왔다.
그녀의 자기애가 강한 거야 처음 만났을 때부터 알고 있던 사실이었다.
좀 철이 없을 뿐이지 나쁜 녀석은 아니라는 것도.
또 해리스가 먼저 하이 엘프가 되면서 거리감을 느낄 법도 한데, 꼬박꼬박 존칭을 붙이면서도 그를 대하는 태도가 그다지 달라지지 않은 것도 신선한 건 마찬가지였으니.
워낙 빠르게 신분이 변화한 터라 이곳에 친한 이도 거의 없는 그에겐 제법 달가운 인연이었다.
거기다 제법 오래 어울리다 보니 이젠 샤피론을 대하는 것에도 나름의 노하우가 생긴 참이었다.
지금처럼 조금 풀이 죽은 듯한 그녀를 상대할 때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스윽—
느릿하게 움직인 해리스의 손이 아공간 마도구를 거쳐, 이내 그녀에게로 뻗어졌다.
그 손에 들린 것은 고소한 향기가 풍기는 봉투 하나.
킁킁—
“앗! 이건 팝콘인가요? 잘 먹겠습니다!”
그 냄새를 맡은 샤피론은 언제 눈치를 봤냐는 듯, 냉큼 그것을 받아 들곤 그의 옆에 주저앉아 봉투를 열었다.
‘이젠 별말 없이 잘 먹네.’
팝콘을 입에 넣고 열심히 입을 오물거리는 그녀를 바라보며 해리스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초기엔 먹을 걸 주면 못내 찝찝하다는 반응을 보이던 그녀였으나, 그게 계속해서 반복되다 보니 이젠 지금처럼 갑자기 음식을 내밀어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경지까지 오게 되었다.
이렇게 보니 왠지 길고양이를 간식으로 길들인 것 같았지만···.
‘그냥 기분 탓이겠지.’
그는 누운 채로 잠시 샤피론을 응시하다가 억눌린 의지를 끌어올려 천천히 상체를 일으켜 세웠다.
“으음.”
어떤 상황에서도 강제로 몸을 움직이게 해주던 통제가 사라지고부턴 몸을 움직이는 것 하나하나가 고역이었다.
이젠 이 자연과의 동화에서 오는 나태함을 오로지 정신력만으로 이겨내야 했으니까.
그래도 전보다 개체에 할당된 정신 능력치 자체가 월등해진 터라, 마음만 먹으면 평소처럼 움직이는 것도 불가능하진 않았다.
조금이라도 여유가 생기면 아까처럼 축축 늘어져 게으름을 부리게 된다는 게 문제일 뿐.
‘그런데, 아까 그 느낌은···.’
그렇게 상체를 일으켜 앉은 해리스가 고개를 돌려 세계수가 있는 방향을 바라보았다.
외침을 막는 성채처럼 거대한 줄기가 한가득 시야에 들어왔다.
‘역시, 그건 기분 탓이 아니겠지?’
한창 자연에 깊이 매몰되어 하나가 되었을 때, 어렴풋이 느껴진 무언가는 분명 세계수의 의지였다.
무슨 이유에서인지 그리 선명하지는 않았으나, 그 안에 담긴 뜻만큼은 어렴풋이 파악할 수 있었다.
‘아, 귀찮다. 그런데 무시할 수도 없고.’
세계수를 가만히 바라보던 그는 결국 애써 자리에서 일어나며 몸 안의 자연력을 끌어올렸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후우웅—!
한순간 바람이 한 점으로 휘몰아치고, 그곳에서 반투명하면서도 거대한 새 한 마리가 나타났다.
전신에 돌풍을 두른 바람의 상급 정령, 파스칼.
해리스의 세 번째 정령이었다.
“웁늄? ···해리스 님?”
해리스는 파스칼이 조종하는 바람에 몸을 맡기며 천천히 공중으로 떠오르다가, 눈을 동그랗게 뜬 채 입안에 든 것을 꿀꺽 삼키는 샤피론을 내려다보았다.
“아— 갑자기 급한 일이 생각나서요. 샤피론 양, 죄송하지만 저 먼저 가 보도록 하겠습니다.”
“네에! 조심히 들어가세요!”
그렇게 해리스는 팝콘 봉지를 껴안은 채 손을 팔랑팔랑 흔드는 그녀와 짧은 인사를 나누고 곧바로 세계수가 있는 방향으로 날아올랐다.
혹시 모르는 일이었으니, 일단 뭘 하기 전에 다른 하이 엘프들과 대화를 나눠볼 생각으로.
‘어? 근데 이거 걷는 것보다 더 편한데? 소환할 때가 좀 귀찮긴 하지만, 일단 유지하는 정도라면···.’
물론 그 와중에도 끊임없이 편리함을 추구하는 건 그의 어쩔 수 없는 본능이었다.
***
세상의 경계가 흐려지고 이리저리 뒤섞인— 미지와 혼돈만이 가득한 공간에서.
그런 주변 환경 따위엔 영향을 받지 않는 듯, 산책이라도 하는 것처럼 느긋하게 거니는 한 존재가 있었다.
“여기까진 순조롭군.”
이 공간엔 중력도, 대지도, 공기도 없었으며 심지어 방향과 시간마저도 흐트러져 있었지만.
그런 것 따윈 그에게 사소한 문제에 불과했다.
‘···진작 이렇게 할 걸 그랬나.’
그 사내, 역천의 서약의 창립자이자 인신(人神)의 사도인 혁명가는 사방에 난 균열을 통해 바깥을 관측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일이 이런 식으로 진행되도록 미리 손을 써두긴 했으나, 그래도 예상치 못한 변수의 개입으로 일이 틀어질지도 모른다고 각오하고 있었는데···.
‘썩 괜찮군. 사냥개도 잡종 사냥을 시작했고.’
그는 고개를 돌려 기괴한 광채가 어린 눈으로 한 균열을 응시했다.
그곳엔 드높게 치솟은 거대한 나무로 접근하는 시커먼 무리가 흐릿하게 비치고 있었다.
‘세계수는 에나멜 대륙의 기둥이자 뿌리. 그것이 흔들리면 대륙 자체가 흔들린다.’
현실에 강림한 신의 일부나 다름없는 그 나무는 분명 대단한 존재였다.
애초에 제법 큰 섬에 불과했던 땅을 지금의 대륙으로 만든 게 바로 세계수였으니까.
그러나 세계수는 화신을 통해 현세에 뿌리내림으로서 만만치 않은 제약 또한 함께 짊어지게 되었는데, 그 대표적인 예가 바로 인과율에 대해서는 다른 신들보다 훨씬 더 취약하다는 것이었다.
하이 엘프 후보였던 세실리의 위치를 자신의 종들에게 정확히 알리지 못했던 것도 그 일환.
그리고 그것은 다른 일에도 충분히 적용될 수 있는 일이었다.
···설령, 그것이 세계수에게 치명적인 위협이 되는 사건이더라도.
‘오바이포 쪽도 나쁘지 않군. 갑자기 나타난 하이브리드라는 놈들이 좀 거슬리긴 하지만. 그래도 대비는 되어 있으니 큰 위협은 되지 않겠지.’
그의 시선이 다른 균열로 향했다.
사실 뱀파이어들에 대해서는 그도 아쉬운 면이 컸다.
비교적 쉽게 끌어들일 수 있었던 라이칸스로프와 달리 그들은 이미 인간 사회에 잘 섞여 있던 데다가, 지도부조차 뿔뿔이 흩어져 반목하는 통에 힘이 분산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처음엔 그도 가장 세력이 강한 유페르쉬에 접근하려 했으나, 하필 그때는 비스크 유페르쉬가 성혈을 계승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시기였고.
그 젊은 뱀파이어는 한창 과한 자신감에 가득 차 있어 말이 통하지 않았다.
‘그래도 최근엔 협력 관계로 묶어 놨다고 생각했건만. 지금은 저들끼리 붙어먹었단 말이지?’
혁명가가 이맛살을 찌푸리며 나직이 혀를 찼다.
이 세계의 모든 라이칸스로프와 뱀파이어가 마땅히 자신을 따라야 한다고 생각하는 그로서는 지금 상황이 마음에 들지 않을 수밖에 없었다.
“···쯧, 창조주의 사도도 알아보지 못하는 우매한 놈들이.”
지금은 당사자들에게조차 잊힌 사실이지만, 사실 그들은 여타 이종족들과는 차원이 다른 기원을 가지고 있었다.
애초에 자체 번식이 불가능해서 감염으로만 수를 늘릴 수 있는 종족이 제대로 된 생명체일 리 없지 않은가?
그들은 인간의 신이 외계(外界)에서 들여온 종자와 인간을 섞어 만든 아인종이었다.
굳이 말하자면 일종의 사생아라고 할 수 있겠지.
이후 신이 심연으로 추방당하며 모든 권한을 박탈당하고 연관성까지 모조리 지워져 버렸지만 말이다.
‘···발테온도 생각 외로 잘해주고 있군. 광기를 가져오면서 조금 걱정했는데.’
이어서 그의 시선이 다른 균열들을 한 차례씩 훑고 지나갔다.
정권 장악이 끝나가는 남부의 부족 연맹은 물론이고, 제국 내부에서도 심상치 않은 움직임이 발생하고 있었다.
황태자를 제치고 제1 후계자가 된 황녀를 암살하고자 하는 적대 세력의 암수.
만약 지금 벌어지는 일들이 전부 제대로 성공하기만 한다면···.
‘교단이 주도하는 판이 흔들리고, 모두가 협력하는 지금의 풍조가 깨질 수밖에 없다.’
이렇게 보다 보니 새삼 시작도 못 하고 좌초되었던 이전 계획들이 아쉬워졌으나, 사실 지금 준비된 것들만 하더라도 각 지역을 뒤집어 놓기엔 충분한 사건이었다.
하물며 지금처럼 위태로운 상황에서 서로 간에 균열이 생긴다면 뒷일은 불 보듯 뻔한 일이었으니.
‘여기서 불사왕까지 날뛰면 금상첨화일진대. 전언은 제대로 전달됐는데 생각보다 반응이 늦군. 진작 움직일 줄 알았건만.’
그렇게 사방에 늘어선 균열들을 쭉 살펴보고도 원하는 것을 찾지 못한 혁명가가 한숨을 내쉬며 두 ‘눈’을 감았다.
그리고 자신의 ‘귀’에 신경을 집중하며.
경계면을 통해 세상의 소리를 엿듣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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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모래알 흘러가는 듯한 노이즈가 사방에서 들려왔다.
세상을 구성하는 이들의 사념이자 세계 자체에서 나는 소리.
그러나 아무리 이 공간에서 그의 권능이 강화된다고는 하지만, 이렇게 엿듣는 것만으로 세상 모든 것을 파악할 수는 없었다.
다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가지는 분명히 알 수 있었는데···.
‘호오, 그래도 조만간 일이 벌어지겠군. 여기다 조금 더 손을 써 볼까.’
다시 감았던 눈을 뜬 그가 흡족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이곤.
그대로 한 손을 옆으로 뻗어— 방금 전까진 그 자리에 없던 무언가를 단단히 틀어쥐었다.
꿈틀— 꿈틀—
마치 저항이라도 하듯 꿈틀거리는 그것, 광기의 씨앗이 반복적으로 전신을 뒤틀었지만.
혁명가는 그에 아랑곳하지 않고 천천히 ‘입’을 열어 그것에게 명령했다.
“———.”
그 직후.
쿠구구구—
씨앗으로부터 시작된 모종의 에너지에 자극받은 심연 깊은 곳의 무엇인가들이 하나둘 연달아 올라오고.
사방에 뚫린 균열을 통해 퍼져 나간 파장에 대륙의 몬스터들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 정도면 됐겠지.’
광기는 심연의 찌꺼기 중 상당히 격이 낮은 편에 속하긴 하나, 그 덕에 이런 식으로 조작하는 데는 제법 수월한 편이었다.
다루는 걸 포기하고 아예 폭탄처럼 던져놓은 채 결과만 기다려야 하는 죽음과는 상당히 대조적인 셈.
애초에 광기를 꺼내도록 유도했던 것 또한 그런 전략적인 선택의 일부였다.
“그나저나, 냄새를 맡을 수 없으니 답답하군.”
그렇게 모든 후속 조치를 끝낸 혁명가가 몸을 축 늘어뜨리며 낮게 중얼거렸다.
이쪽 일은 썩 괜찮은 전개를 보이고 있는데, 다른 쪽 일은 제법 오래 기다렸는데도 영 진전이 없었던 것이다.
‘이 상황에서도 아직도 명줄이 붙어있나. 그만한 액운을 가지고도 질기기도 하군. 어디 있는지 알 수만 있다면 내가 직접 움직일 텐데.’
이렇게까지 대륙을 뒤집어 놓으면 혼란 속에서 금방 죽어 나갈 줄 알았거늘.
아직까지 소식이 없는 걸 보면 상당히 안전한 곳에 있는 모양이었다.
오랜 세월 대륙의 고위층들을 훑었는데도 발견할 수 없었던 걸 보면 그리 높은 위치에 있는 것도 아닐 텐데.
어쩌면 악운이 너무 강해 차라리 죽는 게 나은 상황에 처한 걸지도 모를 일이었다.
“···계속 대륙을 뒤집다 보면 발견되든, 어디서 죽어 나가든 하겠지.”
당장 할 수 있는 일이라곤 그것이 전부.
그래도 ‘후각’이 있으면 좋긴 하겠지만, 당장은 없더라도 큰 문제는 없었다.
일단 계획은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었으니까.
***
대륙 서북부의 대도시 타라크.
“엣츄~! 크흥.”
갑자기 나온 재채기에 서류 더미를 품에 안은 한 소녀가 코를 한 차례 찡그리고는 부지런히 발걸음을 옮겼다.
‘오늘 퇴근하고 튀김이나 사 갈까? 라피가 좋아하던데.’
걱정이라곤 눈곱만큼도 없이, 그런 태평한 생각을 떠올리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