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overeign of the Infinite Clones RAW novel - Chapter (214)
#214
제론의 고난 (3)
쿨럭—
코와 입에서 검게 죽은 피가 쉴 새 없이 터져 나온다.
어떻게든 억눌러보려 했지만, 지금의 출혈은 자신의 의지로 어떻게 할 수 있는 범주를 벗어나 있었다.
‘젠장, 이거 이러다 정말 죽겠군.’
밖으로 흘러나온 피는 그저 현상의 일부에 지나지 않았다.
억지로 무리한 탓에 체내의 마력 회로는 꼬인 것을 넘어 너덜너덜하게 난도질 되었고, 통제가 약해진 틈을 타 범람한 저주가 미친 듯이 날뛰며 그의 생명력을 게걸스럽게 먹어 치웠다.
그나마 하인리히가 준 성표가 있었기에 그 정도지, 그게 아니었다면 겨우 이 정도에서 끝나지 않았으리라.
또 그가 치러야 할 대가는 단순히 그것뿐만이 아니었는데···.
‘그래도 시간을 맞출 수 있었으니 됐어.’
헤스페론은 목에 걸어 옷 안에 넣어뒀던 목걸이가 부스러져 사라지는 것을 느끼며 쓰게 웃었다.
주르륵—
직후, 그의 오른쪽 눈에서 피눈물이 흘러내리고.
서서히 그쪽 시야가 흐려지더니 이윽고 완전히 암전되었다.
‘···오른쪽 눈인가.’
여주인공이 위기에 처한 찰나에 이루어진 극적인 구출.
그 절묘한 타이밍만 따지자면 극한의 상황에서 각성한 주인공이 활약한 클리셰처럼 보일 수 있었으나···.
적어도 지금의 그에 한해서는 그렇게 형편 좋은 이야기가 아니었다.
-한니발 스트라우스 : 그래도 눈 하나 정도면 나쁘지 않군. 강제로 능력을 끌어올릴수록 지불해야 하는 대가도 커지는 법이거늘. 마지막 순간까지 노력한 보람이 있구나.
-할리 : 카핫! 아암, 까짓거 눈이야 새 걸로 하나 달면 되지! 나처럼!
한스가 불사의 군대를 수습하는 과정에서 얻은 흑마도구에는 온갖 기상천외한 능력을 가진 물건이 많았다.
정작 그 대부분이 생명력이나 수명 따위의 대가를 요구해 언데드들은 쓸 수 없었다는 게 아이러니했지만.
《개체가 조건을 달성하여 성장합니다. 스킬「결속의 끈」이 특수스킬「맹약의 사슬」로 진화합니다.》
이번에 헤스페론이 사용한 목걸이도 그중 하나였다.
그 기물이 부족했던 스킬 성장치 일부를 대신 채워준 덕분에 「결속의 끈」을 진화시켜 계약 대상인 라일리를 소환할 수 있었던 것이다.
‘추가적인 보정에 더해 방금처럼 강제적인 영향력까지 행사할 수 있게 되었다. 심지어 무생물과도 결속을 맺을 수 있게 스킬의 적용 범위까지 확대됐고.’
물론 막 스킬이 진화한 만큼 그 활용성에 대해서는 좀 더 고민해 봐야겠으나, 어쨌든 할 수 있는 가능성이 늘어났다는 사실은 환영할만한 일이었다.
“헤론···?”
그때 그의 귓가로 라일리의 얼떨떨해하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하긴, 꼼짝없이 죽었다고 생각한 순간에 정신을 차려 보니 외간 남자의 품 안이다.
당황스러운 게 당연하지.
하지만 지금은 한가하게 이야기나 나눌 때가 아니었다.
그는 그녀를 쳐다보지도 않고 그저 씨익 웃으며 입을 열었다.
“라일리, 대화는 나중에 하자. 지금은 상황이 좀 급하니까.”
“···응.”
헤스페론의 시선은 처음부터 끝까지 줄곧 한 곳에 고정되어 있었다.
조금 떨어진 곳에 우두커니 서 있는 사내, 스타브에게로.
그는 여전히 한 손에 기괴한 단검을 든 채로 고개만 돌려 이곳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이제 남은 건 「맹약의 사슬」로 라일리와 나를 동기화하고, 「영웅의 발자취」로 이 자리를 벗어나는 것뿐인데···.’
다만, 막 무리해서 라일리를 소환한 탓인지 「맹약의 사슬」의 연결이 흔들려 다시 정비할 시간이 좀 필요했다.
본래 실력에 맞지 않는 무리한 스킬 운용이었으니 어쩔 수 없는 문제겠지만, 지금 상황에서 그건 절대 좋은 소식이 아니었다.
“귀찮게 하기는···.”
아니나 다를까.
스슥—
작게 중얼거리던 스타브의 몸이 흐릿하게 일렁이고.
‘역시 기다려 줄 리가 없나!’
헤스페론의 정신이 고양됨과 동시에 「신경과민」이 활성화되어 주변 시간이 급격하게 느려지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 상태에서도 저만한 속도라고?’
그 한없이 늘어지는 세상 속에서 보이는 스타브의 움직임은 명백히 이질적이었다.
느릿느릿 멈춰가는 주변과 달리 혼자 성큼성큼 이쪽으로 접근하는 모습엔 절로 소름이 돋을 지경.
‘···요즘 워낙 큰물에서만 놀아서 잘 실감이 가지 않았었는데.’
최근 들어 적이고 아군이고 온통 거물들과만 어울리다 보니 무뎌진 감이 있었으나, 원래 극의라는 경지는 결코 낮은 수준이 아니었다.
수백 년은 거뜬히 사는 뱀파이어 사회의 3강 브로코슬락 클랜에도 진혈은 로드를 포함해 셋밖에 없었고, 대륙 제일의 영향력을 자랑하는 그 주신교단에서도 수뇌부인 팔라딘과 대주교급에 해당하는 경지였으니까.
그런데 그런 상대가 지금 두 눈에 살기를 품고 흉흉하게 이쪽으로 쇄도해 오고 있는 것이다.
헤스페론은 이를 악물고 억지로 몸을 움직였다.
그러나 이쪽이 사력을 다해 간신히 뒤로 한 발 물러섰을 땐 이미 저쪽은 거침없이 대여섯 걸음을 내디딘 뒤였다.
비정상적인 스테이터스와 스킬로 겨우 상대를 인지하곤 있다지만, 지금의 강화된 육신조차 극의에 달한 기사의 움직임에 대응하기엔 턱없이 부족했다.
‘큭, 조금만 더!’
느리게 흘러가는 시간 속에서 동기화 작업 또한 마찬가지로 더디게 진행되고 있었다.
아무리 마력이 물리 법칙에 크게 구애받지 않는 에너지라곤 하나, 그것이 지나는 통로는 엄연히 현실의 육체였던 만큼 완전히 무관하지도 않았으니 어쩔 수 없는 일.
‘근접전으론 가망이 없다. 최대한 접근하지 못하게 해야 해.’
결국 헤스페론은 시간을 벌기 위해 자신이 가진 모든 수단을 쏟아붓기 시작했다.
하인즈 2세의 「정제혈정」이 농축된 핏빛 구슬이 무더기로 투하되며 그곳에 각인된 혈마법을 사방으로 뿜어냈고.
하인리히의 신성력이 가득 담긴 성표가 상대의 발길을 막기 위한 방벽을 형성했다.
또 거기에 저주받은 물건을 비롯한 온갖 마도구까지 총동원된 건 두말할 것도 없었다.
“큭, 번거로운 짓을! 대체 이런 물건들은 어떻게 구한 거지?”
스악—
촤촤악!
그러나 안타깝게도.
상대는 그의 깜짝 선물 세례가 그리 마음에 들지 않았던 모양이었다.
-하인리히 : 단순히 쾌(快)만이 전부가 아니군. 매개체를 통해 발현한 불완전한 술법의 취약점을 정확히 노리고 있어. 확실히 실력은 지오스 이상이다.
스타브는 짜증 난다는 듯 이를 갈면서도 맹렬하게 타오르는 오러의 검날로 모든 방해를 분쇄하며 다가왔다.
이젠 정말 지척이라 할 수 있는 위치까지.
욱씬
저주받은 물건을 너무 남발한 것 때문일까.
헤스페론의 전신··· 그중에서도 오른손에서 극심한 통증이 전해졌다.
하지만 그렇다고 이제 와서 포기할 수도 없는 노릇.
그는 품 안의 라일리를 끌어안고 다시 몇 걸음 더 뒤로 물러났다.
뿌드득—
느려진 세상 속에서 놈의 페이스에 맞추기 위해 무리한 탓인지 전신의 근육이 비명을 질러댔으나, 지금은 그런 사소한 것에 신경 쓸 때가 아니었다.
“스타브, 네놈! 이 더러운 배신자가 감히 황녀님을!”
“크윽! 어차피 여기서 죽는 거, 이대로 얌전히 당할 것 같으냐!”
그렇게 그가 뒤로 물러난 사이, 지금까지 살아남아 있던 몇몇 기사들은 오히려 그 앞을 막아서며 목숨을 도외시하고 스타브의 발목을 잡고 늘어졌다.
이미 심각한 부상을 입은 데다 대세를 거스르기엔 한참 부족한 숫자였지만, 그들 또한 하나같이 최정예라 할 수 있는 이들.
적어도 이 급박한 상황에서 아주 잠깐의 시간을 벌어주기엔 충분한 전력이었다.
“큭, 멍청한 것들. 이젠 이런 놈들 막는 것 하나 제대로 못 하나?”
“죄, 죄송합니다, 대장님!”
그리고 장렬하게 산화한 기사들이 목숨으로 얻어낸 그 순간은.
헤스페론이 정말 간절히 원하던 찰나였다.
‘됐다.’
그는 한쪽만 남은 시선으로 스타브의 칼날에 쓰러지는 최후의 기사를 바라보며 깊게 심호흡했다.
“후우— 당신들.”
그리고 마지막으로 사방에서 맹렬히 달려드는 배신자들의 얼굴을 쭉 훑으며 나직한 한마디를 내뱉고는.
“어디 실컷 발버둥 쳐 보라고.”
손바닥을 아래로 뒤집어 마지막 선물을 바닥에 툭 떨어뜨리는 것과 동시에 「영웅의 발자취」를 발동했다.
이후 공간이 일그러지며 흐려지는 시야 너머.
살벌한 기세로 이쪽을 향해 달려드는 놈들과 반대로, 스타브가 다급하게 뭔가를 외치며 뒤로 몸을 던지는 모습이 슬로우 모드처럼 지나가다가···.
화면이 바뀌는 것처럼 주변 광경이 한순간에 변화했다.
‘역시 감각이 좋단 말이야. 뭐, 사실 진짜는 이제부터지만. 라일리가 무사히 탈출한 시점부터 저놈들은 이미 나락으로 떨어진 거나 다름없지.’
그건 저들뿐만 아니라 이 일과 조금이라도 연관이 있는 놈들 또한 마찬가지.
수도에 테러를 저지르면서까지 황녀를 제거하려는 무리수가 실패했을 땐 그에 합당한 대가가 따르는 법이었다.
아, 참고로 선물은 정말 별거 없었다.
그저 이전까지 꺼내 놓았던 것들이 영 마음에 들지 않는 눈치라, 이대로 헤어지기도 아쉬우니 좀 더 신경 써서 준비했을 뿐이니까.
한계까지 꾹꾹 눌러 담은 한스 특제 심연 폭탄을 말이다.
***
대륙 전역에서 일어난 불사의 군대의 대대적인 침공.
그것은 세계 각지에 이전까지의 습격들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큰 피해를 안겨주고 있었다.
[끼히히힉!]까드득! 까득—!
[우리와 함께하자!]“죽을 각오로 막아! 여기가 뚫리면 도시 전체가 위험하다!”
“자, 잠깐. 이거 그동안 들어왔던 것과는 다르잖아!”
“지원은! 지원은 아직인가? 이제 진짜로 무리라고!”
그 가장 큰 원인은 지도부의 안일한 대응에 있었다.
이번 습격의 위험성은 이미 성자 하인리히가 몇 차례씩이나 누누이 강조한 바 있었으나—.
여태까지 ‘한스’의 온화한 침공에 익숙해진 이들이 기존 대응 수준을 적당히 높이는 정도로 충분할 거라 생각한 게 문제였다.
[아아—! 좋구나! 이 얼마만의 인세란 말인가! 이 감미로운 피와 비명이 날 흥분시키는구나! 좋구나, 좋아. 더— 더 울부짖거라!] [이 땅에— 끝나지 않는 공포를— 영원한 죽음을—!]심지어 이번에 쳐들어온 침략자들 사이엔 그동안 불사성에 틀어박혀 있던 고위 언데드들마저 간간이 끼어있기까지 했으니···.
‘이 정도 수준이면 되겠지?’하고 방심하다 상황이 난장판이 되어 버린 건 순식간이었다.
그간 두문불출하던 고위 언데드들이 북부 산맥에 쌓인 병력을 이끌고 대륙 곳곳을 무자비하게 타격하면서, 그에 휩쓸린 민간인들의 피해도 눈덩이 불어나듯 커지고 있었다.
그간 애매한 평화가 이어지며 살짝 정체되어 있던 시국을 뒤흔들기에는 충분한 사건.
그러나, 그런 것과는 상관없이 언제나처럼 부지런히 움직이며 누구보다 확실한 성과를 보이는 이들도 있었는데···.
슈욱— 펑!
[크으으—!]쿠웅!
이번에 새로운 인물을 영입한 용사 파티가 바로 그 장본인이었다.
“상황 종료. 이제 주변에 특별한 적은 감지되지 않습니다.”
바람으로 이루어진 화살로 적의 우두머리였던 데스나이트의 핵을 날려버린 녹색 머리의 엘프가 담담하게 입을 열었다.
그녀는 하이 엘프이자 엘븐 킹덤의 전투 집단인 파수꾼들의 수장으로, 2차 정상 회의 직후 용사 파티에 합류하게 된 리디아 그랜우드였다.
처음엔 곧 은퇴를 앞둔 라포리의 후임으로서 이온 대륙에 온 그녀였지만, 급박하게 흘러가는 현 상황과 맞물려 자연스럽게 파티에 합세하게 되었다.
물론 애초에 전투 인원이었던 그녀가 이온 대륙에 사절로 온 것도 이 혼란스러운 정세에 능동적으로 대응하기 위함이었으니 그리 뜬금없는 일도 아니었다.
다만, 그로 인해 또다시 은퇴가 뒤로 미뤄져 버린 라포리만 안타까울 뿐.
“성자님? 괜찮으신가요? 아까부터 전투에 집중도 못 하고 뭔가 불편해하시던 것 같던데.”
그렇게 파티가 슬슬 뒷정리하고 있을 때, 심각한 얼굴로 조용히 생각에 잠겨있던 하인리히에게 다가간 한 여성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흑발에 흑안을 가진 자그마한 체구의 소녀, 제국의 대마법사 이세아 프리스틴이었다.
“아, 이세아 님. 조금 걸리는 게 있어서 말이지요. 지금은 괜찮습니다. 막 해결된 참이거든요.”
그에 제국 쪽의 상황을 살피던 하인리히는 그녀를 보며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다행히 헤스페론과는 달리 라일리 황녀는 다친 곳도 없이 무사했으니 그녀에게도 당당하게 말 할 수 있었다.
음모를 꾸민 놈들이 철저하게 통신을 봉쇄한 탓에 아직 제론에서 일어난 변고를 알지 못한 듯했지만, 조만간 그녀에게도 연락이 갈 터.
아마 그땐 그녀도 지금처럼 평온한 모습을 보이진 못하겠지.
“···그런데, 이번엔 평소보다 사상자들의 수가 훨씬 더 많네요. 언데드 전력도 여태까지 본 적 없는 수준이었고. 이런 규모의 공습이, 전 대륙적으로 일어나고 있다는 말이죠?”
“하아— 그렇지요. 아! 저도 이제 부상자들을 수습하는 걸 도와야겠습니다. 아무래도 저 인원을 성녀님 혼자 감당하시긴 힘드시겠죠.”
“아, 그럼 저도 주변 정리를 도와야겠네요.”
이세아는 서둘러 환자들 쪽으로 향하는 하인리히를 뒤로하고 다시 처참하게 망가진 주변을 둘러보다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지금 그들이 있는 곳은 툴크 왕국 최남단의 교역 도시인 사리단, 그중에서도 상인 연합의 본부가 있는 지점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사람들로 활기가 넘치긴커녕, 무슨 전쟁터 한복판에 온 것처럼 피폐하기 그지없을 지경이었다.
“···그런가. 이제야 확실히 실감이 가네. 우리가 무엇과 싸우고 있는지.”
마왕의 침공. 죽음이 가득한 대지. 세계 멸망의 위기.
지금까진 조금 멀게 느껴졌던 그것이 확실하게 체감되기 시작했다.
그렇게 잠시 가만히 있던 이세아는 주먹을 꽉 움켜쥔 채 자신이 도울 수 있는 일을 찾아 자리를 옮겼다.
그리고, 양심의 가책 때문에 서둘러 자리를 피하던 하인리히는 그녀의 혼잣말을 듣고 내심 한숨을 내쉬었다.
‘후우, 한스···.’
사실 자신의 심정도 그녀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어떻게든 지금의 사태를 끝내고 싶은 마음뿐.
누가 뭐래도 그는 정의와 빛을 수호하는 이 세계의 용사였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