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overeign of the Infinite Clones RAW novel - Chapter (216)
#216
라이칸스로프 (1)
난데없이 조사대를 이끌게 된 해리스는 그 와중에도 최선을 다해서 태만한 삶을 추구했다.
이제는 아예 움직이는 것 자체를 바람의 정령 파스칼에게 맡기고 자기는 허공에 축 늘어진 채로 이동한 것이다.
어차피 정령과 그는 마음으로 연결되어 있으니 생각만으로 움직임을 조절하는 것도 그리 어렵진 않았다.
‘정령술 수련도 되고 말이지.’
아직 바람의 정령 파스칼은 상급에 머물러 있는 상태.
그에게 최상급 정령은 번개의 정령 와트밖에 없었으니 이것도 나름 좋은 기회라고 할 수 있었다.
물론 주변에서 보기엔 하이 엘프로서의 품위와 체통이 영 말이 아니긴 할 테지만, 당장 이렇게나 편한데 알게 뭐람.
그리고 그에겐 수련 외에도 나름 합당한 핑계가 있었다.
이 상태로 자연과의 일체화를 시도해 다시 한번 세계수의 의지를 느끼기 위해서라는.
애초에 이렇게 그가 조사를 나서게 된 원인이 그것 때문 아니던가?
‘지금까진 영 수확이 없긴 한데.’
처음 느꼈던 그 감각이 정말 착각이었던 건지, 그날 이후로는 딱히 이렇다 할 진전이 없었다.
특별히 세계수로부터 계시가 내려오지 않는 것도 마찬가지고.
그런데 조금 전, 그가 게으름··· 아니, 최선을 다해 「자연 동화」를 전개하며 허공을 부유하고 있을 때.
광범위하게 느껴지는 대자연의 숨결 끄트머리에서 아주 미묘한 이질감이 감지되었다.
해리스 수준의 미친 몰입이 아니었다면 도저히 알아채기 힘들었을 정도의 미묘함.
마침 그땐 다른 엘프들이 사방으로 흩어져 조사 활동을 벌이고 있던 터라, 그는 일단 상황만이라도 살펴보고자 홀로 그 장소로 향했고···.
그렇게 발견한 것이 바로 저 열댓 명의 라이칸스로프 무리였다.
뭔가 의식이라도 하는 양 전원이 가슴팍에 기이한 붉은 문장을 새기고, 중앙의 간이 제단을 둘러싼 채 그 위에 나타난 심연의 균열을 바라보고 있는 수상한 놈들이었다.
-하인즈 2세 : 과연, 저들이 라이칸스로프인가. 최근 몇 년간 이온 대륙에서의 움직임이 눈에 띄게 줄었다고 들었는데. 비밀리에 에나멜로 이주했던 모양이군.
-휴고 : 아니, 그것보다 저거 심연 아냐? 위험한 거 같은데···? 에나멜 대륙은 세계수의 영향 때문에 안전한 거 아니었어?
-해리스 : ···아, 정말 싫다···.
해리스가 그간 엘프로서 받은 교육 중에는 이 에나멜 대륙의 탄생에 대한 이야기도 있었다.
수천 년 전에 있었던 신화와도 같은 전승.
처음엔 이종족들도 이온 대륙에서 함께 어울려 살아가고 있었으나, 어떠한 이유로 그들은 인간이 없는 새로운 터전을 필요로 하게 되었다.
그에 갈 곳 없이 방황하는 이들을 안타까이 여긴 한 자애로운 신이 자신의 화신(化身)을 지상에 보냈으니.
그것이 바로 세계수의 묘목이었다.
그 묘목은 조금 큰 편에 불과했던 에나멜 섬을 이종족 모두를 수용할 수 있는 거대한 대륙으로 만들었으며.
마침내 중심의 세계수를 지키는 엘븐 킹덤을 비롯해, 이주한 종족들이 주축이 된 여러 국가가 탄생하게 되었다.
‘그게 엘븐 킹덤이 중심에 있는 이유이자, 엘프들이 다른 종족에게도 존중받는 이유라고 했지.’
물론 수천 년 전 일이라 기록도 제대로 남아있지 않고, 어째서인지 장수종의 대표 격인 하이 엘프의 전승에서조차 자세한 이야기가 누락되어 어디까지가 진실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적어도 세계수의 존재와 그 영향력은 당장 눈에 보이는 사실이었으니 그것을 부정하는 이들은 많지 않았다.
그리고 에나멜 대륙을 지탱하는 기둥이자 뿌리나 다름없는 세계수 덕분에, 두 차례의 불사왕 침공 사태에서도 그 여파만큼은 피해 갈 수 있었다고 들었는데···.
-한니발 스트라우스 : 호오, 저렇게 해서 심연과의 경계를 약하게 하는 건가. 직접 보는 건 처음이군. 독특한 방식이야.
그때, 해리스의 시선을 통해 놈들의 의식을 지켜보던 이 바닥 최고의 전문가.
불사왕께서 친히 이 상황을 진단해 주었다.
-한니발 스트라우스 : 직접적인 구멍을 뚫는 건 아니다. 굳이 비교하자면 지금 이온 대륙 곳곳에 남은 상흔에 가깝다 봐야겠지. 보아하니 그 과정에 세계수의 잔가지나 이파리 등이 제물로 사용된 것 같구나. ···거기다 저놈들의 몸에 있는 낙인, 상당히 범상치 않군.
하긴, 진짜 심연과 연결된 통로였으면 겨우 저 정도 인원과 준비로는 어림도 없을 터였다.
지금처럼 은밀한 작업도 불가능했을 테고.
‘문제는 저놈들이 에나멜 대륙, 그것도 엘븐 킹덤의 영역에서 저런 짓을 하는 저의인데.’
해리스는 여전히 자연과 동화되어 기척을 숨긴 채로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굳이 깊게 생각할 것도 없이 좋은 의도가 아니리란 것은 명백한 사실.
아무래도 귀찮은 일과 마주한 것 같았다.
‘그래도 일이 더 커지기 전에 발견해서 다행인가? 놈들이 어떻게 세계수님의 개입을 막은 건지는 지금부터 알아보면 되겠지.’
물론 그건 국가 차원에서 해결해야 할 일이었다.
놈들이 이곳에서만 수작을 부리고 있으리란 보장이 없으니, 어쩌면 에나멜 대륙의 모든 이종족들이 나서야 할지도.
‘이 상황을 파악한 걸로 내가 할 일은 끝났어. 괜히 나 혼자 고생할 필요는 없단 말씀! 뒷일은 다른 사람들에게···.’
그러나.
그렇게 마음먹은 그가 몸을 빼내려던 순간.
킁? 킁킁—
열댓 명에 달하는 무리 중 제단의 정면에 있던, 3미터에 가까운 덩치의 늑대 인간 하나가 코를 킁킁거리고는—.
고개를 돌려, 번들거리는 샛노란 눈동자로 정확히 해리스가 숨어있는 곳을 바라보았다.
“아, 이런.”
해리스의 나직한 한탄이 채 끝나기도 전···.
콰앙—
폭음과 함께 순식간에 거리를 좁힌 흉악한 손길이 그에게로 쇄도했다.
***
뱀파이어와 라이칸스로프는 똑같이 타 종족에게 배척받는 상황이었지만, 그 성향이 판이한 만큼 그들의 입장엔 큰 차이가 있었다.
흡혈 충동을 느낄 때 외엔 이성이 강한 뱀파이어가 무난하게 인간 사회의 어둠에 숨어들어 꾸준히 세를 불린 것과는 달리, 이 늑대 인간들은 종족 전체가 분노조절장애에라도 걸린 것처럼 툭하면 날뛰기 일쑤라 도저히 공존할 수 없었던 것이다.
결국 그들은 폭력 조직의 행동대장이나 전쟁 용병 등을 전전하는 일부를 제외하곤 하나둘 변방으로 내몰리는 신세가 되었고···.
그 숫자 또한 뱀파이어에 비하면 형편없을 정도로 쪼그라들었다.
남은 종족 전체를 합해봐야 뱀파이어의 유페르쉬 클랜 하나에도 미치지 못할 정도로.
“키키킥, 이거 이거~ 역시 세상일 뜻대로 되지 않는 법이라니까? 하여튼 혁명가 그 양반, 들키지 않을 거라고 그렇게 자신만만하더니 영 실속이 없는 건 알아줘야 해. 에잉~ 쯧쯧.”
높게 솟은 나무 위.
꼭대기 부분의 가지에 앉아있던 한 사내가 숲 한쪽을 바라보곤 미친 듯이 낄낄거렸다.
여기서 보이지도 않을 정도로 먼 거리였으나, 자신에게 속한 부하의 상태를 살피는 데 그런 건 아무런 방해가 되지 않았다.
“조금 이르지만··· 이미 들켰으니 어쩔 수 없지!”
그는 거칠게 머리를 헤집더니 그대로 몸을 미끄러뜨려 나무 아래로 훌쩍 뛰어내렸다.
투웅!
그리고 짧지 않은 체공 시간을 거쳐 바닥에 사뿐히 착지한 것은.
이미 인간의 모습이라고는 한 톨도 남아있지 않은, 3미터를 훌쩍 넘는 거대한 늑대 인간이었다.
아우우우——
숨을 한껏 들이쉬고 하늘을 향해 토해낸 하울링.
동족이 아니라면 의미를 알 수 없는 그 기묘한 울림에, 그의 주변으로 하나둘 검은 그림자들이 몰려오기 시작했다.
“드디어 시작인가? 정말 오래 기다렸다, 킹! 당장 움직이자!”
“크르르— 아직 시간이 많이 남았는데 정말 지금 움직이나? 너무 이르면 준비되지 않은 녀석들이 많을 것 같은데.”
“킹이 그렇게 판단했다면 이유가 있겠지. 크허헝!”
그렇게 다가온 이들 중 유독 덩치가 큰 늑대 인간 셋이 앞으로 나서며 으르렁거렸다.
“크힉힉! 카트로페가 제대로 걸렸다. 아주 박 터지게 싸우는 중인 것 같은데?”
“크르르— 그 멍청한 것이 기어코. 설마 하이 엘프가 움직인 건가? 그럼 정말 시간이 없군. 다른 곳에 있는 녀석들도 걸리지 말란 법이 없으니.”
킹이 짤막하게 덧붙인 말에 다소 회의적인 반응을 보였던 이도 곧바로 상황을 파악하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한 번 들킨 이상, 이 일은 속도가 생명이었다.
그렇게 모두가 납득한 듯하자 킹이 자신의 주변에 몰려든 부하들을 둘러보고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여덟 있는 장군급 중 가장 강한 셋, 오십이 넘는 기사급과 그 외 떨거지들.
거기다 일이 시작되면 사방에 흩어진 나머지도 즉시 호응해 들어올 것이다.
···그리고 다른 무엇보다, 자기 자신이야말로 가장 큰 전력이었다.
“부족하면 부족한 대로! 이미 우리는 많이 참았다! 크학학! 가자! 세계수를 통째로 불태우러!”
우오오——
아우우우——
그가 바로 이 마지막 ‘울프팩’의 수장이자 이제는 유명무실해진 늑대 인간 최후의 왕.
그에 역천의 서약에서 스스로 광대를 자처했던, 라이칸스로프 킹이었으니까.
***
라이칸스로프는 뱀파이어들과 종종 비교되는 종족인 만큼, 그 체계도 어느 정도 흡사한 면이 있었다.
뱀파이어가 성혈, 진혈, 순혈, 잔혈과 번외인 서번트, 슬레이브로 나뉜다면.
라이칸스로프는 왕 아래의 장군, 기사, 전사, 병사의 단계로 나뉘었다.
그 계급명에서 알 수 있듯, 그들의 정체성은 오로지 순수한 전투력이었다.
그것도 뱀파이어가 가지고 있는 잡다한 능력이나 혈마법 따위의 고유 기술도 없이, 오로지 육체적인 부분에만 집중되어 있는.
허나 때론 단순할수록 효율적인 것도 있는 법.
그들의 힘과 민첩성, 내구력, 항마력, 재생력 등은 정면 승부에 한해서는 동급의 뱀파이어를 크게 상회할 정도였으며.
···해리스는 그것을 실시간으로 절실히 체감하고 있었다.
딱히 바라진 않았지만.
콰르르릉—!
마른하늘에 날벼락이 치듯, 다시 한번 새파란 스파크가 요란하게 튀기고.
“크허어엉!”
그 안에서 튀어나온 새카맣게 탄 괴물이 순식간에 주변 나무들을 밟으며 공중에 떠 있던 해리스에게 달려들었다.
거기다 바람의 정령으로 옆으로 회피한 그를 따라 허공의 공기를 박차고 궤도를 틀기까지.
‘아, 진짜 까다롭네!’
지금 그의 앞에 있는 라이칸스로프는 아무리 봐도 장군급··· 즉, 마스터에 해당하는 개체였다.
비록 그 수준이 얼마 전에 헤스페론을 애먹였던 황실 수호대장 스타브에 비할 바는 아니라지만, 이제 하이 엘프가 된 지 얼마 되지 않은 해리스에게 번거로운 상대라는 건 변하지 않았다.
파지지직—!
“크르아악! 비겁하게 싸우는구나! 네놈도 사내라면 당당하게 맞서라!”
물론 번거롭다 뿐이지, 그가 이기지 못할 상대란 소리는 아니었다.
‘무슨 헛소리래.’
삼십 분이 넘게 두들겨 맞고만 있으니 저런 반응도 이해는 간다만.
이곳은 숲, 심지어 지척에 세계수가 있는 엘븐 킹덤이다.
그리고 해리스에겐 「세계수의 적자」, 「자연 동화」, 「별의 관조자」, 「자연의 부름」이란··· 나태함이라는 심각한 부작용을 안겨줄 정도로 친화력에 특화된 스킬들이 한가득이었다.
소리의 정령 데시벨로 놈의 예민한 청각은 물론 피부에 닿는 진동까지 봉하고.
바람의 정령 파스칼과 불의 정령 칼리로 후각과 열 감지를 차단했다.
거기에 모든 정령을 동원해 빛과 흙먼지를 일으켜 시각까지 방해하니, 놈은 자연과 뒤섞여 기척이 사라진 해리스를 찾느라 계속 한 박자씩 늦어질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우리 수준에서 그 한 박자의 차이는 치명적이지.’
다시 한차례의 후폭풍이 지나간 직후.
「신경과민」이 발동해 극도로 고요해진 시간 속에서 그가 세계수의 가지로 만든 활— 테미스를 꺼내 들었다.
“후우—.”
헤스페론이 이 속도로 움직였다면 전신의 근육이 파열되어 버렸겠지만, 하이 엘프인 그에게는 큰 부담이 아니었다.
파지직! 화르륵—!
휘이잉! 우우웅—
힘을 끌어올리자 서서히 자연력이 해리스의 주변으로 몰려들었고, 그의 오른손이 빈 활시위를 잡아당기는 것과 동시에 주변의 자연력이 빨려 들어가 한 대의 화살이 빚어졌다.
한 호흡이 끝났다.
라이칸스로프는 다시 거칠게 저항했으며, 해리스도 놈을 다시 번개로 지져 주었다.
두 호흡 째.
재차 자연력을 끌어모으고, 뭉치고, 기존 화살에 합쳤다.
“크아아! 네놈!”
역시나 놈이 반항했지만, 큰 의미는 없었다.
그 단순한 과정을 몇 차례 반복했다.
파지지직!
번개로 이루어진 듯한 화살에.
화르륵—
압축된 화염이 화살촉에 담겼다.
휘우우웅—!
이어서 바람과 진동이 그것을 감싼 직후.
“~~♪”
「조화의 선율」과 함께 「요정 사법」으로 쏘아진 화살이—.
———!
어떤 소음도 없이, 빛살처럼 허공을 가로질렀다.
그리고 이미 수십 분을 두들겨 맞아 쇠약해진 놈을 처리하기엔.
그것으로 충분했다.
***
싸움이 시작된 즉시 소리의 정령 데시벨로 호출한 파수꾼들이 주변을 포위하고 있었기에, 나머지 라이칸스로프들을 일망타진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놈들은 기사급 둘과 전사급 다섯이 포함된 강자들이었으나, 파수꾼들도 엘븐 킹덤의 정예 전투 부대인 만큼 그다지 꿀릴 게 없었으니.
그렇게 상황이 정리되어 가는 와중, 해리스는 한스의 조언을 받아 아직 미완성이던 간이 제단을 파괴했고···.
《세계수가 자신의 아이를 바라봅니다.》
심연의 균열이 닫힌 직후, 매우 익숙한 시스템 메시지를 마주할 수 있었다.
‘엇?’
그에 이어서 이전에 느낀 적이 있던 포근한 기운이 다시 한번 발끝에서 시작해 정수리까지 치달았다.
‘···퀘스트 보상 한번 화끈하시네.’
처음 이것을 받았을 때가 1차 정상 회의에서 한스와 마주하다 하이 엘프의 자격을 얻었을 때였지.
그때만큼 극렬한 변화는 없었지만 불만은 전혀 없었다.
후우우웅—!
덕분에 바람의 정령 파스칼이 와트에 이어 두 번째 최상급 정령이 될 수 있었으니까.
눈을 감은 해리스가 최대한 감각을 확장했다.
늘어난 자연력과 친화력만큼 그가 인지할 수 있는 범위도 전보다 훨씬 더 넓어졌다.
물론 그 부작용으로 밀려오는 귀찮음도 훨씬 더 커졌지만.
그래도 이 정도면 아직 충분히 이겨낼 만했으니 이런 후원이라면 언제든 환영···.
‘가만··· 설마 이거, 경험치 부스터 이벤트인가?’
그때 문득, 그런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