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overeign of the Infinite Clones RAW novel - Chapter (223)
#223
칼코스 부족 연맹 (1)
“흠, 예후가 굉장히 좋군요. 몸이 상당히 단련되어 있어 어느 정도 예상하긴 했습니다만, 생각했던 것 이상의 회복 속도입니다. 그 외에 따로 불편한 곳은 있으십니까?”
“음··· 아뇨. 다른 곳은 다 괜찮습니다. 오히려 전보다 더 힘이 넘치는 기분인데요? 하하핫!”
아제리온 제국 황궁 외곽에 자리한 황실 병원.
하얀 가운을 입은 초로의 신사, 황실 병원장이 이런저런 수치가 어지럽게 떠오르는 태블릿 형태의 마도구를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기분 탓은 아닐 겁니다. 만티코어의 해독샘에 인피실렌의 꽃 등, 온갖 희귀 재료를 사용했으니 당연한 결과지요.”
“오, 그렇군요. 이거 감사한 일이네요! 그럼 전 언제 퇴원할 수 있을까요?”
“흐음— 일단 며칠간은 좀 더 눈과 팔의 상태를 지켜보는 게 좋을 것 같군요. 당장은 안정적인 모습을 보이고 있습니다만, 추후 문제가 생길지도 모르니 말이지요.”
무덤덤하게 질문에 답한 병원장은 이후 몇 가지를 더 물어보다가, 이내 조작하던 마도구를 다시 챙겨 넣고는 그에게 가볍게 고개를 숙이고 물러났다.
“오늘은 이 정도면 될 것 같군요. 문밖에 간호인이 대기하고 있으니, 필요하신 게 있다면 언제든 호출하시면 됩니다. 그럼 전 이만.”
그렇게 인사를 건넨 병원장이 떠난 후, 혼자 남은 헤스페론은 화려한 병실을 한 번 훑고는 자신의 오른팔을 힐끗 내려다보았다.
“대우가 조금 부담스럽긴 한데···. 뭐, 그럴 만도 한가.”
손끝부터 상완 중간까지 휘감긴, 온갖 룬 문자가 새겨진 붕대.
이게 바로 한스 특제 흑마도구를 과하게 남용한 대가였다.
몸에 퍼진 저주는 어찌어찌 걷어낼 수 있었으나, 오른팔만은 세포 하나하나까지 지독한 저주에 변이되어 지금으로선 절단 외에는 답이 없다는 진단을 받았다.
자칫하다간 저주가 역류해 다시 침식이 재개될 우려가 있다는 소견과 함께.
‘굳이 그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겠지.’
불과 이틀 전, 황녀 습격 사건 이후 약 사흘 만에 정신을 차린 그의 앞에 떠오른 시스템 메시지가 있었다.
《개체가 반복된 훈련을 통해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스킬「저주 내성」을 획득합니다.》
한계 이상의 저주를 마주하고 그것을 이겨내면서 관련된 스킬을 습득한 것이다.
물론 내성 스킬 하나만 믿고 설치다간 큰코다칠 수 있었으나, 거기에 이 붕대의 봉인까지 더해진다면 우려할 문제가 생기진 않을 터였다.
‘한쪽 눈이 안 보이는 게 조금 답답하긴 하지만. 평범한 이식으로는 어림도 없단 말이지? 혹시 한스라면 뭔가 방법이 있지 않을까 했는데···.’
그는 오른쪽 눈가를 덮은 금실 자수가 새겨진 검은 안대를 쓰다듬다가 한숨을 내쉬었다.
‘···이게 무슨 개판이야.’
처음 깨어나자마자 상황을 파악했을 때도 황당해서 할 말을 잃었는데, 다시 확인한 지금도 역시 당황스럽긴 마찬가지였다.
‘해리스와 할리가 맛이 간 거야 둘째 치고, 한스가 제일 문제로군. 아니, 대충 무슨 의도인지는 알겠는데···.’
역천의 서약 놈들이 차려 놓은 판을 빼앗을 수 있으면 좋고, 그게 안 되더라도 놈들을 방해하는 동시에 카르마를 최대한 많이 빨아먹을 수 있으며, 그 와중에 할리를 비롯한 용사 파티가 남부에 개입할 수 있는 명분까지 되어준다.
합리적이기 그지없는 명쾌한 한 수.
다만, 그 과정이 상당히 찝찝하다는 것이 문제였다.
“아! 모르겠다! 어떻게든 되겠지.”
결국 헤스페론은 깊이 생각하는 걸 포기하고 푹신한 침대에 몸을 파묻었다.
어차피 이렇게 그가 고민한다고 저 먼 곳에 있는 아바타들에게 큰 영향을 줄 수 있는 것도 아니었으니.
‘다들 원체 개성이 강하니 말이야. 내가 당장 할 수 있는 거라곤···.’
침대에 누운 그의 시선이 옆쪽 탁자에 놓인 고풍스러운 서적들로 향했다.
심심한 입원 생활을 하는 그를 위해 준비된 선물.
하나같이 소속 마법사들만 열람할 수 있는 데다 일반적으론 반출조차 되지 않는, 황궁 마탑이 보유한 마법서들이었다.
당연히 이런 곳에 있어서는 안 되는 것들이었으나, 그에게 이것들을 가져다준 상대는···.
똑똑—
“실례합니다, 헤스페론 님. 라일리 카르테 아제리온 황녀님께서 방문하셨습니다.”
한창 바쁜 시기를 보내고 있으면서도 하루 한 번은 꼭 찾아오는 라일리 황녀였다.
문밖의 간호인이 노크한 직후, 조심스러운 발걸음으로 병실로 들어선 그녀가 헤스페론을 바라보며 배시시 미소 지었다.
그 품에는 새로운 책 한 무더기를 끌어안은 채.
“헤론, 오늘 상태는 어때요? 순조롭게 회복 중이란 말을 듣긴 했는데.”
수행인들을 밖에 대기시키고 홀로 들어와 문을 닫은 그녀가 마법서들을 탁자 위에 올려놓으며 안무를 물었다.
“더 회복할 것도 없지! 당장이라도 퇴원해도 될 것 같은데, 혹시 모를 노파심 때문에 잡혀있는 거니까.”
“그래도 병원장이 하자는 대로 하세요. 그는 이쪽 방면으로는 대륙 제일이니까.”
“뭐, 며칠 정도야 못 기다릴 것도 없으니 상관없어.”
가볍게 어깨를 으쓱인 그는 이미 읽은 책들을 따로 분류하다가 문득 떠오른 생각에 한 권을 잡고 흔들며 그녀에게 되물었다.
“그런데 라일리. 이 마법서들, 이렇게 마음대로 가져다줘도 되는 거야? 나야 고맙긴 하지만 마법사들이 싫어할 것 같은데. 문제가 되지 않으려나?”
마법사, 그것도 황실 마법사면 보통 까다로운 상대가 아닐 터였다.
막 후계자 자리를 공고히 하는 와중에 그들과 척지는 건 그녀에게도 그리 도움이 되지 않을 텐데.
“아, 그건 괜찮아요. 특히 지금 같은 시기엔 더욱더. 당연히 탑주도 이미 허가한 사안이고요.”
살포시 웃으며 하는 말이었지만, 그녀의 말엔 살벌한 뜻이 내포되어 있었다.
라일리를 노린 역도들 중에는 황궁 마탑에 소속된 마법사들도 있었다.
당연히 그에 동조하던 무리가 마탑 내에 상당수 남아있을 거라는 건 자명한 사실.
분노한 그녀의 색출 작업에 한창 피바람이 몰아치는 와중이거늘, 황녀가 직접 나서서 생명의 은인이 볼 서적 좀 빌려 가겠다는데 거기에 대고 뭐라 할 간 큰 인사가 있을까?
정말 아무나 볼 수 없는 금서(禁書)라면 모를까, 마탑 소속이라면 누구나 볼 수 있는 일반 서적에 불과한데 말이다.
‘음··· 뭐, 똑똑하니까 알아서 잘하겠지.’
그에 헤스페론도 그저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했다.
본인이 괜찮다니까 상관없겠지.
“아, 맞아! 헤론이 깨어났다니까, 세아 언니가 대신 안부를 전해달라고 했었어요. 일이 터졌을 때 못 와서 이번에야말로 직접 오려고 했다는데, 지금 도저히 그럴 여건이 안 돼서 미안하다더라고요.”
말을 전하면서도 아쉬운 표정으로 투정 부리듯 입술을 삐죽이는 라일리.
이 병실 밖에선 북풍한설을 몰고 다니는 철혈 황녀 그 자체였으나, 지금은 그저 그 나이대의 귀여운 소녀로 보일 뿐이었다.
‘···음, 무슨 일 때문인지 알 것 같군.’
하지만 그는 차마 그녀와 시선을 마주치지 못하고 슬그머니 시선을 돌릴 수밖에 없었다.
그야 그는 이세아의 바쁜 일정에 단단히 한몫··· 아니, 그 대부분의 이유를 차지하는 일당들과 한 패거리였으니까.
한스와 하인리히, 그리고 할리.
그녀는 그들의 우당탕탕 대환장 파티에 휘말린 피해자 중 한 명일뿐이었다.
막 사막을 넘어 남부 부족 연맹에 도착한— 용사 파티의 다른 이들과 함께.
***
“하아, 어쩌다 또 여기까지.”
이세아는 광활하게 펼쳐진 황무지를 바라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최근 제국에서 큰일이 있기도 했으니 잠깐이라도 짬을 내서 황궁에 한 번 들를 생각이었는데, 이번에 갑자기 터진 일 때문에 그 계획도 물거품이 되었다.
처음 할리가 돌발행동을 했을 때까지만 해도 그저 단순한 해프닝으로 끝날 줄 알았거늘, 거기에 하인리히의 ‘예지’가 이어지며 도저히 몸을 뺄 수 없는 심각한 사안이 되어 버린 것이다.
‘불사왕의 끄나풀이 된 부족 연맹의 대족장이 다른 족장들을 세뇌해 대륙을 향한 전쟁을 준비하고 있다고···?’
확실히 갑작스러운 단교 선언이 미심쩍던 참이긴 했다.
정상 회의 때 남부의 대표가 전혀 그런 낌새를 보이지 않기도 했으며, 서로 간에 오간 논의도 무척 합리적으로 마무리되었으니.
그런데 그 내막에 이런 이유가 있었을 줄이야···.
‘일이 이렇게까지 진행되었다는 것은 생각 이상으로 위험한 상황이라는 뜻이겠지.’
남부의 행보를 꺼림칙하게 여기긴 했지만, 각 족장의 의견 합치가 필요한 연맹 체제에서 지금 같은 순간에 불합리한 전쟁을 일으킬 리 없다고 방심하고 있었다.
논의가 오가는 과정에서 흘러나올 잡음이 감지되지 않기도 했고.
‘그런데 불사왕이 개입했다면 이해할 수 있어. 설마 언데드와 거인으로 대륙의 이목을 흩트려 놓는 동시에 뒤로는 남부에서부터 시작되는 전쟁을 준비하고 있었을 줄이야.’
확실히 이 방법이라면 성자와의 내기를 어긴 것도 아니었다.
뒤에서 어떤 수작을 부렸든, 결과적으로 전쟁을 일으킨 주체는 같은 인간인 칼코스 부족 연맹이 될 테니까.
‘가만, 최근 공화국의 상황도 어수선하다고 들었는데. 설마 그쪽도 불사왕이 손을 쓴 건 아니겠지?’
일이 이렇게 되니 모든 것이 의심스러워졌다.
심지어 얼마 전에 있었던 라일리 황녀 암살 시도 사건조차 그 수작의 일부인가 생각될 정도로.
‘···진짜 그런 거 아냐?’
아무튼 이 ‘예지’를 대신전에 전해 전쟁 대비를 촉구한 용사 파티가 서둘러 남부로 온 것도 그 때문이었다.
뒷일을 대비하는 건 다른 이들에게 맡기고, 그들은 오로지 그들만이 할 수 있는 일을 하기 위해서.
바로 사건의 원흉이 되는 흑막을 사전에 제거해, 애초에 전쟁이 일어나지 않도록 하는 막중한 임무였다.
‘고작 우리 여섯이서 말이지.’
그녀는 흘깃 시선을 돌려 다른 일행을 돌아보았다.
“일단 대륙 연합 차원에서 대비를 시작하긴 할 테지만, 정말 일이 터지면 큰일이에요. 그 전에 어떻게든···.”
“걱정 마십시오. 주신께서 우리의 앞길을 밝혀주실 겁니다. 그러니 우선···.”
진지한 표정으로 대화를 나누는 성녀 리에스타와 성자 하인리히.
“불사왕이 이곳에···.”
이글이글 타오르는 시선으로 황무지 저편을 노려보는 창기사 지오스와.
“이렇게 척박한 땅은 처음인데 신기하군요. 개인적으론 별로 마음에 들지 않는 환경입니다만, 제 주력인 불의 정령의 힘이 강해지니 싸울 땐 나쁘지 않을 것 같습니다.”
신기한 듯 주변을 둘러보며 심호흡하는 하이 엘프 리디아.
“호오—? 이곳이 남부인가.”
뭐가 그리 신기한지 저 너머에 펼쳐진 사막을 바라보며 눈을 빛내는 야만 전사 할리까지.
‘일단 모두가 일당백 이상이긴 한데··· 상대는 불사왕과 국가를 등에 업은 지배자란 말이지.’
저도 모르게 한숨이 새어 나왔으나, 잘 생각해 보면 전통적으로 용사 파티의 주 업무는 전장의 선봉에서 활약하는 게 아니라 원래부터 이쪽이었다.
그간 불사의 군대의 침공에 맞서면서 정신없이 돌아다니다 보니 본분을 잊고 있었을 뿐.
후방 침투와 요인 암살, 전략 물자 생산 시설 및 중요 거점 파괴 공작 등···.
그들 ‘대(對) 불사왕 대응 특수 기동 타격대’의 전신인 결사대도 같은 행보를 보였었으니, 이제 와서 새삼 불평할 것도 없었다.
“으하하핫! 이거 달려서라도 사막을 건널 생각이었는데, 생각보다 편하게 왔구만! 역시 마법은 대단해! 아암!”
그녀가 앞으로의 일에 대한 대책을 강구하느라 끙끙거리고 있을 때.
근심에 빠진 그녀완 달리 파티의 야만 전사는 정말 걱정이라곤 눈곱만큼도 없는 태도로 호탕한 웃음을 터트렸다.
“하아, 할리 씨. 그렇게 속 편하게 웃을 때가 아니에요. 일단 남부로 오긴 했는데, 진짜 일은 지금부터니까.”
일단 알고 있던 남부의 좌표를 바탕으로 사막을 건너 이곳에 도착하긴 했으나, 칼코스는 워낙 폐쇄적이고 부족 단위의 이동이 잦은 터라 정확한 목표의 위치를 잡기도 쉽지 않았다.
그렇게 어영부영 시간을 보내는 동안 그들에 대한 정보는 자연스레 대족장의 귀에 들어갈 테고, 그렇게 되면 최대한 빨리 그를 처치한다는 계획이 어그러진다.
‘최악의 경우엔 대족장은 구경도 못 해보고 부족 연맹 전체와 싸워야 할 수도 있어.’
그가 도망만 다니면서 휘하의 부족들만 갈아 넣으면 무의미한 싸움만 반복하다 탈진하게 될지도 몰랐다.
“엉? 뭐가 문제야? 간단하잖아?”
물론 저 철탑 같은 사내가 지쳐 쓰러지는 모습은 도저히 상상할 수 없긴 하지만.
이세아는 할리의 대수롭지 않다는 태도에 뭔가 생각지도 못한 묘수가 있나 싶어 그를 바라봤으나···.
“놈들의 본거지에 쳐들어간다! 앞을 막는 놈들과 싸운다! 방해하는 것들은 다 때려 부순다! 그리고 대족장을 쳐 죽인다! 이렇게 쉬운 문제가 또 어디 있다고. 와하핫!”
“아··· 예···. 그거야 그렇죠···.”
혹시나 했는데 역시나였다.
사실 그리 기대도 하지 않았기에 실망도 크지 않았다.
“걱정 마십시오. 저희가 어디로 향해야 할지는 이미 알고 있으니까요.”
그때, 파티의 리더인 용사가 그녀에게 다가와 언제나처럼 믿음직한 모습으로 입을 열었다.
그리고 사막의 어느 한 방향을 바라보며 어딘가 가라앉은 듯한 기색으로 씹어뱉듯 말을 이었다.
“저 방향에 있는 사막의 도시, 베오르센—. 그곳이 저희의 목표입니다.”
“···그곳에 대족장이 있나요?”
“예, 거기에 더불어···.”
딱딱하게 굳은 하인리히의 얼굴.
잠시 끊긴 말은 그리 늦지 않게 천천히 이어졌다.
“불사왕 한···니발 스트라우스까지 말이죠.”
***
대족장 발테온의 거점 도시 베오르센.
[···결국 오는가. 그래, 그것도 나쁘지 않겠지. 크크큭—.]그 중심에 있는 가장 큰 건물 안에서, 끝없는 어둠 속에 휩싸인 존재가 한 방향을 바라보며 나직한 웃음을 터트렸다.
오랜만에 이뤄질 재회를 기대하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