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overeign of the Infinite Clones RAW novel - Chapter (227)
#227
불사왕 vs 용사 파티 (2)
고작 문 하나를 넘었을 뿐인데 바깥과는 아예 질이 다른 공기가 훅 밀려들었다.
예상했던 대로 베오르센 중앙의 건물은 더 이상 평범한 공간이 아니었다.
‘···불쾌하군.’
하인리히는 인상을 찌푸리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이미 건물 내부라고 할 수도 없는 넓고 높은 공간이 온통 어둠으로 가득 차 있는 건 물론, 더럽고 답답하며 끈적끈적한 기운이 내부에 들어온 이들을 휘감고 있었다.
마치 그들을 끝없는 바닥으로 끌어들이려는 심연의 구덩이처럼.
그리고 그 공간의 중앙에.
그가 있었다.
[이거 오랜만이구나. 용사 하인리히 세인트 랜드가드.]지금 이 사태뿐만 아니라 대륙 전역에서 일어나고 있는 환란의 원흉.
···그리고 하인리히와 정반대의 성향을 지녔으면서도, 그의 또 다른 일면이기도 한 존재.
“불사왕, 한니발 스트라우스.”
마침내 용사 파티가 그 불사의 왕과 조우하는 순간이었다.
***
‘불사왕.’
뿌득—
용사 파티의 일원, 지오스 칼킨이 창대를 강하게 움켜쥐었다.
‘드디어.’
정말 간절하게 기다리고 기다리던 순간이었다.
그날의 참변 이후 이제 일 년이 지났나? 아니, 아직 일 년도 되지 않았던가?
기분상으론 까마득한 옛날이었던 것 같은데···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역시, 결사대에 들어오길 잘했다.’
그게 아니었으면 이렇게 불사왕을 직접 대면할 기회를 만들기도 쉽지 않았을 것이다.
직접 무기를 맞대는 건 어림도 없었겠지.
물론 그간 불사왕의 습격을 방어하며 그 사건의 관계자였을 수많은 흑마법사들을 참살하긴 했다.
그는 항상 최우선으로 흑마법사들을 목표로 삼았으며, 전투가 끝난 이후엔 살아남은 놈들을 데려가 고문하는 것도 주저하지 않았다.
지오스의 사정을 알고 있는 하인리히도 그의 행동을 별다른 말 없이 용인해 주고 있었다.
그 정의로운 성정을 생각해 보면 분명 불편했을 텐데, 그 또한 정말 감사하기 이를 데 없는 일이었다.
[크크큭— 이거 참, 재미있······.]“불사왕! 지금······!”
지척에서 불사왕과 용사의 언성이 오가고 있었으나, 지오스의 귀에는 전혀 들어오지 않았다.
흐릿한 그의 시선에 아주 오래전의 기억들이 마치 어제 있었던 일인 것처럼 생생하게 떠올랐다.
-“우후후— 어때, 지오스? 이제 아빠가 될 마음의 준비는 했어?”
만삭의 몸으로 사랑스럽게 자신의 배를 쓰다듬던 아내, 안나.
일가친척도 없이 서로에게 서로뿐이던 둘 사이에 아이가 생기고, 마침내 그들은 셋이 되었다.
-“어떡해! 너무 귀여워. 정말 누구 딸이기에 자는 모습도 이렇게 천사 같을까?”
세상에 나와 제대로 눈도 못 뜨고 꼬물거리던 그 아이를 기억한다.
-“흐—흐에에엥—!”
-“애를 울리면 어쩌자는 거야, 지오스! 장난도 적당히 쳐야 할 것 아냐! 응응~ 괜찮아, 니아. 엄마 여기 있어요.”
아이를 대하는 게 서툴러 항상 실패만 하던 그 순간을 기억한다.
-“아빠빠빠! 이거 봐, 이거! 꺄하하—!”
말도 못 하던 아이가 어느새 훌쩍 자라, 자신에게 다가와 해맑게 짓던 웃음을 기억한다.
-“그럼 난 우리 딸이랑 데이트하면서 천천히 갈 테니까, 영주인 아빠는 먼저 가서 혼자 일하고 있으면 되겠네. 그치~?”
-“그치~? 히힛! 아빠, 얼른 갈 테니까 울지 말고 기다려? 알았지?”
-“얘는, 아빠가 어디 외롭다고 울 사람이니? 그냥 어디 구석에 틀어박혀서 땅이나 파고 있겠지.”
-“아! 진짜 그럴 거 같아! 이히히!”
···마지막 인사를 나누던 그 순간을, 아직도 선명히 기억한다.
지오스는 한 손을 들어 자신의 가슴팍에 깊게 새겨진 흉터를 천천히 쓰다듬었다.
비보를 접한 후, 손이 피범벅이 되고 근육이 갈기갈기 찢어질 때까지 가슴을 쥐어뜯으면서도 필사적으로 눈물을 삼켰다.
울지 말고 기다리란 딸의 마지막 말을 지키기 위해.
물론 아무리 마스터급 기사라 해도 그런 것까지 뜻대로 되진 않았지만.
그래도 그날 이후엔 눈물 한 방울 흘린 적 없는데, 그 정돈 봐 주지 않을까?
‘역시, 날 너무 잘 안다니까.’
덧붙여 구석에 틀어박혀 땅이나 팔 거란 것도 틀린 말이 아니었다.
지금은 목표를 세우고 밖으로 나왔다지만, 한동안 거처에 틀어박혀 멍하니 허송세월한 것도 사실이었으니.
쓰게 웃은 그가 다시 창을 강하게 움켜쥐며 사냥 직전의 맹수처럼 자세를 낮췄다.
그 시선을 이 모든 일의 원흉에게로 향한 채, 언제든 숨통을 끊을 수 있도록 상대의 일거수일투족을 뇌리에 각인하면서.
‘그런데··· 미안하구나. 난, 더는 기다리고 싶지 않단다.’
혈관 속을 매서운 불길이 타고 흘렀다.
슬픔과 절망을 연료로 삼아 타오르는— 복수와 분노라는 이름의 업화가.
‘아무리 기다려도 너희가 올 수 없다면, 내가 가야겠지.’
그 열기가 너무 강한 탓에, 이미 재가 되어버린 지오스의 입가에 일그러진 미소가 맺혔다.
그리고 곧 그가 기다렸던 대로.
용사 파티와 불사왕의 싸움이 시작되었다.
***
쉬익 쉬이익—!
촤아악! 촤악!
하인리히는 불사왕을 향해 질주하며 연신 사방에서 짓쳐드는 심연의 뱀을 베어냈다.
성검을 사용한 「축복 : 광검」은 심연에게도 천적이나 다름없었으나, 그것은 계속해서 베여 사라지면서도 아랑곳하지 않고 끝도 없이 몰려들고 있었다.
‘큭, 상황이 생각보다 더 심각하군.’
다행히 조금 뒤쪽의 지오스가 계속해서 굴절창으로 지원해준 덕에 어느 정도 숨 쉴 틈은 있었다.
그는 「축복 : 증량」을 사용해 신성력을 한층 더 고조시키며 이를 악물었다.
사실 하인리히가 불사왕과 했던 대화는 그리 중요한 내용이 아니었다.
그저 흔해빠진 마왕과 용사의 대거리일 뿐이었으니까.
진짜 중요한 것은 암묵적으로 진행되어야 했을 뇌 내 회의였다.
이렇게 직접 대면하는 상황까지 오면 한스도 마지못해 다시 소통을 막는 장벽을 해제할 줄 알았는데···.
‘양보할 생각이 없다는 거겠지.’
전투가 시작된 지금도, 대화의 창구는 열릴 생각을 하지 않고 있었다.
나는 여기서 물러설 생각이 없다. 난 내 하고 싶은 대로 할 테니, 물러설 거면 너나 물러서라.
그런 식의 일방적인 통보나 다름없었다.
‘한스···.’
콰아앙—! 쾅! 콰쾅—!
그때, 뒤쪽에서 일행들과 함께 있던 리디아가 쏘아낸 화살이 연달아 불사왕의 방벽을 뒤흔들었다.
하워드가 장작으로 사용하고 있는 세계수의 마른 가지로 만들어진 화살이, 정령의 힘은 물론 리에스타의 신성력까지 품고 폭격처럼 쏟아졌다.
[쯧, 귀찮게 하는군.]그 중얼거림이 끝남과 동시에.
공간을 메우고 있던 어둠이 꿈틀거리더니 일제히 날을 세워 후방의 파티원들을 뒤덮었으나.
“주신이시여— 저희를 부정으로부터 보호해 주소서!”
리에스타의 기도문과 동시에 퍼져나간 빛의 구가 일대의 어둠을 밀어내며 일행을 보호했다.
사방에서 밀려드는 압력에 여전히 힘 싸움을 하고 있기는 했지만, 그녀 또한 성녀였으니 그리 쉽게 무너지진 않을 터였다.
파직—! 파지직—!
그리고 그 옆에 있던 이세아 주변의 공간에서.
개전 직후에 시작돼서 지금까지 몇 번이고 반복된 스파크가 재차 튀어 올랐다.
“큭, 이렇게 정신없는 와중에 아직도 이쪽을 신경 쓸 여유가 있다고? 이 무슨 말도 안 되는 괴물이···!”
그녀는 식은땀을 흘리며 입술을 짓씹었다.
주변에 어마어마한 속도로 밀집한 마력이 구조를 이루기 무섭게, 스파크와 함께 무너지길 반복되고 있었다.
고위 마법사가 까마득한 하수를 상대로나 사용한다는 마법의 역산(逆算)을 대마법사인 그녀를 상대로 사용하고 있는 것이었다.
그것도 한창 다른 이들을 상대하는 와중에, 수십 차례 동안 계속.
[가소롭다.]심지어 거기서 끝난 것도 아니었다.
화르륵— 콰앙!
그녀가 어찌할 틈도 없이 시전된 고위 흑마법, 새카만 지옥의 불길이 성녀가 유지하고 있던 빛의 장벽에 내리꽂혔다.
“윽!”
그 충격에 보호막 유지는 물론 파티원들의 몸에 걸린 가호를 유지하고 있던 리에스타가 낮은 신음을 흘렸다.
남의 마법을 방해하면서 자신은 아무렇지 않게 고위 마법을 사용한다.
그 불합리한 상황에 이세아가 이를 갈며 다시 정신을 집중했다.
성과가 있든 없든, 아예 손을 놓아버린다면 상대는 그만큼의 여유로 고위 마법을 비처럼 쏟아낼 테니까.
하지만 그렇게 모두가 애를 쓰는 와중에도.
최전방에 선 용사의 몸에는 조금씩 피해가 늘어나며 부담이 가중되고 있었다.
[크흐흣! 왜 그러지? 용사? 원하는 게 있다면 직접 쟁취해 보거라!]성검으로 발동한 광검은 불사왕에게도 극상성.
날아드는 수많은 공격을 요격해 접근한 후 그 단단한 방어막까지 무처럼 썰어버릴 수 있는 건 좋은데, 상대는 공격하는 대로 다 맞아주는 허수아비가 아니었다.
‘···짜증 나는군. 할리가 있었다면, 조금은 달랐을까?’
어찌어찌 방어막을 벗겨내는 데 성공하더라도 이어지는 반격에 발목이 잡힌 사이 다시 거리가 벌어지길 몇 차례.
하지만 그는 불사왕에게 치명타를 안길 때까지 멈출 수 없었고, 그 과정에서 어쩔 수 없이 감수한 피해는 계속해서 누적되고 있었다.
‘이래 봬도 성기사니 당장 큰 문제가 되진 않겠지만. 아무리 그래도 심연이 섞인 공격이 과하게 중첩되는 건 곤란해.’
아니, 그 전에 동료들이 과연 그때까지 버틸 수 있을지도 의문이었다.
그가 지금껏 몇 차례고 접근할 수 있었던 것도 리디아의 지원 사격과 리에스타의 신성력 보조, 그리고 그에게 향하는 공격을 중간에 요격해 주는 지오스가 있기에 가능한 일이었는데.
‘거기에 이세아 덕분에 한스의 마법 폭격이 줄어든 것도 제법 도움이 됐지.’
여기에 할리도 있었다면 정말 한방 먹일 수 있었을 텐데.
뭐, 그랬다면 한스도 아직 불사성에 남아있는 간부 중 몇을 소환한다거나 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꽈악—
하인리히는 아쉬움을 떨치고 재차 성검을 강하게 움켜쥐었다.
한스가 단독으로 상대해주는 지금이 기회였다.
지금까지 그래왔던 것이 습관으로 남은 건지 단순한 오만인지는 모르겠지만.
‘수단을 아낄 때가 아니군.’
지금 그에게 치명타를 입혀 며칠만이라도 얌전히 만들 수 있다면 본체가 깨어날 때까지 시간을 벌 수 있을 터.
하인리히는 결정적인 순간을 위해 남겨뒀던 「축복 : 도약」까지 아낌없이 사용하며 성검을 휘둘렀다.
진심을 담아, 이 빡통의 해골을 쪼개기 위해서.
***
싸움이 진행되는 내내, 지오스는 자신이 할 수 있는 일과 할 수 없는 일들을 차분히 분석했다.
그가 체하이에게 전수받은 굴절창은 공간을 뛰어넘어 원하는 곳을 타격하는 오러 운용의 극의였지만, 정말 아무런 제약이 없는 건 아니었다.
‘내 공격은 불사왕의 마력 방벽 너머까지 닿지 않는다.’
사실 이건 불사왕뿐만 아니라 일정 수준 이상의 방호 수단 모두에 적용되는 문제였으니 딱히 새삼스러울 것도 없었다.
그가 초월에 올랐다면 모를까 아직 거기에 닿기엔 한참 부족하기도 하고.
‘설령 방어막이 파괴된 순간을 노린다 해도··· 큰 효과는 없겠지, 아마.’
집요할 정도로 상대를 분석하던 지오스는 굴절창을 사용하며 쌓인 공간에 대한 직관을 바탕으로 불사왕의 심장을 둘러싼 비밀을 눈치챌 수 있었다.
‘심장부를 둘러싼 엄청난 수준의 공간 왜곡. 단순히 창끝을 굴절시켜 그곳을 찔러봤자 아무런 의미가 없다. 공간 자체에 개입해 그 너머를 타격한다면 모를까.’
그리고 그건, 지금의 지오스에게는 불가능한 수준의 기예였다.
‘···정상적인 방법으로는 말이지.’
당연하지만 그가 익힌 비기는 절대 평범한 게 아니었다.
초월에 오르지 못한 존재가 오직 오러만으로 공간에 개입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비범함의 극치였으니까.
그리고 체하이의 손에서 만들어진, ‘오러를 사용한 초능력’에 가까웠던 그 기술은.
그것을 계승한 지오스를 통해 좀 더 ‘오러 비기’에 가까운 모습으로 발전되었다.
“후우—.”
그는 창을 휘둘러 주변에서 덮쳐오는 흑마력을 쳐내면서, 심호흡과 함께 주변 상황을 관조했다.
파지직—! 파직! 파직—!
이세아 쪽에서 몇 차례의 스파크가 연달아 튀었다.
그녀도 오기가 생겼는지 자신의 주특기인 어마어마한 마력을 끌어모아 다중 마법의 동시 구축을 시도하고 있었다.
자칫하다간 폭주할 수도 있는 위험한 시도였으나, 덕분에 불사왕이 마법을 사용하는 빈도가 확연히 떨어졌다.
리디아와 리에스타 또한 계속해서 하인리히를 지원하고 있었다.
대체 얼마나 많은 화살을 가지고 있던 건지, 연달아 날아가는 화살이 심연의 뱀들을 꿰뚫었고.
이젠 빛 그 자체로까지 보이는 성녀의 몸에서 뿜어져 나온 신성력이 사방의 어둠을 불사르며 그들에게 힘을 불어넣어 주었다.
지오스의 시선이 다시 전면으로 향했다.
간간이 공간을 넘어 필사적으로 달라붙는 하인리히와 그것에 여유롭게 대응하는 불사왕.
역시 이대론 가망이 없었다.
자칫하다간 용사에 성녀까지 이 자리에서 목숨을 잃을지도 몰랐다.
그리고 그건 정말, 정말 위험한··· 세상의 위기였다.
‘그래, 그러니까··· 이건 어쩔 수 없는 일이야.’
지오스의 입가에 미묘한 미소가 어렸다.
무언가를 기꺼워하는 듯이.
‘불사왕.’
그리고 극의에 오른 마스터급의 기사이자 레스크 왕국의 백작 지오스 칼킨은.
‘아마 이렇게 하더라도, 내가 너를 죽일 순 없겠지만.’
망설임 없이 체내의 오러홀을 비틀고, 쥐어짜고, 뿌리까지 뽑아.
“큽— 쿨럭—!”
그것을 바탕으로 그 자신의 생(生)과 격(格)과 업(業)이 집적된, 한 줄기의 핏빛 오러를 뽑아냈다.
‘그래도 이건··· 상당히 아플 거다.’
막 용사의 성검이 방어막을 가른 직후.
지오스의 창이 내질러지는 것과 동시에— 그 창끝이 공간을 꿰뚫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