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overeign of the Infinite Clones RAW novel - Chapter (232)
#232
실마리
할리가 새로운 각인을 시술받기 전.
베오르센에서 발테온이 사망한 이후, 남부가 한창 그 여파를 수습하느라 여념이 없을 때— 용사 파티는 대강의 상황만 정리하고서 곧바로 그 자리를 벗어났다.
불사왕 한스가 물러서며 끊임없이 이어지던 파상공세도 멈췄고, 그 덕분에 대륙의 혼란도 다소 줄어들었지만··· 그들에게는 절대 미룰 수 없는 일이 있었던 것이다.
“지오스, 이 멍청한 녀석. 내 그리 말했는데. 그렇게 빨리 따라갔어야 했느냐···.”
“···언제든 돌아와 쉬실 수 있게, 준비해 뒀습니다만. 한 번도 오지 않으시더니···. 정말 너무 하십니다, 가주님.”
체하이 내외와 저택의 관리자 올리버가 눈물을 훔쳤다.
이온 대륙 서남부 레스크 왕국의 레가스 남작령, 지오스 칼킨의 저택 한편에 딸린 가족묘에서 열린 간소한 장례식.
급하게 치러진 장례식이긴 했으나 그 참석자들의 면면까지 소박하지는 않았다.
용사 파티 전원은 물론이고 비보를 전해 듣고 부리나케 달려온 레가스 남작을 비롯한 인근 귀족들, 그리고 게이트도 없는 이곳까지 힘들게 찾아온 레스크 왕실의 왕족과 고위 사제들까지 자리하고 있었으니까.
사실 고위 귀족이자 결사대의 일원이 불사왕과의 싸움에서 전사했으니 대대적인 국장(國葬)을 치러야 마땅했으나, 지금은 전 대륙이 휩쓸린 전시 상황이라 어쩔 수 없었다.
물론 이미 수도를 비롯한 주요 지역에 조기(弔旗)를 게양한 데다, 추후에 왕국 차원에서 다시 국장을 치를 계획이라 듣긴 했지만.
‘지오스.’
그리고 장례식이 진행되는 내내.
카르마를 어떻게 쓸지 고민하던 나는 모든 일을 멈추고 하인리히와 할리를 통해 그 장면을 가만히 바라봤다.
슬프면서도 자애로운 표정의 하인리히.
그 정의로운 아바타를 통해, 지오스에 대한 연민과 그가 내세에는 신의 곁에서 가족과 함께할 수 있길 기도하는 마음이 전해졌다.
아쉬우면서도 근엄한 표정의 할리.
그 야만적인 아바타를 통해, 오랫동안 함께한 전우를 잃은 안타까움과 그의 전사답고 장엄한 최후를 인정하는 마음이 전해졌다.
그리고···.
부정적이고 비틀린 아바타인 한스를 통해, 길거리에서 벌레라도 밟은 듯 무감각한 마음이 전해졌으며.
냉소적이고 차가운 아바타인 하인즈 2세를 통해, 그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는 대수롭지 않은 마음이 전해졌다.
거기서 그치지 않고 연달아 이어지는 각 성향에 따른 아바타의 반응들까지.
물론 「마인드 허브」와 「페르소나」, 그리고 전과는 차원이 다를 정도로 강화된 정신력 덕분에 그 과정에서 혼란은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한성현이란 주체는 그저 모든 인격의 중심에 오롯이 존재한 채, 여과된 정보를 받아들이고 객관적으로 판단할 뿐.
‘그게 문제지만.’
다시 입가에 자조적인 쓴웃음이 머물렀다.
‘아바타로만 맺어진 인연. 심지어 내가 사는 세상엔 존재하지도 않는.’
그렇게 매사 상황을 객관적으로 인식하고 있었으니 아바타를 통해서 겪는 상황이 게임처럼 느껴질 수밖에 없었다.
그것이 설령 지인의 죽음이라 할지라도.
‘···산책이라도 해야겠군.’
여전히 「개체 투영」을 사용해 꾸준히 밖으로 나다니고는 있었지만, 아무런 목적 없이 그냥 하염없이 거닐다 오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
그렇게 잠깐 딴생각에 빠져있는 와중에도 시간은 빠르게 흘러.
마침내 장례식이 모두 끝나고, 용사 파티도 업무에 복귀하기 위해 분주히 움직였다.
“얘기 들었습니다. 이번에 불사왕을 물리치셨다고···.”
“과연 성자님이십니다! 칼킨 백작님께서도 분명···.”
이 순간만 노리고 있었는지 귀찮게 달라붙어 오는 왕족과 귀족들이 번거롭기도 했으니.
이어서 하인리히가 미리 계획했던 대로 이런저런 핑계를 대며 할리에게 남부의 상황을 일임했다.
“그럼 칼코스의 일은 할리 님께 부탁드리겠습니다.”
“카하핫! 나한테 맡겨 두라고! 나도 아직 받아야 할 게 남았으니까!”
가슴의 문신을 퉁퉁 두들기는 거친 손길에 할리의 등에 매달린 커다란 도끼가 덜렁덜렁 흔들렸다.
「궁극의 진화 생명체」를 완성한 이후로 그렇지 않아도 강했던 육체가 더욱 강해져 최근엔 꺼낸 적도 없는 무기, 자이언트 킬러였다.
이것도 드워프인 자오닉이 만들어준 명품이었지만, 사실상 이제는 거의 장식품이나 다름없었다.
그가 전력으로 휘두른다면 얼마 가지 못해 망가져 버릴 게 뻔했으니까.
‘조만간 하워드가 희귀 금속들을 팍팍 써서 새로 만들 생각이긴 한데, 지금 이대로라면 그렇게 해도 그리 오래 못 갈 것 같단 말이지. 투왕의 각인이 있으면 뭔가 달라지지 않을까?’
초월적인 육체에 비해 무기를 강화하는 능력이 부족해 생기는 문제였으니, 내면의 에너지를 증폭시켜 주는 각인의 힘이 지금보다 더 강해진다면 뭔가 방법이 생길지도 몰랐다.
‘도끼는 야만 전사의 낭만이니까, 포기할 수 없지!’
그렇게 그를 제외한 용사 파티가 떠나간 후.
홀로 남부로 돌아간 할리는 결사대의 일원으로서 혼란 수습을 돕다가, 마침내 준비된 두 명의 대주술사와 이십여 명의 주술사가 참여한 ‘투왕의 각인’ 시술을 받을 수 있었다.
그리고 당연한 일이었지만.
《개체가 조건을 달성해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스킬「칼코스식 전투 각인」이 특수스킬「투왕의 각인」으로 진화합니다.》
결과는 대성공이었다.
***
수십 명까지 수용할 수 있는 넓은 천막 내부.
“어그그극—.”
“으헉!”
“으음···.”
털썩—
곳곳에 자리 잡고 서 있던 스무 명이 넘는 주술사들이 일제히 앓는 소리를 내며 자리에 주저앉았다.
심지어 비틀거리다 그대로 픽 쓰러져 기절하는 이도 있을 지경.
“끄흘흘— 아주 지독하구만 그래. 성공할 거라고 생각하긴 했지만, 설마 진짜로 신음 한 번 내지 않을 줄이야.”
“···아아, 멋져. 역시 진정한 사내대장부. 하아아— 강철 같은 근육에 그 못지않은 강철 같은 의지···.”
“이거 요거 또 맛이 갔구만. 정신 차려 이것아!”
“아앗! 하···할머님?”
그리고 그들의 중심에 놓인 커다란 제단 위에서.
곁에서 투닥거리는 조손의 대화 소리를 들으며 할리가 천천히 두 눈을 떴다.
-개체명 : 할리
-종족 : ???
-공통 특성 : 「마인드 허브」, 「페르소나」, 「명경지수」, 「혜안」
-개체 특성 : 「궁극의 진화 생명체」, 「광기의 폭군」, 「생체 오러」, 「폭식」, 「보석안 : 강압」, 「투왕의 각인」
-특이 사항 : 생명체로서의 궁극을 추구한 끝에 초월하였다. 에너지가 남아있는 한, 심장이나 머리가 파괴되더라도 끝없이 재생한다. 광기를 제어해 자신의 에너지로 변환한다. 전신의 모든 각인이 이어져 하나가 되었다. 새겨진 각인의 수가 늘어날수록 연계된 영향이 중첩되며 효과가 상시 유지된다.
사지와 몸통, 그리고 머리.
그동안 각기 따로 떨어져 있던 각인의 힘이 하나로 이어져 전신을 휘도는 것이 느껴졌다.
‘대단한데. 각인 개개의 효력이 전부 최소 다섯 배씩은 오른 것 같네.’
그 영향을 받은 「생체 오러」가 더욱 강해진 것 또한 굳이 말할 필요도 없는 일이었다.
심지어 이것도 상시 유지되는 기본 효과일 뿐, 여기다 에너지를 더 쏟아부어서 이 이상으로 강화하는 것도 가능했다.
이미 초월에 오른 마당에 이게 얼마나 도움이 될까 싶었는데, 이 정도면 충분히 도움이 되고도 남으리라.
“으음, 개운하군.”
스으윽—
그렇게 대충 자신의 몸 상태를 살핀 할리가 누워있던 자리에서 천천히 몸을 일으키자.
그 과정에서 일어난 근육의 움직임에 따라 몸 위에 새겨진 기이한 불꽃 문양이 꿈틀거리며 자신의 존재감을 과시했다.
“아···.”
“······.”
별것 아닌 움직임일 뿐이었는데, 바닥에 주저앉아 빌빌거리던 주술사들은 물론 직접 각인 시술을 맡았던 두 대주술사마저 그런 그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엉? 뭐야?”
그 평소와 다른 느낌의 주목에 할리가 슬쩍 고개를 기울였다.
초월에 이른 강자인 그는 기본적으로 강한 존재감을 가지고 있었다.
가만히 있기만 해도 세상에 자신의 존재를 강요하는 듯한 그런 폭력적인 위압감을.
그러나 지금까지의 존재감이 그저 ‘치명적으로 위험한 미지의 괴물’ 같은 느낌이 강했다면, 지금의 그에게선 거기에 더해 알 수 없는 카리스마가 함께 느껴지고 있었다.
살아있는 것처럼 맥동하며 전신의 각인을 휘도는 에너지와, 그 과정에서 뿜어져 나오는 기묘한 아우라.
그것은 마치— 왕의 위엄과도 같은.
패왕(霸王)의 기세였다.
“···왕.”
“왕이시여···.”
주저앉은 채 끙끙거리던 주술사들이 몸을 추스르고 조용히 그 자리에 엎드렸다.
옆에 서 있던 대주술사 조손 또한 마찬가지.
‘···아, 그러고 보니 그런 말이 있었지.’
그 갑작스러운 상황에 눈만 끔벅거리던 할리의 뇌리로 처음 각인을 새겨준 주술사 노파에게 들었던 이야기가 스쳐 지나갔다.
투왕의 각인이란 이름은 그냥 아무 의미 없이 지어진 게 아니었다.
수백 년간 잊혀졌기에 이젠 유명무실해진 사실이지만, 이 자리의 주술사들은 그 누구보다 전통에 민감한 이들이었으니.
오직 목숨을 건 투쟁만이 존립을 결정짓던 척박한 대지에서—.
그 끝없는 전쟁을 끝내기 위해, 여러 부족의 합의하에 칼코스 부족 연맹이 결성되던 초기부터 전해져 내려온 전승이자 맹약.
이것은 그런 왕의 증명이었다.
***
시커멓고 어두컴컴한 대전.
[그럼, 소녀는 이만 물러가겠나이다···. 편히 쉬시옵소서···.]조금 전까지 보고를 늘어놓던 흐릿한 형상의 귀부인이 서서히 사라지고, 마침내 공간은 완전한 침묵에 휩싸였다.
[흐음.]그러나 그 고요는 곧이어 들려온 나직한 탄성에 곧바로 깨어졌다.
넓은 대전의 가장 높은 곳에 놓인 커다란 해골 왕좌, 그곳에 앉아 아래를 내려다보던 불사왕 한스에 의해.
그는 천천히 한 손을 들어 올려 성검에 꿰뚫렸던 자신의 가슴을 쓰다듬었다.
이미 외상은 흔적 하나 남아있지 않은 상태였으나, 아직도 그곳에 잔재한 성검의 기운은 계속해서 그의 기운을 갉아먹고 있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좀 살살 찌를걸.’
심각한 문제가 생길 정도는 아니었지만 아무래도 조금 답답한 것은 어쩔 수 없었다.
물론 그런 필사적인 마음이 있었으니 하인리히가 초월에 이를 수 있었던 거겠지만.
한스는 다시 느긋하게 왕좌에 몸을 기댔다.
죽음의 기운이 가득한 불사성에서도 중심부인 이곳은 그의 회복에 가장 효율적인 장소.
아마 완전히 떨쳐내는 데는 한 달 정도 소요될 테지만, 그래봐야 지구 시간으로는 삼일 남짓에 불과했다.
‘그나저나 광기의 씨앗이라···. 매개체를 어딘가에 숨겨뒀을 거라곤 생각했는데, 하필 혁명가 그놈이 중간에 탈취해 갔단 말이지.’
심연의 문에서 가장 마지막에 나온, ‘광기’의 제일 커다란 조각이자— 지금 대륙에 퍼진 모든 광기의 매개체가 되는 존재.
발테온이 경지에 오른 전사들의 정신 방벽마저 무너뜨려 세뇌하는 데 썼던 수단이 바로 그것이었다.
한스는 자신의 아공간에서 자그마한 금속 조각을 꺼내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심연이 열렸던 곳에서 가져온 이것은, 주변 모든 것이 깔끔하게 정리된 장소에 남아있던 단 하나의 불순물이었다.
뭔가 실마리가 되지 않을까 싶어서 챙겨뒀던 것인데···.
[크크큭큭— 진짜 이게 단서였단 말이지?]추적과 저주, 소환 등.
그간 이것을 촉매로 여러 가지 방법을 시도해 보았으나 전부 실패해버려 헛짚었던 건가 싶었거늘.
이번에 발테온을 통해 심연의 문에 대한 정보를 얻으며 이것의 정체를 확실히 파악할 수 있었다.
30년의 준비 끝에 기어코 심연의 문을 연 자.
앞으로 한 발짝만 내디디면 초월에 이를 수 있었으나, 마음속에 가득 찬 심마(心魔) 탓에 결국 그곳에 닿지 못하고 추락한 대마법사.
그리고 또한, 지상에 나온 광기의 씨앗이 깃든 숙주.
이건 그가 자신의 존재를 바쳐 심연을 열던 순간에 가지고 있던 물건의 일부였다.
그리고 그 말은···.
‘술법을 사용할 때, 그 매개체의 연원과 내력을 얼마나 정확히 아느냐에 따라 나오는 결과는 천지 차이지.’
이것을 매개로, 확실하게 그를 추적할 수 있게 되었다는 뜻이었다.
그저 막연하게 관련된 무언가를 추적하려 했을 때는 불사왕인 그조차 실패하고 말았으나, 그 방향성을 제대로 설정할 수 있게 된 지금은 상황이 달라졌다.
드디어, 혁명가 그놈의 꼬리를 잡을 수 있는 열쇠가 손에 들어 온 것이다.
‘거기다 정신의 구슬도 있으니까.’
정신계 능력을 강화해주는 보물.
그것은 놈을 추적하기 위한 대규모 의식을 치를 때도 큰 도움이 될 터였다.
그런 생각을 한 한스가 흡족한 마음에 구슬을 이리저리 다뤄보던 찰나.
여러 가지 조건이 한순간에 맞물리며, 불현듯 그는 어떤 가능성 하나를 본능적으로 자각할 수 있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이 구슬과 무려 500만 포인트를 투자했던 ‘차원 장벽 완화’의 시너지였다.
‘이거? 잘만 하면···.’
한스는 그간 많은 이들의 머릿속을 읽으며 그 사념들을 수집해왔다.
그것은 그간 처형한 인간들의 숫자만큼이나 방대하기 그지없는 양이었으나, 불사왕이란 초월적인 존재인 그에겐 딱히 문제 될 것도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그런 그의 무의식 속에 침전된 사념 중에서도 유독 특별한 것이 하나 있었으니.
바로 지구에서 수집한 각성자, 그중에서도 초월에 이른 존재에게서 취한 기억이었다.
‘살마.’
스스로를 완성하고 틀을 탈피한 현경의 고수, 천살마제의 영육(靈肉)에 심연을 들이부으면서 쥐어짜 낸 사념 정보.
각성자를 제한하던 차원 장벽이 약해진 채로 정신의 구슬을 통해 바라본 그것은, 다른 사념들과는 비교 할 수 없는 압도적인 밀도를 가지고 있었다.
곳곳이 손상된 어떠한 단락에 불과한데도, 직접 그곳을 경험한 것처럼 생생하게 느껴질 만큼.
‘아직 완전하진 않지만··· 이거 잘만 하면 진짜 되겠는데?’
그 세 가지 요소가 한데 어우러진 결과.
그는 또 다른 세계.
살마의 출신 차원인 ‘강환계’로 갈 수 있는 실마리를 잡을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