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overeign of the Infinite Clones RAW novel - Chapter (246)
#246
뱀파이어 라이즈 (6)
화르륵—
핏빛 염화가 거세게 타올랐다.
한창 전투에 몰입해 있던 윤지윤이 날카로운 눈으로 그것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격렬하게 이어지던 상황에서 가해진 외부인의 갑작스러운 난입과 기습.
한창 날이 서 있던 전투의 맥을 단번에 끊어버린 그것 때문에, 일대를 뒤흔들던 싸움이 허무할 정도로 간단하게 끝나버렸다.
‘아니, 간단한 공격은 아니었지.’
그저 겉보기로는 갑자기 알파의 등 뒤에 나타나 손날로 심장을 꿰뚫고, 그곳에서부터 시작된 불꽃으로 육체를 태워버린 것뿐이었지만.
그녀는 그 일련의 과정에서 오간 수십 차례의 복잡하며 섬세하기 그지없는 인과의 흐름을 인지할 수 있었다.
저항할 수 있는 모든 가능성을 원천 봉쇄하는 필살의 일격.
그녀와의 싸움에서 힘이 빠질 대로 빠지고 급소에 기습까지 허용한 알파가 그것에 대응하는 건 무리였으리라.
‘한국 뱀파이어들의 리더, 하인즈.’
그것이 그간 말로만 들어왔던 존재인 ‘하인즈’를 처음 대면한 그녀가 한껏 긴장하고 있는 이유였다.
‘이건 생각 이상인데.’
최근 혈맹이 아무리 온건한 노선을 견지하고 있다고 하나, 그 구성원들의 대부분은 세간에서 백안시되는 흡혈귀였다.
당연히 우호적인 관계 속에서도 지속적인 경계는 필수였으며, 그에 따라 그들에 대한 충분한 조사는 물론 대비도 완벽하게 되어 있었다고 생각했건만.
‘애초에 그 수장에 대한 정보부터 잘못됐잖아! 기껏해야 8레벨. 아무리 잘 쳐 줘 봐야 그중 상위권 수준이라고 판단하고 있었는데···.’
헛짚어도 한참 헛짚었다.
지금도 저릿하게 본능을 자극하는 위압적인 기세.
이건 아무리 적게 쳐 줘도 9레벨이지 않은가?
일반적으로는 알려지지도 않아, 협회 지부장인 그녀조차 유럽 쪽에나 몇 있다고 들은 게 전부인 존재가 한국에 있었다니···.
‘거기다 아무리 전투에 정신이 팔렸다고 해도 그렇지. 뇌신화(雷身化)를 한 상태였는데 가까이 다가오기 전까지 존재를 인지하지도 못했다고?’
이미 사방에 흐르는 자기장을 통해 남들과는 다른 관점으로 세상을 인식하던 그녀였다.
그런데 그런 감각을 이렇게까지 속이고 접근한 존재는 이번이 처음이었기에 아무래도 경계심이 들 수밖에 없었다.
물론 전투 상황에서 처음부터 긴장하고 대비한다면 충분히 알아챌 수도 있겠지만, 일상을 보내는 중에 저런 존재가 불시에 기습해 온다면 과연 피해 없이 막아낼 수 있을까?
‘···아니, 지금은 그런 걱정을 할 때가 아니지. 그건 나중에 생각하자.’
역시 일단은 대화가 우선이었다.
그녀는 서서히 사그라지는 불꽃을 내려다보는 하인즈를 향해 입을 열었다.
“처음 뵙는군요. 당신이 그 헤테로시스의 수장인 하인즈인가요?”
“흠, 반갑군. 이런 곳에서 그 이름 높은 뇌제를 만나다니.”
다행히 그도 대화에 응할 의사가 있는지 순순히 그에 응하며 그녀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그간 암묵적으로야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해왔다고 하나, 이렇게 정식으로 교감을 갖는 것은 처음이었던지라 조금 걱정하고 있었는데.
“일단 도움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덕분에 빠르게 사건을 일단락 지을 수 있었으니까요.”
하지만 그 전에.
그녀에게도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하는 문제가 있었다.
“그런데 방금 그거, 설마 동족 포식인가요?”
눈을 가늘게 뜬 윤지윤이 하인즈를 살펴보며 고개를 살짝 비틀었다.
타오르는 혈화에 가려졌다지만 그녀 수준의 강자가 흡혈의 낌새를 눈치채지 못할 리 없지 않나?
뱀파이어의 동족 포식은 예민한 사안이었다.
비단 그들끼리만의 문제가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 금기시되는 행위.
당장 이번 소동의 당사자인 알파조차 그 광혈귀이지 않았던가?
그러나 그녀의 날카로운 질문에도 하인즈는 별것 아니라는 듯 태연한 기색을 내보일 뿐이었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는 알겠지만, 그저 피를 뽑아내 따로 저장한 것뿐이다. 그게 놈의 재생을 막는 가장 쉬운 방법이니까.”
피는 흡혈귀가 가진 힘의 원천이었으니 어찌 보면 당연한 말이었다.
9레벨씩이나 되는 흡혈귀에게서 피의 통제권을 빼앗는 것이 불가능에 가까워서 그렇지.
하인즈조차 이번처럼 좋은 기회가 아니었으면 그렇게 쉽게 놈을 처리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렇군요. 그러니까 그 피를 따로 사용할 생각은 없으시다는 말씀이신가요?”
“아, 그건 아니다. 아무리 지저분한 피라고 해도 격이 이 정도로 높으면 여러모로 쓸모가 있는 법이니까. 아무래도 폐기하기엔 아깝지.”
윤지윤은 따지고 드는 자신의 말에도 시큰둥하게 대답하는 하인즈의 두 눈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포식자인 흡혈귀답게 비인(非人) 같은 냉정함과 강자 특유의 오만함 등이 느껴지긴 했으나, 광혈귀가 보였던 비틀린 광기는 조금도 감지되지 않았다.
‘묘하게 대답을 잘해주는 것도 그렇고. 사회성이 영 없는 사람은 아닌 것 같은데.’
하긴, 언제 터질지 모를 폭탄 같았던 혈맹을 지금과 같은 사회 친화적인 조직으로 바꾼 인물이다.
솔직한 마음으론 당장 그 알파의 혈액도 폐기하게 만들고 싶었지만, 여기선 괜히 과민반응 해서 관계가 틀어지기보단 한발 물러서는 게 좋겠지.
“아무래도 민감한 문제다 보니 예민하게 반응했던 것 같네요. 불쾌하게 느끼셨다면 죄송합니다.”
“괘념치 않는다. 충분히 할 만한 걱정이었으니.”
어쩐지 그의 태도에서 일국의 왕 같은 고풍스러운 느낌이 풍기긴 했으나 그건 딱히 이상한 일도 아니었다.
당장 그녀도 이세계에 있을 땐 황제마저 함부로 대할 수 없는 위치에 있던 사람이었으니까.
스스슥—
그때, 외부에서도 싸움이 끝난 것을 감지했는지 일대를 감싼 결계가 서서히 사라지기 시작했다.
이제 내부의 상황을 정리하기 위한 인원들이 들어오면 그녀도 사태를 수습하느라 눈코 뜰 새 없이 바빠질 터.
“나눠야 할 대화는 많은데 지금 상황이 그리 좋지 않군요. 조만간 일정을 잡는 게 어떠신지?”
“좋다. 일이 이렇게까지 된 이상 어쩔 수 없지.”
일단 헤테로시스도 피해자라고는 하나 이만한 대형 사고에 엮였으니 완전히 발을 뺄 수는 없었다.
상당히 귀찮게 되었다고 볼 수도 있었지만, 하인즈는 그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뭐, 번거로운 실무는 진소란에게 맡기면 되겠지. 오히려 이번 기회를 이용할 수도 있을 테고.’
알파는 번천회 소속이고, 그들은 이미 한국의 블랙리스트에 오른 테러 단체였다.
즉, 이번 사건을 잘만 이용하면 한국이라는 국가와 자연스럽게 연대를 맺을 수 있다는 소리이지 않겠는가!
‘놈들은 세상의 어둠에 숨은 전 지구적인 비밀조직. 슬슬 그에 대항할 반(反) 번천회 세력을 키울 생각이었는데, 거기에 한국이 포함된다면 더 무게감이 살겠지.’
일이야 어떻게 대응하는지 나름이었고.
그는 결코 상대의 의도대로 따라줄 생각이 없었다.
그렇게 재차 모습을 감춘 하인즈는 사건 현장으로 몰려오는 사람들을 피해 조용히 자리를 벗어났다.
이번에 알파를 흡혈하며 얻은 것들을 차분히 정리하면서.
***
알파 사건이 끝난 직후.
한국의 매체는 오랜만에 발생한 대규모 테러에 활활 타오르기 시작했다.
그 피해 규모도 규모거니와, 그 외의 자극적인 요소들이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끌었던 것이다.
-와, 미친; 협회도 빨리 대응한 편이었는데, 고작 한 명 때문에 몇 분 만에 백 단위로 죽어나갔네ㄷㄷ
-멀리서 찍힌 CCTV 영상 봄? 설렁설렁 움직이는데 건물이 무슨 폭탄 맞은 것처럼 날아가더라.
-근데 그걸 또 뇌제가 잡음ㅋㅋ 그것도 별다른 상처도 없이ㅋㅋ
그중 하나는 그 빌런이 보인 무력이었다.
그간 귀환자들의 강함에 대해선 여러 매체로 알고 있었으나, 그것을 실제 사건으로 겪게 되니 느껴지는 게 또 달랐던 것이다.
그를 잡았다고 알려진 협회 지부장의 경우도 그렇고.
그 외에도 피해자에 대한 애도, 빌런에 대한 분노, 흡혈귀에 대한 혐오감, 또 국가와 협회의 무능을 성토하는 등 다양한 반응들이 우후죽순 쏟아져 나왔다.
다만, 그 와중에도 예상치 못한 여론이 한 가지 있었는데—.
-아; 하회탈 뭐하냐? 너 없으니까 본진 털리잖아;;
-ㄹㅇㅋㅋ 그거 잠깐 자리 비웠다고 나라 돌아가는 꼬라지가ㅋㅋ
-근데 진짜 죽은 거 아님? 일본에서도 갑자기 활동 접었다며?
└개솔ㄴㄴ 하회탈님 안 죽음.
└잡혔으면 누구든 존나 시끄럽게 떠들며 자랑했겠지, 지금처럼 조용하겠냐?
-테러범이 강해 보이니까 쫄아서 튄 듯ㅋ
└넌 일단 하회탈 업적 정리한 거랑 영상 찍힌 거부터 보고 와라.
바로 하회탈과 관련된 이야기였다.
“아, 하긴 이런 말이 나올 만도 한가. 하회탈이 등장한 후로 이만큼 큰 사건은 처음이었으니.”
나는 대충 그와 관련된 반응들을 살펴보다 턱을 쓰다듬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한스의 자경단 활동이 본격적으로 진행되었을 땐 하루에도 수많은 강력범이 처형되었으며, 자연스럽게 범죄자들이 위축되면서 이렇다 할 큰 사건이 일어난 적이 없었다.
가만히 내버려 뒀다면 이번 못지않은 큰일로 번졌을 테러를 사전에 조용히 막아낸 경우도 적지 않았고.
‘으음, 한스는 아직 연구에 한창인 데다 「개체 투영」을 사용하기엔 조금 조심스러운데.’
한스가 번천회주와 충돌했다가 도주한 지 지구 시간으로 고작 일주일도 채 지나지 않은 시점이었다.
그때는 소환 해제를 이용해 자리를 벗어날 수 있었지만, 만약 「개체 투영」을 이용해 밖에 나섰다가 또다시 같은 상황에 처하게 된다면 정말 어떻게 손 쓸 도리가 없기에 최대한 자제하고 있었다.
‘강환계로 가는 연구는 슬슬 마무리 단계기는 한데···. 그것만 끝나면 다시 틈틈이 활동을 시작해야겠군. 일본에서의 일도 마저 마무리하고.’
지금 진척 상황으로 봐선 그것도 그리 오래 걸리지는 않겠지.
그리고 이왕 이렇게 되었으니 그 기간엔 이번에 쏠쏠한 소득을 올린 하인즈가 대신 활동하면 될 터였다.
“뭐, 예상했던 대로 아직 벽을 넘어서기엔 부족했지만.”
나는 가볍게 입맛을 다시며 고개를 내저었다.
알파의 피가 상당한 도움이 된 건 사실이었으나, 놈 또한 여러 차원의 인자를 짜깁기해 억지로 벽을 넘은 불완전한 존재였던지라 전체적인 완성도가 영 부실했던 것이다.
‘차라리 줄곧 한 차원에서 커서 그 정수를 제대로 담아낸 녀석이었으면 훨씬 더 도움이 되었을 텐데.’
예컨대 하나를 100까지 이룬 존재 말이다.
굳이 따지자면 알파는 하나만 30에 일곱 개의 10을 가진 상태였으니, 흡혈 시에 손실이 더해진다는 것을 생각하면 어느 쪽이 효율적일지는 더 말할 필요도 없는 일이었다.
‘물론 욕심이란 건 알지만.’
나는 알파의 피를 모조리 흡혈한 직후에 떠올랐던 메시지를 다시 확인했다.
《새로운 흡혈인자를 수집합니다. 특수스킬「혼혈진화」의 영향으로 개체의 육체 능력과 마력 저항, 재생력이 향상됩니다.》
《특수스킬「혼혈진화」의 영향으로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스킬「미혹」을 획득합니다.》
역시 지구엔 아직도 하인즈가 수집하지 못한 흡혈인자들이 많이 남아있었던 건지, 새로운 인자를 접한 그의 몸이 한층 더 완전에 가깝게 진화했다.
심지어 상당히 낮은 확률인 혈액에 담긴 가능성을 깨우치기까지 했으니, 이만하면 얻을 수 있는 건 다 얻었다고 봐도 될 터.
‘상대를 홀리는 정신계 능력. 뱀파이어에게 상당히 잘 어울리는 능력이 나왔군.’
거기다 하인즈가 얻은 것은 그게 끝이 아니었다.
《개체가 조건을 달성해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특수스킬「혈통의 갈망」를 획득합니다.》
「혈통의 갈망」은 어찌 보면 지금 그에게 가장 필요한 스킬이라 할 수 있었다.
이건 그의 몸속에 남은 불완전한 인자들을 완성할 수 있도록 인도하는 일종의 가이드 능력이었으니까.
그리고 그 능력은 지금, 그에게 이 땅을 벗어나 다른 곳으로 향하라고 알려주고 있었다.
한국을 벗어나 한참 더 멀리 있는 곳.
유럽으로 가라고.
‘굉장히 시기적절한 능력이긴 한데.’
「마인드 허브」를 통해 뭔가 미묘한 감정이 걸려든 게 문제였다.
단순히 안내를 하는 것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은근히 강요하는 듯한 기분이랄까.
‘갈망’이라는 그 이름 그대로 욕망을 부추기는 것이 느껴졌다.
‘그렇다고 무작정 그에 따를 수도 없고. 뭐, 서두를 필요는 없겠지. 어차피 당장 거기까지 갈 생각도 없었으니 좀 더 신중히 생각해 봐야겠군.’
당분간은 대규모 테러의 여파로 혼란스러워질 밤의 치안을 지키는 게 우선이었다.
겸사겸사 혈맹원들 몸보신도 좀 시키고, 그간 숨어있었을 분란 종자들을 솎아내기도 하면서.
‘한스 대신 활동하는 거니까, 이참에 하인즈도 가면이나 하나 맞춰줄까?’
한스가 가면을 쓴 이유는 해골을 가리기 위해서인 데다, 하인즈의 얼굴은 본체와 완전히 달랐으니 딱히 가릴 필요도 없었으나···.
이제 와서 그런 건 아무 상관 없었다.
그저, 내가 그렇게 하고 싶을 뿐이었으니.
그렇게 고심한 끝에 선택된 하얀색 오페라 가면.
하회탈에 이어서 ‘팬텀’이 본격적으로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는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