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overeign of the Infinite Clones RAW novel - Chapter (247)
#247
맹약의 사슬 (1)
지구에서 소동이 일고 또 그것을 수습하는 와중에도 아우테리카의 시간은 계속해서 흘러갔다.
불사왕이 남부에서 물러난 이후에도 공습은 적당한 페이스로 꾸준히 이어졌고, 하인리히는 여전히 대륙 곳곳에서 명성을 떨치기에 여념이 없었다.
공화국에서의 일이 마무리 단계에 접어들고 나서부턴 딱히 큰 사건 없이 순탄하게 흘러가는 정세.
그건 그동안 다소 뒤처졌던 아바타들이 성장하기 위한 시간이기도 했다.
‘당장 즉시 전력이라 볼 수 있는 아바타는 총 다섯.’
두말할 것도 없는 전통의 최강자, 불사왕 한스.
최근 빠르게 급부상 중인 신예, 흡혈왕 하인즈 2세.
인간의 자존심이나 다름없는 빛의 기사, 성자 하인리히.
이젠 겉모습만 인간일 뿐인 괴생명체, 야만왕 할리.
세계수의 전폭적인 후원으로 벼락출세한 하이 엘프, 해리스.
다른 이들이 알면 그 전력의 기준이 무려 초월이라는 것에 황당해할 게 분명했으나, 이미 눈이 높아질 대로 높아진 그에겐 당연한 일일 뿐이었다.
‘사실 정상적인 방법으로 그 다섯과 동일선상에 서기는 쉽지 않겠지만.’
저 아바타들은 여러 상황이 복잡하게 얽히고설킨 끝에 운까지 따라줘서 빠르게 강해진 케이스였다.
아마 어지간한 방법으로는 많은 시간을 투자하더라도 그들과 대등해지는 건 쉽지 않겠지.
‘그래도 성장의 비약이 생각 이상으로 효과적이니 영 가능성이 없지도 않아.’
카르마 상점을 통해 구입한 성장의 비약은 고작 7일에 20만 포인트라는 살인적인 물가를 자랑했지만, 직접 사용해 보니 확실히 그만한 값어치가 있는 제품이었다.
한 번 사용해 그 효과를 경험하고 나니, 이후엔 가격에 욕하면서도 어쩔 수 없이 재구매하게 되는 중독성이 있었던 것이다.
그렇게 각 세계의 잡일 담당인 휴버트와 휴고를 뺀 세 아바타는 도핑 물약의 약빨을 등에 업고 연일 수련에 박차를 가했다.
우우웅—
“아, 이런! 또 실패야!”
그리고 그중 한 명.
오늘도 실패의 고배를 마신 헤스페론이 거칠게 머리를 헤집었다.
의식을 위해 꾸려진 소환진에서 빛이 명멸하더니 서서히 진동이 잦아들었다.
그와 동시에 제물로 사용된 희귀한 매개체들이 이내 전부 어떻게 손 쓸 틈도 없이 재가 되어 사라져버렸다.
‘···하아, 아깝네. 하도 날려먹어서 이제 슬슬 눈치가 보이는데.’
천부적인 종족 특성을 바탕으로 오직 기술만을 갈고닦는 드워프 하워드와 그 자체로 사기나 다름없는 재능을 타고난 해츨링 호루스.
그들에 비하면 지극히 평범한 인간일 뿐인 그는 성장에서 여러 격차가 생길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선택한 길이 바로 본신과는 별개의 강력한 소환수를 사역하는 것이었는데···.
‘설마 이 페널티가 이렇게까지 발목을 잡을 줄이야.’
깊은 한숨을 내쉰 그의 시선이 자신의 오른팔로 향했다.
온갖 룬 문자가 새겨진 붕대에 감긴 오른팔은 마치 봉인된 흑염룡이라도 튀어나올 것 같은 비주얼이었으나, 사실 그건 그저 호시탐탐 그의 몸을 집어삼키려는 저주의 응집체일 뿐이었다.
‘당장은 어떻게 손 쓸 방도가 없으니.’
흑마법의 대가이자 저주의 스페셜리스트나 다름없는 한스의 시선으로 봐도 지금 그 오른팔에 깃든 저주는 굉장히 희귀한 케이스였다.
성자의 신성력으로 인한 억제, 이세계 각성자로서의 특이성, 분신인 아바타가 가진 잠재력, 세계 제일의 의료기관인 황실 병원의 조치 등.
원래라면 치사량을 아득히 넘긴 저주에 이미 한참 전에 죽었어야 정상인데, 그나마 그 여러 방법들 덕분에 오른팔의 생명력과 융화되는 정도로 끝난 것이었다.
‘그 과정에서 염(念)을 흡수했는지 약간의 영성까지 갖게 된 것 같고.’
헤스페론은 팔에 감긴 봉인구 내부에서 꿈틀거리는 저주를 지그시 노려보았다.
소환 의식을 거행하느라 마력을 좀 많이 사용했더니 또 그것에 자극받아 시위하듯 날뛰고 있었다.
‘이게 날뛸 때마다 발생하는 정신 오염도 상당하고 말이지. 나한테야 어림도 없지만.’
그렇게 여러모로 특이한 점이 많았던지라, 지금처럼 간접적으로 살펴보는 것만으로는 한스도 명확한 진단을 내릴 수 없었다.
그가 직접 해부를 비롯한 연구를 할 수 있다면 또 모를까, 지금 그럴 수는 없는 노릇 아니겠는가?
“하아—.”
가볍게 한숨을 내쉰 그는 곧 자리를 정리했다.
그리고 자신을 위해 따로 준비된 마법 연습실에서 나와, 자연스럽게 황궁 마탑의 복도를 거닐며 혼자 생각에 잠겼다.
‘매칭되는 소환수들마다 하나같이 저주를 기피해서 계약을 거부해대니. 어쩔 수 없이 급을 좀 낮춰야 하려나?’
소환수라고 한꺼번에 뭉뚱그리지만, 사실 거기에는 생각보다 많은 종류가 있었다.
세상에 퍼진 몬스터들과 별반 다를 바 없는 마물부터 정령들과 비슷한 정신체에 가까운 존재, 또 타 차원에 거주하는 생명체 등.
그리고 그중 최고로 손꼽히는 것이 바로 유니콘이나 페가수스, 아룡(亞龍) 등으로 대변되는 환상종들이었다.
당연히 헤스페론도 그들과의 계약에 집중했는데··· 결과는 이미 나왔던 대로 연이은 실패였다.
그것도 황실 소환 마법사의 도움까지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이대로 포기하긴 좀 아까운데. 뭔가 다른 방법이 없나 좀 더 찾아볼까.’
그렇게 복도를 걷던 그는 곧바로 황궁 마탑의 서고에 들어섰다.
손님의 신분인 그가 이렇게 서고를 마음대로 이용할 수 있는 것도 다 라일리 황녀 덕분이었다.
물론 보안 레벨이 높은 구역에 갈 수 없는 건 마찬가지였지만, 어차피 당장은 그 정도까진 필요 없었다.
‘그러고 보니 조만간 또 건강 검진이 있던가.’
서가를 둘러보던 그가 이전의 기억을 떠올렸다.
성장의 비약은 생각 이상으로 다양한 효능이 있었다.
단순히 지식의 습득과 수련에 도움을 주는 것뿐만이 아니라, 좀 더 넓은 의미의 ‘성장’을 포함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퇴원한 후에도 주기적으로 받고 있던 검사에서 확연히 드러났다.
“대단하군요. 균형이 비틀렸던 신체가 비정상적인 속도로 안정을 찾아가고 있습니다. 저하되었던 육체 능력도 이제는 대부분 회복된 듯하군요. 심지어 멈췄던 성장까지 다시 시작되다니···.”
그에 언제나 냉정을 유지하던 병원장조차 그의 몸을 살피면서는 평정을 잃었을 정도였다.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금방이라도 해부해 보고 싶어 하는 과학자의 표정이었다고나 할까.
역시 그만한 위치에 오른 이답게 그도 정상은 아니었다.
헤스페론은 한참 동안 서고를 돌아다니며 이 책 저 책을 살펴보았다.
공통점은 그것들이 전부 계약과 소환 계통의 마법서라는 것.
사실 그가 이렇게 소환수 쪽에 집착하는 것에도 나름대로 합리적인 이유가 있었다.
‘어차피 이젠 드래곤인 호루스가 있으니 정통 마법 쪽을 파 봤자 별다른 메리트가 없어.’
그럴 바에야 차라리 오직 그만이 할 수 있는 강점에 집중하는 게 훨씬 나은 선택이었다.
특히 그가 가진 능력, 진화의 대가로 한쪽 눈을 가져갔던 「맹약의 사슬」이 가진 잠재력은 생각 이상으로 유용했으니.
결속력에 따라 계약 대상을 강화하는 건 물론이고, 심지어 무생물과도 동기화해 제 몸처럼 다룰 수 있게 해 주는 스킬.
이런 능력을 제대로 쓰지 않고 묵혀두는 건 아무래도 아깝지 않겠는가?
‘언데드나 악마라면 오히려 더 좋아할 것 같긴 한데···. 아니, 그만두자. 괜히 흑마법사 취급이나 받게 될 거고.’
라일리의 최측근으로서 황궁에 들어와 전폭적인 지원을 받고 있는데 그런 짓을 하는 것도 민폐였다.
기껏 한다고 해도 한스의 하위호환이 될 게 뻔하기도 했고.
그렇게 마탑의 서고에서 한창 고뇌에 빠져 있던 그에게—.
-헤론! 잠깐 시간 괜찮으신가요? 드리고 싶은 게 있는데!
「맹약의 사슬」의 연결을 통해 라일리의 활기찬 의사가 전해져왔다.
연결의 주도권이야 능력의 주체인 헤스페론에게 주어져 있긴 하지만, 의사소통 정도야 언제든 저쪽에서 먼저 전해올 수 있었다.
처음엔 어색해하던 라일리도 이제는 오히려 시도 때도 없이 그에게 연락해 올 정도.
최근 그녀가 정적인 허먼하트 공작가와의 일로 상당한 스트레스를 받고 있다는 걸 알고 있었기에 그도 그에 순순히 응해주고 있었다.
사람은 하소연하고 자기 말을 들어줄 사람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힘을 낼 수 있는 존재였으니까.
‘소문을 들어보니 잘해 나가고 있는 것 같긴 하지만.’
황궁을 가로지른 그가 마침내 황녀궁으로 들어서고.
이미 이야기된 게 있었는지 안쪽을 지키던 기사들이 대화에 방해되지 않게 자리를 비켜주었다.
제법 자주 있는 일이어서인지 이젠 그들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듯한 태도였다.
“아, 헤론! 오셨나요?”
노크와 함께 라일리가 기다리는 방으로 들어서자, 그녀는 밝은 웃음과 함께 강아지처럼 그를 반겨 주었다.
“후후후, 이것 좀 보세요! 무려 성녀님께서 직접 축복해 주신 새 봉인구랍니다?”
그 말과 함께 뿌듯한 표정으로 선물을 내미는 라일리.
그것은 겉면에 성서의 구절이 적힌 붕대 다발이었다.
“주재료로 쓰인 성체포(聖體布)를 구하는 것도 그렇고, 공들여 만드느라 시간이 좀 오래 걸리긴 했지만요. 그래도 세아 언니 덕분에 생각보다는 쉬웠어요. 역시 인맥이 최고라니까요?”
그는 저것이 어떻게 만들어졌는지도 잘 알고 있었다.
용사 파티의 일원인 이세아가 동료인 리에스타 성녀에게 아쉬운 소리를 하며 부탁하는 것을 바로 옆에서 지켜봤었으니까.
전투 쪽에 대부분의 능력이 집중된 성자 하인리히와는 달리 성녀는 전투 외의 부분에서 두각을 드러내는 존재였다.
그런 그녀가 상당히 긴 시간을 투자해 공들인 만큼 이 봉인구는 정말 어지간해선 구할 수도 없는 귀물이나 다름없으리라.
“고마워, 이렇게까지 신경 써 줘서.”
“뭘요, 헤론이 제게 해 준 거에 비하면 이건 아무것도 아니죠.”
그렇게 흐뭇한 표정으로 선물을 건넨 그녀가 이내 조심스럽게 그의 눈치를 살피며 입을 열었다.
“그보다, 이번엔 성공하셨나요?”
“아니, 평소랑 똑같아. 아무래도 뭔가 방향을 달리 해야 할 것 같은데.”
“···걱정하지 마세요! 헤론은 곧 성공할 수 있을 테니까! 필요한 재료는 제가 최대한 준비해 드릴 테니 신경 쓰지 마시고요.”
이미 그녀가 상당히 무리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괜스레 미안해졌다.
유니콘의 뿔이나 아룡종의 심장 같은 재료들은 아무리 그녀라도 계속해서 지원해 주기엔 상당히 부담이 가는 물건들이었던 것이다.
카르마 상점에서도 최소 20만은 넘어가는 물건들이었으니 당연하겠지.
역시 뭔가 대책이 필요한 시점이었다.
“흠흠, 그보다 얼른 그것부터 써 보시는 건 어때요? 어쩌면 그걸로 마음이 편해지면서 더 좋은 생각이 날지도 모르잖아요?”
헛기침과 함께 기대 어린 눈으로 이쪽을 힐끔거리는 라일리.
헤스페론은 그런 그녀의 반응에 피식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고는, 그녀가 힘들게 구해온 선물을 집어 들고 지그시 눈을 감았다.
「맹약의 사슬」의 발동하고 신성력이 가득한 봉인구로 낯선 감각이 뻗어나가며 교감이 시작되었다.
이미 몇 차례 사용한 바 있었지만 과연 물건의 수준이 높아서인지 다른 때보다 더 많은 집중이 필요했다.
그렇게 잠시의 시간이 지난 후, 봉인구의 끄트머리가 천천히 꿈틀거리기 시작하자.
눈을 뜬 그가 천천히 오른손을 뻗었다.
사르륵—
그러자 건드리지도 않았는데 기존에 감겨있던 붕대가 제멋대로 흐트러지더니 풀려나갔다.
그리고 그 아래.
마치 뱀이 기어간 듯한 얼룩이 남은 팔뚝이 드러났다.
꿈틀—
봉인이 풀리자 그 안에 잠재되어있던 저주가 스멀스멀 피어오르기 시작했으나, 본격적으로 뭔가가 시작되기도 전에 새로운 봉인구가 스르륵 풀리며 순식간에 그의 팔을 휘감아 조여왔다.
그저 팔만 뻗었을 뿐인데 한순간에 봉인구의 교체가 끝난 것이다.
‘확실히 전보다 낫네. 이 정도면 제법 강한 마력 사용에도 견딜 수 있겠는데?’
헤스페론은 단단하게 고정된 오른손을 쥐었다 펴길 반복하며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마력을 깊게 사용하면 사용할수록 저주가 폭주할 가능성이 커지는데, 이것과 함께라면 어지간히 무리하지 않는 한 큰 문제는 없을 것 같았다.
그렇지 않아도 뛰어난 성능이었던 봉인구가 「맹약의 사슬」의 효과로 추가 강화되면서, 이젠 정말 성유물이라 해도 이상하지 않은 수준이 된 것이다.
‘그런 물건으로도 완전히 억누를 순 없다니. 대체 얼마나 지독한 저주인 건지.’
그렇게 오른팔을 바라보며 혀를 차던 그의 뇌리에 문득 어떤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사물을 강화하는 건 물론 그것을 소환하고 제 뜻대로 조종할 수 있는 동기화.
이건 방금 전에 사용한 것처럼 상당히 유용한 능력이었다.
그리고 거기서부터 연상되기 시작한 사고가 뻗어 나가.
이내 다른 방식에까지 생각에 미쳤다.
‘사물, 소환, 강화···.’
그렇다면, 굳이 살아있는 환상종들에 집착할 필요도 없지 않을까?
아직은 아이디어일 뿐이라 생각이 확실히 정리되지 않은 상태였지만···.
‘고정관념에 사로잡혀 있었군.’
이어서 생각의 줄기는 거기서 한 발 더 앞으로 나아갔다.
한층 진화한 이 스킬의 한계는 아직 명확히 정해진 게 아니었다.
「맹약의 사슬」은 생물은 물론 사물과도 교감을 통해 결속을 맺게 해 주는 능력이었다.
그럼 그 기준은 어디까지일까?
굳이 고정된 형상이 존재하지 않아도 되지 않을까?
그렇다면···.
그의 시선이 오른손으로 향했다.
이 손에 깃든 저주를 직접 다룰 수 있게 된다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