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overeign of the Infinite Clones RAW novel - Chapter (248)
#248
맹약의 사슬 (2)
불사왕 한스는 당장 헤스페론의 문제를 해결할 방법을 제시하진 못했지만, 이론적인 부분에 대해서만큼은 충분할 정도로 빠삭하게 파악하고 있었다.
‘애초에 저주는 이성적으로 재단할 수 있는 종류의 힘이 아니지.’
저주란 것은 누군가에게 불행이 닥치도록 기원하는 행위이자 그렇게 해서 발현된 부정적인 힘 그 자체.
흑마법에서 자주 사용되는 계파이기도 했으나, 엄밀히 따지자면 마법보단 주술 쪽에 더 가깝다고 할 수 있었다.
‘그래서 종종 이런 예기치 못한 일이 일어나기도 하는 거고.’
지금 헤스페론의 오른손에 깃든 저주는 일종의 돌연변이였다.
여러 가지 이유가 얽힌 끝에 오른팔과 완전히 융화되어 정착하고, 그 과정에서 생(生)을 취하고 염(念)을 흡수해 마침내 영성까지 띠게 된 ‘무언가’.
결국 그것은 존재의 한계를 뛰어넘으면서 나름의 격까지 획득해 지금은 반쯤 영적 생명체나 다름없어진 상태였다.
제대로 된 봉인이 힘든 것도 그런 이유 때문이었다.
단순히 가진 힘의 크기가 문제인 게 아니라, 갇힌 쪽에서 숙주를 이용해 능동적으로 비집고 나오려다 보니 생기는 어려움이었던 것이다.
‘탄생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제대로 된 자아조차 없어서 정령이라고 하기엔 아직 많이 부족하지만.’
하지만 그렇기에 오히려 지금이 최적의 기회라 할 수 있었다.
남의 몸을 무단으로 점유한 이 불쾌한 이웃의 목에 목줄을 채울 수 있는.
그에 헤스페론은 곧바로 자신이 생각한 바를 시행하기 위한 준비에 들어갔다.
“음, 여긴 이 정도면 된 것 같은데. 또 따로 필요한 게 있나요, 헤론?”
“아! 이 정도면 괜찮습니다, 스승님.”
“필요한 게 있으면 언제든 말하세요. 어지간한 건 다 들어줄 수 있으니.”
그리고 그 과정에서 때마침 잠시 황궁에 들른 이세아의 도움도 받을 수 있었다.
그녀는 명실상부 제국에서도 첫 손에 꼽히는 대마법사.
소환과 계약 마법만 판 황실 마법사에 비하면 전문성은 조금 부족할지 몰라도, 지금 준비하는 의식은 그리 난이도 있는 것이 아니었던지라 그녀의 도움만으로도 충분했다.
무엇보다 스승인 그녀만큼 믿을 수 있는 존재는 따로 없기도 했고.
‘이것도 나름 비장의 수단이라고 할 수도 있는 거니까. 보안은 지킬 수 있으면 지키는 게 좋지.’
그렇지 않아도 최근 라일리 황녀와 가까운 걸로 은연중에 세간의 주목을 받는 그였다.
아마 그가 뭔가를 했다 하면 그것이 삽시간에 소문으로 퍼져나갈 터.
막 일을 벌이려는 단계에서 그런 불필요한 관심은 썩 내키지 않았다.
‘그럼, 시작해 볼까?’
그렇게 모든 준비를 마친 끝에.
마침내 의식이 시작되었다.
넓은 공간을 가득 채운 마법진의 중앙.
그 한가운데에 홀로 선 헤스페론이 오른손을 천천히 앞으로 뻗자—.
파라라락—
단단히 동여맸던 붕대가 풀어 헤쳐지며 그의 맨살이 밖으로 드러났다.
그동안 억눌려 있던 저주의 기운도 함께.
푸화악—!
봉인이 풀리자 검은 안개가 거세게 들고 일어났다.
그간 답답하게 가둬뒀던 것에 불만이라도 표출하듯 평소보다 날이 선 반응이었다.
“마법진 발동할게요.”
그리고 그와 때를 맞춰, 외곽에서 참관하던 이세아가 사방을 감싼 결계를 가동했다.
상당히 큰 규모였던지라 상당한 에너지가 필요한 작업이었지만, 무한에 가까운 마력을 지닌 그녀에게 그 정돈 대수로운 일도 아니었다.
우우웅—!
주변을 둘러싼 마법진에서 흘러나오는 빛과 진동.
그와 함께 끊임없이 중앙으로 향하는 에너지는 한껏 몸집을 부풀리던 검은 안개를 억누르며 그것이 확장하지 못하도록 몰아세웠다.
저주는 그에 반발하듯 검은 불꽃으로 변해 저항했으나, 공들여 준비한 결계의 영향에서 벗어날 수는 없었다.
‘여기까진 생각대로.’
아직 그가 가진 「맹약의 사슬」의 숙련도는 보이지 않는 어떤 것과 교감을 나누기엔 상당히 부족했기에, 일단은 그것을 실체화시킬 필요가 있었다.
거기다 처음 기세등등하게 일어났던 것과는 달리 기운이 한껏 위축된 것 또한 적잖은 소득이었고.
‘자, 착하지? 우리 대화 좀 할까?’
헤스페론은 곧바로 「맹약의 사슬」을 사용해 자신의 오른손에서부터 시작된 검은 불꽃에 집중했다.
그렇게 숙주라 할 수 있는 그의 의지와 본격적으로 연결되자, 그에 반응하듯 저주 또한 거세게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좋아, 순조롭···?’
예상치 못한 반응이 나타난 것은 그 직후.
그는 저도 모르게 몸을 움찔하며 입을 벌렸다.
“아···.”
“엇?”
동시에 뒤쪽에서도 이세아의 탄성이 들려왔으나, 그는 그것에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원래 저주에는 딱히 정해진 형태가 없었다.
사실 그저 기운일 뿐이니 당연한 일이었다.
그래서 처음 헤스페론에게서 피어오른 저주도 검은 안개와 불꽃 정도가 전부였는데···.
실체화한 저주의 응집체와 교감을 위해 접촉한 순간, 그것이 숙주의 심상에 따라 모습을 바꾸기 시작했다.
“······.”
그것은··· 어쩔 수 없는 불가항력이었다.
평소에는 붕대를 감아 봉인하는 한쪽 팔에 깃든 저주.
특정 서브컬처의 상징이나 다름없는, 너무나 뻔하고 클리셰적인 요소이지 않은가?
‘···음, 솔직히 이 정도면 누군가가 일부러 노린 거라고 볼 수밖에···.’
그래, 역시 아무리 생각해 봐도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저것이 하필 저런 모습을 한 것은.
어색한 표정을 지은 헤스페론이 자신의 앞에 떠오른 형상을 바라보며 애써 그렇게 자신을 합리화했다.
화르륵—!
검은 불꽃이 이글거렸다.
길게 늘어진 수염과 타오르는 듯 휘날리는 갈기, 날카롭게 치솟은 한 쌍의 뿔.
그리고 예리한 눈매와 날카로운 이빨, 뱀처럼 기다란 몸통을 허공에 꿈틀거리는···.
훌륭한 흑룡(黑龍) 한 마리가 그곳에 있었다.
“어··· 크흠흠···.”
뒤쪽에서 이세아의 미묘한 헛기침 소리가 들려왔다.
뒤통수가 따갑다.
왠지 모르게 느껴지는 묘한 시선이 쿡쿡 날아와 박혔다.
‘···고정관념 때문일 뿐. 이건 절대 내 탓이 아니야.’
짧게 한숨을 내쉰 그는 이내 당당하게 고개를 치켜세웠다.
사실 객관적으로 보면 굉장히 멋진 외양이었고, 이곳 사람들은 그저 특이하게 생긴 환상종의 일종이라고 생각할 터였다.
즉, 흑염룡이 중2병의 상징이 된 건 그저 부당한 편견의 산물인 뿐인 것이다!
‘그래, 이미 이렇게 된 이상 뭘 어쩌겠어. 신경 쓰지 말자.’
솔직히 신경이 안 쓰일 리가 없었지만, 그는 의식적으로 그것을 외면하며 전력을 다해 「맹약의 사슬」을 운용했다.
그것은 용의 형상만을 갖췄을 뿐 딱히 이성이 그리 강하진 않았다.
기껏해야 강아지 정도의 사고가 한계라고 할까.
하지만 그간 골머리를 썩였던 만큼 그것도 그리 만만한 존재는 아니었다.
저주의 검은 용이 거칠게 반항하며 몸을 뒤틀자 사방으로 검은 불똥이 튀었다.
‘자자— 진정하라고, 친구.’
이런 상황에서 필요한 것은 쾌적한 공동생활을 위한 협의였다.
사실 지금 누가 우위에 있는지는 이미 명백했다.
저주가 날뛰지 못하게 하기 위한 철저한 사전 준비, 놈이 깃들어 있는 신체의 주인이라는 위상, 스킬이라는 미지의 이능과 아바타에 얽힌 수많은 성장 보정의 강제력 등등.
무엇보다 아무리 놈이 영성을 깨우쳤다 한들 본질은 헤스페론의 몸에 기생한 존재일 뿐이었다.
아예 팔을 잘라내 소거함으로써 놈을 없애버릴 수 있는데도 이렇게 협상의 기회를 주고 있으니 이 얼마나 자비로운가!
우웅—
그렇게 현실에선 그리 길지 않은 짧은 시간 동안.
교감을 통해 서로 간에 많은 의사가 오갔다.
헤스페론이 원하는 것은 놈이 자신의 뜻에 복종하며 필요할 때 힘이 되는 것이었고.
놈이 원하는 것은··· 지금 이상으로 성장해 격을 쌓아 올리고, 현 상태에서 벗어나 보다 완전한 객체로 거듭나는 것이었다.
‘정령이나 영령처럼 말이지.’
그 정도야 충분히 도와줄 수 있었다.
아니, 오히려 그만큼 격이 오른다면 자신에게도 더 큰 도움이 될 테니 적극 권장할 일이었다.
그렇게, 서로 간의 협상이 극적으로 타결되었고—.
화르륵—
한껏 몸을 비튼 검은 불꽃의 용이 다시 그의 오른팔에 깃들었다.
뱀이 기어간 듯한 검은 얼룩이 있던 자리가 원래부터 그랬다는 듯 용의 형상으로 변한 것은 덤이었다.
《개체가 계약을 통해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특수스킬「갈망의 오른팔」을 획득합니다.》
《개체가 조건을 달성하여 성장합니다. 스킬「저주 내성」이 특수스킬「저주 포식자」로 진화합니다.》
그리하여 헤스페론은 마침내 오른팔의 흑염룡을 손에 넣을 수 있었다.
약간의 수치스러움을 대가로.
***
-개체명 : 헤스페론
-공통 특성 : 「마인드 허브」, 「페르소나」, 「초회복」, 「명경지수」, 「괴력」, 「신경과민」, 「혜안」, 「제노글로시」
-개체 특성 : 「맹약의 사슬」, 「갈망의 오른팔」, 「저주 포식자」, 「마법학개론」, 「격투술」
-특이 사항 : 우측 안구가 손실되었다. 맹약을 통해 오른팔에 깃든 저주의 힘을 통제할 수 있게 되었다. 「맹약의 사슬」의 효과로 결속을 맺은 기운의 잠재력이 더욱 증가했다. 모든 저주에 면역이며, 저주를 포식하면 일시적으로 모든 능력이 증가한다.
모든 의식이 끝나 뒷정리를 하던 도중.
처음 기대했던 최상의 결과를 얻은 직후였으나, 헤스페론은 그것을 만끽할 틈도 없이 이세아에게 몇 번이고 변명을 늘어놓았다.
“···그런 겁니다. 무슨 느낌인지 아시죠? 그러니까 그건 그냥 자연스럽게 연상된 일종의 생리 현상이나 다름없는···.”
사실 딱히 뭔가를 잘못한 것도 아니었으니 해명할 필요도 없었지만, 은연중에 느껴지는 묘한 시선에 도둑이 제 발 저리듯 먼저 나섰던 것이다.
그 눈물겨운 노력에 그녀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했다.
“알았어요, 알았어. 충분히 이해하고말고요.”
“후우, 네··· 그렇다면 다행이네요.”
“그게 뭐 딱히 이상한 것도 아니고. 사실 처음부터 짐작하고 있었으니까요.”
“어, 네? 뭘요?”
그 수긍의 방향이 조금 다른 쪽으로 비틀려있었다는 게 문제지만.
“아니, 뭐··· 헤스페론이란 게 그리 흔한 이름은 아니잖아요?”
“···아?”
“거기다 그걸 새 출발을 위해 짓는다는 건 좀···. 크흠, 실언이었네요. 취향은 존중해야죠.”
“아니, 스승님? 오해입니다!”
과거의 폭주가 부메랑처럼 돌아왔다.
거기다 따지고 보면 오해가 아니라는 것이 더 큰 문제였다.
지을 때 당시에는 멋있어 보였던 게 사실이었으니까.
그렇게 시간이 흐르고···.
“하아.”
여러모로 시끄러웠던 하루가 저물어갈 무렵.
숙소의 침대에 털썩 주저앉은 헤스페론이 가벼운 한숨과 함께 슬쩍 자신의 오른손을 바라보았다.
팔에는 여전히 신성한 문자가 새겨진 붕대가 감겨 있었으나 그 상황은 이전과 확연하게 달랐다.
「맹약의 사슬」의 효과는 단순히 대상과 결속을 맺는 것뿐만이 아니라, 그 대상을 강화하고 제 뜻대로 통제하는 효과도 있었으니까.
‘으음, 확실히 좋기는 한데.’
이번에 그가 얻은 것은 단순히 봉인을 풀었을 때 저주의 힘을 자유자재로 다룰 수 있다는 것뿐만이 아니었다.
그간 문제가 되었던 저주와 그것을 막기 위한 봉인구 모두가 그의 통제에 들어오며, 미세한 조절을 통해 가늘게 뽑아낸 힘의 투사로 은밀하고 변칙적인 힘의 활용이 가능해진 것이다.
기운은 최대한 갈무리 하고 외부에 물리력을 행사할 수 있는, 「갈망의 오른팔」과 봉인구의 합작 능력이라 봐도 될 터.
‘···그래, 어차피 지구에서 활동할 땐 가면을 쓸 생각이었으니까 상관없겠지.’
성능만 좋다면 쪽팔리든 뭐든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압도적인 능력 앞에선 감히 아무도 비웃지 못할 텐데.
‘연습할 게 늘었군.’
그는 그대로 침대에 몸을 파묻으며 옆쪽을 향해 가볍게 오른손을 휘저었다.
그러자 손이 닿지 않는 거리에 있던 발광 마도구에서 빛이 사라지고 실내가 어둠에 잠겼다.
그리고 그렇게 어두워진 공간을 가르며.
흐릿하고 가느다란 실 한 가닥이 그의 손끝으로 빨려 들어갔다.
***
이온 대륙 북부 산맥에 자리한 불사성.
[크하하하핫—!]그 가장 깊은 곳, 불사왕이 칩거를 위해 든 심처에서 쩌렁쩌렁한 광소가 터져 나왔다.
내부의 공간이 단절되어있었던지라 그 웃음이 밖에까지 새어 나가진 않았으나, 설령 새어나갔더라도 별로 신경 쓰지 않았을 정도로 그 장본인은 기분이 매우 좋은 상태였다.
[···드디어 완성했다.]그도 그럴 것이···.
[다른 세상으로 갈 방법을!]제법 오랜 시간을 투자한 연구 중 하나가.
비로소 마무리된 참이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