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overeign of the Infinite Clones RAW novel - Chapter (252)
#252
닫힌 차원 (1)
동정호 인근의 허름한 어촌.
웅성웅성—
일을 접기에는 한참 이른 시간대였으나, 지금 마을 사람 중에 평소와 같은 일과를 지키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할당량을 채우기 위해 지친 몸으로 배를 타고 나갔던 어부들은 서둘러 귀항했고, 그들의 가족은 물론 마을 사람들 모두가 물가로 향하면서 나루터는 때아닌 인파로 북적였다.
하지만 그런 어수선한 상황 속에서도 그 피골이 상접한 마을 사람들의 반응은 약속이라도 한 듯 똑같았다.
바로 하나같이 넋이 나간 얼굴로 호수 저편을 바라보며 웅성거리고 있다는 것.
“세상에 저게 뭐여?”
“허어, 이 무슨 조화란 말인가···.”
“어무니! 저거···!”
이 일대의 지배자인 어룡채의 수채가 있는 방향에서 한눈에 보기에도 범상치 않은 이상 현상이 발생하고 있었다.
화창한 이쪽과는 달리 일대의 구름을 모조리 빨아들인 듯한 소용돌이 형상의 구름이 하늘에 두껍게 드리웠고.
제법 거리가 있는 이곳에서도 느껴지는 거센 폭풍이 그 경계를 두르듯 매섭게 휘몰아치고 있었다.
번쩍—
쿠르르릉—!
거기다 그 중심부에서 터져 나오는 천둥번개는 인간 본연의 공포심을 자극할 정도로 위압적이었으니.
두려운 눈으로 그 현상을 바라보던 마을 사람들이 마음속 깊은 곳에서 치밀어 오르는 경외감에 마른침을 삼켜댔다.
“천벌이지, 천벌이야. 저 죽일 놈들 때문에 동정호의 용왕께서 노하신 게야.”
그렇게 혼란스러운 와중, 주름이 자글자글하고 등이 굽은 노인 하나가 냉담하게 그런 말을 툭 내뱉었다.
국가가 붕괴하면서 시작된 세력들 간의 영역 다툼, 그리고 그로 인한 수적들의 수탈과 횡포가 극에 달한 지금.
놈들에게 아들 내외와 손자를 잃고도 남은 가족을 위해 억지로 참아야만 했던 울분이 저 압도적인 광경을 보자 저도 모르게 터져 나온 것이다.
“아이고, 어르신 무슨 말씀을 하십니까!”
“어휴— 영감, 해가 지지도 않았는데 벌써 술이라도 자셨소? 얼른 들어가 잠이라도 주무시구랴!”
그에 주변의 마을 주민들이 기겁해 그를 말리며 슬쩍 주위를 살폈다.
노인의 마음이야 이해한다지만, 이 마을은 실질적으로 어룡채가 통치하고 있는 곳.
괜한 말을 했다가 그 사실이 놈들의 귀에 들어가기라도 하면 결코 무사하지 못할 테니 당연한 일이었다.
그런 사람들의 마음을 알았는지 한소리 뱉었던 노인도 더는 입을 열지 않고 우묵한 눈으로 수채가 있는 방향만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하나였던 제국이 사실상 수십 개의 도시 국가로 쪼개진 것이나 다름없는 상황에, 그들이 살고 있는 이 땅에선 바로 저 수적들이 왕이었으니까.
‘바라옵고, 바라옵나이다. 용왕이시여, 부디 저 인두겁을 쓴 악귀들에게 피의 철퇴를 내려주소서!’
그저 마음속으로 바랄 뿐이었다.
저 천인공노할 놈들에게 하늘의 심판이 있기를.
***
‘딱히 대단한 놈들은 없네.’
주변에 폭풍과 번개를 두른 해리스가 난장판이 된 수채를 가볍게 둘러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활은 물론이고 다른 정령들까지 꺼낼 필요도 없었다.
이 정도 수적들을 때려잡는 것 정도야 그와 연결된 두 정령만으로도 충분했으니.
그리고 그건 이 어룡채의 채주를 상대하는 것도 마찬가지였다.
확실히 다른 놈들에 비해선 압도적인 실력을 갖추고 있었으나, 그래봐야 극의의 문턱도 밟지 못한 잔챙이일 뿐.
“끄흐으— 마, 말도 안 돼. 이런 일은 술법으로도 불가능한데···! 설마, 진짜 전설 속의 요괴라도 된단 말인가···?”
와트의 전격에 지져진 놈은 이내 얼마 버티지 못하고 벌레처럼 바닥을 기며 정신이 나간 것처럼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정보를 뽑아내고자 일부러 죽이지 않고 제압만 했는데, 충격이 컸던 모양인지 영 상태가 좋지 않아 보였다.
‘이대로는 안 되겠는데?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상태로 만들 필요가 있겠어.’
어른들이 말씀하시길, 자고로 오래된 전자 제품과 인간은 두들기다 보면 고쳐지기 마련이라 했다.
최신 제품들에 해당되는 소리는 아니라지만, 저놈은 딱 보기에도 옛날 사람이지 않은가?
‘죽기 싫으면 알아서 정신 차리겠··· 음? 잠깐.’
그러다 문득, 해리스는 뭔가 위화감을 느끼고 인상을 찌푸렸다.
그리고 가만히 자기 손바닥을 내려다보며 자신의 행동과 사고를 반추했다.
‘···역시, 아무리 생각해도 좀··· 많이 과격해진 것 같은데?’
아무리 세계수의 권역에서 멀어진 영향이라고는 하나, 그걸 감안해도 생각 이상으로 난폭한 행보였다.
아우테리카에서의 그 느긋하고 태평하던 해리스라곤 상상할 수도 없을 정도로.
‘흐음, 이것도 한번 자세히 알아봐야 할 것 같네. 그전에 지금은 일단···.’
그런 자신의 변화가 내심 신경 쓰이긴 했지만 당장은 사로잡은 수적 두목을 심문하는 게 우선이었다.
고작 산 하나에 눌러앉아 있던 산적들보단 한 지역을 차지한 그에게서 훨씬 더 양질의 정보를 얻을 수 있을 테니까.
“그럼, 저희끼리 대화를 좀 나눠 볼까요? 평화적으로?”
그런 마음으로 어룡채주에게 다가간 해리스가 아직도 바닥에서 꿈틀거리는 그를 가만히 내려다보며 온화하게 말을 건넸다.
자신이 지을 수 있는 최대한으로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으, 으윽··· 사, 살려주···.”
어째서 그걸 마주한 상대의 얼굴이 더욱 창백해졌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
세 개의 차원에서 동시에 아바타를 운용하다 보니 깨달은 것이 있었다.
바로 강환계의 시간 흐름이 아우테리카보다 조금 더 빠르다는 점.
대충 비교해 보니 아우테리카에서의 10일이 강환계에서는 10일하고도 8시간 정도는 되는 것 같았다.
‘오래 있을 게 아니라면 그리 큰 차이는 아니지만 말이지. 그래도 약간의 시간이 더 생긴 건 나쁘지 않네.’
그리고 또 한 가지.
어룡채주를 심문하며 알게 된 중요한 사실이 하나 있었다.
드르륵— 드륵—
나는 마우스의 휠을 움직여 모니터에 떠오른 강환계에 대한 정보를 다시 살펴보았다.
하지만 아무리 봐도 이번에 알게 된 내용에 대해선 그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었다.
혹시 몰라 다른 ‘닫힌 차원’에 대해서도 확인해 봤지만 역시나 마찬가지.
이내 추가 정보를 찾는 걸 포기한 나는 그 자리에서 팔짱을 낀 채 조용히 사색에 잠겼다.
‘강환계가 닫힌 차원이 되어버린 이유.’
그리고 무려 10년이 넘도록 이어진 전쟁의 원인.
또한 그 전, 강대하던 제국이 무너져 내릴 수밖에 없었던 비사(祕事).
그 모든 것들을 관통하는 어떠한 비밀까지.
‘···아니, 벌써 결론을 내리기엔 아직 이르다. 좀 더 확실한 정보가 필요해. 역시 고위층일수록 알고 있는 게 많겠지.’
호남성의 3강 중 하나인 동정십팔채의 수좌이자 화경의 고수인 총채주라면 자신에게 더 큰 확신을 줄 수 있을 터.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창밖을 바라보며 생각을 정리했다.
‘후우, 뭔가가 있을 거라 짐작하긴 했는데.’
답답한 마음에 한숨이 절로 새어 나왔다.
이건 그만큼 중요한 문제였다.
무력이 중시되는 무림 타입의 이세계인 강환계에서.
그 근간이라 할 수 있는 기(氣)가 메말라가고 있다는 것은.
***
어룡채를 정리한 직후.
해리스는 놈들의 본거지에 있던 창고를 탈탈 털어 「아바타 클라우드」로 재화와 무공 비급 등을 챙기고 곧바로 다시 하늘로 날아올랐다.
물론 그 과정에서 약간의 서비스로 식량 같은 물자들은 인근 마을에 뿌리는 것도 잊지 않았다.
어차피 수적들은 전부 죽거나 다시는 무공을 사용할 수 없는 몸이 되어 그걸로 뭐라 할 놈들은 남아있지 않은 상황.
물론 이곳에서 벌어진 일을 다른 수적채에서 알게 되면 놈들이 뭔가 해를 가할지도 몰랐으나, 그는 그렇게 되기 전에 일을 전부 끝마칠 자신이 있었다.
‘이곳에서의 정보 전달 수단이라 해봐야 직접 가서 전달하는 것 아니면 전서구를 이용하는 게 전부지.’
그리고 그런 정보 전달은 처음 보는 동물들과도 쉽게 친해지는 하이 엘프 앞에선 무의미할 뿐이었다.
훈련된 본능마저 넘어서는 압도적인 친화력에 바쁘게 날아가던 새들마저 방향을 틀고 다가와 그에게 애교부리기 일쑤였던 것이다.
‘그보다··· 이제야 제대로 실감이 가는군. 이 땅의 실태가.’
모여 사는 사람이 많은 호수 인근인 만큼, 날아가며 보이는 지상의 모습에 이 세상이 지금 어떤 상황에 처해있는지 확실히 체감할 수 있었다.
강환계의 위험도가 어째서 매우 높음이었는지도.
‘끝나지 않는 전쟁과 몇 년째 계속되는 대기근. 거기다 지역끼리의 교류는 단절되었고 곳곳에는 역병이 창궐하며 도적 떼까지 날뛰니···.’
강자라면 그리 문제 되지 않을지 몰라도, 이 세계로 넘어온 지 얼마 되지 않은 이에겐 그야말로 극악의 난이도라 할 수 있었다.
강해지기 위한 수련은커녕 이 세태에 휩쓸려 당장 생존부터 걱정해야 할 판이었으니.
그런 지상의 모습에 해리스는 당당하게 하늘을 가로지르며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그리고.
그로부터 단 하루—.
부지런히 움직인 해리스가 경로상의 모든 수적채를 때려 부수고, 동정십팔채의 총채주 교룡패도 진덕만과 마주하기까지 걸린 시간이었다.
“대체 뭐냐! 이 터무니없는 괴물은!”
“초, 총채주님! 저 바람 때문에 화살이 통하지 않습니다!”
“다가갈 수도 없소, 총채주! 이대로 가다간··· 끄어억!”
휘우웅—
파지지직—!
화르륵—!
이어진 그와의 싸움도 그리 어렵지 않게 끝났다.
이 인근에서야 그가 범접할 수 없는 최고수라고 하지만, 고작해야 천하백대고수쯤에나 이름 올리는 실력으로 해리스와 대적하는 건 어림도 없는 일.
그래도 보다 원활한 주변 정리를 위해 불의 정령인 칼리까지 꺼내 들게 했으니, 그를 비롯한 동정십팔채의 정예들도 체면치레 정도는 했다고 봐도 되리라.
“···크윽, 대체 고인께선 누구시오? 어떤 연유로 이렇게 갑자기 찾아와 난동을 부린단 말인가!”
“아, 전 해리수라 합니다. 잠깐 묻고 싶은 게 있습니다만.”
“허! 그런 거라면 그냥···!”
“그리고 겸사겸사 청소도 하고 말이죠. 뭐, 어쩌겠습니까? 그간 쌓인 업보라 생각하시길.”
“······!”
그렇게 통성명도 마친 상태에서 평화로운 심문 시간이 이어졌다.
자존심 때문인지 총채주 진덕만이 처음에 조금 비협조적으로 나오긴 했지만.
어른들의 말씀을 떠올린 해리스가 번개의 정령 와트를 이용해 그를 열심히 ‘고쳐’주자, 결국 그도 마음을 고쳐먹고 열성적으로 호응해 주었다.
이래서 옛말에 어른들의 말을 들어서 손해 볼 것 없다고 하는 거겠지.
‘하아, 골치 아프네.’
그리고 그를 통해 다시 강환계의 상태를 확인한 해리스가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
역시 지금 상황은 알량한 무력만 가지고는 어떻게 할 수 없는 시대의 흐름이나 다름없었으니까.
“이 싸움엔 우리의 생존이 걸려있소! 용맥(龍脈)을 확보하지 못하면 결국 도태되어 잡아먹힐 것이 뻔한데 어찌 물러설 수 있을까!”
언제나 풍족하던 세상의 기운이 서서히 말라가고 있었다.
이 세상의 주요 세력들은 이미 그 이상 사태를 파악하고, 곧바로 살아남기 위한 방법을 강구한 것이었다.
그것이 바로 세상에 흐르는 에너지의 중심지이자 꾸준히 ‘기’가 뿜어져 나오는 분출구, 용맥을 확보하는 것이었다.
설령 그 과정에서 다른 세력과 전쟁을 벌이는 한이 있더라도.
“기존 무인의 경지 상승은 물론 새로운 무인을 양성하고, 또 영약을 만들거나 내상을 다스리는 등 모든 일에 기는 필수 불가결. 우리도 좋아서 전쟁을 하는 게 아니오!”
그 에너지도 무한정한 것이 아니었기에 양보도, 타협도 불가능하다.
쉽게 말해 사막에서 몇 안 되는 오아시스를 두고 각 부족끼리 생존 경쟁을 벌이는 거나 마찬가지였다.
그것이 이 세상에서 전쟁이 멈추지 않는 이유.
모두가 필사적이기에 더욱 처절한 비극의 연쇄였다.
“···아! 그런가. 당신, 이세계인이었군? 천살마제를 끝으로 이제는 모두 사라진 줄 알았거늘.”
그렇게 한동안 울분을 토하던 진덕만이 문득 뭔가를 깨달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정체에 대해 감도 못 잡았던 어룡채주를 생각해 보면 일반적으로 퍼진 정보는 아닌 듯한데, 과연 위치가 위치인지 그는 이세계인에 대해서도 제법 잘 아는 듯 보였다.
‘하긴, 차원이 닫히기 전까지만 해도 강환계는 각성자들이 제법 오래 활동한 차원이었지.’
그런데도 곧바로 연상하지 못했던 건 해리스의 힘이 이세계인들 기준으로도 워낙 이질적이어서 일 터.
일반적인 각성자들은 그리 강하지 않은 이능 하나만을 가지고 그 성장력을 바탕으로 빠르게 무공을 익혀 두각을 드러냈을 테니, 아예 이계의 힘만을 이 정도로 사용하는 경우는 듣도 보도 못했을···.
“으음, 그러고 보니 비슷한 경우를 들어봤던 것 같은데. 터무니없는 헛소리라 여겼었건만, 혹시 그게 사실이었나?”
···텐데, 그의 혼잣말에서 흥미로운 주제가 튀어나왔다.
그러자 한껏 예민해진 직감이 경종을 울렸다.
저 이야기를 결코 쉽게 넘겨선 안 된다고.
그리고 약발이 떨어졌는지 슬슬 다시 뻗대기 시작하는 진덕만을 좀 더 세심하게 고쳐주자, 그는 치를 떨며 잠시 멈췄던 말을 서둘러 다시 이었다.
“큭! 나도 자세한 건 모르오! 그저 우연히 전해 들었을 뿐이니···!”
하지만 아쉽게도 그가 아는 사실은 그리 많지 않았다.
그 정보를 접한 게 20년도 더 지났을 때인 데다 관심도 없어서 그냥 흘려들었다고 하니까.
다만, 어쩐지 잘은 모르겠지만.
“대충 이 나라가 무너지고 갈라진 게 전부 그자 탓이라는 내용이었는데···. 크흠, 그러고 보니 세상의 기가 쇠퇴하기 시작한 시기도 얼추 비슷하군.”
왠지 그자가 누군지 알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