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overeign of the Infinite Clones RAW novel - Chapter (258)
#258
제갈세가 (4)
쪼르르—
찻주전자에서 흘러내린 찻물이 찻잔에 담기면서 은은한 향기가 사방으로 퍼져 나갔다.
화려하지 않고 정갈하면서 고풍스럽게 꾸며진 실내.
그야말로 학사의 거처라는 말이 절로 연상되는 방 안에서 손수 차를 우려낸 노인, 제갈세가의 태상가주 제갈군악이 천천히 찻잔을 들어 그 향을 음미했다.
“으음.”
이미 시력을 잃은 지 오래였으나 다도를 행하는 그의 움직임에는 한 치의 군더더기조차 없었다.
긴 수양을 거친 그에겐 이 정도 일상생활쯤은 큰 무리 없이 행할 수 있는 예민한 감각이 있었기에.
‘해리수··· 그리고 하승훈.’
그리고 당연한 말이지만.
그 예민한 감각은 누군가를 파악하는 데에도 매우 유용하게 사용되었으며.
그것은 이번에 갑자기 찾아온 이방인들도 예외는 아니었다.
‘이세계인들이라···. 이번 방문객들은 여러모로 상식 이상이군.’
하지만 그런 제갈군악에게도 그 두 사람을 파악하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다.
소싯적에 몇몇 이세계인들과도 교류를 가져본 적이 있는 그였으나, 그때 겪었던 이들과는 그 성향과 행동 양식, 그리고 가진 능력 등 모든 부분에서 너무나 판이했던 것이다.
‘하지만 둘 모두 악인과는 거리가 먼 데다 딱히 적의도 느껴지지 않았지. 아니, 오히려 호의에 가깝다고 해야 할까?’
비록 해리스의 태도가 다소 무례하기는 했지만, 그만한 수준의 강자가 오만한 거야 그리 흠잡을 일도 아니었다.
그런데 이번에 저쪽에서 먼저 관계 회복을 위한 의사를 표현해 온 것이다.
그에게 하승훈이 가진 치료 능력에 대해 의도적으로 흘림으로서.
‘혜미의 상태를 어떻게 알았는지는 모르겠다만.’
뻔히 보이는 수작이었으나 제갈군악은 아무것도 모르는 척 그 의도대로 움직여 주었다.
그것이 화해와 협력을 위해 그들이 먼저 내민 손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아직 많은 것이 의문이긴 하나.’
해리스와 대화하면서 그가 뭔가를 숨기고 있다는 것은 진즉에 눈치채고 있었다.
이 혼란의 원흉이라 추측되는 그 날개 달린 이방인에 대한 것도 마찬가지고.
하지만 그자에 대해 말해줬을 때 보인 적의도 진짜였으니···.
‘흐음, 역시 좀 더 지켜볼 필요가 있겠군.’
당장 추가적인 대응은 불필요,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는 것을 권장.
그것이 바쁜 가주를 대신해 이방인들을 상대하게 된 태상가주의 1차 소견이었다.
“허허헛, 그리고 하나뿐인 손녀딸의 생명의 은인이기도 하고 말이지. 벌써 차도를 보이고 있다 했던가? 괜히 이 노구가 갔다가 탈이라도 날까 봐 참고 있었거늘. 이거 오랜만에 손녀 얼굴을 볼 수 있겠구나.”
정적인 공기 속에서 다도를 즐기며 생각을 정리하던 제갈군악의 입가에 자그마한 미소가 맺혔다.
가문의 큰어른으로서 모든 일에 있어 세가가 최우선이었지만, 그 또한 아픈 손녀를 걱정하기는 마찬가지였으니까.
‘한 명은 신비 문파 천기문의 맥을 이은 현경의 고수. 다른 하나는 가문은 물론 외부에서 초빙한 명의들조차 포기한 환자를 살린 의선(醫仙)··· 아니, 신의(神醫)라니. 이 정도면 그들과 연을 맺은 게 오히려 이득이 아닌가?’
물론 그 와중에도 본능적으로 득실을 따지게 되는 것은 그들 일족의 어쩔 수 없는 숙명이었다.
***
신성력을 통한 치료는 만능이 아니었다.
물론 무려 성자님이 직접 부여해 준 것인 만큼 그 효능이 확실하긴 했으나, 중병을 치료하는 데에는 그만큼 많은 시간과 노력이 필요했던 것이다.
지금 이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하루 한 번, 휴고가 ‘아가씨’에게 신성력 치료를 시작한 지 사흘째.
파아앗—
앞서와 마찬가지로 성표에서 새어 나온 부드러운 빛이 자연스럽게 치유 대상의 몸으로 스며들었다.
그 광경은 첫날과 완전히 똑같았지만 그때와 확실하게 달라진 것도 있었는데···.
“으응, 신기하네요. 뭔가 내공과는 다른 느낌. 뭐랄까, 좀 더 따뜻하게 감싸 안으면서 포용하는 듯한···.”
바로 그 당사자인 제갈세가의 금지옥엽, 제갈혜미가 깨어있다는 것이었다.
혼수상태에 빠져 있다가 이틀 차 치료 때 정신을 차린 그녀.
시체처럼 창백했던 얼굴에는 옅은 홍조가 깃들었으며, 그 피부도 전과는 달리 확연한 생기를 품고 있었다.
온갖 영약을 사용하고도 간신히 연명하는 게 고작이었던 과거에 비하면 그야말로 극적이라 할 수 있는 변화가 찾아온 것이다.
이번이 겨우 세 번째 치료일 뿐인데.
‘효과가 있는 건 다행이지만, 뭔가 신성력에 반응하는 게 다른 질병들이랑은 다른데? 아니, 이거 정말 병이긴 한 건가?’
하지만 정작 치료를 행하는 휴고는 알 수 없는 기분에 미묘한 표정을 지을 따름이었다.
뭔가가 다르다는 건 알겠는데, 단순히 매개체를 통해 신성력을 옮길 뿐 세례도 받지 않은 그의 감각으로는 뭐가 문제인지 정확히 파악할 수 없었던 것이다.
‘하인리히가 직접 이 자리에서 확인한다면 더 확실히 알 수 있을 텐데.’
물론 그건 무리였으니 당장은 장기적인 변화를 살피면서 그 추이를 간접적으로 체크하는 수밖에 없었다.
어차피 상황을 보아하니 이 치료가 단기간에 끝날 것 같지도 않았고.
‘그래도 일단 회복되고 있는 건 사실이니까. 여기서 기존의 시술까지 병행하면 그 기한이 더 줄어들지도 모르지.’
다소 속물적인 생각이지만, 어찌 보면 그 기간 동안 제갈세가와 유대를 더 돈독하게 다질 수 있을 테니 그리 나쁘지 않을 것 같기도 했다.
계속해서 신성력을 공급해 줘야 하는 하인리히가 조금 귀찮아지기야 하겠지만.
“하아, 이게 얼마 만에 느껴보는 기분인지 모르겠어요. 아니, 거의 처음인 것 같기도 하고? 전 어릴 때부터 몸이 약했거든요. 그냥 태어나면서부터···.”
그리고 치료 과정에서 제갈혜미와도 이런저런 대화를 나눌 수 있었다.
평소 방 안에서 누워만 있던 그녀는 그 사실에 한이 맺혔는지, 외부인이라 할 수 있는 그에게 정말 잠시도 쉬지 않고 재잘거렸다.
덕분에 통성명한 지 고작 이틀째에 휴고는 본의 아니게 그녀에 대해 많은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녀가 위로 오빠만 셋이 있는 막내라던가, 친어머니가 자신을 낳고 돌아가셨다던가, 자긴 태어나면서부터 세상의 혼란을 초래한 저주받은 아이라던가···.
장난스러운 목소리로 하는 말 거의 대부분이 자신에 대한 비관과 자조였으나, 그중 유독 그를 신경 쓰이게 하는 대목이 하나 있었다.
“흐음, 실례지만 제갈 소저. 나이가 어떻게 되시는지···?”
“에엑? 숙녀의 나이를 물으시는 건가요? 으으— 하 공자 그렇게 안 봤는데 조금 세심함이 부족하신 것 같···.”
안 되겠다.
이대로 가만히 내버려 뒀다간 또 언제까지 혼자 떠들지 모른다.
그에 휴고는 과감하게 그녀의 말을 잘랐다.
“제가 알기로 세상이 이 모양이 된 건 22년 전의 그 사건 때문이라 했던 것 같은데, 아닙니까?”
“네? 맞아요. 일반적으로 알려진 사실은 아니지만요.”
“그럼 소저의 나이가 스물둘이라는 겁니까?”
“또, 또. 굳이 그렇게 따져야 하나요? 그냥 대충 넘어가시지, 공자도 참.”
그는 장난스럽게 볼을 부풀리며 입술을 삐죽이는 그녀를 떨떠름한 얼굴로 바라보았다.
외양도 그렇고 하는 짓도 그렇고, 역시 아무리 봐도 열댓 살도 되지 않은 소녀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아니, 어렸을 때부터 아팠다고 했으니 그럴 만도 한가.’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인 데다 사실 그건 그다지 중요한 일도 아니었다.
지금 신경 쓰이는 부분은, 하필 그녀가 태어나던 해에 이 세계의 근간이 흔들리는 대사건이 일어났다는 것이었다.
‘우연?’
진짜 저주 같은 것 때문일 리는 없겠지만, 어쩌면 그 사건과 그녀의 병세가 뭔가 연관이 있는 건···.
“그러고 보니 공자는 나이가 어떻게 되시나요?”
그렇게 생각에 잠겨있던 찰나.
제갈혜미가 천진한 목소리로 그에게 질문을 던져왔다.
언제 삐진 척을 했냐는 듯 그 얼굴엔 다시 생글거리는 미소가 돌아와 있었다.
“스물셋입니다.”
그에 그는 단호하게 대답했다.
왠지 연하라고 하면 더 말려들 것 같아서 일부러 높여 불렀는데, 사실 따지고 보면 틀린 말도 아니었다.
지구의 나이는 여전히 스물이었지만 그도 이세계로 진입한 지 이제 3년 차로 접어들고 있었으니까.
실질적으로는 스물셋이라고 할 수 있었고, 다수의 분신으로 같은 기간 내에 보내는 시간의 밀도가 다른 사람들보다 월등히 높다는 걸 생각해 보면 어쩌면 그보다 더 쳐줘야 할지도 몰랐다.
“아! 제 또래셨네요? 뭔가 더 나이가 많으실 줄 알았는데. 에헤헷.”
이건 삭아 보인다고 돌려 까는 건가?
순간적으로 그런 생각이 들었지만 헤실헤실 웃는 모습을 보니 별다른 의도는 없는 모양이었다.
역시 상대하기 피곤한 여자였다.
“흐암— 합!”
그때, 무방비하게 하품하던 그녀가 놀라서 자신의 입을 틀어막았다.
자신도 모르게 나온 하품이었는지, 잠시 그대로 굳은 그녀는 이내 동그란 눈으로 슬며시 이쪽의 눈치를 살피기 시작했다.
“피곤하신가 보군요. 오늘 치료도 끝났으니 이만 주무시지요.”
“아, 아니! 별로 안 피곤한데요? 저 완전 멀쩡한데요?”
“고집부리지 마십시오. 휴식도 회복을 위해 필요한 과정입니다. 말하는 것도 체력을 많이 소모하니 오늘은 여기까지 하죠.”
그에 휴고는 단호하게 말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마침 슬슬 일어날 기회를 보던 순간이었는데 좋은 타이밍이라고 생각하며.
“으우우··· 내일도 와 주시나요?”
“당연하지요. 당분간은 매일 올 생각입니다.”
“···알겠어요, 그럼.”
그러자 시무룩해진 제갈혜미가 꾸물거리더니 다시 침상으로 몸을 구겨 넣었다.
만난 지 얼마 되지도 않은 그에게 보이기엔 과한 친밀감이었지만 그녀 입장에선 그가 생명의 은인일 테니 이상한 일도 아니었다.
‘어쩌면 편하게 속내를 털어놓을 대상이 필요했던 걸지도 모르고.’
가족도, 가문 사람도 아닌— 그녀가 지나온 삶과 전혀 상관없는 외부인.
그녀가 했던 말들을 떠올려 보면 이해할 수 있을 것 같기도 했다.
“···내일 봐요.”
“예, 내일 뵙겠습니다.”
그렇게 휴고는 새로운 인연과 함께 강환계에서 순조롭게 자리를 잡아 나갔다.
***
한바탕 전투가 벌어진 듯 난장판이 된 전장의 한구석.
우우웅—
경건한 자세로 무릎을 꿇은 채 두 손을 마주 잡은 한 사내의 주위로 무거운 공기가 감돌았다.
어떤 움직임도 없이 그저 가만히 기도하고 있는 것뿐이었지만, 그 엄숙한 모습은 보는 이의 숨을 턱 막히게 할 정도로 압도적인 위압감을 뿜어내고 있었다.
그리고 마침, 그 모습을 감탄 어린 눈으로 바라보는 이가 있었으니—.
‘역시 하인리히 님! 잠시도 기도를 쉬지 않으시네요.’
바로 주신교단의 성녀인 리에스타였다.
또 한 차례 출몰한 백색 거인을 토벌한 직후.
자신이 맡은 구역의 희생자들을 돕고 돌아온 그녀는 오늘도 틈이 나는 대로 기도를 올리고 있는 하인리히를 보며 눈을 반짝였다.
‘이거 저도 질 수 없죠!’
그의 몸에서 불길처럼 일어나는 신성력에 그녀의 마음속에도 신앙의 열기가 옮겨붙은 듯했다.
그에 그녀는 조심스럽게 그의 옆에 자리를 잡고 같은 자세로 기도를 올리기 시작했다.
전투에 이어 인근에 막 초광범위 치유 성법을 사용한 후인지라 피로가 상당했으나, 주도적으로 전투를 이끌고 뒷수습까지 도왔던 하인리히도 저렇게 신실한 모습을 보이고 있는데 그녀가 우는소리를 할 수는 없지 않은가!
그렇게 경건한 신성력이 도도하게 흐르는 공간 속.
성자와 성녀는 나란히 앉아 주신께 기도를 올렸고—.
‘음, 이 정도면 됐나?’
오늘도 하인리히는 강환계로 보낼 신성력을 성공적으로 리필할 수 있었다.
***
“여기도 있네. 이거 진짜 노다지잖아?”
자신의 팔뚝만한 커다란 식물 뿌리를 집어 든 해리스가 흐뭇하게 미소 지었다.
이곳은 제갈세가가 있는 융중산과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한 무당산.
강환계에서도 거대 집단에 속하는 무당파가 자리하고 있는 영산이었다.
‘물론 지금은 내 텃밭일 뿐이지만.’
아직까지 기운이 풍부한 이곳에 와보니 확실히 느낄 수 있었다.
그가 지금까지 캐온 영약들에 깃든 기운이 생각보다 만족스럽지 않았던 이유를.
‘제갈세가에서도 그랬었지. 영약들의 전반적인 약효가 떨어지고 있다고.’
그게 전부 주변 기운에 너무 민감한 나머지 세상의 기가 말라가는 것에 영향을 받아서였다.
아마 용맥에서 자란 것이 아니라면 이 세상에 남은 다른 영약들도 대부분 비슷한 상태일 터.
그만큼 용맥산(産) 영약의 가치가 높아진다는 소리였다.
‘그리고 우리 휴고가 먹을 것들은 항상 최상급이어야지!’
영약이라는 것도 많이 먹다 보면 내성이 쌓여서 효과가 줄어들 텐데, 괜히 잡스러운 것들로 그 한계를 채울 순 없는 노릇이었다.
우리 아이에겐 정말 엄선한 식재료들만으로 꽉꽉 눌러 담아 먹여도 모자랄 판이었으니까.
‘그렇게 생각하니 다른 곳에서 캐낸 영약들을 제갈세가에 넘긴 것도 탁월한 선택이었군. 적당히 생색도 낼 수 있었고.’
그렇게 흡족한 마음으로 고개를 끄덕인 해리스는 분주하게 날아다니며 눈에 띄는 영약들을 하나둘 수거해 나갔다.
시간도 없는데 괜히 마찰이 생겨 귀찮아질까 봐 최대한 기척을 감추고 남들의 이목을 피한 것은 덤이었다.
‘물론 지금이 아니라도 기회가 될 때마다 올 생각이긴 하지만. 그래도 그동안 휴고가 당장 쓸 것들 정돈 미리 챙겨두는 게 좋겠지.’
그런 마음으로 채집을 이어가다 보니 그 양이 생각 이상으로 불어나고 있었으나, 원래 이런 건 부족한 것보다는 넘치는 게 나은 법이었다.
정 다 못 쓰겠다 싶으면 선심 쓰듯 다른 이들에게 뿌려도 되는 일이었으니.
‘음, 일단은 이 정도면 되겠군. 그럼 이제 슬슬···.’
해리스가 강환계로 진입한 지 10일 차가 되던 날.
그가 다시 아우테리카로 돌아가기 직전에 있었던 참된 노동의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