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overeign of the Infinite Clones RAW novel - Chapter (266)
#266
광기의 왕 (5)
아우테리카 차원의 가장 밑바닥.
한 세상의 찌꺼기가 모여서 고인 차원의 쓰레기통.
심연.
그곳은 살아있는 존재는 물론 형태와 개성을 갖춘 어떠한 것조차 허용하지 않는 장소였다.
시간과 공간은 물론 추상적인 개념과 현상까지 뒤섞여 흐르는 혼돈 그 자체라 할 수 있는 곳.
하지만 모든 일에는 예외가 있는 법이었으니.
그런 끔찍한 공간 속에서도 끝까지 ‘자신’을 잃지 않고 그 존재감을 과시하는 존재가 있었다.
꿈틀—
심연 깊은 곳에 가라앉아 파묻힌 그것이 신경질적으로 몸부림쳤다.
주변 환경에 반쯤 동화된 상태에서도 빛이 바래지 않은 그 존재의 움직임에 주변의 흐름이 뒤틀리며 공간 전체가 거세게 요동쳤다.
하지만 그 정도 난리쯤은 심연에선 일상이나 다름없는 일이었기에, 그것은 바깥세상에 그 어떠한 영향도 줄 수 없었다.
지금까지 늘 그래왔던 것처럼.
한동안 몸부림치던 그 존재의 움직임이 서서히 가라앉았다.
뜻대로 되지 않은 일에 반사적으로 반응하긴 했지만, 겨우 그런 일 하나에 일희일비하기엔 그는 너무 오랜 세월을 존재해 왔다.
쿠르르—
움직임을 완전히 멈춘 그것은 다시 조용히 침잠했다.
비록 나름대로 공들여 왔던 일이 실패하면서, 또 충동적으로 개입까지 시도하느라 상당한 침식을 허용하긴 했으나, 그것으로 모든 일이 끝난 것도 아니었으니까.
어차피 그에게 좌절은 일상이었다.
아직도 많은 시간이 남아 있는 만큼 기회 또한 계속해서 찾아올 터.
그가 할 일은 그 순간이 왔을 때 그걸 놓치지 않고 제때 이용하는 것이었다.
그렇게 그것은 다시 조용히 때를 기다리기 시작했다.
머지않아 찾아올 그날을 위해.
***
타라크 시 북서 방면을 뒤덮었던 검붉은 소용돌이가 서서히 흩어졌다.
정확히 말하자면 세상에 퍼진 광기의 흐름은 여전히 그대로였지만, 그 격류의 세기와 밀집도가 줄어들면서 평소처럼 눈에 보이지 않을 수준까지 농도가 떨어진 것이었다.
‘광기를 완성하는 데 시간이 조금 걸리더라도 이렇게 하는 게 안전하겠지.’
그렇게 하지 않으면 그 흐름에 홀린 마물들 때문에 다시 대륙이 엉망이 되어버릴 테니.
사실 지금도 그리 좋은 상황은 아니었다.
혁명가의 각성 시도부터 처리까지 걸린 시간은 고작 10여 분 남짓.
나름대로 빠르게 사태를 수습했으니 대부분의 마물들은 다시 원래의 자리로 돌아갔을 테지만, 관성적으로 계속 이동하거나 이미 서식지의 경계가 흐트러진 경우도 적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아마 그 피해는 인근 거주자들에게 고스란히 전가되겠지.
‘···뭐, 이 정도로 끝난 것만 해도 다행이지만.’
최근 각 지역의 경계 수준을 생각하면 그만한 소요 정도는 일이 더 심각해지기 전에 수습할 수 있을 터였다.
이쯤 되면 그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했다고 봐도 무방하리라.
“으그극— 어우, 이거 속이 영 더부룩하구만. 몸도 뻐근하고!”
마침내 주변을 휩쓸던 폭풍이 완전히 사라져 정적이 감도는 가운데.
다시 원래의 크기로 돌아온 할리는 서서히 가루가 되어 흩어지는 거인의 사체에 기댄 채, 갑작스러운 힘의 유입에 부하가 걸린 몸을 스트레칭 하듯 쭉쭉 뻗었다.
눈은 바로 앞에 떠오른 시스템창을 바라보면서.
《개체가 조건을 달성하여 성장합니다. 특수스킬「광기의 씨앗」을 획득합니다.》
그가 강탈한 것이 시스템의 공증을 받아 스킬로 자리 잡았다.
그러나 역시 아직 불완전한 상태의 핵이기 때문인지, 불사왕 수준은커녕 그리 특별한 능력이랄 것도 없었다.
기껏해야 세상의 광기를 마음대로 끌어올 수 있다는 점과, 그 자체로 막대한 에너지원이 될 수 있다는 것 정도?
‘아니,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대단하지. 거기다 당장 할리가 품은 격 자체도 상당히 오른 것 같고 말이야.’
그 격을 제대로 담기 위해 지금도 계속해서 「궁극의 진화 생명체」가 성장하며 육체를 진화시키는 중이었다.
나중에 직접 해 봐야 알겠지만, 아마 거인화 했을 때의 최대 크기도 전보다 훨씬 커졌을 터.
게다가 풍족한 에너지가 뒷받침된 할리가 얼마나 강해질 수 있는지는 이번에 직접 겪어보지 않았던가?
사실상 그에게 거대한 에너지 탱크가 생긴 것이나 다름없는 일이었다.
또 나중에 씨앗이 완전히 발아하면 능력이 어떻게 진화할지도 모를 일이었고.
‘그보다··· 역시 놈이 말했던 그 권능이라는 건 없네.’
그것이 조금 아쉽긴 했다.
이번 기회에 디아나와 혁명가가 가진 그 불가사의한 감각에 대한 단서를 얻을 수 있지 않을까 싶었는데.
‘이런 식으로 빼앗을 순 없다는 건가? 하긴, 유폐된 신과 관련된 권능 같았으니. 조금 아쉽긴 하지만··· 어차피 혁명가가 죽은 이상 이젠 신경 쓸 필요도 없겠지.’
그는 혁명가와 심연의 경계에서 싸웠을 당시에 한스가 겪은 그 존재의 개입을 떠올리다가 슬쩍 고개를 저었다.
당연하지만 심연에 갇힌 신을 꺼내는 작업이 그리 쉬울 리 없었다.
그런데 그런 오랜 세월 공들인 대작전을 이리 완벽하게 박살 내 놨으니, 적어도 그가 이 세상에 남아있는 동안 그 신이라는 작자와 또 마주할 일은 없지 않을까?
“성자님! 어디 불편하신 곳은 없으세요?”
“아, 괜찮습니다. 다 성녀님께서 지원해 주신 덕분이지요.”
“오랜만이에요, 할리 씨. 아깐 정신이 없어서 인사도 못 나눴네요. 가장 앞장서서 싸우셨는데 몸은 괜찮으신가요?”
“으하하핫! 아, 이 몸이야 언제든 튼튼함 그 자체지! 이거 참, 오랜만에 친구 좀 만나러 왔다가 저런 놈이랑 마주칠 줄은 나도 몰랐구만! 카하핫!”
그렇게 잠시간 일이 무사히 마무리된 직후의 여운을 즐기고 있자, 상황이 모두 끝난 것을 감지한 이들이 하나둘 모여들기 시작했다.
“흐응~ 나보곤 아이들을 데리고 뒤로 빠지라더니. 결국 혼자만 재미를 보셨군요, 하이 로드?”
“흠, 다행히 전부 무사한가 보군.”
“그래도 다들 진혈은 되는 아이들이니까요? 뭐, 살짝 조짐을 보이던 아이도 몇 대 때려주니 깨끗하게 나았고 말이죠? 우후후.”
어쩐지 유독 몇몇이 초췌해 보이더라니 그것 때문이었나.
그래도 별다른 희생이 없다는 것은 좋은 소식이었다.
하긴··· 놈을 상대하는 데 고전했던 것도 그 압도적인 덩치와 어우러진 맷집과 재생력 때문이었지, 아바타 삼인방을 비롯해 성녀와 브리키까지 포함된 초월급 강자 다섯이 버거워할 정도는 아니었다.
실제로 전투 내내 시종일관 우위를 점하며 압도하기도 했고.
두두두두—
다그닥 다그닥
그리고 그렇게 모여든 것은 함께 싸웠던 용사 파티와 하이브리드의 뱀파이어들만이 아니었다.
그들의 뒤쪽, 탈리아 시가 있는 방향에서 말과 마차를 탄 다수의 사람들이 줄을 지어 이쪽으로 접근하고 있었다.
슬쩍 그쪽을 바라본 하인리히가 살짝 눈을 크게 뜨며 턱을 쓰다듬었다.
‘마스터급 기사와 정예 기사단··· 툴크 왕실에서 파견된 건가? 거기다 저긴··· 피카올 대신전의 도노반 추기경이 직접 왔다고? 팔라딘과 대주교들까지 데리고?’
그것은 이곳에서 벌어진 사태를 전해 듣고 급히 달려온 원군들이었다.
이 땅의 주인이라고 할 수 있는 왕국의 정예 부대는 물론, 이온 대륙 서부를 관장하는 피카올 대신전의 강자들까지.
심지어 과거 성검의 시험을 치르면서 안면을 익혔던 도노반 추기경은 대신전의 책임자 신분이었다.
팔라딘 출신이라고 듣긴 했는데 설마 이런 자리에까지 직접 나올 줄이야.
‘확실히, 일찍 왔다면 어떤 식으로든 도움이 됐을 전력이군.’
물론 이미 상황이 종료된 마당엔 한참 늦은 뒷북이라 할 수 있었으나, 사실 곧바로 아바타를 보낸 그가 빨리 대응한 거지 그들의 파견이 늦었다고 볼 순 없었다.
마지막에 있었던 할리의 활약 덕분에 생각 이상으로 전투가 빨리 끝난 것도 한몫했고.
‘뭐 지금도 충분히 도움이 되겠지만 말이야.’
그리고 어찌 보면 딱 적절한 타이밍이기도 했다.
쿠르르릉— 쿠쿵—!
아직 이번 일이 전부 끝난 게 아니었으니까.
히히히힝—
푸르릉— 푸힉!
“워! 워! 뭐야, 갑자기!”
“헛? 저기, 저쪽에!”
“이건, 설마···!”
슬슬 근처까지 다가와 인사말을 나누려던 이들이 긴장하며 말고삐를 휘어잡았다.
뭔가에 겁을 먹고 난동을 부리기 시작한 말들과 그것을 진정시키기 위해 애쓰는 사람들.
그 갑작스러운 이상 상황에 현장에 있는 사람들의 시선이 모두 한곳으로 돌아갔다.
쿠구궁— 찌지지직—!
그 이상의 근원지가 어디인지 굳이 찾으려 노력할 필요도 없었다.
애초에 공간이 찢어지는 듯한 굉음과 함께 일어난 시각적 효과가 도저히 그것을 무시할 수 없게 만들었으니.
거인이 쓰러진 곳에서도 조금 떨어진 곳.
그 허공의 공간이 깨진 유리처럼 금이 가 있었다.
순식간에 몰려온 먹구름이 하늘을 뒤덮는다.
이어서 요란한 뇌성과 함께 검은 벼락이 내리쳤다.
스산한 바람이 일대를 휘감고, 날씨에 맞지 않은 서리가 내려앉았다.
“하마(下馬)! 방진을 갖춰라!”
“성기사들 앞으로!”
“주신께 아뢰옵나이다. 당신의 자녀들께 은총을 베푸시어···.”
그에 근처까지 접근했던 병력이 곧바로 전투를 준비하며 기세를 드높였다.
그 반응은 거인과 싸우고 마음이 풀려 있던 이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렇게 갑작스럽게 발생한 이상 현상의 중심.
마치 유리가 깨진 듯 사방으로 금이 간 공간 한가운데.
파지직— 파차창—!
그것이 화려하게 깨져 나가며.
사방을 자욱한 흑마력이 뒤덮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안에서 그가 모습을 드러냈다.
[크크큭, 이거 오랜만이구나. 빛의 기사, 하인리히 세인트 랜드가드.]지금 저기 쓰러져 있는 거인 따위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 절대 악이자, 이 세상을 파멸시키려는 진정한 흑막.
대륙의 공포이자 인류의 절망, 심연에서 기어 올라온 죽음의 현신.
“···불사왕, 한니발 스트라우스···!”
불사왕이 이 자리에 강림했다.
뒤에는 흉흉한 기세를 뿜어대는 무수히 많은 언데드들을 거느린 채.
***
역천의 서약의 설립자이자 리더, 혁명가.
그는 아우테리카의 어둠에 숨어 이 세상을 좌지우지하려던 흑막이자, 심연에 유폐된 악신의 부활을 꿈꾸는 이단이었으며, 다수의 강자를 상대로 어마어마한 위용을 선보인 초대형 거인이었다.
사실 악역 배우에 불과한 불사왕 한스를 제외하면 실질적인 이 세상의 최종 보스라 할 만한 존재였는데···.
‘뭐, 일이 쉽게 풀리면 좋은 거지만.’
그런 존재가 맞이한 최후는 조금 어이없을 정도로 허무했다.
마지막 순간에 뭔가를 할 것처럼 심상치 않은 모습을 보였던 거인.
하지만 놈은 그 뭔가를 제대로 선보이기도 전에 할리에게 두개골이 박살 나 버렸고.
그대로 광기의 씨앗을 강탈당하며 허망하게 퇴장하고 말았다.
그리고 그것으로 끝.
사실 지금도 계속해서 시나리오를 짜내려 가고 있는 입장에서 보자면 놈의 그 안일한 뒷마무리가 불만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복선을 깔았으면 회수해야 하고, 뭔가 의미심장한 모습을 보였으면 그에 걸맞은 모습을 보여야 할 것 아닌가!
그것은 심각한 프로 의식의 결여였다.
‘하여튼 요즘 흑막들은 근성이란 게 없어요.’
물론 농담이었다.
하지만 그 허무한 최후와는 별개로 놈은 굉장히 매력적인 소재라 할 수 있었다.
무려 이 세상을 난장판으로 만든 결정적인 요인인 광기의 숙주이자, 용사를 비롯한 다수의 초월급 강자와 싸우면서도 당당하게 맞섰던 괴물이 아닌가?
당연히 이대로 찝찝하게 퇴장시키기엔 아쉬울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준비했다.
[아아— 과연 제법이로구나. 이번 건 상당히 공들여 준비한 선물이거늘.]그 가련한 거인의 배역을 완벽하게 만들 마지막 쇼를.
“역시 네놈의 짓이었나, 불사왕!”
[받은 게 있으니 돌려줘야 하지 않겠는가? 아쉽군. 저걸로 나라 하나 정도는 없애버릴 수 있으리라 생각했는데.]그렇게 거인에게 부여된 역할은 불사왕이 보낸 비밀 병기.
일명 중간 보스였다.
[용사여, 빛의 기사여. 나는 아직도 잊지 않았다. 남부에서 네가 이 몸의 심장에 그 저주받을 성검을 꽂아 넣던 순간을.]“그래서, 복수라고 말할 셈이냐?”
[크흐흐— 그럴 리가. 그저 기꺼울 뿐이다. 나의 대적자가 그렇게까지 나를 즐겁게 해줄 수 있음에.]그리고 거기에서부터 이어지는 이 만남 시나리오는.
[그런데 용사, 알고 있는가? 그날로부터 곧 일 년이 다 되어가는구나.]“···무슨 말이 하고 싶은 거지?”
[아아— 별거 아니다. 그저···.]‘안방극장 : 마왕과 용사’의 종막으로 향하는 시작이었다.
[더 기다리기엔 조금 지루해져서 말이지.]이야기를 좀 더 풍성하게 만들기 위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