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overeign of the Infinite Clones RAW novel - Chapter (269)
#269
외출 (1)
“거기! 그건 저쪽으로 치워!”
“어어엇? 무너지지 않게 조심하라고!”
“마법사는 아직이야? 이건 우리만으론 못 건드려!”
난장판이 된 현장과 그 수습을 위해 분주하게 움직이는 사람들.
갑작스러운 거인의 습격과 불사왕의 침공이라는 악재를 연이어 겪은 타라크는 한창 정신없는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사실 불사왕이 도중에 떠난 덕분에 그나마 더 큰 희생이 생기지 않은 것뿐, 이번 일로 타라크가 입은 피해는 절대 작지 않았다.
마법사들의 필사적인 운용으로 무리하게 가동된 방호 방벽을 비롯한 마법진은 회생 불가 수준으로 망가진 지 오래였고, 무너져 내린 성벽과 대지의 오염도 심각한 수준이었으며, 그 외의 인적ꞏ물적 손실도 상당했으니까.
거기다 생명체와 상극인 죽음의 기운을 풀풀 풍기는 불사의 군대를 극한의 상황에서 마주해야 했던 것 때문에, 방어전에 참여한 병사들 대부분이 깊은 공포와 트라우마를 가지게 된 것도 문제였다.
그에 전투가 마무리된 직후, 부상병들뿐만이 아니라 정신에 타격을 입은 병사의 치료까지 도맡은 이들이 바로···.
“허헛, 오랜만에 뵙습니다. 성녀님, 성자님. 이거 갑작스러운 일들이 연달아 터져서 뒤늦게 인사드리게 됐군요.”
“정말 오랜만이에요, 도노반 추기경님! 오늘 고생 많으셨어요.”
“아닙니다. 이 늙은이가 한 일이래 봤자 성녀님과 동료분들의 활약만 하겠습니까? 이번 일도 불사왕이 직접 참전했다면 순식간에 타라크가 잿더미가 되어버렸겠지요.”
피카올 대신전에서 넘어온 교단의 사람들이었다.
그들의 대표인 추기경은 불사왕의 등장과 타라크 공방전에 이은 급한 환자들의 응급처치까지 끝마치고서야 비로소 용사 파티와 서로 정식으로 인사를 나눌 수 있었다.
손녀를 대하는 할아버지처럼 자상한 눈길로 리에스타 성녀를 바라보는 도노반 추기경에게 하인리히가 놀랍다는 듯 슬쩍 한마디를 건넸다.
“그런데 굉장히 빠르게 오셨군요. 이만한 수준의 지원군을 준비하는 것도 쉽지 않으셨을 텐데 말입니다.”
“최근 놈들이 묘하게 잠잠해지는 것 같기에 혹시나 싶어 만반의 대비를 갖추고 있었습니다. 만약의 사태가 발생하면 언제나 곧바로 출발할 수 있도록 말이지요. 그런데 때마침 타라크로부터 긴급 연락이 오지 뭡니까?”
그리고 그는 이번이 첫 긴급출동이었던지라 생각보다 지체했다고 자조하며 아쉬운 듯 입맛을 다셨다.
전과 다름없이 여전히 흉악하기 그지없는 빵빵한 근육을 연신 꿈틀거리면서.
‘나이도 많으신데 대단하단 말이야.’
그것을 보자 성검의 시험을 치르기 위해 갔던 피카올 대신전에서 그를 처음 만났을 때가 떠올랐다.
물론 단순히 용사 후보 성기사였던 그때와 성자로 인정받고 한창 명성을 떨치고 있는 지금 그의 입지는 천지 차이였지만.
“그런데··· 흠, 그 뱀파이어들은 이미 떠났군요. 허헛.”
“아, 전투가 끝나자마자 곧바로 자리를 벗어난 것 같습니다. 이번에 도와준 것에 대해 감사 인사라도 드릴 생각이었습니다만···.”
“으음, 확실히 그치들이 큰 도움이 되긴 했지요. 그 조력이 없었으면 아마 그리 오래 버티지 못하고 무너지고 말았을 겁니다. ···허 참, 뱀파이어들에게 도움을 받는 날이 올 줄이야. 이거 복잡한 심경이군요.”
짧지 않은 평생 동안 뱀파이어를 적이라 여기며 살아왔던 그가 짧은 한숨을 토했다.
그간 그는 성자가 밀어붙인 화평책을 탐탁지 않아 하고 있었으나, 실제로 이렇게까지 도움을 받아버린 이상 이제는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때 내린 성자의 판단이 옳았다는 것을.
그 모습을 본 하인리히가 입가에 흐릿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걸로 뱀파이어의 양지화도 한층 탄력받겠지. 도시가 입은 피해에 대해서는 휴버트 상회가 추가로 출자하면서 영향력을 더 키우는 방향으로 가면 될 테고. 어디, 그럼···.’
그리고 그와 같은 시각.
전투가 끝난 직후 슬그머니 안가로 돌아온 하인즈 2세는 부하들이 혈문을 준비하는 것을 바라보며 생각을 정리했다.
그가 지구에서 아우테리카로 다시 넘어온 것은 슬슬 동부 공화국의 뒤처리가 끝나가고 있었기에 그것을 제대로 마무리 짓기 위해서였다.
그러다 비상사태가 터져서 급하게 이쪽으로 건너왔던 것.
이제 모든 문제가 해결되었으니 서둘러 돌아가 일을 끝맺을 필요가 있었다.
물론 아직 툴크 왕국에서의 조력에 대한 보답 문제도 남아있었지만—.
‘그런 협상이야 언제든 할 수 있다. 이번에 확실하게 이쪽의 힘을 보여주기도 했으니까. 앞으로 벌어질 일을 생각하면 저쪽에서 먼저 숙이고 들어올 수밖에 없겠지.’
탈리아 왕국의 대표인 하인즈 2세가 그런 사소한 것까지 직접 나서봐야 위신만 상할 뿐이다.
원래 실무자란 이럴 때 부리라고 있는 법.
이번 지원에 대한 답례는 물론 앞으로의 일에 대해서도 국가 차원에서 협의할 문제였으니, 당장 그가 이 자리에 남아서 더 할 일은 없었다.
‘케일라 맥클레어와도 다시 이야기도 해 봐야 하고.’
아들의 실종에 대한 전말을 알기 위해 그에게 협조한 공화국의 부통령.
그녀의 아들이 어떻게 되었는지 알아내기 위해 오바이포 클랜 출신들을 전수 조사하던 중, 미심쩍은 정황이 발견되었다고 막 보고받은 찰나였다.
‘···어쩌면 지금까지 살아있을지도 모르겠는데.’
물론 아직 확실한 것은 아니었다.
아무래도 이십여 년 전에 납치되어 실종되었던 어린아이가 지금도 멀쩡히 살아있을 확률은 그리 높지 않을 테니.
‘여기 일을 최대한 빨리 마무리하고 얼른 북유럽 맛집 투어나 갈 생각이었는데.’
하인즈가 슬그머니 혀를 내밀어 입술을 핥았다.
하지만 앞으로도 많은 도움이 될 상대와의 약속을 무작정 깨뜨릴 수도 없는 법.
그는 일렁거리는 핏물 속에서 서서히 열리기 시작한 혈문을 바라보다 슬쩍 고개를 비틀었다.
‘뭐, 그렇게 오래 걸리지도 않겠지.’
어차피 혁명가란 가장 큰 방해물을 제거한 이상.
더는 이 세상에서 그의 뜻을 거스를 만한 존재는 없을 테니까.
***
『XX된 XXX의 XX 파편 (28,500,000)』
“흐음, 역시 저건 그 심연에 처박힌 신과 관련된 거겠지?”
나는 『물품 구매』란에 떠오른 한 물건을 바라보며 슬쩍 미간을 찌푸렸다.
처음 보았을 땐 무려 3천만에 달했던 알 수 없는 상품.
동부에 숨어있던 뱀파이어 오바이포를 처리하기 전, 드래곤 아바타를 만든 직후에 갑자기 30만 포인트가 줄어들었던 그것이.
이번엔 100만 이상이 줄어들어 있었다.
‘역시··· 이만한 변동 폭이라면 확실하다 봐도 되겠지.’
저 상품은 그 거인, 혁명가와 그놈이 숭배하는 심연의 신과 무언가 연관이 있다는 것을.
‘심연에 유폐된 신이라.’
당연한 이야기지만, 그에 대한 정보를 알고 나서부터 온갖 다양한 방법을 총동원해 관련 정보를 수집했다.
각 아바타 휘하에 있는 정보 단체들은 물론 성자로서의 위치를 이용하길 서슴지 않았으며, 그렇게 대륙 전역에서 긁어모은 정보는···.
“이 정도면 신기할 지경인데.”
놀랍게도 전무(全無)했다.
심지어 각 지역의 설화나 우스갯소리로도 그 비슷한 말이 하나도 없을 정도였으니 말 다 했지.
그리고 그것은 주신교단 내부, 그중에서도 정보 분석을 겸하는 이단심문관 쪽도 마찬가지였다.
그에 관련해서 슬쩍 떠 봤을 때, 마스크와 후드를 눌러 써 눈만 노출된 상태였음에도 그들의 당혹스러움이 절로 느껴질 정도였으니까.
혹시 성자가 맛이 간 건 아닌가 하는 걱정이 담긴 눈빛에 하인리히는 그 이상의 정보 수집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물론 그쯤 되면 그것 자체가 하나의 정보라 할 수 있기도 했고.
‘아예 아우테리카란 차원 전체에서 존재가 지워진 거라는 소리니까.’
세계 단위로 벌어진 신적인 존재의 기록말살형.
그것이 가능한 존재는 단 하나밖에 없었다.
‘이제야 알겠군. 주신이 왜 그렇게 나를 밀어준 건지.’
불사왕은 그 심연 속의 신이 내보낸 첫 번째 칼이자 가장 위협적인 무기였다.
그런데 그런 것을 이 세상과 연관도 없는 외부인이 불쑥 나타나 아무렇지 않게 빼돌린 셈이 되어버리지 않았나?
모종의 이유로 배제했던 버그가 자꾸 튀어나오려는 상황에, 세계의 질서를 주관하는 주신이 그를 백신으로 사용한 것도 그리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뭐, 윈윈이었으니까 불만은 없지만.”
나는 어깨를 으쓱이며 그 정체불명의 상품에서 시선을 뗐다.
그간 모인 카르마 포인트를 확인하려 시스템창을 연 것이었는데, 무심코 그 가격 변동을 확인하다가 생각이 딴 데로 새 버렸다.
‘어쨌든, 역시 거물을 사냥해서인지 포인트가 꽤 쏠쏠하단 말이야.’
연달아 고유스킬을 강화한 데다 성장의 비약까지 꾸준히 사용하면서 그간 카르마 증가세가 조금 더뎌진 상황이었는데, 이번에 혁명가를 처리하며 그 보유량이 폭발적으로 증가했다.
이번에 있었던 단 하나의 사건만으로 거의 200만에 가까운 수치가 한꺼번에 들어온 것이다.
‘이 포인트는 일단 좀 아껴둘까. 언제 뭐가 필요해질지 모르니. 무엇보다 당장 고유스킬을 강화할 순 없을 것 같으니까.’
이제 포인트로 강화한 횟수만 무려 12번이었다.
그리고 이 정도 단계까지 오니 본능적으로 느껴지는 게 있었다.
아직 자신은 다음 단계로 나아갈 준비가 되지 않았다고.
‘하긴, 언제고 한계가 올 거라 예상하긴 했지.’
까놓고 말해서 지금의 나는 너무 단기간에 급성장한 나머지 다음 단계로 넘어갈 최소한의 숙련도마저 만족시키지 못한 상태였다.
아마 저번 강화에서 연달아 두 번 강화했던 것도 상당한 영향을 미쳤을 터.
‘그래도 당분간은 그리 급하지 않으니 상관없어. 어차피 남은 시간은 많으니까 느긋하게 내실을 다지자.’
여러 개의 몸을 가지고 훨씬 시차가 빠른 세상을 살아가느라 실감이 잘 가지 않았으나, 지금의 나는 각성자가 되고 「아바타」 능력을 손에 넣은 지 고작 반년도 채 되지 않은 시점이었다.
누가 봐도 비정상이라고밖에 보이지 않는 성장세인데, 여기서 괜히 조급하게 구는 것도 과한 욕심이리라.
띠리리링~♪
그렇게 시스템창을 보고 있을 때, 스마트폰에서 미리 맞춰뒀던 알람 소리가 울려 퍼졌다.
“아,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됐나.”
어느덧 정오가 가까워질 시간.
그에 슬쩍 폰을 들어 시간을 확인한 나는 서둘러 겉옷을 걸치고 해가 쨍쨍 내리쬐는 밖으로 향했다.
‘날씨 한번 더럽게 좋군.’
나는 슬쩍 눈살을 찌푸리며 눈 위를 손으로 가리며 발걸음을 재촉했다.
이제는 밖에 나가는 것도 무리 없이 할 수 있지만, 오랜 세월을 집 안에만 틀어박혀 지낸 탓인지 여전히 외출하는 것을 그리 좋아하진 않았다.
필요한 운동 시설과 여가 시설 등도 전부 집안에 설치해 뒀으니 굳이 나갈 필요성도 느껴지지 않았고.
-강태산 : 야, 진짜 오게? 할머니도 괜히 무리하지 말라고 하시는데.
하지만 오히려 그렇기에, 필요한 순간에는 어떻게든 일부러라도 외출하려고 노력할 필요가 있었다.
게다가 그들은 나에게 완전히 남이라고 할 수도 없는 존재이지 않은가?
고작 편리를 챙기고자 자신에게 얼마 남지 않은 인간관계마저 무시할 수는 없었다.
-나 : 간다. 이미 버스 탐.
-강태산 : ㅇㅇ 그럼 조심히 와라.
어쩐지 오랜만에 하는 것 같은 본체 상태로의 서울 나들이.
오늘은 내 유일한 친구인 강태산의 할머니가 퇴원하는 날이었다.
***
운 좋게 별다른 기다림 없이 몇 차례 버스를 갈아타고 서울 시내로 향하며 느낀 점은, 하루라도 빨리 면허를 따야겠다는 다짐이었다.
그간 편하게 순간이동을 펑펑 써대며 이동했기에 미처 체감하지 못하고 있었는데, 일반인이라 알려진 본체 상태로 어딜 이동하려다 보니 환승 타이밍이 잘 맞은 상태였는데도 이동이 너무 불편했던 것이다.
‘슬쩍 「개체 투영」을 사용해서 이동하는 방법도 있긴 하지만···. 겨우 외출하는 걸로 그렇게까지 할 순 없지.’
원래 그런 사소한 방심에서 꼬리가 드러나는 법이었다.
본체의 장기적인 대외활동의 알리바이를 위해선 되도록 정상적인 방법을 이용할 필요가 있었다.
“아이고, 성현이 왔나? 뭐 한다고 여까지 왔누? 괜히 피곤하게시리.”
“아하하— 괜찮아요. 이참에 바깥바람도 좀 쐬고 하는 거죠.”
“아, 그건 맞아요. 쟨 이럴 때라도 밖에 좀 나와야 돼. 할머니, 쟤 집이 어떤지 아세요? 글쎄 집에다가 헬스장에 수영장, 영화관까지 차려놨다니까요?”
그리고 마침내 병원에 도착해 막 퇴원 절차를 밟던 할머니를 뵈었을 때.
나는 가슴을 간질거리는 묘한 기분에 휩싸였다.
‘신성력 효과 한번 확실하네.’
그리 병세가 좋지 않았던 할머니가 마침내 퇴원하게 된 모습에 그날 하인리히의 몸으로 행했던 성법 치료가 재차 떠올랐던 것이다.
‘노환 자체야 어쩔 수 없다지만, 체력과 저항력을 회복시키는 것만으로도 큰 도움이 되지.’
당시의 신성력이 주교 수준이었던가.
성자급인 지금에 비하면야 제법 손색 있다 할 수 있겠으나 사실 주교도 충분히 고급 인력이었다.
귀족으로 치면 백작급에, 신전과 함께 하나의 교구까지 책임질 수 있는 고위 성직자였으니.
‘할머니도 시간이 좀 걸리긴 했지만 어쨌든 완치되기도 했고.’
역시 신성력과 성법이라는 것은 상당히 쓸모 있는 능력이었다.
괜히 현대 사회에서 온갖 군소 종교들이 난립하는 게 아니었다.
아마 페널티로 지구에서의 출력이 심각하게 감소하지 않았더라면 성직자들이 지금보다 더한 세를 떨치고 있지 않았을까?
“끝났다! 이제 가자.”
나는 모든 퇴원 수속을 마치고 할머니의 휠체어를 끌고 나가는 강태산의 뒤를 따랐다.
그렇게 막 병원을 나서려던 직후.
“풉··· 푸힛!”
압도적인 스테이터스에 더해 고유스킬 강화 효과로 상시 보정 받는 내 청각에 작은 웃음소리가 감지되었다.
오직 내 귀에만 들려온 불길한 웃음.
순간 등골에 싸늘함이 내달리며 감각이 곤두섰다.
나는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려 웃음소리가 새어 나온 곳을 살폈고—.
곧이어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어쩐지 운수가 좋더라니!’
역시 집구석이 제일 안전하다는 것을.
그리고.
콰아아앙—!
병원 로비에서 거대한 폭발이 터져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