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overeign of the Infinite Clones RAW novel - Chapter (275)
#275
재전(再戰) (4)
황궁 마탑주 로렌스 후작과 전투 마법사들이 도착한 이후.
변두리 빈민가에서 일어난 사태는 빠르게 정리되었다.
끝까지 저항하던 스타브는 오래 버티지 못하고 제압되었고, 대마법사의 난입에 탈출할 수 없다는 걸 깨닫자마자 자결을 시도한 소수의 복면인들은···.
“큽!”
“으읍!”
“어허, 어딜! 얌전히 있어.”
어느새 입을 포함한 몸 곳곳을 저주의 실에 휘감긴 채 뻣뻣하게 굳어 있다가, 곧 합류한 마법사들에게 모든 수단을 봉인 당한 채 연행되었다.
‘역시 굉장히 유용하단 말이지.’
전보다 한층 짙은 기운을 풍기는 오른손을 흘깃 바라본 헤스페론이 고개를 끄덕였다.
자결 직전의 순간에 복면인들이 방심한 탓도 있었지만, 그걸 감안해도 상당히 높은 수준이었던 놈들을 완벽히 제압할 수 있었던 건 전부 「갈망의 오른팔」이 성장하며 출력이 상승한 덕분이었다.
이번에 사용한 ‘마비’와 같이 세부적인 저주를 좀 더 능숙하게 사용할 수 있게 된 것도 적잖은 수확이었고.
-상황 종료! 덕분에 살았다. 고마워, 라일리.
-하아— 다행이네요, 늦지 않아서. ···그리고 이건 따지고 보면 제 탓이니 제가 사과를 드려야죠. 폐를 끼치지 않게 처음부터 확실히 처리했어야 하는데···.
-괜찮아, 괜찮아. 원래 세상사란 게 다 그런 거지 뭐. 그때그때 최선을 다했으면 그걸로 된 거야. 이제부터도 최선을 다해서 대처를···!
그렇게 자책하는 라일리를 느긋하게 격려하던 헤스페론이 갑자기 말을 멈췄다.
곧이어 그의 시선이 다시 자신의 오른팔로 향했다.
스으으—
스멀스멀 피어오르는 시커먼 저주의 기운.
한을 집어삼키고 만족했던 「갈망의 오른팔」이 다시 슬금슬금 고개를 치켜들며 시위하고 있었다.
-헤론? 갑자기 왜 그러죠? 괜찮아요? 역시 어디 다치신 건···!
-아, 미안. 별거 아냐. 그냥 잠깐 스타브랑 눈이 마주쳐서. 좀 째려봐 줬어.
그러나 헤스페론은 그녀의 말에 꼬박꼬박 답하면서도 이젠 요란하게 경련하기 시작한 자신의 오른팔을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아, 이거 위험한데.’
그녀에게 했던 말과는 달리 서서히 핏기가 가시기 시작한 창백한 안색으로.
뚝 뚝—
표정만 평안할 뿐, 식은땀이 가득한 얼굴에서 흘러내린 코피가 바닥으로 뚝뚝 떨어졌다.
그에 주변을 정리하던 몇몇 마법사들이 황급히 이쪽으로 다가왔으나, 지금은 그쪽에 신경 쓸 정신도 없었다.
사아아아—
이윽고 조금씩 간을 보는 듯했던 저주의 기운이 점점 거칠게 날뛰기 시작했다.
“이거··· 부작용인가.”
그 상황에서도 「마인드 허브」를 이용해 냉철함을 유지한 그는 슬쩍 인상을 찌푸리며 자기 몸을 하나하나 세심하게 점검했다.
아무리 계약을 통해 저주를 사역하는 데 성공했다지만, 애초부터 그 본질 자체가 양날의 검과도 같은 힘이었다.
심지어 보통의 저주도 아니고 영성을 띠며 스스로 격을 획득한 특별한 존재이지 않나?
불사왕 한스처럼 저주 따윈 완전히 무시하는 존재가 아니라면 항상 취급에 주의해야 하는 능력이었는데.
‘···확실히 이번에 좀 과하게 사용하긴 했어.’
단순히 힘만 운용한 게 아니라 방어용으로도 사용하며 흑마력이 담긴 공격과 몇 번이나 정면충돌했다.
그렇게 걸러서 전해진 충격만으로도 내장이 진탕될 정도였으니, 팔에 누적되었던 피해는 오죽할까.
스으으—
그때, 언제 현신했는지 팔을 휘감은 흑룡이 이쪽을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평소의 늠름한 모습과는 달리 뱀처럼 사이하게 빛나는 눈.
이어서 오른팔에 한정되어 있던 저주가 슬금슬금 영역을 확장하기 시작했다.
“쳇, 이래서 조심하란 의사의 말을 잘 들었어야 하는 건데.”
그 행태에 헤스페론이 조용히 혀를 찼다.
물론 이번엔 도저히 어쩔 수 없는 비상 상황이었다지만, 역시 어떤 방식으로든 대책을 마련할 필요가 있었다.
나중에 저주가 더 성장하고 나면 정말 어떻게 될지 몰랐으니까.
“하지만 지금은 어림도 없다, 이 녀석아.”
빠지직—
그리고 예상대로, 영역을 넓히려던 저주는 어깨선을 넘지 못하고 연신 꿈틀거렸다.
어깨에 둘둘 감아 둔 붕대 봉인구는 물론, 육체를 침탈하려는 시도에 그의 스킬인 「저주 포식자」가 극렬하게 저항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지금!’
파라라락—
그에 저주가 잠깐 주춤하는 사이.
그의 의지에 따라 어깨의 붕대가 한순간에 풀려나갔다가 눈 깜짝할 새에 오른팔을 물 샐 틈 없이 휘감았다.
빠직— 빠지직!
이내 그것에 반발하듯 검은 스파크가 튀며 팔이 요란하게 펄떡거렸다.
그에 맞춰 형광등이 깜박거리듯 나타났다 사라지길 반복하는 흑룡.
동시에 오른팔에서 어마어마한 고통이 밀려들기 시작했으나, 그가 가진 「마인드 허브」와 「영혼 방화벽」은 철저하게 그것을 차단하며 정신을 보호했다.
하지만 정신과 달리 통증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는 육체의 반응은 그로서도 어쩔 수 없었다.
그는 근육 한 올, 세포 하나하나까지 전부 제어할 수 있는 할리가 아니었으니.
뇌와 신경을 점거한 고통에 동공이 풀리고 전신의 근육이 경련했다.
창백해진 안색과 반대로 입과 코에선 가느다란 핏줄기가 흘러내렸고, 온몸이 물에 빠진 것처럼 식은땀으로 흠뻑 젖었다.
그렇게 약 5분.
저주와 연결된 「맹약의 사슬」로 계속해서 고삐를 조인 덕분일까.
한껏 날뛰던 「갈망의 오른팔」이 마침내 서서히 진정하기 시작하며 그의 몸 또한 조금씩 안정을 되찾았다.
‘후우, 이거 전투 중에 터졌으면 답이 없었겠는데.’
이내 안도의 한숨을 내쉰 그가 욱신거리는 오른팔을 주물렀다.
그리고 꼼꼼하게 붕대가 감긴 팔을 이리저리 움직이며 상태를 점검하고서 고개를 들자.
“자네··· 괜찮은가?”
언제부터 여기에 와 있었는지, 로렌스 후작이 묘한 표정을 지으며 조심스럽게 말을 걸어왔다.
“네, 이제 괜찮습니다.”
그간 황궁에서 마법을 익히며 그와도 종종 마주쳤던지라 나름 익숙한 관계라고 할 수 있었다.
차기 최고 권력자인 라일리를 의식했던 건지 가끔 이런저런 조언을 던져주기도 했고.
“음··· 자네가 괜찮다면야 상관없겠다만.”
“하핫, 그보다 인사가 늦었군요. 이렇게 구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마침 정말 위험하다 느끼던 참이었는데요.”
“뭘, 자네도 곧잘 싸우더구만. 수련을 시작한 지 얼마 되지도 않았다고 들었는데 벌써 그 정도 수준이라니.”
놀랍다는 듯 말을 잇던 그는 말을 멈추고 다시 천천히 헤스페론을 훑어보았다.
몸에 가득한 흙먼지와 곳곳에 남은 핏자국, 창백한 안색과 전신을 흥건히 적신 식은땀, 아직도 간헐적으로 떨려오는 근육들까지.
역시 아무리 봐도 전혀 괜찮지 않아 보였다.
‘아니, 그게 아니더라도 아까의 모습을 보았다면 누구나 그렇게 생각하겠지.’
자신의 턱수염을 쓰다듬은 로렌스가 눈을 가늘게 떴다.
제어를 잃고 폭주하는 저주와 어떻게든 그것을 억누르려는 의지의 대립.
그 신체의 반응만 봐도 그때 가해진 고통이 어떤 수준인지 익히 짐작할 수 있을 정도였건만, 지금 헤스페론의 얼굴은 언제 그런 일이 있었냐는 듯 평온하기 그지없었다.
‘정신력과 자기 통제력이 말이 안 나올 정도로군. 아깝구나, 아까워.’
그간 지켜봐 온 성장 속도도 그렇고, 이번에 자신이 도착하기 전까지 스타브를 상대로 버텼던 것도 그렇고.
제자로 삼아 잘만 가르치면 후계자로도 삼을 수 있을 것 같은데···.
‘음, 나중에 슬쩍 말이나 꺼내 볼까.’
하지만 지금은 그런 얘기를 꺼내기에 적절하지 않았다.
이왕 하기로 한 거 확실히 해 두는 게 좋을 터.
괜히 부작용 때문에 그가 어디 잘못되기라도 했다간 기껏 구해놓고 황녀의 원망을 들을 수도 있지 않겠나.
“그건 안 될 말이지.”
“···네?”
“자자, 어서 가세나.”
“아··· 예.”
그렇게 헤스페론은 로렌스의 강권에 못 이겨 반강제적으로 황실 병원에 입원하는 신세가 되었고.
그 전말을 전해 들은 라일리에 의해 곧바로 그의 장기 입원이 결정되었다.
왜 괜찮다고 했냐며, 「맹약의 사슬」로 전해진 걱정 어린 잔소리와 함께.
***
서울 외곽에 마련한 근거지.
툭 툭 툭—
손가락으로 탁자를 두들기는 소리가 조용한 방 안에서 흩어졌다.
나는 보안 메일로 온 보고서가 출력된 모니터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조용히 생각에 잠겼다.
‘아우테리카는 이제 종장에 접어들었다.’
자잘한 건수들은 아직도 꽤나 남아있었으나, 세계에 큰 변화를 일으킬 만한 사건들은 대충 마무리된 참이었다.
앞으로 할 것은 각자의 자리에 선 아바타들이 꾸준히 영향력을 키우는 것과 안방극장을 성공적으로 마무리하는 것 정도?
‘그나마 큰 건이 허먼하트 공작가에 대한 제재인데···.’
사실 그것도 그리 오래갈 것 같진 않았다.
라일리가 진짜 단단히 화가 났는지 전에 없이 적극적으로 움직이고 있었으니까.
그녀는 아직도 로셀리아 대신전에 있었지만, 그간 모아온 휘하 세력을 일사불란하게 지휘하며 대대적인 움직임을 보이기 시작했다.
정계는 물론 재계와 학계, 마탑, 심지어 용병들까지.
심지어 교단에는 암흑기사가 된 스타브에 대한 이야기를 흘리며 이단심문관까지 요청할 정도였으니 더 말해 무엇하랴.
‘나도 그쪽에 원한이 있으니 냉큼 받아주긴 했지만.’
무려 제국의 대표로 온 이가 직접 꺼낸 말이다.
그만하면 교단이 직접 개입할 명분으로 충분하지 않은가?
‘그러다 좀 부족하다 싶으면 그쪽에 불사의 군대와의 연결점을 몇 개 심어 두면 되는 거고.’
그렇게 한다면··· 이럴 수가!
명문 공작가가 아주 간단하게 인류의 배신자가 되어버리는 것이다!
권력에 눈이 멀어 불사왕과도 손을 잡은 역적이라니.
아무리 제국의 공작이라 한들 가문 하나가 끝장나는 건 순식간이었다.
하물며 황가도 등을 돌린 상태라면 회생 가능성은 제로라 할 수 있겠지.
‘그런데 생각해 보면 틀린 말도 아니잖아?’
거기다 곰곰이 따져보니 그게 누명이 아니라는 것에 생각이 미쳤다.
이미 허먼하트 공작이 역천의 서약의 간부 중 하나였다는 것은 확인이 끝난 상태였다.
역천의 서약이 뭐하던 놈들인가?
무려 불사왕을 부활시키는 건 물론, 심연의 문을 열어 광기를 꺼내고, 에나멜 대륙의 침몰과 이온 대륙의 대전쟁 등을 획책한 악의 집단이 아니냔 말이다.
‘그가 어디까지 알고 협력했는지는 모르겠다만, 어쨌든 사실은 사실이지.’
정말 대륙이 멸망할 수 있다는 걸 알고도 협력한 건지, 아니면 적당한 위기를 조장하며 실리만 챙기려 했는지는 이제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다.
이건 이제 정당한 형의 집행이 되어버렸으니.
‘···생각이 딴 데로 샜군. 그럼 그쪽은 그렇게 하고···.’
내 시선이 다시 모니터의 보안 메일로 향했다.
그러자 환기를 위해 억지로 끌어올렸던 기분이 다시 바닥으로 가라앉았다.
발신자는 앤드류 위버.
정보 수집에 유용한 고유스킬 「궤적 관측」을 지닌 노예··· 아니, 인재였다.
그리고 이번에 온 보고서에는 그를 영입한 보람이 느껴지는 내용이 담겨있었다.
‘율령자···.’
문득 일본에서 마주한, 한스에 의해 만신창이가 되었던 그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리고 불과 얼마 전에 있었던 병원 테러를 겪으며 스쳤던 과거를 다시 되새겼다.
불길과 폭음, 열기, 비명, 피 냄새.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 자신을 보는 눈길, 온기, 추억.
“흐읍, 후우—.”
깊은 심호흡과 함께, 급박한 상황에 애써 묻어두었던 감정이 부글거리며 끓어올랐다.
아직은 때가 아니라며— 「페르소나」에 묻어두었던 분노와 원한이 서서히 고개를 치켜들기 시작했다.
‘그래, 이 정도면 많이 참았다. 슬슬··· 성과를 보일 때도 됐지.’
꿈틀거리던 입꼬리가 서서히 위로 올라갔다.
동아시아 지부장 율령자.
그리고 그 말인즉슨.
놈이 그때 있었던 테러의 결정권자이자 총책임자라는 소리이지 않나?
그놈 하나로 끝낼 생각은 없다만, 그래도 대충 이 갈증을 가시게 할 입가심 정도는 될 터.
나는 눈을 감고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어두워진 시야, 컴퓨터가 돌아가는 작은 구동음.
그리고.
“한스.”
방 안에.
어둠이 드리웠다.
***
아우테리카의 가장 깊은 곳.
심연.
시간과 공간, 물질과 개념의 기준이 흐트러져 무의미하게 부유하는 그곳은 언제나처럼 혼돈으로 가득 차 있었다.
여태까지 그래왔고, 앞으로도 줄곧 그러겠지.
파직!
그런데.
그 언제까지고 변함이 없을 것 같은 장소에서 갑작스러운 이변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파사사삭—
콰드득— 콰직!
공간이 부서지며 뭔가가 깨져나가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아니, 어쩌면 부서지는 건 공간이 아닐지도 모른다.
이곳은 그런 개념조차 온전히 존재할 수 없는 곳이었으니까, 소리가 났다는 것조차 착각일지도 모르지.
하지만 그 이유가 무엇이건 알 수 없는 변화는 지금도 계속되고 있었고.
그것은 마침내 또 다른 이변을 그 자리에 툭 뱉어냈다.
“흐음.”
언제부터 그곳에 있었는지, 갑자기 자리에 나타난 사내.
모든 것이 요란하게 뒤섞이는 공간 속에서도 조금의 영향도 받지 않은 그는 천천히 주변을 둘러보고는 나직한 침음을 흘렸다.
“이번에도 꽝인가?”
하지만 아직 확신할 순 없었다.
정식으로 방문한 게 아니라 편법을 이용해 침입한 만큼 이전에도 비슷한 경우가 종종 있었으니까.
원래 보안의 취약점은 관리자의 눈길이 닿지 않는 이런 외딴곳에 있는 법이었다.
그렇게 생각한 사내··· 평범한 것도 같고, 위압감을 풍기면서도, 흐릿하게까지 느껴지는 존재—.
번천회의 회주가 입꼬리를 비틀며 입을 열었다.
“이번에는 좀 쓸 만한 수확이 있었으면 좋겠···.”
하지만 그 말이 채 끝나기도 전.
《XX된 XXX이 당신을 바라봅니다.》
두쿵—
거센 박동과 함께 공간이 흔들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