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overeign of the Infinite Clones RAW novel - Chapter (282)
#282
유럽 진출 (1)
후우우웅—
시끄러운 엔진 소리가 묵직하게 울려 퍼지고 사방에선 웅성거리며 분주히 움직이는 사람들의 소리가 가득했다.
마치 이곳만 다른 세상이라도 되는 것처럼, 테러가 만연한 현대 사회에서는 그리 쉽게 볼 수 없는 풍경이었다.
‘그만큼 방비가 철저하다는 뜻이기도 하지.’
그 공간의 한 편.
수많은 사람들이 오가는 것을 보며 가만히 팔짱을 끼고 있던 하인즈 2세가 슬쩍 주변을 살피곤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도 그럴 것이 이곳은 국가 최중요 전략시설 중 하나.
인천 국제공항이었으니까.
‘···그래. 원래 외국으로 나가는 덴 비행기를 타는 게 최선이었지.’
그간 워낙 편하게 이곳저곳을 넘나들다 보니 잊고 있었지만, 지구에서 장거리 이동을 하는 것은 그리 쉽지 않았다.
「영웅의 발자취」를 사용하기 위해선 일단 그곳을 한 번이라도 방문해야 했으며, 한스의 공간 이동 서비스를 이용하는 데에도 한계가 있었으니.
‘일본이나 중국처럼 거리가 가깝다면 모를까, 좌표 따자고 거기까지 직접 날아가기도 그렇고.’
아무리 한스의 이동 속도가 비행기 못지않다 하나, 지구 반대편에 가까운 곳까지 그런 식으로 갈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그럴 바에야 차라리 그냥 몰래 비행기에 잠입하고 말지.
-안내 말씀 드리겠습니다. 파리로 가는, 아리아나 항공 OG501편이 잠시 후 출발하오니 탑승하지 않으신 승객께서는···.
그때 마침 기다리던 안내 방송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그리고 태연하게 벽에 기댄 채 주변을 구경하던 하인즈는 사전에 결심한 바를 그대로 이행했다.
진짜로 공항의 철통같은 보안을 뚫고 침투를 시도한 것이다.
‘아무리 위조 신분이 있다지만 검문 과정이 생각 이상으로 까다롭다. 괜히 쓸데없는 흔적을 남기느니 그냥 이렇게 하는 게 더 편해.’
공항 곳곳에는 수많은 각성자들과 마도구, 결계 등이 배치되어 있었으나, 그 모두를 압도하는 격을 지닌 그가 전력을 다해 구사한 「존재부정」을 잡아낼 수는 없었다.
아무리 요충지라지만 국내에도 몇 없는 초월급 강자가 이런 곳에 종일 죽치고 있을 리도 없었고.
‘이참에 다른 지역에도 미리 방문해 둘 필요가 있겠어. 언제든 「영웅의 발자취」로 이동할 수 있도록.’
그렇게 공항 인근에서부터 기척을 감추고 잠입했던 그는 결국 프랑스행 비행기에 유령처럼 숨어드는 데 성공했으며—.
-손님 여러분, 곧 이륙하겠습니다. 좌석 벨트를 매셨는지 다시 한번 확인해 주시기···.
이후 별다른 이상 없이 유럽으로 향하는 장거리 비행을 시작할 수 있었다.
‘생전 처음 타 보는 비행기가 밀항이라니.’
그 점이 조금 아쉽긴 했으나 기회야 나중에라도 얼마든지 있지 않겠는가.
하인즈는 기내를 순찰하는 각성자의 옆을 스쳐 지나가며 빈자리에 다리를 꼬고 앉아 느긋하게 눈을 감았다.
도착까지 앞으로 약 13시간.
한 세계를 지배한 흡혈왕의 유럽 상륙까지 남은 카운트다운이었다.
***
선선한 바람과 천천히 흘러가는 구름.
어디론가 여행 가기에 딱 좋은 이 날씨에···.
“슬픈 예감은 항상 빗나가질 않아.”
이능관리국 범죄수사과의 신입 요원, 강태산이 하늘을 보며 넋두리하듯 중얼거렸다.
얼마 전에 친구와 함께 대화하며 나왔던 우려가 현실로 다가왔으니.
“뭘 또 혼자 궁시렁거리냐?”
“아, 선배님! 이거 너무한 거 아닙니까? 왜 또 저희가··· 아니, 그보다 백기사는 범죄자도 아니지 않습니까?”
바로 그가 속한 팀이 하회탈에 이은 또 다른 추적 임무에 동원되었던 것이다.
‘백기사’는 병원 테러 사건에서 활약했던 성기사에게 이능관리국이 임의로 붙인 코드 네임이었다.
애초에 한국에서 활동하는 성기사가 한둘도 아닌데, 그런 일반명사를 특정인을 지칭하는 데 사용하는 건 부적절했으니 당연한 일.
그래서 지어진 호칭이 그의 상징과도 같은 순백의 갑옷에서 따온 백기사였다.
“어쩔 수 없잖냐. 어쨌든 그가 귀환자 등록을 안 한 건 사실이니까.”
일단 법 자체가 그랬으니 명분은 충분했다.
물론 그는 위험한 테러를 막고 민간인들을 보호한 영웅이었으니 정말 범죄자 취급을 하는 건 아니었다.
그 과정에서 테러범이 사망하는 일이 일어나긴 했어도, 그 상황은 충분히 정상참작이 가능한 수준이었으니까.
다만 그렇다고 손을 놓고만 있을 수도 없는 것이···.
“생각해 봐라. 명색이 국가 기관인데 그만한 유명인에 대해 아무것도 모른다는 게 말이 되나. 사실 하회탈 때문에 지금도 체면이 말이 아니야.”
엄밀히 따지자면 지금까지 자발적으로 신고하지 않은 이들의 수 자체는 결코 적지 않았다.
하지만 그들은 최대한 자신을 숨기고 대중에 나서지 않는 이들.
이번에 대대적으로 매스컴을 탄 데다 세계적인 관심까지 끌어모은 백기사와는 경우가 다른 것이다.
“···끄응, 그거야 그렇죠.”
그에 강태산은 수긍하며 뒷머리를 벅벅 긁을 수밖에 없었다.
여전히 진짜 범죄자들을 쫓는 게 아닌 엉뚱한 일만 하는 것이 불만이긴 했지만, 일개 직장인··· 그중에서도 말단 공무원이 무슨 힘이 있겠는가?
그저 위에서 시키면 시키는 대로 하는 수밖에.
“하지만 그래도 판테온의 편의를 이렇게까지 봐주는 건 좀···. 저희가 무슨 가이드도 아니고.”
물론 그렇다고 지금 상황을 완전히 납득한 것도 아니었다.
이쪽이 수사에 협조를 구한 거라면 모를까, 지금 보이는 모양새는 그 정도 수준이 아니었던 것이다.
강태산은 시선을 돌려 통제선 안쪽의 병원 곳곳을 배회하는 외국인 무리를 바라보았다.
그들은 판테온 한국 지부의 성직자들이 아닌, 미국의 총본부에서 파견된 이들이었다.
그의 시선을 따라 그쪽을 흘깃 쳐다본 선배가 가볍게 숨을 내쉬곤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그건 나도 좀 고깝긴 한데, 어쩌겠냐. 쟤네랑 틀어지면 피곤해. 이쪽도 도움을 제법 많이 받고 있기도 하고.”
판테온은 그 특성상 결집력이 굉장히 약하지만, 그래도 성직자들의 입장을 대변하는 집단이라는 사실 자체는 변하지 않는다.
그들은 자신들의 권익을 위해 국가 기관들과도 상당히 친밀한 관계를 맺고 있었고, 위험한 일에 자주 엮이는 이능관리국 요원들 중에도 그 덕분에 목숨을 부지한 사례가 적지 않았다.
‘물론 그 복지 혜택이 가족들에게까지 돌아가는 건 아니지만.’
그 때문에 강태산의 할머니도 병원에 입원할 수밖에 없지 않았나.
거기까지 기대하기엔 수요에 비해 공급이 너무 적었다.
그런 성직자들의 위상을 생각해 보면 지금 이 정도 일쯤이야 별로 대단한 것도 아니리라.
“&$#%&@!”
“@$^#@#.”
그때, 현장을 살펴보던 외국인들이 옆에 있던 한국인 성직자들과 뭐라 대화를 나눴다.
그리곤 저마다 고개를 끄덕이더니 일제히 이쪽으로 다가오기 시작했다.
“어, 끝났나 본데요?”
그리 생각한 강태산은 선배와 함께 자세를 바로 했으나, 그들의 조사는 아직 전부 끝난 게 아니었다.
“어, 네?”
갑작스러운 질문에 당황한 그가 저도 모르게 되묻자, 한국인 성직자가 부드러운 목소리로 재차 입을 열었다.
“그때 그 자리에 계셨다고 들었습니다.”
“아··· 예. 하지만 전 첫 번째 공격에 곧바로 기절해 버려서 아는 게 없습니다. 그냥 폭발에 휘말려서 날아가다 정신을 잃은 게 전부라서요.”
이미 휴가에서 복귀하고 나서 질리도록 했던 말이다.
그는 어색하게 웃으며 손사래를 쳤다.
“그 순간 병원에 계셨던 이유가 할머님의 퇴원 때문이라고 하던데.”
“예, 운이 나빴지요. 하필 딱 정문에 섰을 때 사고가 터지는 바람에.”
그 말에 성직자가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미 어느 정도 정보를 공유받았기에 그 정도는 이미 알고 있었으니.
중요한 것은 그 다음이었다.
“진료 차트에 적혀 있기론, 할머님께서 어느 순간부터 급격히 회복되셨다고 들었습니다만.”
“···그렇습니다. 나이가 있으셔서인지 완치는 아니었지만요.”
그는 자신과 함께한 성직자들을 쭉 둘러보더니 다시 시선을 강태산에게 주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분을 저희가 한 번 뵐 수 있겠습니까?”
***
역시 지금 생각해 보면 ‘VIP 마켓’의 『무작위 기타 스킬 습득 (500,000)』에서 「제노글로시」를 얻은 것은 행운이었던 것 같았다.
탑승했을 때처럼 은밀하게 비행기에서 빠져나온 하인즈 2세는 파리 샤를 드골 국제공항을 둘러보며 그런 생각을 떠올렸다.
“짐 제대로 부친 거 맞습니까? 왜 이렇게···.”
“일단 숙소로 모시겠습니다. 이쪽으로···.”
“오! 아녜스, 무사히 다녀왔구나! 어서 집으로···.”
사방에서 들려오는 이국적인 언어들을 자연스럽게 이해할 수 있었고, 곳곳에 자리한 표지판의 글자들도 어렵지 않게 순식간에 읽어 내렸다.
중국에서도 한번 느끼긴 했으나, 이렇게 먼 타지에 나와 보니 그 성능을 좀 더 절실하게 체감할 수 있었다.
‘처음 일본에 갔을 때처럼 번거로운 과정을 되풀이할 필요가 없어서 좋군.’
하인즈는 인천 국제공항과 마찬가지로 곳곳에 배치된 보안 장치들을 이리저리 회피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단순히 프랑스에만 있다 돌아갈 생각은 없는 만큼 유럽 각지의 언어를 곧바로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은 훌륭한 장점이었다.
직접 행동하던 정보를 수집하던 언어야말로 가장 큰 장벽이었으니.
‘음?’
그런 생각을 하던 도중, 공항 한가운데의 벤치에 앉아 폰으로 게임을 하던 금발 여성 하나가 슬쩍 그가 있는 방향을 흘기는 게 포착되었다.
그녀는 가볍게 미간을 찌푸리며 보일 듯 말 듯 고개를 갸웃하더니, 이내 다시 아래로 시선을 내려 다시 스마트폰을 두들겼다.
‘제법이군.’
하지만 하인즈는 알 수 있었다.
그저 게임에 정신을 팔린 것처럼 보이는 그녀가 아직도 한껏 신경을 곤두세운 채 그가 있는 방향을 예의 주시하고 있다는 것을.
그는 잠시 풀어졌던 마음을 다잡고 전력으로 「존재부정」을 사용해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당연하지만, 감시자는 그의 움직임을 전혀 감지하지 못했다.
‘경지는 극의에서도 중위권 정도로 보이는데. 감지 계통 특화인가?’
흡혈귀로 치자면 대충 7레벨의 끄트머리 수준이었다.
그러나 9레벨이라고 할 수 있는 자신의 은신에 미약하나마 위화감을 느꼈다는 것만으로도 그녀의 감지력이 어느 정도 수준인지 익히 짐작할 수 있었다.
그만한 인재가 이런 곳에서 공항 경비나 서고 있다니.
‘그만큼 이곳의 수준이 높다는 건가, 아니면 그럴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는 건가.’
어느 쪽이든 흥미로운 사실이었다.
아무도 자신을 인지하지 못하는 상황 속에서 유령과 같은 발걸음으로 공항을 나선 하인즈는 이내 자신의 품 안에 손을 넣어 새하얀 가면 하나를 꺼내 들었다.
특별한 무늬 없이 이마부터 코까지 뒤덮는 새하얀 오페라 가면.
‘그러고 보니 오페라의 유령 원작이 프랑스 작품이었던가.’
어쩐지 유쾌한 기분이 들었다.
잠시 그것을 바라보던 그가 그것을 천천히 얼굴에 가져갔다.
지금까지 줄곧 써 왔던 가면인데, 색다른 장소에서 쓰고 있자니 뭔가 고양감이 느껴졌다.
자신이 진짜 팬텀이 된 것 같은 기분이랄까.
‘그럼 나의 크리스틴은 어디에 있으려나.’
가면을 쓴 채 깊게 숨을 들이쉰 그의 시선이 한쪽 방향으로 향했다.
유럽 땅과 가까워진 몇 시간 전부터 계속해서 거칠게 요동치던 「혈통의 갈망」이 이끄는 대로.
그 직후.
그 자리에서 그의 모습이 사라졌다.
물론 그것조차 누구도 인식하지 못했지만.
이어서 그가 다시 모습을 드러낸 곳은 공항으로부터 십여 킬로미터는 떨어진 어느 도심지의 골목길이었다.
이젠 「존재부정」을 사용하지 않고 온전히 모습을 드러낸 그가 옷매무새를 가다듬으며 당당하게 걸음을 옮겼다.
뚜벅뚜벅—
얼굴에 쓴 하얀 가면과 대비되는 검은 중절모와 고급 양복, 광이 나는 구두.
어딜 보나 세련된 신사 그 자체인 하인즈가 골목 끄트머리에서 인상을 찌푸린 채 그를 경계하는 청년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평소와 같은 냉정한 목소리로 한마디를 건넸다.
“그대가 나의 크리스틴인가?”
“···뭐야, 이 미친놈은?”
의도치 않은 실언에 이어 상대의 어이없다는 표정과 마주한 하인즈는 그제서야 자신이 단순히 들뜬 정도가 아니었다는 걸 자각할 수 있었다.
‘이런, 「마인드 허브」로 계속 걸러내다 보니 알아채는 게 늦었네.’
원래의 냉소적이고 침착한 하인즈 2세였다면 이런 실수를 할 리가 없을 텐데.
아무래도 생각했던 것보다 「혈통의 갈망」이 개체에 미치는 영향이 더 큰 모양이었다.
“실례했군. 팬텀이다. 아니면 에릭이라고 불러도 좋고.”
“···이게 뒤지려고 헛소리를···!”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화를 터뜨리려던 파리의 흡혈귀 청년은.
“미안하지만.”
갑자기 등 뒤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딱딱하게 몸을 굳혔다.
방금까지 사람이 있었던 그의 앞에는 텅 빈 공간 뿐.
상대가 언제 자신의 뒤로 돌아갔는지 인지할 수조차 없었다.
‘갑자기 무슨···!’
그가 속으로 욕지기를 내뱉고 있을 때, 차가운 손이 그의 뒷목을 움켜쥐었다.
날카로운 손톱이 살과 근육을 파고들며 숨통을 조여들었다.
“대화는 나중에 하지.”
좀 더 고분고분해지고 나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