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overeign of the Infinite Clones RAW novel - Chapter (283)
#283
유럽 진출 (2)
슬슬 날이 저물어 갈 무렵의 파리 외곽 지역.
오늘도 평소와 같이 충실한 하루를 보내기 위해 밖으로 나온 건실한 흡혈귀 청년, 바스티앙은 전혀 예상치 못했던 일과 맞닥뜨려 버렸다.
클랜의 영역권을 순찰하는 업무를 위해 이동하던 도중 갑자기 나타난 웬 가면 쓴 괴한에게 불시에 습격당하고 말았던 것이다.
프랑스 최대 규모의 흡혈귀 조직, 파리를 비롯한 주요 도시의 밤을 지배하는 ‘테르미도르’의 일원인 그가!
‘미친 거지! 겁도 없이 감히 이 땅에서 이런 짓을 해? 그것도 밤에?’
프랑스의 수도 파리는 세계적으로도 유명한 대도시이면서 그만큼 많은 이권이 쏠려있는 금싸라기 땅이었기에, 당연히 조직도 이곳에 많은 신경을 쏟고 있었다.
다른 지역에서는 그래도 중간 간부 정도는 맡을 수 있는 5레벨 흡혈귀 바스티앙이 말단들이나 할 법한 순찰 임무에 직접 투입될 만큼.
‘진짜 미친놈이었군. 제법 실력에 자신이 있나 본데, 설령 내가 죽더라도 너는 결코 무사하지 못할 거다.’
어떤 이유에서인지 눈 하나 깜짝 수 없게 굳어버린 육체.
서서히 목을 죄어오는 차가운 손아귀에 자신의 최후를 직감한 그가 입 밖으로 나오지 않는 최후의 저주를 읊조린 순간—.
그는 자신이 뭔가를 단단히 착각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아?’
목을 파고든 손끝에서 무언가가 노도와 같이 밀려들었다.
그것이 무엇인지 알아챈 바스티앙이 경악을 표출하기도 전, 거대한 존재감이 그의 사고를 뒤흔들었으며.
일부러 감춘 듯한 어떤 실체가 그의 뇌리에 강제로 때려 박혔다.
‘이건···!’
숨이 턱 막힌다.
그것은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의 경외감.
높고 아득하다.
넓고 광활하다.
크고 경이롭다.
깊고 섬뜩하다.
그의 몸이 굳은 건 상대가 따로 무슨 수작을 부렸기 때문이 아니었다.
그저 까마득한 격의 차이를 마주한 본능이 저도 모르게 공포에 질렸던 것일 뿐.
의식하지 못한 사이에 사지가 덜덜 떨리고 있었다.
‘최소 7···? 8레벨? 아니, 내가 가늠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야.’
바스티앙이 마주한 적이 있던 가장 강한 흡혈귀, 테르미도르의 고위 간부가 7레벨이었다.
동지들과 함께 사열하고 있던 그때의 그는 극도의 긴장감에 한참을 얼어 있다가 거리가 좀 멀어지고 나서야 겨우 숨을 돌릴 수 있었는데···.
‘어쩌면 그 이상··· 로드급일지도.’
지금에 비하면 그때는 휴양하던 것과 다름없었다.
애당초 비교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하지만 그는 더 이상 잡생각을 이어갈 수 없었다.
우드득— 뚜둑!
체내에 들어온 혈액의 영향을 받아 아까부터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모든 근간이 갈아엎어지고 있었으니까.
‘이런 게··· 이런 게 가능하다니···!’
그것은 마치 혁명과도 같은 진화였다.
그 잠깐 사이에 육체가 단번에 한계를 넘어서며 시계가 확장했다.
바스티앙은 조금 전의 자신 정도는 수십이라도 상대할 수 있을 것 같은 전능감에 휩싸이며 조용히 전율했다.
물론 그렇게까지 느껴진 건 한창 호르몬이 과다 분비되며 생긴 부작용일 뿐이었지만, 이미 머리끝까지 한껏 뽕이 차오른 그는 그런 사소한 문제 같은 건 신경도 쓰지 않았다.
머릿속을 가득 채우며 휘몰아치는 경외와 소속감, 충성심에 넙죽 엎드린 바스티앙이 고개를 땅에 박으며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복종의 말을 외쳤다.
“무엇이든 명령만 내려주십시오! 저 바스티앙 뒤보스크, 팬텀 님께서 크리스틴을 찾으실 수 있도록 전력을 다하겠습니다!”
“······.”
이미 위압적인 존재감에 경도된 그는 자신이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모르는 것 같았지만.
하인즈의 떨떠름한 눈길이 그의 뒤통수에 꽂혔다.
***
‘이걸 이렇게 멕이네.’
하인즈는 못마땅한 시선으로 자신의 앞에 엎드린 흡혈귀 청년, 바스티앙을 내려다보았다.
말실수 한 번 한 거 가지고 그걸 또 우려먹다니.
하지만 이후 그가 보인 전폭적 협조는 나쁘지 않았다.
이상할 정도로 자신을 경배하던 그는 하인즈의 질문에 정말 열성적으로 답하며 자기가 아는 바를 모조리 고해바쳤던 것이다.
마치 신을 숭상하는 광신도처럼.
확실히 척 보기에도 정상적인 반응은 아니었다.
‘역시 여기에도 「미혹」이 작용한 건가. 이게 이렇게 효과가 좋을 줄은 몰랐는데.’
아무리 「정제혈정」으로 종속하였다 해도 거기엔 저렇게까지 대상자를 홀리는 힘은 없었거늘.
아마 서로 간에 있는 격의 차이도 거기에 상당한 영향을 끼쳤을 것이다.
어쨌든 일이 편해졌으니 이쪽으로선 좋은 일이었다.
‘시간을 아낄 수 있었으니 마침 잘 됐지.’
그가 이 유럽의 프랑스에 대해 가지고 있던 정보는 딱 인터넷에서 얻을 수 있는 정도가 전부였다.
쾌적한 활동과 빠른 일 처리를 위해선 현지인의 협력이 필수 불가결.
어차피 5레벨 수준을 종속시키는 걸론 「정제혈정」의 소모도 크지 않으니 딱 적절한 상대였다.
‘이 정도 상대는 잡아먹어봤자 간에 기별조차 안 가기도 하고.’
이미 성혈로서 초월에 이른 하인즈 2세가 자신만의 혈통을 완성하고 틀을 부수기 위해선 최소한 진혈급 격을 지닌 흡혈귀의 혈액이 필요했다.
그나마도 최소치일 뿐, 제대로 된 탈피를 위해선 성혈급이 다수는 있어야 할 터.
‘지금 프랑스에 있는 성혈급··· 9레벨은 하나.’
하인즈의 시선이 「혈통의 갈망」이 이끄는 방향으로 향했다.
하지만 상대의 격이 격인만큼 어렴풋하게 느껴질 뿐, 이전까지와는 달리 그 위치를 확실하게 파악할 수 없었다.
그는 유럽에 도착한 직후 계속해서 꿈틀거리는 갈증의 충동을 대수롭지 않게 무시하며 냉정하게 상황을 판단했다.
‘이 상황에서 무작정 들이박는 건 멍청한 짓이지.’
이곳은 적의 본거지이자 엄연한 타국이었다.
어떤 함정이 있을지도 모르고, 괜히 함부로 움직였다가는 일본에서처럼 정부 측이 개입할 수도 있다는 소리.
‘살짝 판을 흔들 필요가 있겠군.’
그래서 그는 바스티앙의 협력하에 곧바로 작업에 착수했다.
수월한 사냥을 위한 약간의 사전 공작을.
***
웅성웅성—
“이거 향이 제법 괜찮군. 상당히 좋은 취향이야.”
“그렇지? 구하긴 힘들어도 이것만큼 좋은 게 없지.”
“나디아 님, 긴히 드리고 싶은 말씀이···.”
파리 인근 베르사유 시에 위치한 테르미도르의 근거지 중 하나.
“아주 개판이군.”
한창 광란의 파티가 벌어지고 있던 화려한 저택 내부에서 싸늘한 음성이 속삭이듯 흘러나왔다.
그건 파티의 소란에 묻힐 정도로 자그마한 소리였지만···.
“음?”
“···방금 누구냐.”
이 공간에 있던 이들은 그런 이질적인 불협화음을 놓칠 만큼 녹록치 않았다.
풀어져 있던 분위기가 순식간에 팽팽하게 당겨지고.
기세를 일으키며 빠르게 주변을 살핀 그들은 곧 자연스럽게 자신들의 틈에 섞여 있는 한 불청객을 발견할 수 있었다.
“네놈은 뭐냐!”
“어떻게 여기에? 아니, 언제?”
경계 어린 외침과 함께 그들에게서 뿜어져 나온 흉포한 기운이 주변을 뒤덮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 상황에서도 소리를 낸 불청객, 오페라 가면을 쓴 하인즈 2세는 굳은 표정으로 천천히 주변을 둘러볼 뿐이었다.
천장에 매달린 커다란 샹들리에와 온갖 귀금속으로 꾸며진 식기, 그리고 한눈에 보기에도 범상치 않아 보이는 예술품들까지.
그 틈바구니에 낀 채 오들오들 떨고 있는 소년소녀들의 모습이 어색하게 느껴질 정도로 화려한 모습이었다.
참가자들이 쥔 은잔에 담긴 피는 물론, 일부러 꾸민 것처럼 사방에 낭자한 혈액과의 부조화는 두말할 것도 없겠지.
‘···쯧. 좀 더 빨리 왔다면 좋았을걸.’
가볍게 혀를 찬 하인즈가 희생자들의 신선한 피로 파티를 벌이던 흡혈귀들을 다시 둘러보았다.
어느새 파티장 전체를 둘러싼 그들은 자신들이 할 수 있는 대응 준비를 모두 마치고 공격을 준비하고 있었다.
“엇, 통신이 안 됩니다!”
“뭣? 대체 언제부터···?”
외부로 이 사태를 전파하는 것만 빼고.
애초에 조용히 처리할 수 있음에도 그가 이렇게 기척을 낸 것도 아무 생각 없이 한 행동은 아니었다.
“시간이 없으니 최대한 빨리 끝내도록 하지.”
이미 상황은 끝난 거나 다름없었으니까.
딱—
가볍게 손가락을 튕기는 소리와 함께.
「피의 신비」가 발동했다.
전위 예술처럼 사방에 흩뿌려져 있던 것은 물론 잔에 담겨있던 피가 일제히 자욱한 운무가 되어 주변을 감싸기 시작했다.
“혈마법 결계다!”
“뭉쳐! 바로 대응 준비를···!”
이후에 이어진 것은 전투가 아니었다.
그저 일방적인 유린일 뿐.
희생자들의 피에 깃든 원한을 느끼며, 일대에 흐르는 인과를 바라보던 하인즈가 그 일부 자락을 움켜쥐었다.
그리고 그가 그렇게 행하기로 마음을 먹자.
—그리 되었다.
퉁!
콰아앙—!
천장에서 끊어진 샹들리에가 떨어져 내리며 파편이 비산하고.
푸화악—!
촤악—
무언가가 찢기는 소리가 연달아 터져 나왔다.
“커흡!”
“끄르륵···.”
공간을 뒤덮은 노을빛 운무 속에서 장미꽃잎처럼 흩날리는 흡혈귀들의 핏줄기.
그 인지를 초월한 공격은 방어도 회피도 불가능했다.
또한 거기에 깃든 아득한 격에 그들이 지닌 변변찮은 재생력 따위는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크윽!”
물론 모든 이들이 그 한 수에 정리된 건 아니었다.
이 테르미도르 베르사유 지부에서 가장 강한 이.
하인즈가 나타난 순간부터 침착하게 상황을 진두지휘하던 7레벨의 고위 간부, 나디아는 잘려 나간 왼팔의 단면을 붙잡고 곧바로 도주를 시도했다.
‘뭐야, 대체?! 9레벨? 9레벨이라고? 이 무슨 말도 안 되는!’
격하의 상대는 대적조차 할 수 없는 불가해한 공격.
그녀는 순식간에 토막 나 널브러진 부하들을 뒤로하고 이를 악물었다.
‘오페라 가면··· 대체 누구지? 아니, 어디서 온 놈이지? 이탈리아? 독일? 설마 루마니아는 아니겠지?’
9레벨의 흡혈귀는 세상에 그리 많지 않았다.
그 세가 가장 강하다는 유럽에서조차 한 손으로 꼽을 수 있을 정도였으니.
그리고 그녀가 알기로 그 중엔 저런 인상착의를 지닌 존재가 없었다.
‘설마 다른 대륙에서 넘어온 건가? 아메리카? 아시아? ···그러고 보니 비슷한 얘길 들었던 것 같···.’
하지만 그녀의 생각은 길게 이어지지 못했다.
뚜벅뚜벅—
바로 앞에서 피의 운무를 헤치고 등장한 하인즈 때문에.
“생각이 많아 보이는군.”
그에 발을 멈춘 나디아가 입술을 짓씹었다.
원래라면 이 저택 부지를 벗어나는 데에 1초도 걸리지 않았을 텐데.
무슨 조화인지 그녀는 아직도 붉은 안개가 자욱하게 깔린 저택 내부에 있었다.
“···당신은 누구지? 대체 어디서 무슨 목적으로···!”
“예상했던 대로, 다른 녀석들은 영 부족했다만.”
억지로 짜내듯 목소리를 높이는 그녀의 말을 차분한 한 마디가 끊었다.
“넌 제법 영양가가 있어 보이는구나.”
말을 마침과 동시에 가면 아래에서 슬쩍 입술을 핥고 사라지는 붉은 혀.
금기를 암시하는 그 언행에 나디아의 동공이 팽창했다.
“···설마 당신···!”
“쉬잇—.”
그래봐야 그녀가 뭘 할 수 있겠냐마는.
이윽고 한층 짙어진 핏빛 안개가 주변을 두껍게 감쌌다.
《새로운 흡혈인자를 수집합니다. 특수스킬「혼혈진화」의 영향으로···.》
그리고 음소거라도 된 듯 부자연스러운 적막이 지난 후에, 그 자리엔 오직 한 사람만이 남게 되었다.
***
파티의 일부로서 저택에 끌려온 희생자 중 하인즈가 도착하는 순간까지 살아있던 이들은 십여 명 남짓에 불과했다.
하나같이 성인이 될까 말까 한 나이의 소년소녀들.
“우읍.”
“으으···.”
그간 시끄럽거나 저항하던 이들부터 제물이 되었기에, 그들은 학습된 대로 파티 도중 소동이 일어나는 와중에도 필사적으로 입을 틀어막고 공포에 떨고 있었다.
평범한 인간인 그들로선 주변을 자욱하게 감싼 핏빛 안개 때문에 도무지 상황을 파악할 수 없었으니.
이 혈무에는 희생자들을 보호하는 기능도 있었으나 그들은 그 사실을 알 수 없었다.
‘제발, 제발.’
‘엄마···.’
그래도 한 가지는 확실하게 인지하고 있었다.
적어도 자신들을 파티 음식으로 삼으려던 괴물들보단 뒤늦게 나타난 반가면 신사가 이기는 쪽이 백배 천배는 낫다는걸.
그렇게 긴장 속에서 기도만을 되풀이한 지 얼마나 되었을까.
주변을 감싸던 피 냄새 가득한 안개가 이내 서서히 옅어지기 시작했고.
마침내 보인 풍경은, 흡혈귀는 물론 피 한 방울 남지 않은 넓은 파티 홀이었다.
“어?”
“아무도··· 없어?”
자신들 외엔 어떤 인적도 없는 가운데 고요한 적막이 사위를 휘감았다.
몇몇이 승자로 추측되는 가면 신사를 찾아 이리저리 고개를 돌렸지만 그의 모습은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었다.
왠지 모르게 바닥에 떨어져 박살 난 샹들리에가 유독 시선을 잡아끌 뿐.
잠시 눈치를 보며 머뭇거리던 그들은 곧 하나둘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하더니, 나중엔 달리듯이 활짝 열린 정문으로 일제히 뛰쳐나갔다.
‘흠, 경찰도 근방에 있으니 이 정도면 됐겠지. 그럼 다음으로 가 볼까.’
그러한 가면 신사, 팬텀의 깜짝 방문은 단순히 베르사유 지부에 그치지 않았다.
생드니와 크레테유 등.
파리 주변 도시의 지부들을 순회하듯 습격한 것이다.
그것이 아무리 도시의 어둠 속에서 진행된 일이라 해도, 고작 하룻밤 만에 그만한 일이 연달아 일어났으니 언제까지 알려지지 않을 수도 없었다.
덕분에 빠져나올 수 있었던 생존자들이 계속해서 속출하기도 했으니까.
그리고 테르미도르 클랜과 관련된 이들은 그 사태를 통해 어떤 메시지를 읽을 수 있었다.
그것은 누군가에게 보내는 노골적인 도발이었다.
숨어 있지 말고 당장 튀어나오라는.
-나는 이곳에 있다.
아주 자신감이 넘치는 도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