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overeign of the Infinite Clones RAW novel - Chapter (290)
대다수의 분신이 활동하고 있는 아우테리카.
발을 들인 지 얼마 되지 않은 차원인 강환계.
그리고 본체가 있는 중심 거점, 지구까지.
여러 개의 몸을 가지고 다양한 세상을 동시에 살아가면서 느낀 것은 정말 수없이 많았다.
하지만 그렇게 체감할 수 있었던 요소들 중에서도 인상적인 점을 단 하나만 꼽으라면 주저 없이 선택할 수 있는 것이 있었으니.
···바로 ‘시차’였다.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겠군. 요즘 지구 쪽에 신경을 좀 많이 쓰긴 했는데···.’
무려 열 배에 달하는 시간차.
그 차원 간의 차이는 절대 녹록지 않았다.
지구에서 삼 일만 보내도 이세계에선 대략 한 달 정도의 시간이 흐르니 어쩔 수 없는 일이기도 했고.
그 때문에 지구에서는 겪은 사건들의 규모에 비해 흐른 시간 자체는 짧다고 볼 수 있었으나, 다른 세상의 경우까지 따지자면 딱히 그런 것도 아니었다.
아우테리카, 이온 대륙의 중심에 위치한 성지.
“오셨습니까, 성자님. 이번엔 조금 일찍 돌아오셨군요.”
“아, 라이린 경. 오늘도 수고하십니다.”
막 정문을 지나 로셀리아 대신전으로 들어선 하인리히가 자신에게 인사를 건네는 푸른 머리의 여성을 돌아보았다.
그녀는 한때 그도 소속되었던 광휘수호 성기사단의 일원으로, 주신교단의 많은 기사단 중에서도 로셀리아 대신전 내부 수호를 전담하는 엘리트 성기사였다.
마침 근처를 지나는 듯했던 그녀는 그에게 용무가 있었는지 절도 있는 걸음으로 다가와 예를 갖추곤 마저 말을 이었다.
“성녀님께서 조금 전에 혹시 성자님께서 돌아오셨는지 몇 차례 확인하셨습니다. 아무래도 무슨 용건이 있으셨던 것 같습니다만···.”
“아, 제가 때맞춰 왔나 보군요. 전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라이린 경.”
“아닙니다, 성자님. 그럼 전 다시 가보겠습니다.”
“예, 수고하십시오.”
그렇게 용건을 전달한 그녀는 꾸벅 고개를 숙이곤 다시 각진 동작으로 몸을 돌렸다.
그가 대신전 내부로 처음 발령받았을 때의 사수가 그녀였었는데, 그때의 인연으로 지금도 다른 이들보다는 편하게 대하고 있었다.
아무래도 그는 직위에 비해 파격적으로 급성장한 케이스라 친분이 있는 이들 자체가 좀 드문 편이었으니까.
‘그러고 보니 대신전 내부에 불사왕의 파편 중 하나가 있다는 걸 처음 알려준 것도 라이린이었지.’
물론 그것도 경비 업무에 포함된 절차 중 하나였지만, 어쨌든 그것이 이후 이어진 자신의 행보에 도움이 된 것도 사실이었다.
그에 피식 웃음을 터트린 하인리히는 다시 대신전 내부로 발걸음을 옮기며 어깨를 으쓱였다.
‘그나저나 리에스타가 날 찾았다고 했지. 역시 이번에도 지구에 대해 물어보려는 건가? 뭐, 몇 번이나 왔다 갔다 했으니 대충 이때쯤 올 거라고 짐작했으려나.’
당연하지만 그는 주신교단에 아무 언질 없이 무단으로 지구로 넘어간 게 아니었다.
아무리 최근 백색 거인 사태가 종식되며 다소 여유가 생겼다 한들, 성자이며 용사인 교단 무력의 상징과도 같은 존재가 마음대로 자리를 비울 순 없지 않겠는가?
‘그래서 그냥 이쪽에도 솔직하게 말했지.’
당분간 잠깐씩 자리를 비워서 이세계에 좀 다녀오겠다고.
‘물론 그것도 주신의 은혜로 포장하긴 했지만.’
어차피 상대는 하나같이 광신도들, 차원을 넘어선다는 위업조차 신의 위광 앞에선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렇지 않아도 헤스페론에 이어 이세아까지 이세계인이라 밝힌 이후로 호기심을 가지게 된 성녀가 따로 다른 세상에 대한 조사를 벌이는 중이기도 했으니.
‘조만간 이세아에게도 따로 말을 꺼내봐야겠군.’
이제 그녀도 귀환 예정 시기까지 얼마 남지 않았다.
대충 불사왕과의 결전이 끝난 직후쯤으로 생각하고 있지 않을까?
그녀가 지구로 돌아간 이후에 사실을 알게 된다면 배신감을 느낄 수도 있으니, 이번에 미리 언질이라도 해 두는 게 여러모로 좋을 것 같았다.
‘그렇게 하면 이후 지구에서도 협조 관계를 계속 이어갈 수 있을 테고.’
아우테리카에 남겨진 인연 때문에 귀환에 쓸 카르마까지 몽땅 털어 넣었던 그녀였다.
그만큼 정이 많은 그녀에게 차원 간의 소통 창구가 되어 줄 하인리히는 마른 땅에 소나기 같은 존재가 되어줄 것이다.
‘이제 이세아도 뭔가 계기만 있으면 벽을 넘어설 수 있을 것 같은데. 그만한 수준의 전력은 많으면 많을수록 좋은 법.’
이곳에 있을 때는 지구에 있을 가족에게 대신 안부를 전해줄 수 있고, 돌아가고 나서도 라일리와 간접적인 소통을 계속할 수 있게 될 테니 그녀에게도 좋은 일일 터.
하지만 내심 걱정되는 부분이 아예 없는 건 아니었다.
‘하회탈과 불사왕이 동일인이라는 건 어떻게든 숨겨야 하는데.’
이세계에선 마왕이었던 악당이 지구로 돌아와 보니 다크 히어로로 활동하고 있다고?
그 양측 모두 당황스러울 조우를 막기 위해선 이제 한스의 활동 영역을 온전히 해외로 고정할 필요가 있었다.
‘어차피 이제 한국은 안정된 상태니 굳이 한스까지 있을 필요도 없어. 일단 정면으로 마주치는 것만 무조건 피하면···.’
사진이나 동영상 같은 매체야 그저 비슷한 인물이라고 우기면 그만이었다.
애초에 성향 자체가 너무나도 다른 데다, 칙칙한 검은 로브는 딱히 특별할 것도 없었고, 하회탈은 원래부터 한국의 상징과도 같은 가면이었으니까.
‘이세아가 한국인이라는 걸 안 후부턴 아우테리카에서는 일부러 부서진 가면만 쓰고 다니기도 했고.’
하지만 이미 몇 차례나 직접 손속을 나눈 상대와 직접 마주해서까지 정체를 속일 자신은 없었다.
이미 안방극장도 다 끝난 상황에서 들킨다고 큰일이 나는 건 아니었으나, 처음부터 문제가 될 소지는 차단하는 게 좋지 않겠는가.
‘그럼 다시 며칠 정도 있다가 지구로 가야 하니 밀린 일 처리를···. 아, 일단 리에스타에게 먼저 가 볼까.’
「이계전송진 소환」의 사용주기는 지구 시간으로 12시간에 한 번씩.
지구에서의 활동이라 해 봐야 고작 하루 몇 시간이 고작이었으니 충분히 양립할 수 있었다.
물론 전송진을 이렇게 타이트하게 운용하면 다른 아바타들의 유동성이 조금 떨어질 우려가 있었지만···.
‘당분간은 급한 일도 없으니 별 상관없겠지.’
이제 아우테리카에 남은 큰 사건은 안방극장의 마무리뿐.
폭풍전야와 같은 한때가 지나고 있었다.
***
타라크에 위치한 한 개인 공방.
“오오! 드디어!”
얼마 전에 시제품을 테스트하며 한바탕 소란을 일으킨 직후, 하워드는 자오닉의 공방에 얹혀살던 생활을 벗어나 때마침 준비가 끝난 개인 작업실로 거처를 옮겼다.
자오닉은 지금까지처럼 계속 있어도 상관없다고 했으나, 휴버트 상회를 등에 업고 있는 자신이 돈이 없는 것도 아닌데 굳이 신세를 지는 것도 뭐해 단행한 것이었다.
어차피 이웃이나 다름없는 거리여서 매일같이 교류하는 건 달라지지 않기도 했고.
“드디어 완성이구나!”
그래도 온전히 자신만의 비밀기지라는 것은 묘하게 가슴을 끓어오르게 만드는 뭔가가 있었다.
그 덕분인지 이사한 첫날부터 시작해 뭔가에 홀린 듯이 작업에 매진한 하워드는 몇 주 만에 마침내 유의미한 결실을 거둘 수 있었다.
“만능 전투용 전신 슈트 Mk.2의 왼쪽 팔!”
그래봐야 아직은 팔 한쪽에 불과했지만.
두 손으로 그것을 번쩍 치켜든 그는 감격스러운 눈으로 다시 한번 자신의 역작을 훑어보았다.
척 보기에도 심상치 않은 기세가 풍기는 기계 팔.
고작 파츠 하나였으나 이건 결코 평범한 물건이 아니었다.
거기에 사용된 재료나 기술은 두말할 것도 없고 안에 내장된 에너지원조차 범상치 않았던 것이다.
‘역시 기술도 기술이지만 제작에 있어서 자본은 최고의 미덕이라니까!’
최상급 마정석.
특급 마정석이라는 드래곤 하트의 바로 아래 단계에 위치한 귀물이었다.
제국의 황궁조차 비상 상황이 아닐 때는 드래곤 하트가 아닌 최상급 마정석을 결계의 핵으로 사용할 정도니, 그 가치는 말해봐야 입만 아프리라.
‘저번엔 혁명가 놈에게서 디아나를 빼돌린다고 하나 날려 먹긴 했지만.’
애초에 그쯤 되는 물건을 소모품으로 써먹었으니 별다른 능력이 없던 휴버트가 그런 괴물의 손에서 벗어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그 보물이 이번엔 고작 팔 한 짝을 구동하기 위한 에너지원으로써 내장되어 있다는 뜻이었으니···.
‘강환계의 만년한철과 마계산 아다만티움의 합금이 아니었으면 어림도 없었겠지.’
두 재료 모두 내구성은 물론이고 에너지 저항력이 뛰어나기로 이름 높은 금속들이다.
그런 것들을 합금으로 만드는 과정은 결코 쉽지 않았으나, 하워드는 「불과 금속의 노래」와 「야금술」, 「기술 혁명」을 이용한 노력 끝에 기어코 성공할 수 있었다.
그리하여 탄생한 황금비율의 합금이 이 파츠의 내부에 빼곡하게 깔려 회로 역할을 하고 있었으니 그만한 에너지에도 견딜 수 있는 물건이 탄생한 것이었다.
판타지의 드워프가 무협 세계와 마계의 재료를 가지고 미래 과학 기술을 접목해 만든 강화 외골격이라!
“껄껄껄~ 이쯤이면 소형 우주선 하나를 팔에 달고 다니는 것과 다름없겠구나! 모든 파츠가 완성되면 과연 어떤 모습을 보여줄지!”
그렇게 신나서 기계 팔 한 짝을 들고 덩실덩실 춤을 추던 하워드가 갑자기 우뚝 멈춰 섰다.
그리곤 가만히 선 채 그것을 들여다보다가 진지하게 턱수염을 쓰다듬으며 뭔가를 고민했다.
“쓰읍— 이거 이제 슬슬 제대로 된 이름이 필요할 것 같은데.”
이런 훌륭한 물건에다 대고 언제까지 ‘만능 전투용 전신 슈트’라는 밋밋한 이름으로 부를 순 없지 않나.
좀 더 귀에 확 들어오는 멋들어진 고유명사가 필요한 순간이었다.
“흐음, 역시 이건 ‘아이언 가이’로··· 아니, 아니지. 그러면 너무 짝퉁 같으니까. 그럼 ‘캡틴 아우테리카’···도 마찬가지군. 크흐흠.”
이후 작명의 고통에 시달리며 끙끙거리길 한참.
그러다 갑자기 모든 게 부질없게 느껴진 그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에잉, 그냥 ‘티탄’ 정도가 좋겠구만! 작은 거인 같은 느낌으로다가. 생각해 보니 나도 드워프인데, 이만한 물건이라면 신의 이름에서 따오는 것도 그리 나쁘지 않···.”
그렇게 대충 이름을 정한 하워드가 혼잣말을 중얼거린 순간.
화르륵—
옆쪽의 화로에서 튀어나온 한 가닥의 불줄기가 거칠게 일렁거리며 그의 주위를 휘감았다.
그리고 그 불길이 사라진 직후에 그의 앞에 몇 줄의 알림창이 떠올랐다.
《타이탄이 당신을 굽어봅니다.》
《개체가 조건을 달성하여 성장합니다. 특수스킬「불과 금속의 노래」가 「불과 금속의 조율자」로 진화합니다.》
이전에도 한 번 경험해 본 적이 있는 일이었다.
“이건··· 화로의 축복?”
화로 앞에서 뭔가 의미 있는 물건을 만들거나 신의 마음에 드는 장인이 벽을 넘어서 성장 할 때 나타나는 관심의 표현이라고 했었지.
‘그렇다는 건, 이거 역시···.’
아무래도 신께서도 마음에 드셨던 모양이었다.
자신의 이름을 딴, 원래는 세상에 없었던 이 새로운 발명품이.
***
솨아아—
파도가 부서지는 소리가 잔잔하게 울려 퍼졌다.
공기 중에 살짝 섞인 짭짤한 소금기마저 이색적인 감상이 들게 하는 물 좋고 바람 좋은 바닷가.
“으으음!”
그 휴양지와도 같은 곳의 절벽 안쪽 은신처에서 누군가가 용을 쓰는 소리가 작게 흘러나왔다.
“이걸 이러케···.”
앳되기 그지없는, 제대로 발음되지 못하고 뭉개지는 그 말투의 주인공은 자기 목소리처럼 매우 어린 외양을 하고 있었다.
찰랑거리는 금발과 촉촉하게 빛나는 금빛 눈동자, 부드럽고 매끄러운 피부와 통통한 볼살이 매력적인 예닐곱 살의 귀여운 남자아이.
아우테리카에 남은 마지막 골드 드래곤 해츨링, 호루스였다.
그는 온갖 신기한 장비들이 늘어선 마법 연구실 의자 위에 올라선 채, 테이블 위에 놓인 무언가를 붙잡고 한참을 끙끙거리더니···.
“돼따!”
이내 만족한 듯 두 손을 번쩍 치켜들며 환호성을 내질렀다.
그리곤—.
“호오, 그건 무엇이냐?”
“으익?!”
갑자기 들려온 늘어지는 목소리에 움찔했다가, 두 손을 든 자세로 뒤를 돌아보며 배시시 미소를 지었다.
언제 다가왔는지 뒤에는 골드 일족의 엘더 드래곤 슈리하트겐이 반쯤 감긴 시선을 그에게 향하고 있었다.
“헤헤헤···.”
“···허어, 평범한 물건은 아니로군. 그런 게 어디서 난 거지?”
잠시 흐뭇하게 호루스를 바라보던 노룡의 시선이 그 앞에 놓인 물건으로 향했다.
그의 육체는 죽어가는 생을 억지로 붙잡느라 동면 상태나 다름없어졌지만, 그것에게선 그런 상태로도 알아챌 수 있을 정도로 예사롭지 않은 기운이 풍기고 있었다.
“이건··· 드워프의 솜씨로구나. 제법, 아니. 굉장히 잘 만들어졌군. 처음부터 인챈트를 염두에 두고 제작한 건가?”
그 물건을 살펴보던 그의 피곤한 표정에 서서히 놀라움이 들어찼다.
“허, 이 정도면 단순히 마법에 해박한 정도가 아니로군. 최소한 대마법사급의 식견이 없다면 어림도 없을 터인데.”
그건 상당히 놀라운 일이었다.
애초에 그 드워프라는 꼴통 종족은 오로지 제작만으로 마도구를 뛰어넘는 물건을 탄생시키는 걸 자랑으로 여기니까.
일단 만들어진 물건에 인챈트를 더하는 정도라면 모를까, 아예 설계 단계에서부터 인챈터의 추가 가공을 염두에 두고 ‘협업’하는 건 그리 자주 있는 일이 아니었다.
하물며 그 밑바탕이 된 지식수준이 대마법사급이라?
‘이 아이가 거기에 인챈트를 한 건가? ···이것도 훌륭하군. 설마 벌써 이 정도 수준이 됐을 줄이야. 처음부터 짜 맞춘 것처럼 아주 조화가 잘 됐어. 이쯤이면 아예 처음부터 한 사람이 만들었다고 봐도 되겠는데.’
새삼스러운 시선으로 호루스를 흘깃 바라본 그가 다시 천천히 그 물건을 감상했다.
미묘한 검은빛의 금속이 주가 되어 유려한 곡선을 그리는 매끄러운 디자인.
어마어마한 세월을 살아온 그조차 처음 보는 양식의 갑옷, 그 왼팔 파츠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