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overeign of the Infinite Clones RAW novel - Chapter (304)
진심으로 즐겁다는 듯 박수를 치며 호응하는 중년 사내, 닥터.
하지만 던전을 돌파한 끝에 기어코 이 자리에 발을 디딜 수 있었던 하인즈 2세는 그 말에 답하지 않고 천천히 주변을 둘러보았다.
막 개화한 영적인 감각으로 알아낸 정보에 슬쩍 인상을 찌푸리면서.
‘잔재주를 부리는군.’
언뜻 보기엔 온갖 방해를 뚫고 드디어 목적지까지 도착한 것 같았지만, 사실 지금 이 장소도 결코 평범한 곳은 아니었다.
마치 거울처럼 실제 공간을 그대로 투영한 허상일 뿐.
당연히 지금 그의 앞에서 떠들고 있는 닥터도 마찬가지였다.
‘최후의 발버둥인가.’
그러나 이제 와서 고작 이 정도 저항은 우습지도 않은 수준이었다.
하인즈의 두 눈에 짙은 핏빛 기운이 어리는 것과 동시에 주변에 덧씌워진 공간이 갈가리 찢겨 나가기 시작했다.
콰지지직—
그는 앞에서 상대가 뭐라 떠들든 전혀 신경 쓰지 않고 자신이 할 일만을 이어갔다.
이면 공간의 위상을 인위적으로 중첩하고 비틀어 형성한 초소형 국소 차원.
그것이 닥터가 사용하는 수법에 대해 내린 그의 대략적인 판단이었다.
‘한스나 호루스가 직접 이 자리에 있었다면 더 빠르고 확실하게 파악할 수 있겠지만.’
이 공간에 적용된 다양한 술식들이 워낙 복잡하게 얽히고 그 수준까지 높아, 다른 아바타를 통한 간접적인 분석으로는 어느 정도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었다.
원래 어떤 정보를 받아들이고 해석하는 데에 있어서 감각이라는 요소는 절대적인 기준이지 않던가?
‘아직 새롭게 발달한 감각에도 온전히 익숙해지지 못한 상태이기도 하고.’
게다가 지금 자신의 앞을 막아선 것을 박살 내는 데에는 그 정도 수준만으로도 충분했다.
누가 뭐래도 그는 이 세상에서 유일한 10레벨이자 신혈(神血)의 뱀파이어였으니까.
[이거 이거, 정말 곤란하군요! 파햐햐햣! 외통수란 이런 걸 말하는 것이겠죠!]“···시끄럽군.”
그리고 그러한 사실은 이번 일의 직접적인 이해 당사자인 닥터도 아주 잘 알고 있었다.
당장 그를 저 괴물 같은 존재와 직접 대면하지 않게 해 준 마지막 장벽이 곧 무너지기 직전인데 오죽하랴.
[햐햐햐햣—!]하지만 그는 명백히 최후의 순간이 다가오고 있음에도 아무렇지 않은 듯 기묘한 광기가 섞인 웃음을 터트릴 뿐이었다.
아무리 광인이라 한들 쉽게 이해할 수 없는 그 태도에 하인즈의 미간이 살짝 찌푸려졌다.
‘자포자기한 건가? 그게 아니라면 저런 반응을 보일 이유가··· 음?’
그 순간.
무언가를 느낀 그의 상념이 멈췄다.
우우웅—
갑자기 격렬해진 거대한 인과의 흐름에 거세게 요동치기 시작한 주변의 기운.
그리고 한껏 예민해져 있던 그의 감각은 그것으로부터 이어지는 어떠한 결과를 순식간에 도출해 냈다.
그의 입가가 저도 모르게 연신 씰룩거렸다.
그도 그럴 것이, 이건···.
“···하, 자폭이라고?”
[오? 눈치가 굉장히 빠르시군요!]이 저택을 중심으로 전개된 모든 신비를 집어삼키며 발동한 이상 현상.
그것은 순식간에 몸집을 부풀리며 주변 일대를 현실과 유리(遊離)시키기 시작했다.
‘자신의 생명을 대가로 전개하는 술식이군. 원래부터 있었던 기능은 아닌 것 같은데···, 그 짧은 시간에 이걸 구축한 건가?’
내심 혀를 내두른 하인즈가 다시 닥터를 바라보았다.
던전과 결합된 이면 공간을 다시 떼어내, 내부의 모든 것을 무(無)로 되돌리는 의식.
결과적으로 지금 그들이 있는 저택 부지 자체가 세상에서 소멸해 남는 것은 거대한 크레이터밖에 없을 터였다.
‘물론, 성공한다면 말이지만.’
그의 입에서 피식 헛웃음이 새어 나왔다.
‘···성공할 수 있을 리가 없지.’
어디 숨어서 일을 벌이는 것도 아니고, 이렇게 코앞에 이판사판으로 들이받는데 자신이 가만히 있을 턱이 있나!
아무리 놈이 주도하는 의식의 발동이 비정상적으로 빠르다고 한들 어느 정도 한계는 있기 마련이었다.
지이잉—
하인즈의 사고가 빠르게 가속했다.
시간이 한없이 느리게 흘러가는 중에 점차 깊이가 더해졌다.
주변에서 요동치는 인과의 흐름이 그 어느 때보다 손에 잡힐 듯 선명하게 다가왔다.
‘그럼 이제.’
그는 그 모든 것들을 느끼는 상태에서 천천히 손을 뻗었고.
한 줄기 의념을 담아 그대로 그 일부 자락을 움켜쥐었다.
우우웅—
그리고.
···그것으로 끝이었다.
언제 시끄럽게 요동쳤냐는 듯 다시 고요해진 저택 내부.
달라진 것은 오직 혼자 그 모든 여파를 뒤집어쓴 것처럼, 칠공에서 피를 줄줄 흘리며 신체의 말단부터 빠르게 가루가 되어 부스러지는 닥터 한 명뿐이었다.
“쿨럭! 이야~ 이게 이리 간단하게 막힐 줄은 몰랐는데 말이죠···? 크힉힉, 설마 이런 것까지 가능할 줄이야···. 역시 당신은 제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유능했던 모양입니다!”
하지만 그 와중에도 그의 방정맞은 주둥이는 다물어지지 않았다.
한동안 킬킬거리며 웃다가, 오히려 흥미로운 연구 주제라도 맞이한 듯 대기 중으로 흩어지는 자신의 팔다리를 이리저리 살펴보며 고개를 끄덕거릴 뿐.
“바로 연구할 수 없는 것은 아쉽군요! 이것도 상당히 재미있는 주제가 될 것 같은데.”
그리곤 입맛을 다시며 가벼운 불평을 토했다.
확정된 자신의 죽음이 코앞으로 다가온 상황에서까지 연구를 생각하는 모습은 과연 매드 사이언티스트 그 자체였다.
그러나 그런 닥터의 모습도 그리 오래가지 못했으니.
순식간에 몸을 잠식한 소멸의 반동이 사지를 넘어 곧장 몸통과 머리까지 치달았던 것이다.
“···그럼 다음에 다시 뵙겠습니다! 그땐 당신은 물론, 당신의 친구들까지 전부 볼 수 있었으면 좋겠군요! 퍄하하핫!”
파사삭—
그렇게 유언인지 저주인지 모를 말을 남긴 닥터의 몸이 이내 완전히 가루가 되어 흩날렸다.
그 다소 허무하기도 한 결말에 조금 찝찝한 기분이 들었으나, 그렇다고 당장 뭘 어떻게 할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살려서 잡을 수 있었다면 베스트겠지만, 놈이 처음부터 죽을 생각으로 나오니 어쩔 수 없지.’
이러니저러니 해도 술법 쪽으론 저쪽이 더 우위에 있지 않던가?
그래도 덕분에 공간 붕괴를 막으면서 이곳 닥터의 연구실에 있는 여러 가지 정보들도 추가로 건질 수 있었으니 그리 나쁜 일만은 아니었다.
‘이곳 전체가 훌륭한 교보재로군. 일단 싹 다 털어서 살펴보면 뭐라도 더 건질 수 있겠지. 쓸 만해 보이는 물건들도 상당히 많고···. 오? 저건 하워드의 연구에 도움이 되겠어.’
빈 공간을 가로질러 마침내 닥터의 개인 연구실로 들어선 하인즈가 감탄을 토하며 잔뜩 어질러진 실내를 둘러보았다.
서류철로 묶인 연구일지들은 물론이고, 어디에 사용되는 것인지 알 수 없는 기구들까지 곳곳에 널브러져 있어 얼핏 보면 쓰레기장 같다고 여겨질 정도.
하지만 이곳에 있는 물품들은 바깥에 나가면 하나같이 어마어마한 가치를 가지게 되는 귀한 것들이었다.
누가 뭐래도 세계 최고의 이능 공학자인 닥터의 손길이 닿은 기물이거나 그의 사고 원리가 기록된 수기였으니까.
“음? 이건···.”
그런데 그때 마침, 가볍게 연구 계획서들을 훑어보던 그의 시선에 굉장히 익숙한 문구 하나가 뇌리에 틀어박혔다.
‘···완전 진화 생물 프로젝트?’
이미 제법 오래전, 할리를 만들기 위해 한 번 유용하게 써먹은 전적이 있었던 실험 주제였다.
대충 내용을 살펴보니 시간이 꽤 지난 덕분인지 확실히 이전에 접했던 것에 비해선 좀 더 발전한 느낌이 들었다.
“멀었군.”
하지만 하인즈는 가차 없이 그렇게 평하며 그 서류를 대충 책상 위에 툭 던져 놓았다.
아무렴, 아직도 설계 단계에서 애먹고 있는 저쪽과는 다르게 이쪽은 이미 완벽을 넘어선 궁극의 예술품을 탄생시키지 않았던가?
아무리 이론적인 면에서 추가 업데이트가 이루어졌다 해도, 그로선 당연히 가소로울 수밖에 없었다.
‘그나저나 아직도 할 일이 많군. 루마니아의 드라쿨 잔당을 대신 이끌 놈도 골라야 하고, 밑에 놈들이 딴생각하지 않도록 차근차근 「정제혈정」도 하사해야 하고···.’
빠르게 다음 할 일을 생각하는 그에겐 별생각 없이 내뱉었던 가면무도회(Masquerade) 따위는 이미 남아있지 않았다.
그렇게 번천회 유럽지부장 ‘공작’과 총괄 기술부장 ‘닥터’가 사망한 날.
그들의 유럽 통제력은 전에 없을 정도로 크게 바닥을 치게 되었고.
그 과정 중에 있었던 일들은 그대로 다른 나라들에까지 영향을 끼쳤다.
***
아무리 세상이 혼란스럽다고 해도 현대 사회의 강점은 여전히 빠른 정보 전달이었다.
그것이 지구 반대편에서 벌어진 일일지라도 실시간으로 전달될 수 있는 초고속 연결망.
그리고 그건 최근 유럽에서 있었던 일들을 한참 멀리 떨어진 동아시아 지역, 그중에서도 한국까지 빠르게 전달하는 데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어마어마하게 먼 거리에서 벌어진 일임에도 불구하고 거의 정보 손실 없이 있는 그대로의 사실이 알려지는 데 성공한 것이다.
사실 그 소식이라는 것도 대중들이 관심을 가지기에 충분하다 못해 넘칠 정도의 화제성을 가지고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야 그럴 수밖에.
한국이라는 변방에서 넘어간 흡혈귀 하나가 단신으로 전통의 강호, 유럽의 뱀파이어 클랜들을 차례차례 무너뜨리고 그 세력을 흡수하고 있다지 않은가!
당연히 사람들은 처음엔 그 사실을 쉽게 믿지 못했다.
하지만 아무리 그 증거자료들을 파고 또 파 봐도 사실이 더욱 명백하게 드러날 뿐.
애초에 팬텀은 이미 찍힌 사진도 적지 않을 정도로 유명인이었기에 비교 분석하기가 너무나도 용이했다.
서울 시내에 자리한 헤테로시스의 사무실.
일전 알파의 습격 사건 이후 새로 입주한 건물의 집무실에서 진소란이 가만히 보고서를 들여다보았다.
“···로드께서 잠깐 유럽에 다녀오신다고 했을 때 혹시나 하긴 했는데···.”
단정한 정장을 입고 긴 머리를 포니테일로 묶은 여성, 헤테로시스의 수장 대리 진소란이 첨부 자료에 실린 하인즈의 사진을 보며 떨떠름하게 말을 흘렸다.
하긴 누구라도 그럴 수밖에 없었다.
그 외국에 나간 지 얼마나 되었다고 전국구급 암흑 조직을 벌써 몇 개씩이나 휘하로 집어넣는단 말인가?
그것도 하나같이 한국보다 훨씬 더 큰 땅덩어리를 터전으로 살아가는 이들과 졸지에 같은 배를 타게 되었으니.
솔직히 규모 면으로나 전력 면으로나 한국의 혈맹이 우위를 차치할 수 있는 부분이 없었다.
유럽이 괜히 흡혈귀의 세력이 강성한 땅이 아닌 것이다.
‘으음, 확실히 로드의 능력이시라면 일단 우두머리만 어떻게 회유할 수 있으면 나머지는 비교적 쉬운 일이겠지만.’
그래도 역시 스케일에서 차원이 다른 것은 분명하다.
그녀는 한창 한국 커뮤니티를 달아오르게 만든 키워드들을 살피며 한숨을 내쉬었다.
사실 여기까지라면 괜찮았다.
이것도 나름대로 국뽕 요소라고 할 수 있는 만큼, 국내 커뮤니티를 비롯한 매스컴에서는 대체로 우호적인 분위기였다.
문제는 다른 쪽.
주로 일본과 중국 등을 위시한 대부분의 외국 언론이었다.
“번천회가 손을 쓴 거겠지···.”
최근 팬텀이 노골적으로 번천회에 적대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으니, 슬슬 무력 외적인 부분에서도 압력이 들어오기 시작한 것이다.
무엇보다 중국은 여전히 그들의 텃밭이었고, 일본도 아직 그 청산이 제대로 마무리되지 못했다.
‘그들은 굳이 번천회의 부추김이 아니더라도 한국 정부에게 강하게 나갈 수 있는 이런 기회를 절대 놓치지 않을 거야.’
문제는 그 방법이 생각 이상으로 효과적이라는 것에 있었다.
어쨌건 객관적으로 보자면 팬텀과 그 휘하 뱀파이어들이 국가의 법을 따르지 않는 범법자라는 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으니까.
어떻게든 이런 이미지를 쇄신하지 않으면 앞으로 두고두고 방해될 것이다.
“어떻게 하는 게 좋을까.”
머리를 감싸 쥔 진소란이 책상에 이마를 박고 끙끙거렸다.
이미 사회 깊은 곳에 뿌리내린 번천회에 대항하기 위해선 최대한 모을 수 있는 힘을 한데 끌어모으고 공동으로 대응하는 게 최선이다.
그렇다면 역시 강경 노선보다는 좀 더 대중에게 친밀하게 다가가는 노선을 택해야 할 텐데···.
애초에 인간의 피를 필요로 하는 흡혈귀가 인간들에게 친화적으로 보일 수 있을까?
“하아, 친근감이라··· 광고라도 내야 하나? 우리 아이들은 물지 않아요. 같은 거라던가. 무슨 연예인도 아니고 그런 게 쓸모가 있을 리가···.”
말을 잇던 그녀가 잠시 멈칫했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턱을 쓰다듬으며 고민에 빠졌다.
정말 불가능한가?
지금 팬텀의 인기를 따져보자면 그리 불가능하진 않아 보였다.
무엇보다 흡혈귀들은 대체로 미형이었다.
그야말로 연예계에 최적화된 인선이라고 할 수 있을 터.
‘마침 한국 귀환자 협회를 통해 정부와도 긍정적인 교감이 오가는 중이지. 여기서 잘만 한다면···.’
뾰족한 송곳니를 드러내며 미소 짓는 그녀의 눈이 별처럼 반짝였다.
헤테로시스의 수장 대리이자 혈맹의 대외 업무 총책임자 진소란.
아는 사람만 아는 사실이었지만, 그녀는 전 아이돌 지망생이자 현 인터넷 방송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