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overeign of the Infinite Clones RAW novel - Chapter (306)
어느 인적 없는 산지.
지지직—
그 한가운데에서 뭔가가 찢어지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와 동시에 빈 허공에 생기기 시작한 기다란 균열.
그것은 계속되는 소음을 동반하며 급격하게 영역을 넓히더니—.
파자자작—!
뒤이은 거친 파열음을 끝으로 커다란 구멍을 만들어 냈다.
그에 이어 그 지옥의 무저갱과도 같은 틈새에서 불쑥 튀어나온 한 쌍의 손이 찢긴 공간의 양쪽을 잡곤, 조금씩 그것을 벌리며 더욱 확장시키기 시작했다.
“···드디어.”
마침내 그 균열의 크기가 일정 선을 넘어서자, 누군가의 담담한 말소리가 그 너머에서 흘러나왔다.
남성이라는 것 외에는 어떤 정보도 알 수 없는··· 도무지 종잡을 수 없을 정도로 기이한 목소리였다.
“생각보다 오래 걸렸군.”
이내 그 음성의 주인이 공간 너머에서 서서히 모습을 드러냈다.
평범한 청년인 것 같기도 하고 비범한 노인 같기도 한 정체불명의 사내.
그간 심연의 밑바닥에서 지상으로 나오기 위해 오랜 시간 고군분투하던 번천회주가 마침내 지상의 땅을 밟는 순간이었다.
‘이곳이 아우테리카 차원인가.’
가만히 주변을 둘러보던 그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머릿속으로 사전에 알아두었던 내용 몇 가지가 스쳐 지나갔다.
가장 기본적인 판타지 타입의 이세계이자, 현상 발현에 유용한 에너지인 마나를 기반으로 하는 이능 체계.
세상의 관리자인 신 또한 단순히 신성력을 내려주는 것뿐만이 아니라, 간혹 직접적인 이적을 행사하기도 한다는 개입형 차원이었다.
‘방임형이 더 편하긴 한데···. 그래도 귀찮은 만큼 얻을 수 있는 건 더 많을 터.’
그 덕분에 이곳에 온 지 얼마 되지도 않아서 벌써 하나 건지기도 하지 않았나?
비록 거래 대상이 영락하고 유폐된 신이었던지라 기대한 정도는 아니었지만, 아무리 그래도 이 차원의 정명한 신격을 가진 존재였던 만큼 번천회주에게 가해진 세상의 제약 중 상당 부분을 무마할 정도는 되었다.
그게 없었으면 아마 아직도 그 심연이라는 감옥에 갇혀있지 않았을까.
‘일단은 그 정도만 해도 감지덕지하지. 이곳에서 어떻게 움직이는 게 효율적인지도 알 수 있었고. 명색이 신이라는 놈과 거래를 한 건 마음에 들지 않지만, 도움이 되는데 굳이 날을 세울 필요도 없다.’
자신의 목표를 이루기 위해서라면 무슨 짓이든 하기로 마음먹지 않았던가?
지금까지 그것을 위해 타협한 일이 몇 가지인데, 이제 와서 방법에 수단을 가리는 것도 웃긴 일이었다.
“그럼 이제···. 으음···.”
그러다 문득, 다음 단계를 생각하며 크게 한 발 내디디던 그가 크게 휘청거렸다.
그리곤 저도 모르게 인상을 찡그린 채 한 손으로 머리를 짚고 눈을 질끈 감았다.
우우웅—
-나는 위대한 ···이 되어···.
우웅—
-몇 번을 ···하더라도 반드시···.
지이잉—
-오직 나만이 이 세상을···.
머리를 뒤흔드는 진동과 함께 귓가에서 울리는 이명.
이성을 유지하는 자아를 뒤틀어 버릴 정도의 충격이 연신 그의 내면에 휘몰아쳤으나, 그는 그저 가만히 눈을 감고 자신의 사명을 떠올리며 그 모든 것들을 묵묵히 버텨냈다.
그렇게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자기 자신조차 잃어버릴 것만 같은 거센 격류가 한차례 휩쓸고 지나가고, 마침내 내면에서 날뛰던 무언가가 점차 진정하기 시작하자 그도 조금씩 안정을 되찾을 수 있었다.
“후.”
짧은 한숨과 함께 머리를 짚은 손을 뗀 그가 손바닥에 가득 묻은 식은땀을 확인하며 인상을 찡그렸다.
익히 예상하긴 했지만 언제 겪어도 마음에 들지 않는 감각이었다.
‘···이번엔 얼마나 잃은 거지?’
하지만 그는 침착하게 곧바로 자신의 상태를 점검했다.
신격을 얻을수록 점차 인격과 자아가 흐려지고 있었지만, 아직 해야 할 일이 많이 남아있는 만큼 여기서 벌써 무너질 수 없었다.
‘그래도 이 정도면 안정권이군. 크게 신경 쓸 필요는 없나. 아직 좀 더 채워 넣을 수 있겠어.’
애초에 신이란 이들은 원래 그런 존재였기에 지금 그에게 일어나는 반응도 당연한 현상이었다.
오히려 목적을 위해 온전한 신위를 얻으려 하면서도 인간으로서의 사고까지 유지하려고 하는 쪽이 욕심일 터.
‘별문제는 없다.’
그러나 지금까지 오직 그것만을 위해 노력해 온 그는 누가 뭐라 하던 오롯이 자신의 길만을 갈 뿐이었다.
그렇게 재차 마음을 다잡은 그는—.
다시 발걸음을 옮기려다 일순 우뚝 몸을 멈춰 세웠다.
“······.”
그의 시선이 한쪽으로 돌아갔다.
일시적으로 시간 감각이 무너져 정확하진 않았지만, 그가 정신을 놓았던 순간이 그리 짧지 않았던 건 맞았다.
그래도 그게 분명 한 시간가량은 넘지 않았을 텐데.
‘미리 대비한 것도 아닐 텐데 이렇게 빨리 반응했다고?’
어느새 주변을 둘러싸고 이쪽으로 접근하는 무리가 감지되었다.
그들에게서 풍겨 나오는 적대감은 저들이 결코 우연으로 이곳에 온 것이 아니라는 것을 말해주고 있었다.
다만 그걸 감안하더라도 한 가지 걸리는 점이 있었으니.
바로 그들에게서 느껴지는 기운이 하나같이···.
“···뭐지? 어째서 네가?”
그때.
그가 채 의문을 풀기도 전에 한 익숙한 존재가 무리의 선두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크크큭, 이거 내가 가장 먼저 찾았구나.]“···하회탈. 네가 어떻게 여기에 있는 거냐?”
하회탈.
얼마 전에 한바탕 맞부딪치기도 했으며, 이후에도 그의 재등장을 대비해 한동안 지구에 머무르도록 만들었던 존재.
멀쩡한 가면을 쓰고 마주했던 그때와는 다르게, 지금은 부서진 가면 조각 일부만을 붙인 채 살벌한 형상의 해골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었지만 분명 그가 틀림없었다.
당황스럽게도 미처 예상치 못한 장소에서 뜻밖의 대적자를 마주한 번천회주의 표정이 미묘하게 비틀렸다.
“···그렇군, 설마 너도 차원을 넘을 수 있었던 건가? 그동안 이곳과 지구를 오가면서 활동하고 있었나.”
[크흐흣— 그렇게 생각하나?]“나 말고 그것이 가능한 이가 또 있을 줄은 몰랐는데. 이건 상당히 뜻밖이로군. 전혀 예상하지 못했어.”
[오호? 역시 오만하구나. 이제라도 세상이 넓다는 것을 알았으니 잘됐군. 축하할 만한 일이야.]“그럼 저 버러지들은 네가 이 세상에서 모은 병력인가?”
그들이 그렇게 서로 대화를 가장한 신경전을 벌이는 와중에도 한스와 같이 온 언데드들, 불사의 군대 간부진은 일사불란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엘리트 데스나이트들을 이끌며 진형을 꾸리는 데스나이트 로드 카람.
유령체 언데드들을 데리고 허공을 부유하는 드래드 팬텀 파고스.
후방에서 고위 리치들과 함께 거대한 마법진을 구축하는 아크리치 켈리파.
초월급 각성자 출신인 살마를 비롯한 다수의 어비스 레버넌트들.
그 외에도 사납게 기세를 돋우는 구울 로드 피오나, 둠 나이트 드렉슬러, 제너럴 스파르토이 트레브, 데스위저드 말콤 등—.
일제히 사방을 점유하고 대열을 갖춘 그들의 몸에서 흘러나온 시커먼 기운이 ‘죽음’과 공명하며, 순식간에 주변을 둘러싼 채로 일대의 공간을 오염시켜 나갔다.
[쿠오오오오——!] [캬아아아——!]거기에 더해 창공을 유영하며 아래를 노려보는 본 드래곤 엔트라시오와 헤라토스까지.
급하게 불사의 군단 최상위권의 정예들만 데려왔기에 병력의 숫자는 겨우 수백 단위에 불과했으나, 각자가 이룬 경지에 더해 한스가 부여한 죽음의 힘까지 가득 들어찬 그들의 기세는 쉽게 무시할 수 없는 수준이었다.
‘···어쩐지 심연에 처박혀 있을 때부터 기시감이 느껴지더라니. 하회탈이 쓰던 것과 완전히 같은 힘이었군.’
그들의 전의 속에서 느껴지는 기운에 번천회주가 혀를 차며 미간을 찌푸렸다.
그때는 설마 싶어 세계의 찌꺼기는 다 비슷하다며 크게 신경 쓰지 않았었는데.
“그래, 하회탈. 솔직히 놀랐다. 지구에서 도망친 네가 이런 데에 숨어있었을 줄이야. 그런데 계속해서 숨어있지 않고 이렇게 내 앞에 나타났다는 말은··· 이번엔 자신 있다는 거겠지?”
조롱 섞인 말을 마친 그의 몸에서 묵직한 기세가 뿜어져 나왔다.
고오오오—
과연 그 악명에 걸맞은 존재감.
단지 그것뿐이었는데 주변을 둘러싼 간부들 간의 연결이 휘청거리며 그들이 한 발짝씩 뒤로 물러났다.
[크크큭, 말이 길어지는구나. 그거야 직접 겪어 보면 알겠지.]그에 가만히 그것을 지켜보던 한스의 몸에서도 재차 심연의 죽음과 뒤섞인 흑마력이 흘러나와 공간을 잠식해 나갔다.
그리고 그것은 번천회주의 존재감과 서로 엎치락뒤치락하며, 언데드 간부들의 몸속에 스며들어 가 흐트러진 그들의 기세를 일제히 각성시켰다.
‘심연의 죽음과 언데드의 상성에 대해선 두말할 것도 없지. 보조를 위해 데려온 간부들이 얼마나 쓸모가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약간이라도 도움이 될 수 있다면 그걸로 좋아.’
한스는 고조되는 긴장감 속에 정신을 한껏 북돋우며 전투를 준비했다.
전에도 상대해 봐서 상대의 능력은 확실히 알고 있었다.
사실 일대일로 붙는다면 지금도 썩 자신이 없었다.
‘하지만 이곳은 지구와 상황이 달라.’
그땐 『차원 장벽 완화』도 없을 때여서 심연이 제대로 힘을 쓰지 못했었지만 여기서는 아니었다.
거기다 그 효과를 불사의 군대 최상위권 간부들은 물론, 그간 지구의 각성자들로 제조해 온 어비스 레버넌트들도 누릴 수 있지 않나?
반대로 번천회주가 다루는 신성력은 이차원인 아우테리카에서 온전히 발휘할 수 없었다.
지구에서야 자체적으로 힘을 끌어낼 수 있는 그에게 별 상관없는 문제였겠으나, 엄연히 주신이 있는 이곳에서 외신(外神)의 힘을 마음대로 쓸 수 있을 리 없지 않은가!
‘그래, 이곳은··· 아우테리카는 내 영역이다.’
뚜둑—
뼈밖에 없는 주먹 관절에서 딱딱한 소리가 울렸지만, 그 작은 소음은 폭풍이 몰아치는 듯한 주변 소란에 파묻혀 금방 사라졌다.
‘···내가 네놈들에게 또 빼앗길 것 같으냐?’
자신의 구역에 쳐들어온 침략자를 마주한 불사왕 한스의 눈에서 시퍼런 광망이 뿜어져 나왔다.
솔직히 말해, 지금만큼은 안방극장이고 뭐고 안중에도 없었다.
그저 전력을 다해 적을 쳐부수고 싶은 생각뿐.
‘이곳에서 놈을 이기지 못한다고 해도 상관없다. 놈이 무슨 짓을 할지 알 수 없는 이상, 이 세상을 마음대로 활보하게 풀어둘 순 없어.’
그는 당장이라도 「개체 집결」을 사용하고 싶은 욕구를 억지로 억눌렀다.
일단은 만약의 사태를 대비해 연결된 각 세력들에게도 여러모로 준비시킬 필요가 있었으니.
한스의 목표는 다른 아바타들이 전부 일을 끝마칠 때까지 최대한 시간을 버는 것이었다.
‘항상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던 보람이 있군.’
그가 번천회주를 가장 먼저 찾아낼 수 있었던 이유는 간단했다.
이곳은 이온 대륙 북동부, 제피아 공화국 위쪽의 북부 산맥.
다른 어떤 조직보다 빠르게 정보를 습득할 수 있는 장소인 것은 물론, 말 그대로 24시간 대응이 가능한 불침번 수백이 깔린 첨단 감시 구역이었다.
물론 그 과정에서 불사의 군대 정보 총책임자인 밴시 퀸 올리비아가 최근 잠도 못 자고 고생하긴 했지만, 어차피 잠이 없는 그녀였으니 큰 문제는 아니겠지.
“···그래, 일단 일을 시작하기 전에 너부터 정리해 둬야겠구나.”
그때, 가만히 주변을 둘러보던 번천회주가 선언하듯 무거운 한마디를 내뱉었다.
펄럭—
거친 날갯짓 소리와 함께 놈의 몸에서 뿜어져 나온 찬란한 노을빛 광채가 사위를 뒤덮었다.
그 출력이 약해진 게 틀림없는데도 성자인 하인리히를 훌쩍 넘어설 정도의 막강한 신성력.
그에 주변을 가득 메운 죽음의 기운 곳곳이 녹아내리듯 사라지며 구멍이 숭숭 뚫리기 시작했다.
“지구에서 할 일을 덜 수 있으니 오히려 이편이 더 좋을지도 모르겠군. 그럼 어디 한번 반항해 보거라.”
[크흐하하! 아아— 그래. 어디 한번 어울려 보자꾸나!]그렇게 사람들의 발길이 끊긴 외진 산지에서.
콰아아앙—!
외계의 천사와 현지의 마왕 간의 2차전이 시작되었다.
***
“브리키.”
“아— 하인즈, 굉장히 오랜만에 왔··· 으읏?”
익숙한 목소리에 평소처럼 태평한 표정으로 뒤를 돌아보던 브리키의 표정이 일순 뻣뻣하게 굳어졌다.
꿀꺽—
이어서 작게 들려오는 침 넘기는 소리.
하지만 그녀가 멈칫한 것은 찰나였다.
곧 신색을 회복한 그녀가 슬그머니 시선을 내리깔며 재차 입을 열었다.
“음, 그··· 하, 하이 로드 오셨네요? 어디 멀리 다녀오신 거 같은데···. 뭐 몸에 좋은 거라도 드셨나 보다. 아주 얼굴에서 광채가···.”
“지금 바로 전투를 준비해라.”
하지만 그것에 어울려 줄 여유가 없었던 하인즈는 단호하게 그녀의 말을 끊으며 명령을 내렸다.
뱀파이어끼리의 텔레파시를 통해 진혈급 고위 전투 요원들에게도 연락을 돌리면서.
“네, 하이 로드!”
“아, 그리고.”
군기가 바짝 들어 본능적으로 반응한 브리키의 대답 뒤에 그의 말이 다시 이어졌다.
“그 전에 이것부터 먼저.”
그렇게 말하는 하인즈 2세의 손끝에서 루비처럼 빛나는 신혈의 「정제혈정」이 피어올랐고.
꿀꺽—
재차 넘어가는 침 소리와 함께 그녀의 시선이 그 향기로운 액체에 틀어박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