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overeign of the Infinite Clones RAW novel - Chapter (310)
찰나지간에 전신을 억압하는 찬란한 광휘.
번천회주의 몸을 감싼 노을빛 신성력이 맥없이 사그라지며 길게 뻗어있던 날개가 형편없이 구겨지기 시작했다.
‘어떻게?’
저항할 시간도 없었다.
그가 언제 그 자리에 나타날지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는 듯, 공간을 넘어 목적지에 도착한 순간엔 이미 모든 의식이 완성되어 있었다.
그는 몸을 짓누르는 압력에 반발하며 시선을 돌려 빠르게 사방을 훑었다.
입으론 기도문을 읊으면서도 그를 똑바로 노려보는 이들에게서 선명한 적개심이 전해져 왔다.
-[초대받지 않은 이방인아. 영원히 환영받지 못할 세계의 침탈자야. 명심하라]
어째서일까?
그때, 번천회주의 뇌리에 하회탈이 떠나기 직전 마지막으로 남겼던 말이 떠올랐다.
-[이 땅에 네가 있을 곳은 없다.]
질서정연하게 대열을 갖춘 무수한 군중들의 일념(一念)이 하나로 뭉쳐 형상을 갖추었다.
족쇄에서 해방된 것처럼 가벼워졌던 몸이 전보다 더한 제약에 구속되며 깊은 심해에 가라앉듯 운신이 버거워졌다.
‘이대론 안 된다.’
뭔가가 잘못됐다.
그러나 이게 어떻게 된 일인지 자세히 생각할 겨를 따윈 없었다.
날카롭게 치솟은 위기감이 번천회주의 뇌리를 자극하며 급하게 대응 방안을 강구했다.
‘구속이 더 강해지기 전에 부순다.’
순간적으로 내린 판단을 거의 동시에 행동으로 옮겼다.
전신을 옥죄어 오는 압박 속에서 신성진의 구조를 빠르게 읽어낸 그는 곳곳에서 의식의 중심이 되는 지점들을 파악할 수 있었고.
이내 그곳들을 노리고 오른손을 길게 휘저었다.
쿠우웅—
번천회주가 다루는 노을빛 신성력과는 별개의, 순수하게 그의 고유스킬로 발동하는 공간의 힘.
목표 지점 일대의 중력이 급격히 치솟으며 그곳에 선 자들의 표정이 일제히 창백해졌다.
의식의 참여자들을 보호하는 역장 덕분에 납작한 쥐포가 되는 신세만은 피할 수 있었지만, 당연히 거기에도 한계는 있을 수밖에 없었다.
콰드드득—
중력의 압력에 약해진 역장의 틈새로 공간 붕괴의 힘이 파고들었다.
그리고 그것은 곧장 신성진의 요충지에 자리 잡고 있던 고위 사제들에게 이빨을 들이밀어—.
콰앙!
“어림없다!”
“주신이시여!”
그 목표를 이루기 전, 불시에 나타난 성기사들에 의해 철저하게 파훼 되었다.
번천회주의 미간이 꿈틀거렸다.
아무리 이 신성진에 의해 위력이 격감하였다고는 하나, 공간에 직접 간섭하는 그의 공격을 막아내는 것은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게다가 이번 한 수는 그로서도 제법 공들인 일격이 아니었던가?
심기가 불편해진 그의 시선이 자신의 공격을 막아낸 일곱 명의 성기사들에게로 향했다.
천천히 전면으로 나서는 그들의 몸에서 육체를 불사르듯 일렁거리는 아우라가 타올랐다.
“경계해라. 이단의 수준이 생각 이상으로 높다.”
“이 신성진 안에서도 저 정도라니···. 까닥하다간 순식간에 목이 날아가겠군.”
“과연 성자님의 말씀대로.”
성자 하인리히를 성지로 데려온 은빛날개 성기사단의 투스킨과 흑마법사와 악마 숭배자 처단이 주 업무인 검은삭월, 그리고 로셀리아 대신전을 수호하는 광휘수호 성기사단장 등.
주신교단 무력의 정점에 있는 팔라딘들이었다.
‘···이거 곤란하게 됐군.’
그들에게서 풍기는 기운을 가늠한 번천회주의 표정이 찌푸려졌다.
사실 따지고 보면 그들 하나하나는 별거 아니었다.
팔라딘은 마스터급 무인임과 동시에 고위 성직자였지만, 어느 쪽이든 준신의 격을 이룬 그의 입장에서는 조금 거슬리는 정도에 불과했으니.
그러나 그것도 통상적인 경우에나 해당하는 말이지, 지금처럼 특수한 상황에서는 그들을 결코 쉽게 볼 수 없었다.
평소 강건하게 단련된 육체와 짙은 농도의 신성력에 익숙해진 그들의 몸은 이 공간에 가득 채워진 막대한 신성력을 투사할 훌륭한 매개체가 될 터.
비록 그 힘이 일시적이고 수명에도 커다란 악영향을 준다 하나, 언제든 신의 뜻을 위해 순교할 준비가 되어있는 팔라딘들에게는 그리 큰 문제도 아니었다.
화아악—!
공기가 무거워지며 천지 사방이 찬란한 신성력으로 물들었다.
그간 누구도 예상할 수 없었던 ‘내부의 스파이’ 때문에 불사왕을 상대로는 여러모로 체면을 구긴 주신교단이었지만, 그들은 틀림없이 아우테리카 최대의 세력 중 하나이자 모든 종교의 중심이었다.
“쯧, 이건···.”
세상의 중앙에 위치한 교단의 성지.
일제히 기도문을 외우는 수만의 열성 신도.
그들을 주도하며 의식을 진행하는 고위 성직자와 주변에 가득한 에너지를 한계까지 받아들인 채로 앞을 막아선 팔라딘들.
그리고 신성진의 가운데에 선 채 가만히 그가 있는 방향을 바라보고 있는 추기경들까지.
‘글렀군.’
그에 빠르게 상황을 파악한 번천회주는 곧장 포기를 결정할 수 있었다.
이만한 대비가 되어있는 이상 당장은 그로서도 어찌할 수 없었다.
저렇게까지 준비된 판에 무리하게 달려들다가 정말 신까지 개입해버리면 그거야말로 최악이었으니까.
‘일단 지금은 물러난다. 이만한 대비 수준을 상시 유지할 수는 없을 터. 좀 더 장기적으로 상황을 보다 빈틈이 생겼을 때···.’
어차피 그에게 남은 시간은 많았다.
속전속결로 끝내려다 계약금을 벌써 날려버린 건 조금 아깝긴 해도, 그 덕분에 상당히 많은 것을 알 수 있었으니 손해만 본 건 아니었다.
‘저쪽에 예언자가 있다. 그것도 세상 전체에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그의 출현 지점에 기다렸다는 듯 병력을 이끌고 나타난 하회탈.
이후 교대하는 것처럼 등장한 차원 최정상급의 강자들과 그 조력자들.
심지어 그가 이동할 곳을 예상하고 미리 준비해 둔 초대형 신성진과 그를 이용한 의식까지.
예언자의 존재가 아니라면 도저히 설명할 수 없는 사건의 연속이었다.
‘이 나를 상대로 이렇게까지 치밀한 예언을 할 수 있다니.’
스스로 틀을 벗어난 존재인 초월급만 끼어도 불안정해지는 게 예언이라는 것이었다.
그가 오라클을 우대하는 것 또한 그 한계를 이겨낸 거의 유일한 인물이기 때문이 아니었던가?
그런데 준신의 격에 오른 그의 행적을 이렇게 자세히 읽을 수 있다는 것은 그 존재가 상상 이상의 위험인물이라는 것을 뜻했다.
‘일단 그놈부터 처리해야 한다.’
실상 성녀가 받은 계시는 그저 ‘외부 차원에서 온 침입자’의 존재에 대한 것이 전부였으나, 이 일에 개입한 누군가가 가진 정보와 능력을 알지 못하는 그로선 그리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예언의 허점을 이용해야겠군. 그걸로 어떻게든지 놈을···.’
하지만 그가 채 생각을 마무리하기도 전.
파아아앗—
귀찮게 방해하는 이들을 견제하며 신성진의 구속에서 조금씩 몸을 빼내던 그는.
“주신의 이름으로. 이 세상에서 네가 발 디딜 곳은 없다, 이단.”
갑작스러운 빛과 함께 나타나 재차 성검을 겨누는 주신의 챔피언을 보고 미간을 찌푸릴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의 등장은 시작에 불과했으니.
“암! 어딜 가려고? 그 날개 주기 전까진 어림도 없지! 프하하핫!”
“으음, 신성력이 짙군. 피부가 탈 것 같아.”
“이 근방의 숲은 크기가 상당히 작군요···. 뭐, 북부 산맥이 울창한 거였겠지만···.”
처음부터 그 자리에 있었다는 듯, 하인리히의 뒤를 따라 하나둘 모습을 드러내는 삼인방.
그 끈질긴 찰거머리들의 모습에 번천회주의 얼굴이 기어코 험악하게 일그러졌다.
***
번천회주의 침입에 대해 알게 됐을 때, 그가 노릴 만한 후보지를 따로 생각해 둔 적이 있었다.
‘운이 좋았군. 놈이 처음부터 다른 곳으로 가 버렸으면 놓칠 뻔했는데.’
그때 가장 가능성이 높다고 점쳤던 장소는 두 곳.
이온 대륙의 중심인 교단의 성지와 에나멜 대륙 한가운데에 자리하고 있는 세계수였다.
또 그렇게 예상한 이상, 만약을 위해 앞으로의 일에 대비해 두는 것도 당연했고···.
[해리스입니다. 외신의 사도는 주신교단의 성지로 향했습니다.] [그렇군요. 이걸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조금 아쉽군! 이쪽도 나름 철저하게 대비했는데 말이야!] [그, 그래도 큰일이 없는 게 좋죠! 아무리 열심히 준비했어도 희생은 생길 수밖에 없으니까요. 주신교단도 큰 피해가 없었으면 좋겠는데···.]그에 따라 교단의 성지뿐만이 아니라 엘븐 킹덤의 수도 드라샤에서도 세계수를 이용한 대규모 결계를 펼칠 만반의 태세를 갖추고 있었다.
해리스로부터 신호가 오면 곧바로 결계를 발동시키기 위해서.
물론 그 과정에서 들어가는 수고와 재화가 적지는 않았으나, 현 엘븐 킹덤 최강자이자 세계수의 사랑을 듬뿍 받는 그의 말을 함부로 무시하는 이는 없었기에 일이 성사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그래도 혹시 모르니 끝까지 경계를 유지해 주세요. 놈을 상대하다가 뭔가 이상이 생기면 곧바로 연락드리겠습니다.] [알겠습니다, 해리스 님. 부디 몸조심하십시오.] [다치지 마세요! 너무 무리하지 마시구요.]해리스는 드라샤에 있는 세실리의 걱정 어린 말을 끝으로 세계수 네트워크를 종료했다.
원래라면 아무리 하이 엘프더라도 이렇게 먼 거리에선 숲의 정기를 이용할 필요가 있었으나, 초월에 오르며 능력이 크게 성장한 그에게 이 정도쯤은 이제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럼···.’
가볍게 한숨을 내쉰 그가 다시 치켜든 활의 시위에 화살을 걸었다.
그리고 눈을 가늘게 뜨며 조금 떨어진 곳에서 벌어지는 접전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콰아앙—!
폭음과 함께 전해지는 충격파.
하지만 그건 불과 얼마 전 산맥에서 느꼈던 것에 비하면 그 위력이 확연하게 줄어 있었다.
물론 가장 큰 원인은 교단의 신성 결계가 피해를 줄이기 위해 그 여파를 흡수한 덕분이었지만···.
‘확실히 약해졌다. 혹시 몰라서 제국 황궁과 공화국 의회에도 언질을 줬었는데, 굳이 그렇게까지 할 필요도 없었겠군.’
그뿐만 아니라 만약을 위해 중요하다 싶은 곳에는 전부 경고를 보내뒀었다.
그 외의 장소로 놈이 사라지더라도 곧바로 종적을 쫓기 위해서 밴시 퀸 올리비아를 비롯한 각지의 정보 조직들까지 총동원해 두기도 했고.
‘이곳에서 확실하게 끝낸다.’
그런데 상황을 보니 이제 다른 곳은 신경 쓰지 않아도 될 것 같았다.
미리 대비한다는 마음으로 주신교단 측에 지시를 내렸던 것이, 막상 결과를 보니 그 효과가 생각 이상이었던 것이다.
뭘 따지고 잴 것도 없이 지금 이곳이야말로 놈을 마무리 짓기에 가장 완벽한 타이밍이었다.
카가강!
“크으으! 이 귀찮은 놈들! 어떻게 이곳까지 따라온 거냐!”
당사자인 번천회주도 그런 위기감을 느꼈는지, 상황을 살피듯 소극적으로 대항하던 그가 더는 참지 못하고 노성을 터트렸다.
일대 다수를 피해 온 곳에서 그보다 더한 몰매를 맞게 생겼으니 그 심정이야 오죽하랴.
물론 그와 성검을 맞댄 하인리히는 그런 마음 따위는 눈곱만큼도 신경 쓰지 않았다.
“그것이 이 세상의 뜻이니까! 사라져라, 이단!”
「축복 : 광검」에 휩싸인 성검이 빛의 기둥이 되어 허공을 갈랐다.
그 「공간 베기」에 앞을 가로막은 무형의 장막이 갈기갈기 찢기고, 주변에서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던 붕괴 에너지가 갈 곳을 잃고 산산이 흩어졌다.
‘이거 끝내주네.’
내심 감탄한 하인리히가 검의 손잡이를 강하게 틀어쥐었다.
평범한 팔라딘조차 강제로 한계를 넘어서게 만들 정도의 환경이다.
그것을 용사인 그가 적극적으로 이용하니, 전신에서 광휘를 줄기줄기 뿜어대는 모습이 마치 신의 화신이 지상에 강림한 것처럼 보일 정도였다.
콰악!
그리고 그런 우세에 힘입어.
“카하하하! 그럼 잘 먹겠습니다!”
“크윽! 이 괴물 놈이!”
마침내 할리는 자신이 바라던 바를 성취할 수 있었다.
인간 형상의 괴생명체가 구겨진 날개를 억지로 잡아당기며 그 뿌리 부분을 크게 한입 베어 물자—.
콰지직—!
살이 으스러지는 살벌한 소리와 함께 기어이 날개 한 짝이 뜯겨나갔다.
거기에 번천회주가 어떻게 대응하기도 전, 슬그머니 나타난 하인즈 2세가 비산하는 순백의 혈액을 챙기며 그 상처 부위에 날카로운 피의 가시를 꽂아 넣었다.
“이 미천한 것들이···!”
계속되는 공격의 연쇄에 연이어 수세에 몰려 이를 가는 날개 잃은 천사.
굳이 현질까지 하며 「개체 집결」을 반복해 사용한 보람이 있는 모습이었다.
‘「이계전송진 소환」이나 「영웅의 발자취」 같은 특전에는 적용되지 않아서 그간 신경 쓰지 않고 있었는데, 이거 생각 외로 유용하군.’
그가 사용한 상품인 『스킬 쿨타임 초기화』는 VIP 마켓 상품답게 가격이 조금 세긴 하지만, 지금처럼 중요한 순간에 쓰기에는 썩 괜찮은 옵션이었다.
그래봤자 그런 게 필요할 정도로 쿨타임이 긴 스킬은 「개체 집결」을 제외하면 「개체 투영」 정도밖에 없긴 하지만.
‘이제 슬슬 끝내자.’
하인리히의 손에 들린 성검이 예리한 빛을 발하며 허공을 꿰뚫듯 내질러졌다.
여기서 상대를 쓰러뜨린다고 모든 일이 해결되리라 생각하진 않는다.
아마 놈은 어떤 식으로든 다시 자신의 앞에 나타나게 될 테지.
격이 오르며 날카로워진 직감이 그게 운명이라 속삭였다.
하지만 지금 중요한 점은.
쉴 새 없이 온갖 세계의 가능성을 먹어 치우며 몸집을 부풀리던 놈에게 마침내 제동을 가했다는 것이었으며.
푸욱—!
결국 자신이 이 아우테리카를 지키는 데 성공했다는 사실이었다.
“사라져라, 이단.”
양손으로 틀어쥔 성검을 번천회주의 가슴에 박아 넣은 하인리히가 일그러진 그의 눈매를 똑바로 노려보며 으르렁거리듯 내뱉었다.
《개체가 조건을 달성해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특수스킬「대축복 : 광휘의 날개」를 획득합니다.》
역시, 후원자께서도 썩 만족스러우셨던 모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