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overeign of the Infinite Clones RAW novel - Chapter (311)
하인리히의 등에서 눈부신 빛이 뿜어져 나왔다.
파아앗—
번데기에서 나비가 우화하듯 서서히 날개 한 쌍의 형상을 갖추며 빚어지는 아름다운 빛무리.
이윽고 마침내 완성된 날개가 일렁이는 휘광과 함께 가볍게 펄럭이자.
그에 따라 주변에 가득한 에너지들이 순식간에 빨려 들어오며 그의 체내에 깃든 신성력의 농도가 다시금 급격하게 치솟기 시작했다.
‘이건···.’
자연스럽게 하인리히의 눈이 살짝 커졌다.
하지만 지금은 다른 데에다 정신을 팔고 있을 상황이 아니었다.
추가적인 기능은 나중에 천천히 살펴봐도 될 터.
일단 당장은···.
그가 양손에 잡힌 검 손잡이를 더욱 강하게 움켜쥐었다.
우웅—
찬란하게 빛나는 성검의 날을 따라 농도 짙은 신성력을 내뿜었다.
그것은 마치 독소처럼 거침없이 타깃의 체내를 파고들어 저항하는 모든 것들을 차례차례 파괴해 나갔다.
“쿨럭···!”
평소 따뜻하고 온화한 신성력의 성향을 생각하면 난폭할 정도로 과격한 현상.
그러나 사용자의 의지에 반응하는 기운은 자신이 언제 얌전했냐는 듯, 대상이 가진 상충하는 신성에 예민하게 반발하며 그것을 사납게 물어뜯을 뿐이었다.
애초에 신앙의 차이로 전쟁이 벌어지는 일도 흔한 마당에 딱히 이상한 것은 아니었지만.
그리고 이번 전쟁의 승자는 이미 정해져 있었다.
“크흐흐··· 이거 어이가 없군.”
가슴에 검날이 박힌 번천회주가 입가에 피를 흘리며 헛웃음을 흘렸다.
날개에서 흐르는 새하얀 혈액과는 달리 그의 몸에서 흐르는 핏물은 여전히 붉은색이었다.
“대체 언제부터 준비한 거지? 설마 내가 이런 꼴이 될 줄은 몰랐는데.”
이제 포기한 것일까?
방금 전까지만 해도 한껏 분노를 표출하며 얼굴을 일그러뜨리던 그의 표정이 무덤덤하게 가라앉았다.
갑자기 해탈이라도 한 듯 감정이 사라진 눈동자가 하인리히를 똑바로 직시해 왔다.
‘또 무슨 수작을 부리려고.’
하인리히는 그 물음에 답하지 않았다.
그저 손에 쥔 검의 손잡이를 강하게 비틀며 더욱 세차게 신성력을 퍼부을 뿐.
검 끝을 통해 상대의 생명력이 가파르게 깎여나가며 바닥을 치는 것이 전해져왔다.
‘그래도 확실하게 하는 게 좋겠지.’
이어서 다른 아바타들의 공격과 주신교단 측의 신성 주문이 연달아 터져 나왔다.
“크하핫! 역시 한 짝으로는 좀 부족한 것 같은데? 이왕 주는 거 나머지도 좀 달라고, 친구!”
“으음, 속이 좀 거북하군. 그래도 썩 나쁘지 않아.”
입가에 새하얀 핏물과 깃털 몇 개를 묻힌 할리와 유령처럼 모습을 드러낸 하인즈 2세가 빠르게 쇄도했고.
사방에서 날아드는 신성한 빛 사이로 해리스가 저 멀리에서 쏘아낸 장거리 저격이 섞여 들었다.
이번에야말로 확실하게 끝을 내겠다는 듯 매섭게 쏟아지는 공격들.
그 일대를 휩쓰는 노도와 같은 흐름 속에서.
“···어쩔 수 없군.”
가까이 붙은 하인리히에게만 들릴 정도의 작은 목소리가 번천회주에게서 흘러나왔다.
“······!”
그리고 그 말이 끝나기 무섭게.
키이이잉—
그 모든 공격들이.
아니, 일대의 공간 전체가.
시간이 멈춘 듯 그대로 정지했다.
‘시간 정지?’
그림처럼 허공을 수놓은 에너지 덩어리와 사나운 기세를 품은 채 멈춰 선 아바타와 군중들.
마치 역동적인 한순간을 사진에 고스란히 담아낸 것처럼, 박제된 시간 속에서 호흡은 물론 에너지 입자 하나하나까지 모두 그 자리에 고정되었다.
‘아니, 아니야. 이건···.’
강제로 시간이 멈춘 듯한 그 장엄한 광경에 하인리히는 순간적으로 당황했지만, 이내 급격하게 가속하기 시작한 사고 덕분에 빠르게 상황을 파악할 수 있었다.
그래, 이건 세계 자체의 시간을 멈춘 이적이 아니었다.
[대단하군. 설마 여기까지 따라올 줄이야.]그저 사고를 무한히 가속해 끝도 없이 길게 늘어진 찰나의 순간에 잠시 머무르는 것뿐.
물론 이렇게까지 완벽한 정지 상태를 유지하는 건 단순히 정신력이 강하다고 해서 가능한 게 아니었다.
[흠, 이 검과 연결된 신성력 때문인가. 아무리 그래도 이런 경우는 처음인데···. 뭐, 이 정도야 상관없겠지.]지금 여기엔 다른 아바타들도 있었으나 이 찰나를 제대로 인지할 수 있는 것은 오로지 하인리히 하나뿐이었다.
번천회주의 말마따나 놈의 몸에 성검을 꽂아 넣어 직접 접촉한 덕분인지는 모르겠지만.
[이거 손해가 이만저만이 아니야. 이렇게 뭘 하기도 전에 실패한 게 대체 얼마 만인지.]서로의 눈을 똑바로 마주 보는 상태에서 상대의 의지가 전해져왔다.
다행히 이 상태에선 본인도 움직일 수 없는지, 그의 가슴에는 여전히 성검이 박혀 있는 채였다.
그를 통해 느껴지는 생명력도 여전히 바닥을 치기는 마찬가지였고.
[아무리 제약 때문에 전력을 다할 수 없었다고 한들, 상황이 이렇게까지 흘러왔는데 인정하지 않을 수는 없지. 아무래도 이 세계는 꽝이었던 모양이군.]패배에 대한 변명이라도 하고 싶었던 걸까?
넋두리라도 하듯 일방적으로 떠드는 놈에게 핀잔이라도 주고 싶었으나, 아직 익숙하지 않아서인지 이쪽의 의사는 전달되지 않는 듯했다.
[···시간이 다 되었나. 그럼 여기까지 하도록 하지.]아무래도 놈도 괜히 시간을 허비한 건 아닌 모양이었다.
그러한 마지막 의지가 전해진 직후, 마침내 정지된 세상에서 이상 현상이 발생했다.
‘이건···?’
모든 것이 멈춘 시간 속에서 일어난 한 가지 변화.
그 주체는 가슴에 성검이 박힌 채 전신이 만신창이가 되었던 번천회주였다.
스스스—
검 끝에서 느껴지는 생명력이 다시 서서히 차오르기 시작하고, 곳곳에 난 상처가 봉합되며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거꾸로 되감기듯 움직여 몸을 꿰뚫은 성검에서 벗어난 그의 등에는 어느새 멀쩡한 날개 한 쌍이 제대로 붙어 있었다.
‘시간에 개입한다고···? 단순히 공간을 다루는 고유스킬이 아니었나?’
시간을 거스르는 롤백(Roll Back).
그러나 하인리히는 그 역행이 완전하지 않다는 것을 금방 눈치챌 수 있었다.
‘할리가 뜯어간 날개와 하인즈가 취한 피까지는 건드리지 못하는 것 같군. 이미 통제에서 벗어난 신체 부위까진 영향을 끼치지 못하는 건가.’
그렇다면 그나마 다행이었다.
어쨌든 날개를 잃으면서 힘의 절대량이 깎여나간 건 사실일 테니.
그 안에 담긴 에너지도 보통이 아니었던 걸 생각하면 놈이 입은 손실도 결코 적진 않을 것이다.
[기억하겠다, 아우테리카의 챔피언. 다음번에는 이렇게 쉽게 당하진 않을 거다.]그때, 마침내 성지에 처음 왔을 때의 모습으로 되돌아간 번천회주에게서 마지막 전언이 전해졌다.
이미 되감기듯 움직인 그는 시야에서 한참 벗어나 있었지만, 고개를 돌릴 수도 없는 하인리히는 그저 기척만으로 그의 상황을 짐작할 뿐이었다.
‘···이거 답답하네.’
그리고 번천회주의 기척이 완전히 사라진 후.
드디어 몸을 움직일 수 있게 되었을 때는 이미 성지에서 놈의 모습은 찾아볼 수 없었다.
남은 건 할리가 먹다 만 날개 한 짝과 하인즈가 챙겨둔 약간의 피뿐.
“이단이 사라졌다! 모두 경계···.”
“3진과 4진이 탐지 결계를 가동한다! 나머지는 방어 태세로···!”
갑자기 모습을 감춘 타깃에 주위를 경계하는 교단 사람들을 뒤로한 하인리히가 한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래, 확실히 여기엔 없었다.
여기엔.
***
육체의 시간이 되감기며 어지럽게 스쳐 지나가는 주변 풍경.
번천회주는 그 흐름에 몸을 맡기며 지그시 눈을 감았다.
‘어지간하면 시간의 힘은 쓰고 싶지 않았거늘.’
오래전 한계를 넘어서는 사용으로 심각한 과부하를 받은 이후, 아직까지 완전히 회복하지 못해 준신의 격에 오른 지금도 주의해서 사용해야 하는 힘이었다.
그 때문에 과거보다 효과는 더욱 약해지고 부담은 오히려 가중되었는데···.
‘어쩔 수 없지.’
하지만 이번에는 이 방법 외엔 별다른 수가 없었다.
괜히 그 자리에서 한 번 죽기라도 했다간 신성에 막대한 손상을 입는 건 물론, 심연의 신격과 맺은 계약 불이행으로 추가적인 손실까지 생길 판이었으니까.
‘곤란하군. 과연 이 세상에 계속 투자하는 게 좋을지.’
주신의 챔피언에게 두고 보자는 식으로 말하긴 했으나, 아무리 따져 봐도 여기서 더 시간을 낭비하는 건 비효율적이었다.
차원의 환경에 제대로 적응하기도 전에 충돌해 첫 단추를 잘못 끼워버린 것도 그렇고, 이럴 바에야 차라리 계약을 파기한 뒤 이번 차원을 포기하고 다른 곳으로 넘어가는 게 더 나을지도.
일방적으로 계약을 무르면 그만큼 대가를 치러야 하긴 하지만, 이 세계에 존재하는 예언자 등 여러 난이도를 따졌을 때 진지하게 고려할 가치는 있었다.
‘되도록 포기하고 싶지 않은데···. 일단 상황을 좀 더 지켜보고 판단해야겠군.’
과정이 어찌 되었든 결국 성공만 한다면 어느 정도의 손실은 감수할 수 있었다.
그리 마음먹은 그가 그렇게 앞으로의 일을 고민하던 순간.
마침내 역행이 끝나고.
번천회주는 자신이 지상에 처음 도착했던 장소에 도착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천천히 눈을 뜬 그는—.
[크크큭— 여기서 다시 보게 되다니. 이거 반갑구나.]그 직후.
한 쌍의 귀화(鬼火)가 이글거리는 해골과 정면으로 눈이 마주쳤다.
하도 들어서 이젠 친숙하게까지 느껴지는 음산한 목소리와 함께.
“···하, 젠장할···.”
그에 저도 모르게 상스러운 욕설이 튀어나오던 찰나.
푸우욱—!
시간 제어의 반동으로 약해진 몸을 파고든 차가운 손길이 그의 심장을 움켜쥐었다.
이미 사지는 사방에서 돋아난 시커먼 가시와 사슬들로 옭아매졌기에 뭔가 반응을 보이기는커녕 옴짝달싹할 수조차 없었다.
‘설마 여기까지 읽혔다고?’
일순간 온갖 생각이 떠오르며 그의 뇌리를 어지럽혔다.
하지만 지금 중요한 건 그런 게 아니었다.
한껏 저항력이 약해진 상태에서 심장을 파고든 죽음의 힘이 순식간에 전신으로 퍼져나갔다.
상극의 힘이 직접적으로 때려 박히며 그간 쌓아온 신성이 조금씩 오염되기 시작했다.
‘위험하다.’
머릿속에 급박한 경종이 울려 퍼졌다.
아까와는 사정이 다르다.
이렇게 되면 그저 신성의 일부가 깎여나가는 정도로 끝나지 않는다.
이러다간 그간 신위를 위해 쌓아온 근간마저 비틀려버릴지도···.
‘상황을 지켜볼 시간도 없군.’
결국, 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해 할 일은 정해져 있었다.
지금은 손해를 감수하더라도 내줄 건 내주고 몸을 빼는 것뿐.
“···계약 파기다.”
터트릴 것처럼 심장을 쥐어짜는 손길에 인상을 찌푸린 그가 씹어뱉듯이 읊조렸다.
그 직후.
쿠오오오—
한창 소란이 일었던 동북부 지역의 산맥에서 다시 거대한 섬광이 터져 나왔다.
***
한차례 폭풍이 지나간 뒤.
[크흐— 과격한 놈이로군. 그나저나 이건···.]마력을 내뿜은 한스가 주변에 흩날리는 흙먼지를 날려버렸다.
그리고 거대한 폭발에 손상이 간 육체를 수복하며 손에 쥐어진 새카만 기류를 바라보다 고개를 기울였다.
자신은 틀림없이 심장을 쥐고 있었을 텐데, 손안에 있는 건 불길하게 꿈틀거리며 저항하는 무언가였다.
어쩐지 모르게 굉장히 친숙하게까지 느껴지는.
‘이것 말고 남은 것은··· 없나? 그거참 철저한 놈이군.’
사실 이번에 번천회주와 마주한 건 순전히 우연이었다.
몸도 추스를 겸 하인리히를 비롯한 다른 아바타들과 교대한 직후, 번천회주가 처음 등장했던 심연의 균열을 조사하기 위해 왔다가 갑자기 코앞에서 놈이 튀어나올 줄 누가 알았겠는가?
‘균열에 남은 흔적이 완전히 사라지기 전에 놈이 어떻게 넘어온 건지 알아보려고 했는데.’
물론 성지에서 사라진 놈이 갑자기 나타나서 조금 놀라긴 했으나, 그는 굴러들어 온 기회를 놓칠 정도로 어수룩하지 않았다.
그 이후 이어진 놈의 주저 없는 자폭에는 제법 당황하긴 했지만.
‘어쩌다 보니 막타는 한스가 치게 된 셈인가.’
그는 하인리히가 성지 쪽 상황을 수습하는 것을 살피다 다시 손안에 들어온 기류에 관심을 돌렸다.
사실 아까부터 계속해서 균열로 넘어가려 몸부림치는 것을 억지로 잡고 있었던지라 더 무시하기도 힘들었다.
불사왕인 그조차 조금이라도 방심했다간 금방이라도 놓쳐버릴 것 같았으니.
‘역시 이건···.’
그쯤 되니 이게 무엇인지는 자연스럽게 알 수 있었다.
‘심연에 유폐된 신과 연관된 건가.’
본능적으로 느껴졌다.
이것과 한스의 근간인 「불사의 심장」은 같은 기원을 가지고 있다고.
아마 모종의 이유로 번천회주가 넘겨받은 것이겠지.
거기다 묘하게 놈의 기운도 상당히 섞여 있는 것이, 그의 자폭과 함께 그 힘 일부도 강탈한 것으로 보였다.
이 정도 양이면··· 그가 그간 쌓아온 신성에도 상당한 타격을 입지 않았을까?
‘이거 참, 난데없이 선물을 받은 기분이네.’
역시 착하게 사니 복이 오는 것 같았다.
이번 일에 대해선 무보수를 각오하고 있었는데 이렇게 자신까지 챙겨줄 줄이야!
‘그럼 곧바로···.’
이 위험한 물건을 계속 잡고만 있다간 무슨 일이 생길지 몰랐으니, 더 이상 시간 끌지 말고 서둘러 수습하는 게 좋을 터.
그 방법은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한스는 폭발에 구멍이 숭숭 뚫린 로브 틈새로 손을 가져가 심장부의 종속 아공간 속에 그것을 집어넣었다.
어차피 자신의 심장과 이것은 같은 기원을 가지고 있었으니···.
두근—
그간 잠잠하던 심장이 거칠게 뛰었다.
그러면서 자의식이라도 가진 것처럼 기류가 거칠게 저항했지만, 이미 한데 엉겨 붙은 심연의 기운은 더 이상 분리할 수 없었다.
남은 것은 주도권을 가지기 위한 싸움뿐.
그리고 그 경쟁은 생각 외로 간단하게 끝나버렸다.
아무렴, 제법 튼실한 기운이었다지만 순수한 죽음의 응집체와 비교할 정도는 아니었으니까.
[크크큭, 심연이 끓어 넘치는구나.]아직은 그 변화를 확실히 체감할 순 없었으나, 직감적으로 느껴지는 건 있었다.
이번 일을 계기로 벌어져 있던 번천회주와의 차이가 한 단계 더 가까워졌으리라고.
‘아니, 놈은 오히려 내려왔을 테니 두 단계이려나.’
그리고 그 직후.
『XX된 XXX의 신성 파편 (20,900,000)』
카르마 상점의 한 항목에서 다시 한번 변화가 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