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overeign of the Infinite Clones RAW novel - Chapter (326)
목인광이 기억하는 최초의 풍경은 추운 겨울이었다.
엄동설한의 날씨 속에서도 뒷골목의 얼음장같이 차가운 바닥에서 살아가며, 다른 고아들과 함께 배고픔과 갈증 등의 결핍을 감내해야 했던 나날.
어찌하여 그런 생활을 하게 됐는지는 모른다.
그때의 그에게 그건 당연한 일일 뿐이었고, 그 자신뿐만이 아니라 주변의 다른 누구도 그 이유 따위엔 관심을 가지지 않았으니까.
하긴, 안다고 해서 달라질 것이 없기도 했다.
그는 그런 환경 속에서 유년기를 보냈다.
한 가지 다행인 점이라면 당시의 그에게도 그런 상황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능력이 있었다는 거였다.
선천적으로 튼튼한 몸을 가졌던 그는 가혹한 환경을 버티지 못한 아이들이 하나둘 스러져 갈 때도 잔병치레 한 번 하지 않았고, 자신보다 덩치가 큰 이들과 마찰이 생기더라도 맞서 싸울 수 있을 정도로 싸움에 재능이 있었다.
그러나 그런 그에게도 치명적인 단점이 하나 있었으니.
바로 나이를 먹어갈수록 점점 심해지는 그 지랄 맞은 성격이었다.
평소엔 괜찮은 듯싶다가도 어느 순간 휙 돌아버리는 성격 탓에 쉽게 넘어갈 수 있었던 일이 눈덩이처럼 커지는 것도 부지기수.
당연히 그의 주변에선 싸움이 끊이질 않았고, 몇 안 되는 인망까지 모두 잃다 못해 평판이 바닥까지 처박힌 그는 결국 스스로 고립을 자처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된 상황 속에서도 불현듯 내면에서 치미는 분기를 참지 못하고 시시때때로 분란을 일으키는 폭탄과도 같은 삶을 살던 어느 날.
그에게 인생의 전환점이 찾아왔다.
약 이십여 년 전.
이제는 무엇 때문인지 알지만 당시엔 어쩐지 도시 전체가 술렁거린다고만 느끼고 있을 때, 소년 목인광은 그와 만나게 되었다.
“허어, 어찌하여 여기에 이런 아이가···. 이 세상이 어찌 돌아가려고.”
낡은 도복을 입은 채 얼굴엔 근심이 가득한, 기다란 수염을 늘어뜨린 선풍도골의 노인.
그는 그저 죽지 못해서 살아가던 생기 하나 없는 눈의 소년을 똑바로 응시하고 천천히 입을 열었다.
“야.”
“······?”
“정신 좀 차려봐.”
그 난데없는 막말에 목인광이 고개를 갸웃했다.
가만, 이때 원래 이랬던가···?
목소리도 좀 이상한데?
하지만 그가 그런 의문을 품건 말건 기다려 줄 생각이 없다는 듯, 그의 앞에 선 노인이 인자한 표정으로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허어— 어린 아이가 품지 말아야 할 것을 품고 있구나. 역시 이 또한 인연인 거겠지. 그래, 아이야. 네 이름이 무엇이냐?”
“······.”
“이런, 내 마음이 급해 먼저 소개하는 걸 잊었구나. 나는···.”
여전히 묵묵부답인 그를 향해 천천히 입을 연 노인이 자신을 소개했다.
“이제 내가 광마다.”
“······?!”
정신이 급격하게 부상한다.
“큭!”
죽은 듯 감겨있던 목인광의 눈이 번쩍 떠졌다.
직후 느껴지는 것은 전신에서 전해지는 어마어마한 고통.
마치 고문이라도 받은 것처럼 이곳저곳 쑤시지 않은 곳이 없었다.
“오! 정신이 들었군? 혹시나 했는데 정말 이 말에 반응할 줄이야! 크하하핫!”
그에 저도 모르게 전신을 움찔거리고 있자니, 그런 그를 향해 꿈속에서 어렴풋이 들었던 목소리가 시끄럽게 떠들었다.
이 세상의 일반적인 감성과 한참 동떨어질 정도로 이질적인, 그러나 이제는 제법 눈에 익은 독특한 차림새의 사내가 근육질의 두 팔을 꼬아 팔짱을 끼며 당당하게 선언했다.
“그래도 이젠 늦었다! 어쨌든 내가 이겼으니까!”
광마라는 타이틀을 건 결투에서 당당히 승리를 거머쥔 할리가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 단호한 태도에선 상대가 어떻게 나오더라도 절대 양보할 생각이 없다는 굳은 신념마저 풍기고 있었다.
“하···.”
목인광이 바람 빠지는 듯한 한숨을 내쉬었다.
다만 그 반응은 단순히 상대의 말이 어이없어서 나온 것이 아니었다.
아니, 오히려 지금의 그는 당장 할리가 뭐라 떠드는지 이해하고 있을 겨를이 없었다.
‘혹시나 했는데.’
전신에서 느껴지는 격통 너머에서 전해지는 광기의 존재감.
한창 싸움이 격화되던 당시 미친 듯이 발광하던 그 기운이 지금은 얌전히 자신의 통제에 따르고 있었다.
분명 광기에 완전히 휩싸이는 것까지 감수하며 일을 벌인 후, 실제로 마지막의 마지막 순간까지 버티다 결국 결과를 받아들이고 체념하기까지 했었건만.
어째선지 지금 그의 기운은 그 어느 때보다 더 안정적인 상태였다.
머릿속이 이렇게 상쾌했던 게 대체 언제였는지도 가물가물할 정도로.
“···그래서 내가 너의 새 별호를 생각해 봤는데, 심플하게 광견 어떠냐? 한번 물면 절대 놓지 않는다는 느낌으로! 그게 싫으면···.”
그 와중에도 언제 서로 싸웠냐는 듯 친한 척 말을 거는 할리의 입에선 다양한 별호 후보들이 우수수 쏟아져 나오고 있었다.
광조수라, 탈혼광인, 광룡왕 등등.
정작 당사자를 배려하는 마음은 눈곱만큼도 느껴지지 않는 언행이었으나, 말을 내뱉는 할리는 물론 그것을 듣는 목인광도 별반 신경 쓰지 않았다.
‘설마 내 체내에 깃든 광기까지 통제할 수 있을 줄이야. 대체 정체가 뭐지?’
그의 머릿속이 복잡하게 얽혀들었다.
평생토록 자신을 괴롭히던 광기가 수그러든 것 때문인지는 모르겠으나, 지금은 상대에 대한 적개심마저 대부분 줄어든 상태였다.
어차피 이렇게까지 박살 난 이상 괜히 더 반항해 봤자 별 의미도 없겠지만.
지금 그가 느끼고 있는 감정 중 가장 커다란 것은 호기심과 흥분으로, 자신에게 무슨 수를 썼기에 이렇게 할 수 있었던 건지 알고 싶을 뿐이었다.
대체 어떻게 그게 가능했는지도.
지금까진 도저히 방법이 없다고 생각해 거의 포기하고 있었는데···.
‘어쩌면 저놈을 이용한다면 가능할지도.’
그렇게 멍하니 그를 바라보고 있자니, 그 시선을 어떻게 받아들였는지 할리가 인상을 찌푸리며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쓰읍, 안 돼. 물러줄 생각 없어. 난 이게 마음에 들었으니 네가 다른 거 골라 써라.”
아무래도 상대의 머릿속에는 여전히 그 별호에 대한 것 하나만이 박혀있는 모양이었다.
저렇게 나오면 온갖 생각으로 머릿속이 어지러워진 이쪽이 더 바보 같아지지 않는가?
“···미친놈.”
결국 그는 한숨과 함께 허탈한 목소리로 마음속에서 우러나오는 말을 내뱉었다.
그는 의식하고 있지 못했지만, 서로가 마주하고부터 지금까지 그가 내뱉은 ‘미친놈’이라는 말만 이번으로 3번이었다.
즉.
삼진 미친놈으로 아웃.
진짜 광기 앞에 가짜 광기가 무릎 꿇는 순간이었다.
***
할리는 깨어난 직후부터 순한 양처럼 고분고분해진 전(前) 광마, 목인광과 함께 산을 내려왔다.
힘 조절에 공을 들인 만큼 딱히 부러진 곳은 없겠지만 딱 그 정도일 뿐, 전신이 걸레짝이 되어 너덜너덜해진 건 마찬가지임에도 그는 앓는 소리 없이 꿋꿋하게 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그런 그를 몇 걸음 뒤에서 바라본 할리가 천천히 턱을 쓰다듬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음, 대충 예상하긴 했는데 효과가 생각보다 더 좋군. 언제 다시 원래대로 돌아올지는 몰라도 당분간은 큰 걱정 없겠는데.’
당연하지만 조금 전까지 미쳐 날뛰던 인간이 저렇게 얌전해진 건 정상적인 반응이 아니었다.
그의 몸속에서 날뛰던 광기를 제압하고 억누르는 과정을 조금 과격하게 수행했더니 생긴 일종의 정신적인 부작용이라고 봐야 할 터.
물론 당장 다루기엔 순종적인 데다 약간 무기력한 지금 정도가 딱 좋았으니 나쁠 것은 없었다.
‘이 양반이랑 만난 건 우연이긴 하지만··· 뭐, 좋은 게 좋은 거지.’
그 덕분에 얻은 게 적지 않았다.
할리가 써먹을 수 있는 무공에 대한 것도 그렇고, 이참에 ‘광기’에 대해 더 자세히 파악할 수 있었던 것도 수확이며, 그를 통해 얻은 정보 중에서도 쓸 만한 것들이 제법 많았다.
‘무엇보다 저만한 인재와 연을 맺은 게 가장 크니까.’
물론 방금 전까지만 해도 치고받고 싸우던 사이인데 마냥 신뢰할 수는 없었다.
어쩌다 보니 일시 휴전 비슷한 걸 맺어 이렇게 동행하게 된 것도 여러 가지 조건이 겹쳐서 생긴 일시적인 이벤트일 뿐.
그를 확실히 옭아매기 위해선 추가적인 조치가 더 필요할 터였으나···.
‘뭐, 저쪽의 반응을 보아하니 광기를 제어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할 것 같긴 해.’
그에 필요한 단서도 이미 얻은 참이었으니 거리낄 게 없었다.
무슨 사정인지는 몰라도 그에겐 굉장히 민감한 문제인 것 같았으니까.
물론 그가 언제 다시 이빨을 드러낼지 모른다는 소소한 문제는 있었지만···.
“뭐지? 그 눈은? 왜 그렇게 보는 거냐?”
“엉? 아, 별거 아냐. 카하하핫!”
“···일단 주먹부터 내려놓고 말해라. 정말로 날 죽일 생각이 아니라면.”
저쪽도 이쪽에 뭔가 바라는 게 있는지 이런 갑작스러운 형태로 동행하게 되었음에도 딱히 반발하는 눈치는 아니었다.
물론 무력적으로 굴복하게 된 것도 한몫하겠지만.
“자, 그럼 가보자고, 친구!”
“···어디로 말이냐.”
그렇게 각자의 꿍꿍이를 품고 동행하게 된 이들이 다음 행선지로 발걸음을 옮겼다.
“거, 이 친구 참 답답하구만. 지금 가장 핫한 곳이 어디야?”
“핫···?”
“아— 그러니까, 요즘 세간의 화제가 되는 곳이 어디냐고.”
“그거야 숭산이지. 정파의 대표적인 세력이 한곳에 모이는 자리인데. 물론 그들이 모두 정예는 아니겠지만 상징적인 의미라는 게···. 잠깐, 네놈 설마?”
“으하하하! 자, 가자고!”
“이 미친놈이! 도대체 무슨 생각이냐?”
무슨 생각이긴.
이왕 지척까지 왔는데 얼굴도장 정도는 찍어 줘야지 않겠나!
새로운 ‘광마’에 대한 쇼케이스 자리로 그곳보다 좋은 곳은 또 없었다.
‘이런 빅 이벤트를 놓칠 순 없지!’
그렇게 거침없이 나아가던 할리가 똥 씹은 표정으로 억지로 뒤따르던 목인광을 슬쩍 돌아보며 대수롭지 않게 한마디 던졌다.
“그래서, 새 별호는 뭐로 할 거냐? 난 개인적으로 광견이 가장 좋은 것 같은데! 그것도 아니면···.”
“······.”
아, 이 악물었다.
역시 아직 완전히 마음을 정리한 건 아닌 모양이었다.
***
소림사에 찾아온 손님들을 맞이하는 지객당.
그곳을 나선 휴고는 오늘도 자신을 안내하는 스님의 뒤를 따라 길을 나섰다.
본격적인 회합이 시작되기 전, 최근 그의 일과나 다름없는 업무를 위해서였다.
“그럼 오늘도 잘 부탁드립니다.”
“걱정 마시지요. 지금까지 차도도 상당히 좋으니까요.”
이내 약초 냄새가 가득 풍기는 어느 방 안에 들어선 그가 한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 한가운데에 죽은 듯이 누워있는 깡마른 청년.
제갈세가에서와 마찬가지로 그가 이번에 치료를 부탁받은 대상이었다.
‘절에서 다른 차원에서 끌어온 신의 힘을 쓰는 건 어떨까 싶지만 말이야.’
물론 혹시 모를 사태에 대비해 신성력의 기운이 밖으로 새어 나가지 않도록 추가 조치를 취하긴 했는데···.
그래도 소림사가 타 종교에 배타적이지 않아서 다행이었다.
애초에 이들이 추구하는 것도 신적인 존재에 대한 무조건적인 믿음과 숭배보단 그들을 본받아 해탈에 이르고자 하는 것이기도 했고.
우우웅—
어느새 손에 쥐어진 성표를 환자의 이마에 가져다 댄 휴고가 눈을 가늘게 뜨고 그 변화를 살폈다.
서당 개 삼 년이면 풍월을 읊는다고, 이미 여러 번 해본 일이었기에 치료에 대한 반응을 살피는 것 정도는 그도 충분히 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진단 결과는.
‘신기하네. 역시 제갈혜미랑 완전히 반응이 똑같아.’
아무리 봐도 이건 무언가의 질병이 아니라는 것이었다.
그렇다고 특정 체질 문제도 아닌 것 같은데···.
“···아, 오셨습니까.”
그때, 조용히 누워있던 청년의 눈꺼풀이 서서히 열리며 그의 입에서 메마른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아, 가만히 누워계십시오. 거의 끝나가던 참입니다.”
“오늘도 신세를 지는군요. 신의님 덕분에 많이 좋아졌습니다. 이젠 간단한 산책 정도는 할 수 있게 되었으니까요.”
과연 빈말이 아닌지 그의 목소리는 전보다 한결 좋아져 있었다.
그에 천천히 고개를 끄덕인 제갈세가의 식객, 무명신의(無名神醫) 하승훈이 이곳으로 출발하기 전 태상가주 제갈군악과 따로 했던 이야기를 떠올렸다.
그의 소림사 행 합류가 결정된 직후, 제갈세가 측에선 그에게 한 가지 양해를 구해왔다.
바로 소림사 쪽에도 제갈혜미와 같은 증세를 가진 이가 한 명 있는데, 그를 한 번 봐 줄 수 있겠냐는 것.
그러면서 이미 치료를 위한 관련 연구를 함께 진행한 적도 있었기에, 그녀의 회복에 대한 걸 무작정 숨기기가 쉽지 않다고 했다.
지금이야 괜찮을지 몰라도 언젠가 그 쾌유 사실이 밖에 알려지게 된다면 소림사에서 상당한 배신감을 느끼지 않겠는가?
그녀가 마냥 세가 내에서 숨어 살 수도 없는 노릇이었고.
‘소림사는 상징적으로나 실질적으로나 정파 세력 중 제일이지. 이참에 연을 만들어 두는 것도 좋을지도.’
그리고 그것은 휴고에게도 딱히 거절할 이유가 없는 부탁이었다.
애초에 그의 목적인 강환계에서의 영향력 확대와도 부합했으니.
그리고 또 한 가지 그 결정에 영향을 준 사실이 있었는데···.
“예상했던 것보다 차도가 빠르군요. 아무래도 소림사에서도 그간 신경을 많이 썼던 모양입니다.”
“하하하··· 언제나 감사할 따름이죠. 언젠가 은혜를 갚을 수 있으면 좋겠는데. 아, 물론 신의님께도 말입니다.”
“말씀만으로도 감사합니다, 황자님. 그럼 마무리 작업을 하겠습니다.”
바로 그 소림사에 의탁한 환자의 정체가 황손.
그중에서도 마지막 황제의 적통이라는 사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