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overeign of the Infinite Clones RAW novel - Chapter (330)
바람을 휘감고 허공에 떠오른 채 아래를 내려다보는 검은 장포의 사내.
겉보기론 삼십 대 정도로 보일 뿐이었으나, 당대 천마는 이미 그 삼십 년 전에도 활발하게 활동하던 인물이었다.
‘그런 괴물이 이렇게 직접 나서다니.’
모두의 몸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소림사의 방장인 신승(神僧) 무진 대사는 현경의 고수이자 정파 무림 최고수로 손꼽히는 강자였다.
그런데 그런 그가 천마에게 당해버렸다는 것은···.
“···허허허. 아무래도 나이를 먹다 보니 몸이 예전만 못한 것 같구려. 다 빈승이 모자란 탓이지.”
푸스슥—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무너진 불당의 잔해를 해치고 먼지를 잔뜩 뒤집어쓴 노승 하나가 천천히 걸어 나왔다.
물론 별다른 타격이 없어 보이는 상대에 비해 그 행색이 그리 좋지는 않았지만.
그는 한 손으로 헤진 승복을 여미며 팔꿈치 아래로 잘려 나간 오른팔을 일별하곤 왼손만으로 합장하면서 태연하게 대꾸했다.
“그보다 천마 시주께서는 전보다 더 강해지신 것 같구려. 뭐 몸에 좋은 거라도 드셨나 보오.”
“흐— 그래, 아주 좋은 걸 먹었지. 덕분에 날아갈 것만 같구나. 원한다면 네게도 나눠줄 수 있다만?”
“아미타불, 시주의 마음은 고마우나 사양하도록 하겠소. 이래 봬도 불법을 따르는 몸인지라, 정도를 벗어난 방법을 행할 순 없으니 말이오.”
“그거 아쉽군. 너라면 충분히 자격이 있는데 말이야. 생각이 바뀌면 언제든 말하도록.”
서로 간의 말투는 무척 친근했으나 이 자리에 있는 이들 중에 그걸 곧이곧대로 받아들이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마치 가시라도 박힌 듯한 말 한마디 한마디가 오갈 때마다 칼날 위를 거니는 것 같은 긴장감이 스멀스멀 치솟아 올랐으니까.
천마는 오히려 그런 경직된 분위기를 즐기듯 느긋하게 주변을 깔아보며 입꼬리를 치켜올렸다.
그동안 어쩔 수 없이 숨죽이고 있어야 했던 교의 본격적인 첫선이었다.
그런 행사가 이렇게 성황리에 진행되고 있으니 당연히 만족스러울 수밖에.
‘이 흐름은 절대 거스를 수 없다. 이제 이 세상에 본 교의 앞을 막아설 수 있는 존재는 남아있지 않··· 음?’
하지만 긴장과 공포가 담긴 정파 졸개들의 시선을 음미하듯 훑어보던 그의 미소는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시종일관 여유가 깃들어 있던 그의 거만한 표정이 일순 딱딱하게 굳었다.
“···뭐냐, 넌.”
그의 입에서 흘러나온 차가운 목소리가 모든 것을 얼려버릴 듯 나직이 울려 퍼졌다.
그에 잔뜩 긴장한 이들이 저마다 무기를 치켜세웠지만, 천마의 눈은 미동도 하지 않고 한 곳에 틀어박혀 있을 뿐이었다.
‘아, 이럴 줄 알았어. 이번엔 특별히 좀 더 신경을 더 썼는데도 이 모양이네.’
내심 식은땀을 흘리면서도 애써 시선을 피하는 휴고에게로.
당연하지만 상대는 그런 그의 노력 따위엔 눈곱만큼도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
“어째서— 어째서 아직도 이 세상에 남아있는 거지?”
알 수 없는 감정이 담긴 한마디.
문제는 그것이 단순한 감정의 표출로 끝나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큭, 이건···!’
시선이 느껴진다.
단지 그것뿐이었는데 주변 공기가 쇳덩이처럼 무겁게 그를 짓누르며 전신의 감각이 오작동하기 시작했다.
원근감이 무너지고 균형 감각이 뒤틀리며 뇌의 활동이 뚝뚝 단절됐다.
물론 그의 사고 능력은 단순히 휴고라는 단말 개체 하나에만 국한되지 않으니 의식 자체가 끊기는 일은 없었으나, 그 때문에 육체의 통제권을 상실한 건 어쩔 수 없었다.
‘···설마 천마가 이 정도였다니. 이 정도 수준이면···.’
과연 같은 현경인 무진 대사가 속수무책으로 밀린 이유가 있었다.
이러면 아직 화경에도 이르지 못한 휴고로선 감히 어떤 대항도 할 수 없었다.
그저 상대의 자비를 바라는 것이 그가 할 수 있는 전부.
결국 지금이라도 소환 해제를 해야 하나 고민하던 찰나.
“허읍—!”
갑자기 맑은 공기가 폐로 쏟아져 들어오는 것과 동시에 그는 무너졌던 자신의 감각이 다시 원래대로 돌아오기 시작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동안 자신이 숨을 쉬지 않고 있었다는 사실도 함께.
‘···끔찍하군. 특별히 내공을 사용한 것도 아닌데 의지만으로 사람을 이 지경으로 만들 수 있다니. 그것도 절정이면 그리 낮은 경지도 아닌데.’
그리고 애써 숨을 고르며 고개를 든 그는 눈앞에서 펄럭이는 승려의 가사 자락을 보고 어떻게 자신이 정신을 차릴 수 있었는지 알 수 있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살짝 떨어진 곳에 있던 소림사의 방장이 어느새 그의 앞을 막아서고 있었던 것이다.
“허허허, 천마 시주. 아직 어린 후배에게 장난이 심하시오.”
“비켜라.”
“아미타불, 정말 끝까지 해보실 생각이시오? 이대로 계속 부딪치는 건 서로에게도 좋지 않을 터인데.”
“말로 해선 안 되겠군.”
차갑게 굳어있던 천마의 표정이 미묘하게 일그러졌다.
휴고의 존재가 그에겐 생각보다 더 큰 의미를 가지고 있었는지, 첫 등장 때와는 달리 조금 과하다 느껴질 정도로 예민한 반응이었다.
“복마대주.”
“천마재림 만마앙복! 복마대 흑승마군 장철익, 여기 대령했나이다!”
쩔그렁!
그의 호명에 온몸에 검은 쇠사슬을 감싼 거대한 체구의 흑인 사내가 앞으로 나서며 요란하게 바닥에 부복했다.
어느새 이곳에 도착해 주변을 감싸고 있던 마교도들 중 한 명이었다.
“이곳에서 한 놈도 빠져나가지 못하도록 해라. 특히 저기 저놈은 절대 놓쳐선 안 된다. 묻고 싶은 게 있으니 귀와 입만 남겨두도록.”
“존명! 지엄하신 명을 따르겠나이다!”
그렇게 휘하의 부대, 그것도 화경의 고수에게 직접 명을 내린 천마가 여전히 신승의 뒤에 숨어있는 휴고를 보며 입꼬리를 비틀어 올렸다.
당하는 입장에서는 도무지 영문을 알 수 없을 정도로 무겁고 짙은 조소였다.
‘아, 이거 큰일이네.’
그에 마교도들은 물론 주변에 있던 정파 무인들의 시선까지 한 몸에 받게 된 휴고가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아무리 그가 관심을 좋아한다 해도 이런 일방적인 집착은 사양인데···.
‘어쩔 수 없지.’
곧 몰려들 적들에 대비해 손아귀의 검을 다시 한번 강하게 틀어쥔 그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아무래도 좀 더 서둘러야 할 모양이었다.
***
소림사 산문 인근.
채애앵!
검성 남궁우가 인상을 찡그리며 자신과 검을 맞댄 애꾸눈의 노인을 노려보았다.
강대한 힘이 담긴 그의 검에 맞서 조금도 밀리지 않는 귀신의 형상이 새겨진 흑검.
그 주인은 그와 동시대에 활동했던 인물이자 현경의 경지에 오른 절대 고수 중 한 명, 천마신교 호법의 일인인 귀검마제 여문철이었다.
“흐흐흐. 늙었구나, 남궁우. 겨우 이 정도인가?”
“허어— 내게 한쪽 눈을 잃고 부리나케 도망가던 때가 엊그제 같은데 말은 잘하는구나, 여문철. 부정하게 쌓아 올린 힘으로 기고만장하는 꼴이라니.”
“크흣, 웃기는군. 어릴 때부터 밥 대신 영약을 더 많이 먹었을 네가 그런 말을 하는 건가?”
“이놈, 무고한 이의 정기와 영약을 같은 취급하지 마라!”
“뭐가 다르지? 그 또한 외부의 도움으로 얻은 힘이 아닌가?”
채앵—
동시대에 활동한 데다 주 무기도 같고 가진 재능과 경지도 비슷했던 그들은 이미 과거 몇 차례나 충돌한 전적이 있었다.
그 싸움의 종합은 끝내 한쪽 눈을 앗아간 남궁우의 판정승이었는데···.
거의 이십여 년 만에 충돌한 지금은 그때완 양상이 달랐다.
‘그동안 정말 단단히 작정하고 나왔구나.’
손에서 전해지는 묵직한 반발력에 검성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지금은 신승 혼자서 천마를 잡아놓고 있었지만, 그게 그리 오래가지 못할 거란 건 이미 충분히 짐작하고 있었다.
그 또한 그 괴물의 무지막지한 기세를 직접 느껴보았으니까.
그렇다고 귀검마제를 가만히 내버려 둘 수도 없으니, 신승이 천마를 잡고 최대한 버티는 동안 재빨리 놈을 해치우고 그쪽에 합류할 계획이었거늘···.
“딴 생각이라니. 아직 여유가 있나 보군.”
“큭!”
상대가 가진 무력이 예상했던 것 이상이었다.
지금 상태로 단시간에 결판을 내는 건 도저히 무리일 정도로.
괜히 무리하다간 이쪽이 먼저 당해버릴 터였다.
검성이 이를 악물었다.
다른 이들도 물론 걱정되는 건 마찬가지였지만, 무엇보다 아직도 저쪽에 남아있는 손자와 손녀가 신경 쓰여 참을 수 없었다.
자신만 믿고 이 먼 곳까지 온 아이들인데 이게 무슨 추태란 말인가?
“흐흐흣— 집중이 흐트러졌구나, 남궁우. 일단 한쪽 눈부터 가져가 볼까?”
그런 분위기 속에서 공세가 오가며 검성의 검세가 조금씩 어그러지기 시작했다.
진지하게 임해도 승부를 장담할 수 없는 판에 마음이 콩밭에 간 상태로 제대로 싸울 수 있을 리 없지 않나.
그에 서서히 손발이 흐트러진 그의 패색이 짙어지고 있을 때.
“어이쿠, 이거 잠깐 실례—!”
그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던 불청객이.
그 싸움판에 갑작스레 난입해 들어왔다.
“······!”
“뭣?!”
아무리 서로에게 집중하고 있다고 하나 그들은 명색이 현경의 고수였다.
정체불명의 인물이 눈 깜짝할 사이에 영역 내로 침투한 순간 즉각 반응한 그들이 각자의 성향대로 움직였다.
검성은 한 발짝 물러나며 방어를 굳히며 상황을 파악했고, 귀검마제는 상대를 향해 곧바로 날카로운 강기를 휘둘렀다.
상대가 누구든 곧바로 숨통을 끊어버릴 수 있도록.
“···어헛! 이렇게 위험한 걸 다짜고짜 사람에게 휘두르다니!”
그리고 그 악독한 손속은 그저 평화롭게 길을 트고 지나가려던 누군가의 심기를 건드리고 말았다.
명색이 위대한 전사라 불리는 이로써 이런 무분별한 폭력을 그냥 좌시할 순 없지 않겠는가!
꾸구구국—
그렇다고 시간도 없는데 뭔가 따로 특별한 일을 한 것은 아니었다.
그저 전력을 다해서 주먹을 강하게 틀어쥔 채, 그것을 면전에 날아드는 공격에다 냅다 때려 박았을 뿐.
물론 그것만으로도 효과는 확실했다.
콰아아앙—!
“크윽?!”
일순 귀검마제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충돌의 순간, 검 손잡이를 잡고 있던 그의 손아귀로 어마어마한 압력이 밀려든 것이다.
예상을 상회하는 갑작스러운 충격에 약간의 내상까지 입었을 정도.
그에게 좋은 소식은 결코 아니었다.
‘무식한 수준의 물리력이다. 최대한 충격을 흘렸는데도 이 정도라니?’
충돌 직후의 반발력을 이용해 거리를 벌린 그가 다시 제대로 검을 고쳐 잡았다.
그것은 상대의 후속타를 경계하고 곧바로 대응하기 위한 작업의 일환이었지만, 정작 상대는 그런 그를 슬쩍 한 번 쳐다보기만 할 뿐이었다.
마침 거슬리던 차에 눈에 띄어 한 방 먹이긴 했으나 당장 그에게 중요한 건 이쪽이 아니었으니까.
여기 문제는 나중에 다시 와서 해결해도 충분했다.
“이거 신나게 잘 싸우는데 내가 괜히 방해해 버렸구만! 미안하게시리! 난 이만 지나갈 테니 신경 쓰지 말고 하던 거나 마저 하쇼!”
“저 노인은 설마 검성인가? 그럼 그와 맞서는 자는··· 애꾸에 검은 귀문검. 귀검마제? 그럼 저 안쪽에는···.”
“거 언제까지 거기서 그러고 있을 거야, 친구? 얼른 오라고!”
그리고 그는 저 뒤편에서 꾸물거리며 혼잣말을 구시렁대던 사내를 억지로 이끌고, 자신을 경계하는 두 노인에게 머쓱하다는 듯 손을 한 차례 흔들어 주고는 미련 없이 몸을 돌렸다.
말 그대로 그저 지나가던 길을 막고 있어서 잠깐 끼어든 것뿐이라는 듯이.
“···뭐지?”
“······”
하지만 검성은 물론 불청객과 한 차례 충돌한 직후였던 귀검마제 또한 함부로 움직일 순 없었다.
저 괴한은 그 우스운 몰골과는 다르게 굉장히 뛰어난 실력을 갖추고 있어 그를 상대하다간 필연적으로 빈틈이 많이 드러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지금 눈앞에 있는 호적수는 그런 빈틈을 절대 놓치지 않을 터였으니.
‘대체 누구지? 저런 외양의 괴인에 대해선 들어본 적이 없는데.’
아직 신(新)광마에 대한 소문을 듣지 못한 검성이 의문을 표했다.
눈앞에 있는 귀검마제의 반응을 보고 그가 마교의 인사가 아니었다는 건 짐작할 수 있었지만, 갑자기 툭 튀어나온 인물치고는 그 경지가 높아도 너무 높았던 것이다.
그러나 그 귀검마제의 머릿속에 떠도는 생각은 달랐다.
‘···광마와 그를 사칭한 괴인. 어떻게 저놈들이 이곳에 있는 거지? 자기가 알아서 처리하겠다더니, 군사는 대체 뭘 했단 말인가!’
스치듯 듣는 바람에 떠올리는 게 조금 늦었다.
물론 거사를 앞둔 마당에 별로 신경 쓸 것도 없는 가십거리를 대충 흘려넘긴 탓도 있었으나, 이렇게 그 당사자들이 떡하니 나타났으니 속이 터질 수밖에 없었다.
‘대체 무슨 이유로 둘 다 이곳까지 온 거지? 저놈들은 정파 무림과 큰 상관이 없을 텐데?’
기존의 광마는 어느 세력에도 속하지 않은 정사지간의 인물로, 엄밀하게 그 행보를 따지자면 사파 쪽에 더 가깝다고 할 수 있는 인사였다.
그를 사칭하고 나선 괴인 또한 그것은 크게 다를 바가 없어 보였는데···.
하지만 그런 미묘한 분위기도 잠시.
빠르게 정신을 수습한 그들은 이미 지나간 이들을 머릿속에서 지우고 다시 서로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리고—.
채앵—! 챙! 콰아앙—!
잠깐이 휴식 시간을 마치고 다시 격렬한 싸움이 시작되었다.
지금 그들에게 주어진 가장 중요한 임무는 일단 눈앞의 상대를 쓰러뜨리는 것이었으니까.
< 천마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