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overeign of the Infinite Clones RAW novel - Chapter (332)
아우테리카 중심의 성지, 로셀리아 대신전.
“신성력이라.”
온갖 기화요초가 가득한 정원을 천천히 거닐던 성자 하인리히가 지그시 눈을 감았다.
업무 도중 머리도 식힐 겸 산책을 나왔다가 더 골치 아픈 문제와 마주해 버린 탓에 머릿속이 복잡해졌던 것이다.
‘그건 분명 번천회주의 신성력이다.’
이쪽 분야에서 최고의 전문가라 할 수 있는 그의 소견으로도 그건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다만 문제는 그 신성력이 절대 강환계에서 비롯된 힘이 아니라는 것이었다.
즉, 외부로부터 유입된 에너지라는 소리인데···.
‘그런데 천마가 그 힘을 사용하고 있단 말이지.’
게다가 휴고가 「아바타 클라우드」와 성표를 매개체로 쓴 것처럼 꼼수를 부린 것도 아니었다.
성직자가 자신이 따르는 우상의 신성력을 끌어내고 운용하듯, 명실상부 본인 스스로가 발현해 낸 이적.
번천회주와 천마 사이에 그의 예상을 넘어서는 어떤 커넥션이 있다는 소리였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타 차원의 신성력은 그 세계의 이물질이나 다름없다. 때문에 휴고가 신성력을 간접적으로 이용하는 데도 상당한 에너지 손실을 감수해야 했건만.’
하인리히가 조용히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그의 의지에 따라 아지랑이처럼 피어오른 백금빛의 광채가 어지러이 일렁이며 그 존재감을 과시했다.
세상엔 존재하는 차원의 숫자 이상으로 많은 신이 있었고, 그 신들이 가진 성향도 그만큼 제각각이었다.
그들로부터 비롯된 신성력 또한 그 성향을 따라가는 건 마찬가지.
‘그런 의미에서 우리 아우테리카의 주신님은 엄연히 선신(善神)이라고 할 수 있겠지.’
물론 그 근간이 일반적으로 말하는 연민과 자비 같은 건 아닐 것이다.
그걸 굳이 인간의 입장에 맞춰보자면—.
공들여 만든 수제품을 보관함에 넣고 흐뭇하게 감상하다가 가끔 먼지도 털어주고 애지중지 관리하는··· 그런 느낌이랄까?
반대로 스스로 만든 모래성을 부수는 것에 재미를 느끼는 부류라면, 처음부터 무너뜨리는 것을 목적으로 탑을 쌓아 올리는 그런 존재라면 피조물들에게 악신(惡神)이라 불릴 것이다.
‘뭐, 신들의 뜻을 인간에 불과한 내가 어떻게 가늠할 수 있겠느냐마는.’
아무리 자신이 성자라 불리며 이런저런 특혜를 받고 있다고 해도 그건 무리였다.
그게 가능하다고 여기는 것이야말로 오만··· 아니, 신성모독이라 할 수 있을 터.
“어쨌든, 놈의 흔적이 드러난 마당에 가만히 있을 순 없겠지.”
처음부터 적극적으로 개입할 생각이긴 했지만 이번 일로 그 마음이 더욱 확고해졌다.
그게 어느 수준이냐면, 지금이라도 직접 강환계로 넘어가 천마를 족치는 데 동참하고 싶을 정도였다.
물론 하인리히는 당장 아우테리카와 지구 양쪽 모두 신경 써야 하니 바로는 힘들겠지만.
“성자님, 잠깐 시간 괜찮으신가요?”
그때 정원을 거닐던 그에게 작은 체구의 여성이 다가와 말을 걸었다.
함께 수많은 싸움을 거쳐 왔던 용사 파티의 동료, 지구 출신의 대마법사 이세아였다.
“아, 이세아 님. 물론 괜찮습니다. 마침 여유가 생겨 하릴없이 시간을 때우던 중이었으니까요.”
“크흠, 감사합니다. 그··· 이런 부탁을 드리는 게 조금 죄송스럽긴 합니다만···.”
그렇게 잠깐 뜸을 들이던 그녀가 조심스럽게 두툼한 편지 한 장을 내밀었다.
물론 그에 대한 연심을 담은 러브레터는 아니었다.
“아, 결정하셨나 보군요.”
“···네, 아무래도 저에겐 좋은 기회니까 말이죠. 부끄럽습니다만, 호의를 받기로 했습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성자님.”
그건 지구에 있을 그녀의 가족에게 보내는 편지였다.
지구와 아우테리카를 오갈 수 있게 된 하인리히에게 편지의 전달을 부탁하는 것.
성자씩이나 되는 위인에게 이런 개인적인 부탁을 하는 게 영 민망했지만, 이건 그녀와의 협력 관계를 공고히 다지기 위해 그가 먼저 제의한 일이었다.
“걱정 마시지요. 괜한 말이 나오지 않도록 은밀하게 전달하도록 하겠습니다. 저도 이젠 지구의 환경에도 익숙해졌으니까요.”
“후우, 감사합니다. 성자님 덕분에 이렇게나마 먼저 소식을 전할 수 있어서 다행이네요. 다들 그동안 걱정 많이 하셨을 텐데.”
고작 고등학생인 딸이 갑자기 이세계로 끌려가 일 년 가까이 소식이 없으니, 당연히 그녀의 가족들은 하루하루 피가 마르는 기분일 것이다.
여러 가지 사정으로 당장 돌아갈 수도 없는 만큼 안부를 전할 수 있게 되면 양측 모두 걱정을 덜게 되겠지.
또 단순한 편지가 아닌 그녀의 영상을 담은 마도구의 일종이라 증명하는 것도 어렵지 않을 것이다.
이후 받은 편지를 아공간에 넣은 하인리히는 짧은 담소 끝에 그녀와 헤어져 다시 집무실로 발걸음을 옮겼다.
최근 북부로의 마지막 진격을 앞둔 만큼 이것저것 신경 쓸 게 많아 마냥 여유를 부릴 수만은 없었다.
물론 정말 그가 꼭 필요한 문제가 생긴다면 이런 잡무 따윈 언제든 때려 쳐 버릴 테지만.
‘아직은 괜찮아. 할 수 있는 것부터 차근차근 해 나가면 돼. 일단은 강환계 쪽 사정을 더 확실하게 파악한 후에···.’
집무실로 향하던 그의 발걸음이 일순 멈칫했다.
약간 높은 지대에 있는 그의 시야 저편에 아직 채 사라지지 않은 전투의 상흔이 한눈에 들어왔다.
얼마 전에 있었던 외계의 침입자에 맞서 모두가 함께 싸웠던 흔적.
‘네놈이 다른 차원들까지 손을 뻗어서 무슨 짓을 꾸미려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하인리히가 지그시 눈을 감고는 두 손을 마주 잡고 그날의 희생자들을 추모했다.
경건한 분위기 속에서 그의 몸에서 흘러나온 찬란한 백금빛 광채가 서서히 사방으로 번져나가기 시작했다.
‘철저히 깨부숴 주마. 네놈이 계획한 모든 것들을.’
그것을 위해서라면 쓸 수 있는 것들은 모두 이용할 것이다.
또 그건 지구에서의 일도 예외는 아니었으니.
‘슬슬 판테온과 접촉해 봐야겠군. 그들이 모두 번천회에 넘어갔을 리는 없다. 그쪽과 접촉한 후엔···.’
물론 번천회를 세계의 공적으로 만들고 양지로 끄집어 올리는 작업은 지금도 순조롭게 진행 중이었다.
***
쿠웅—
영향력이 닿는 권역 내의 모든 이들을 찍어 누르는 군림자의 발걸음.
그 천하를 내리밟는 일보(一步)와 함께 무거운 공기가 사위를 짓눌렀다.
“크흑! 무거워···!”
“뒤로 물러나! 어영부영하다간 휘말린다!”
쿠르르릉!
간접적인 여파만으로 근방에서 전투를 벌이던 이들이 서둘러 물러나고, 격렬한 싸움으로 충격이 누적되었던 건물 몇 채가 그대로 무너져 내렸다.
복종을 강요하는 그 위압적인 기세는 감히 자신의 뜻을 거스르는 적대자들에게 격의 차이를 각인시키기에 충분했지만···.
“카하핫! 이런 미적지근한 거로는 어림도 없다!”
정작 그 압력의 대부분이 집중된 대상에게는 큰 효용이 없었다.
상대는 그저 육체의 스펙만으로도 운신을 방해하는 모든 제약을 찢어발길 수 있는 괴물이었으니까.
창공을 딛고 선 채 지상을 짓밟던 하늘의 마(魔)에게 광기에 가득 찬 야수가 짓쳐들었다.
콰아앙—!
직후, 다시 한번 상공에서 터져 나오는 거대한 폭발에 충격파가 사방을 휩쓸며 지상의 사물들을 뒤흔들었다.
“···거 요란하게도 싸우는군.”
그리고 그 아래쪽.
천상계에서 벌어지는 싸움과는 동떨어진 곳에 선 전 광마 목인광이 혀를 내두르며 나직이 투덜거렸다.
‘대단한 놈이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설마 그 이름 높은 마교의 천마에게 달려드는 것도 모자라 정면으로 맞붙을 정도일 줄이야.
저런 상대를 찾아가 싸움을 걸었다니, 이제 와서 보니 자신이 얼마나 무모했던 건지 확실히 깨달을 수 있었다.
‘애초에 그게 내가 지금까지 살아온 방식이지만.’
입맛을 다신 그가 고개를 내저었다.
어쨌든 결론적으로 보자면 결과가 그리 나쁘진 않았다.
그 덕분에 평생 자기 머리 꼭대기에서 삶을 지배해 오던 광기를 극복하고 광제심결(狂制心訣)을 완성할 단초를 잡을 수 있었으니까.
···비록 별호를 빼앗기는 수모를 겪기는 했지만 말이다.
아픈 기억을 애써 억누른 목인광이 겨우 자신을 합리화하며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렸다.
천상계의 싸움과는 별개로 아래쪽에서는 인간들끼리의 전쟁이 치열하게 일어나고 있었다.
“흐— 이제 슬슬 나도 끼어들어 볼까.”
비명과 선혈이 난무하는 그 전장을 보고 있자니 조금씩 피가 끊어 오르기 시작했다.
이곳까지 오는 길에 할리에게 몇 차례 더 시술받으며 사고를 지배하던 광기가 많이 가라앉긴 했으나, 그렇다고 평생 살아온 삶의 방식이 그리 쉽게 달라질 리 없지 않겠는가?
‘사실 정파 놈들을 돕는다는 게 영 내키지 않긴 한데.’
하지만 마교의 종자들은 정파보다 더 싫었으니 거부감이 심하지는 않았다.
또 이젠 그의 상전이 되어버린 미친놈도 왠지 모르게 정파 세력을 옹호하는 기색이기도 했고.
“과연 마교로군. 판이 완전히 기울어져 버렸어.”
대체 무슨 수를 쓴 건지 정파의 무인들이 제대로 힘을 쓰지 못하게 된 것이 치명적이었다.
이대로 가다간 십중팔구 소림사 내부의 모두가 몰살당하는 결과로 이어지게 될 터.
‘물론 내가 없었다면 말이지.’
목인광의 얼굴에 살벌한 웃음이 맺혔다.
현경에 이른 초월자만큼은 아니지만, 그 또한 화경에 오른 이들 중에서는 적수가 없다 자신할 정도의 강자였다.
마교도가 어떤 수작을 부리건 그의 개입만으로도 전황에 유의미한 변화가 생길 수밖에 없으리라.
‘그럼 이제··· 응?’
그렇게 고양감으로 머리에 서서히 열이 뻗치던 순간.
무의식중에 천상계의 싸움을 흘깃 쳐다본 그가 순간적으로 멈칫했다.
“아니, 잠깐. 저건?”
이어서 찬물이라도 뒤집어쓴 듯 머릿속이 싸해졌다.
그리고 그는 차마 말을 잇지 못하고 입만 뻐끔거렸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저 새끼가?”
조금 전까지만 해도 본능과 야성을 우선하는 움직임을 보이던 할리가 좀 더 체계적이고 정련된 움직임을 보이고 있었으니까.
그것도 왠지 모르게 굉장히 눈에 익은 기술들을 사용하면서.
···그래, 그 기반이 된 건 분명 광제심결을 근간으로 삼은 그의 독문 무공이었다.
‘어쩐지 이곳에 오는 동안 계속해서 대련하자고 달려들더라니!’
그땐 광기를 다스려 준다는 핑계로 그를 두들겨 패며 화풀이를 하려는 게 아닌지 의심할 정도였는데···.
그게 설마 전부 자신의 무공을 훔쳐 가기 위해 준비한 밑그림이었을 줄 누가 상상이나 했으랴.
“대체, 대체 어디까지 훔쳐 갈 생각이냐—!”
그에 목인광이 깊은 곳에서부터 올라오는 분통을 터트렸다.
광마라는 별호에 이어 무공까지 빼앗기게 되었다는, 도저히 참을 수 없는 현실에 대한 울분을 가득 담아서.
***
‘귀가 가렵군.’
할리의 뇌리에 잠깐 그런 생각이 스쳐 지나갔으나 그 생각은 오래지 않아 빠르게 사라졌다.
지금은 도저히 다른 곳에 신경 쓸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으니.
쫘아아악—!
직감에 따라 고개를 숙인 그의 머리 위로 새카만 검광이 스쳐 지나갔다.
그와 동시에 길게 찢겨나가는 공간의 단면.
어지간한 공격은 죄다 몸으로 때우는 그조차 쉽게 무시할 수 없는 공격이었다.
“쫄래쫄래 잘도 피하는구나, 야만인.”
“카핫! 이거 짜릿한데? 좀 더 힘 좀 써 보라고, 형씨!”
그에 반사적으로 도발을 시도하긴 했지만, 사실 지금 상황이 할리에게 썩 유리한 것도 아니었다.
그만큼 감춰뒀던 신성력을 꺼내든 천마는 이전과는 전혀 다른 위용을 뽐내고 있었다.
단순히 추가적인 에너지로 스스로를 강화하는 정도의 수준이 아니라 마치 격 자체가 한 단계 상승한 듯한 느낌이라고 할까.
당연히 모든 부분에서 이전보다 월등해진 것은 물론이고, 그에 따라 할리가 공격을 허용하는 빈도도 하나둘 늘어갈 수밖에 없었다.
“···이것도 회복한다고? 어이가 없군. 대체 어떻게 되어 먹은 몸뚱이지?”
그나마 아우테리카에서의 싸움에서 번천회주의 날개를 뜯어 먹고 그에 대한 내성을 기르지 않았다면 정말 위험할 뻔했다.
신성력이 깃든 그의 강기는 공간은 물론 할리가 품은 저항력이라는 개념마저 베고 들어올 정도로 지독했으니까.
츠즈즈즉—
할리는 거의 절단된 채 덜렁덜렁 붙어있던 팔뚝을 이리저리 움직이며 접합 상태를 확인했다.
그곳뿐만 아니라 공격을 허용한 다른 신체 부위도 사정은 비슷했으니.
상황이 이쯤 되자 그도 자신의 능력을 마냥 숨기고만 있을 수는 없었다.
몸에 새겨진 각인이 일제히 발광하기 시작하고, 정제된 에너지가 체내를 휘돌며 잠재된 능력을 활성화했다.
그중에는 어지간해선 내보이지 않으려 했던 육체 변이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래, 그럴 줄 알았다. 역시 네놈은 인간이 아니었구나.”
피격에 대응하고자 양손의 손끝부터 팔꿈치까지 빼곡하게 뒤덮인 검붉은 비늘을 본 천마가 예상했다는 듯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미 충분히 짐작하고 있었다는 듯이.
오히려 이쪽이 놀랄 정도로 담백한 반응이었다.
‘역시 놈은 뭔가를 알고 있었군.’
전 광마 목인광에게 배운 수법들을 사용하면서 느낀 의문이 있었다.
바로 광기를 직접 이용하는 이 ‘광제심결’이라는 무공이 할리와 이상할 정도로 잘 어울린다는 것.
솔직히 무공과의 적합성만 따지자면 배운 지 며칠 되지 않은 할리가 목인광보다 훨씬 궁합이 좋을 정도였다.
모든 조건이 보통 인간과는 전혀 다른 「궁극의 진화 생명체」에게 딱 맞는 무공이 이미 이 세상에 있다는 것 자체가 놀라운 일.
그렇게 빠른 속도로 무공에 익숙해지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깨달을 수 있었다.
‘이 무공.’
이건 처음부터 인간이 사용하는 걸 전제로 만들어진 게 아니라는 것을.
이 광제심결이라는 무공은 설계 단계에서부터 그와 같은 괴물··· 아니, 비인(非人)이 사용하기 위한 목적으로 탄생한 것이었다.
그래, 예를 들자면.
지금은 강환계에서 모습을 감춘 이종족인··· 요괴라던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