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overeign of the Infinite Clones RAW novel - Chapter (336)
고요 속에 정적만이 감도는 공간.
움찔—
어느 순간, 그 중심에서 양반다리를 하고 앉아 있던 한 사내의 몸이 미약하게 흔들렸다.
이어서 감겨 있던 눈이 서서히 떠지고, 그와 동시에 눈부신 광망이 폭발적으로 터져 나왔다.
한순간 사방을 물들였다가 한 쌍의 눈동자 안으로 갈무리되는 안광.
“···연결이 끊어졌군.”
그 직후, 차마 뭐라 가늠할 수 없는 기이한 목소리가 사내에게서 흘러나왔다.
평범함과 비범함, 연륜과 치기가 한데 어우러진 것만 같은 이질적인 음성이었다.
“이건··· 강환계인가?”
그 목소리의 주인, 번천회주가 재차 눈을 감고 감각을 되새겼지만 이제 와서 변하는 건 없었다.
강환계에서 그의 신성을 대리하던 사도와의 연결이 끊어졌다.
그리고 그 말이 뜻하는 바는 단 하나였다.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이제 강환계에는 천마를 해할 수 있는 존재가 없을 텐데.’
당연하지만 신위에 오르는 것은 그저 힘만 강하다고 해서 되는 일이 아니었다.
애초에 신이란 자신을 숭배하고 신앙을 바치는 신도들이 있을 때에 성립하는 존재였으니.
말하자면 이건 그간 신앙을 공급해 주던 식민지의 총책임자가 난데없이 비명횡사하며, 그와 관련된 모든 라인까지 봉쇄되어 버린 것이나 다름없는 상황이었다.
‘쯧, 하필 지금 상황에 이런 일이 생기다니.’
그에 얼마 전 아우테리카에서 입었던 피해를 수습하기 위해 칩거에 들어갔던 번천회주가 혀를 찼다.
설마 천마씩이나 되는 존재가 이렇게 갑자기 사망해 버릴 거라고 누가 예상이나 했을까.
뭔가 예상을 벗어난 일이 벌어진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지금은 함부로 움직일 수도 없다.’
차원을 넘나드는 것은 굉장히 많은 수고가 필요한 일이었다.
거기다 이미 한번 방문했던 세상에 재방문하기 위해서는 기존의 몇 배 이상의 시간과 노력을 추가로 투자해야 한다는 것 또한 문제였다.
그쪽 세상을 담당하는 신이 절대 그가 마음대로 드나들도록 그냥 내버려 두지 않을 테니.
그 기회비용을 감안하면 차라리 새로운 세상을 개척하는 게 훨씬 나을 지경이었다.
“내 기대가 과했나 보군. 제법 쓸 만한 녀석이라고 생각했는데.”
결국 번천회주는 그냥 혀를 한 번 차곤 다시 지그시 눈을 감았다.
한 세계를 담당하던 사도 하나를 잃은 건 제법 큰 손실이긴 했으나, 이 정도 손실은 충분히 상정 내에 있었다.
‘가장 가능성이 높은 건 요괴 잔당들의 개입인가. 제대로 처리했다고 생각했는데 놓친 게 있었나 보군. 다음엔 좀 더 신경 써야겠어.’
그렇게 갑작스레 발생한 변수를 대수롭지 않게 넘긴 번천회주가 다시 깊은 고요 속으로 침잠했다.
이번 이변의 원흉이 아우테리카에서 그를 엿 먹였던 일당들에 의해 일어난 것이라고는 상상조차 하지 못한 채.
***
“저, 저기··· 광마님?”
“엉? 왜 그래, 형씨?”
“그··· 다시 한번 말씀드리지만 전 정말 맛이 없습니다. 농담이 아니라 그게 저희의 주 생존 수단일 정도지요. 오죽하면 그 맛대가리 없는 생선인 강준치가 오히려 진미로 느껴진다는 말이 있을···.”
“아, 거참! 알았다니까 그러네. 이 양반 왜 이렇게 겁이 많아?”
“···그럼 절 보시면서 입맛 다시는 건 좀 멈춰주셨으면···.”
“아.”
츄릅!
할리는 그제야 저도 모르게 흘러내린 침을 삼키며 손으로 입가를 슥슥 문질렀다.
그들은 지금 융중산 인근에서 벗어나 다른 곳으로 이동하는 중이었다.
상대가 금오도 소속이라는 것을 알게 된 할리가 좀 더 내밀한 대화를 위해 그쪽에 정식으로 대화를 요청했고, 그 사실을 상부에 보고한 청관에게 그를 인도해 오라는 허가가 떨어졌던 것이다.
‘이렇게 순조로운 상황에서 괜한 짓으로 초를 칠 순 없지. 어차피 기회야 나중에도 있을 테고.’
이 세상에 와서 처음으로 본 요괴였던지라 개인적으로 흥미가 동하긴 했으나, 정말 그에게 위해를 가할 생각은 없었다.
방금 전의 신체 반응도 그저 새로운 유형의 유전자를 발견하면서 나타난 자연스러운 현상일 뿐.
아무리 할리의 육체가 초월에 이를 정도로 완성에 가깝다고 해도, 이건 탄생의 근간에 각인된 본능이었기에 그로서도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크흠, 그런데 요괴라면 팔다리 하나 정돈 잘려도 쑥쑥 재생할 수 있지 않나? 거 형씨, 너무 민감하게 반응하는 것 같은데.”
“대체 어떤 환경에 있으셨기에 그리 생각하게 되신 건지는 모르겠지만, 요괴라고 다 그런 능력을 가진 건 아닙니다. 그중에서도 전 육체 능력보다는 술법 쪽에 더 특화된 편이지요.”
“아, 그거 아쉽···.”
“···네?”
“아냐, 아냐. 자, 얼른 가자고! 카하하핫!”
“······.”
베일에 싸인 요괴들의 세력, 금오도(金鰲島).
그 대외 창구나 다름없는 모산파는 바다와 면해있는 동쪽 끄트머리의 강소성에 있었지만, 다행히 그들이 거기까지 직접 찾아갈 필요는 없었다.
“사실 거긴 외부 활동을 하며 대외적인 감투가 필요할 경우를 위해 만들어진 거지요. 모산파 본산의 도사들은 몇몇 빼곤 거의 다 인간들이고, 저희 요괴들은 대부분 다른 곳에 거주하고 있습니다.”
그런 간단한 설명과 함께 청관이 안내한 곳은 인근에서도 제법 커다란 규모의 강 한 줄기였다.
“저마다 각자의 방법이 있긴 합니다만, 전 아무래도 출신 때문인지 이쪽이 가장 익숙하더군요. 지형에 상당히 많이 구애받긴 해도 물길만 잘 찾을 수 있다면 제법 편하기도 하고 말이죠.”
그렇게 대충 설명을 마친 청관은 이내 등짐에서 이런저런 제구(祭具)들을 꺼내 늘어놓더니, 강 앞의 평평한 곳에 제단을 차리고 기이한 주문을 외우며 곧바로 어떤 의식을 진행했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자 가까운 곳에 있는 물줄기가 출렁거리며 요란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거 장관이군. ···그런데 저건?’
그러던 어느 순간.
제갈세가의 술법과는 다른 방식의 발현에 흥미진진하게 의식을 구경하던 할리는 이내 그 물줄기 너머의 강바닥에 원래는 없었던 무언가가 비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들이 있는 이곳의 정경이 아닌, 전혀 다른 곳의 숲을 비추는 정체불명의 구멍이 그곳에 생겨나 있었다.
“···후우, 됐군요. 이제 저곳으로 들어가면 됩니다. 그럼 저희 금오도의 자랑, 이 세상의 이면에 구축한 환계(幻界)로 접어들 수 있지요! 사실 떠돌이 요괴에게 이렇게 금방 진입 허가가 나오는 것도 이례적인 일인데, 아무래도 위에서도 광마님과의 만남을 긍정적으로 생각하는 모양입니다.”
짤랑—
어느새 다시 짐들을 정리하고 옆으로 다가온 청관이 작은 방울을 흔들며 밝은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사실 그도 과정이야 어찌 되었든 이렇게 고향으로 가게 되었으니 썩 나쁘지 않은 기분이었다.
“그래, 그럼 가 볼··· 아!”
“왜 그러십니까, 광마님?”
“···아니, 그냥 까맣게 잊고 있었던 걸 떠올려서.”
순간적으로 멈칫한 할리가 뒷머리를 긁적이며 입맛을 다셨다.
소림사에 남은 휴고의 시선을 통해 그곳에 남은 전(前) 광마 목인광을 보고서야 그에게 아무런 언질도 주지 않고 이곳까지 혼자 왔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뭐, 이미 지난 건 어쩔 수 없지! 일단 가자고, 형씨! 으하핫!”
하지만 그는 이내 대수롭지 않게 털어버리며 당당하게 앞으로 발을 내디뎠다.
당장 목인광에 대한 소림사의 대우가 그리 나쁘지 않았으니까.
하긴 아무리 평소 백안시하던 정사지간의 인물이라 하나, 어려운 상황에 발 벗고 달려와 도와준 이를 박대할 리가 없었다.
비록 그게 본의가 아니었다 할지라도 결과적으로 큰 도움이 된 게 사실이었으니.
거기다 그렇지 않아도 심각한 피해를 입은 직후였던지라, 소림사도 만약의 사태를 대비해 그 정도 수준의 강자를 최대한 오래 붙들어 놓고 싶을 것이다.
‘그러니 대충 이쪽 일이 끝난 다음에 찾아가도 되겠지.’
어차피 그가 여기까지 따라온 것도 정보를 얻는 게 목적이었다.
아마 모든 일을 다 마무리 짓고 가더라도 그리 오래 걸리진 않을 터.
그렇게 할리는 금속 방울을 흔들며 물속으로 뛰어든 청관의 뒤를 따라 강바닥에 난 구멍으로 발을 뻗었고.
그 직후, 자신이 어딘가 몽환적으로 느껴지는 숲 한복판에 서 있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
그리고—.
“크르릉— 뭐야, 이건? 잡종인가? 어이, 넌 정체가 뭐냐?”
이미 그곳에 와 있던 선객과 정면으로 마주했다.
자신의 바로 앞에 선 채, 팔짱을 끼고 이쪽을 내려다보는 거대한 체구의 요괴를.
“히익! 도, 도올 님이 어째서 여기에···?”
그 상대가 썩 좋지 않은 의미로 유명인이었던 건지, 할리와 함께 환계로 넘어온 청관이 사색이 되어 뒤로 주춤주춤 물러섰다.
“내가 못 올 곳이라도 왔나? 그리고 거기 네놈, 벙어리냐? 그것도 아니면 이 몸의 위용에 얼어버린 건가? 크륵크륵—!”
5미터를 훌쩍 넘어서는 신장에 두 발로 선 호랑이 같은 몸체와 기다란 꼬리, 입술이 없어 훤하게 드러난 날카로운 이빨과 그 사이에 툭 튀어나온 멧돼지 같은 한 쌍의 어금니, 그리고 이글이글 타오르는 도깨비불이 담긴 안광까지.
그 흉악한 외양에 걸맞은 어마어마한 위압감과 함께 폭력적인 기세가 사방을 스멀스멀 뒤덮기 시작했다.
‘대단한데. 하긴 요괴 중에도 이런 괴물이 있으니 이들이 지금까지 무너지지 않고 버틸 수 있었던 거겠지.’
현경 중에서도 격이 달랐던 천마에 비할 바는 못 되지만, 저 정도면 대충 남궁세가의 검성과는 비벼볼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렇게 할리가 내심 감탄하고 있자니 뒤로 물러섰던 청관이 침을 꿀꺽 삼키며 조심스럽게 앞으로 나섰다.
“저, 저기 도올 님? 이분은 청룡님의 손님으로서 여기에 오신···.”
“꺼져라, 생선. 회쳐 먹어 버리기 전에.”
“흐익!”
하지만 그 용기는 오래가지 못했다.
낮게 으르렁거리는 듯한 목소리와 함께 아래를 노려보는 도올, 그 두 눈에 담긴 귀화(鬼火)에 숨이 턱 막힌 청관이 제자리에 멈춰선 채 입만 뻐금거렸다.
그에 상대가 단순히 이쪽을 마중 나온 게 아니라는 것을 확신한 할리가 입가에 미묘한 웃음을 매단 채 앞으로 한 걸음 성큼 내디뎠다.
“잠깐만, 거기 커다란 친구? 혹시나 해서 미리 물어보는 건데, 지금 이거 시비 거는 건가?”
그래도 혹시 모르니 확인 절차는 꼭 필요했다.
지금 자신은 초대받아서 남의 영역에 들어온 입장이지 않았던가?
아직 목표를 달성하지 못한 이상 일단은 저들의 장단에 맞춰줄 필요가 있었으니.
“크륵크륵, 시비? 글쎄···. 그저 간단한 시험이라 생각해도 좋다. 처음 보는 놈을 검증도 없이 들여보낼 수는 없지 않은가? 전사의 가치관은 투쟁으로 증명하는 법이지.”
“아하! 그러니까 신고식이란 말이지?”
“호오? 흥미가 생겼나?”
“카하핫—! 물론이지!”
그들의 대화에 청관이 당황한 표정으로 팔을 허우적거렸으나, 이미 그는 두 괴물의 안중에도 없었다.
점차 고조되는 투기 속.
“딱 내 취향이군! 나도 그런 거 아주 좋아하는데 말이야!”
그 말 그대로, 즐거운 듯한 할리의 목소리와 함께 그의 입가가 길게 찢어지며 톱니 같은 이빨이 드러났다.
이곳에 오기 전에 억지로 억눌러 두었던 침 몇 방울이 바닥으로 뚝뚝 떨어져 내렸다.
‘저 녀석, 척 봐도 육체파로 보이니까—.’
청관과는 달리 극도로 발달한 육체와 그 세포 하나하나에 깃든 폭력적인 에너지.
할리는 본능적으로 직감할 수 있었다.
‘저건’ 그 어디에서도 맛볼 수 없는 극상의 진미일 것이라고.
‘—딱 한 입만··· 아니, 덩치가 크니까 몇 입 정도는 먹어봐도 되겠지!’
참았던 허기가 물밀듯이 밀려오기 시작했다.
***
도올은 최근 심심해 미쳐버릴 지경이었다.
형제처럼 지내던 이들이 모두 죽어 홀로 남았을 때, 생존을 위해 어쩔 수 없이 금오도에 의탁하며 받아들인 금제가 문제였다.
금오도에 속한 이들에게 먼저 위해를 가하지 말 것.
처음엔 대수롭지 않게 받아들였던 조건이었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도올은 그게 그리 간단하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다.
태생부터 호전적이고 분쟁과 싸움을 좋아하는 그에게 이곳에서 보내는 하루하루는 감옥이나 다를 바 없었다.
여기저기 기웃거리며 다른 이들의 다툼을 부추기고 그것을 구경하거나, 일부러 상대의 선수(先手)를 유도하는 것도 한두 번이지···.
거기다 도올의 악명이 워낙 자자한지라 그런 꼼수는 애초에 잘 먹히지도 않았다.
그리하여 차라리 그냥 밖에 나가서 죽을 때까지 싸우는 게 더 낫지 않을까 한창 고민하던 무렵.
그는 정말 우연히도 금오도에 웬 떠돌이 요괴 하나가 입장을 허가받았다는 소식을 접할 수 있었다.
‘외부자!’
즉, 금오도에 속하지 않은— 금제의 대상에서 벗어나는 자.
이곳에 들어오는 것을 허가받았다는 시점부터 그는 손님인 동시에 이후 금오도에 소속될 가능성이 매우 높다는 뜻이었으나, 도올은 그런 사소한 것 따위는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어쨌든 당장 외부자라는 건 틀림없지 않은가!
그래서 냉큼 입장 지역에 달려온 그는 머지않아 목표와 마주할 수 있었다.
어쩐지 친근감이 드는, 예사롭지 않은 기운을 풍기는 사내를.
그를 보자 사지 몇 짝 정돈 뜯어서 먹어 치워 버리려 했던 처음 생각이 조금 바뀌었다.
저 정도면 적당히 두들겨 준 다음 부하로 삼는 것도 나쁘지 않을지도.
그렇게 생각한 도올은 그 입장에선 굉장한 호의를 담아 친절하게 말을 걸었고, 다짜고짜 싸움을 걸려 했던 처음 계획과는 달리 원만한 합의를 이뤄낼 수 있었다.
그의 예상을 벗어난 일이 벌어진 것은 그 직후.
“그럼 일단 사이즈를 맞춰 볼까?”
그 말이 끝남과 동시에.
뿌득— 뿌드득—
그의 허벅지 정도밖에 오지 않았던 몸이 순식간에 불어나기 시작했다.
허리, 가슴, 어깨선은 물론 정수리를 넘어··· 고개를 치켜올려야 보이는 위치까지.
“아, 이런. 이건 너무 큰가? 이것도 오랜만에 하다 보니 조절이 잘 안되는군! 카하하핫!”
쿠르릉—
천둥과 같은 웃음소리와 함께 폭풍이 휘몰아치며 사위를 쩌렁쩌렁 진동시켰다.
도올은 고개를 치켜든 채 저 위를 바라보며 멍하니 입을 벌렸다.
단순히 덩치만 큰 게 아니었다.
별개의 생명체처럼 꿈틀거리는 근육의 밀도와 활화산처럼 이글거리는 에너지의 존재감이 사방 일대를 찍어 누르고, 그렇게 생겨난 선명한 질감을 강제로 뇌리에 때려 박고 있었다.
‘어···.’
일이 그쯤 진행되니, 문득 도올의 뇌리에 냉철한 사고 한 줄기가 스치고 지나갔다.
‘이거 이대로 괜찮은 건가?’
···물론 전혀 괜찮지 않았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