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overeign of the Infinite Clones RAW novel - Chapter (343)
벽면 곳곳에 웅장한 그림이 걸린 커다란 집무실.
드르륵—
왠지 모르게 무거운 공기가 감도는 공간 한가운데에서 제복을 입은 잿빛 머리카락의 여인이 손에 쥔 마우스의 휠을 돌렸다.
무심한 푸른 눈동자가 빠르게 내려가는 모니터를 훑고, 이내 그 입가에 자그마한 조소가 어렸다.
“하인리히 세인트 랜드가드. 아우테리카의 성자.”
이어서 그녀의 입에서 차가운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유리알처럼 빛나는 한 쌍의 푸른 눈이 모니터에 선명하게 떠오른 은발의 미남자에게 틀어박혔다.
‘그가 처음 지구에 모습을 드러낸 게 지난달쯤이었지. 그리고 회주께서 다른 차원에 있던 그의 존재를 확인하신 게 불과 얼마 전.’
그녀— 번천회 북아메리카 지부장, 서기관이 양손의 다섯 손가락을 서로 마주 대며 의자에 천천히 몸을 파묻었다.
그 입가에 어린 차가운 미소가 더욱 짙어졌다.
“···아무래도 차원을 넘나드는 건 사실인 모양이야.”
그게 아니라면 그 시공간의 차이를 설명할 수 없었다.
회주께서 직접 상대를 확인하고 확언까지 내려주신 이상 그것은 절대불변의 진실.
도저히 믿기지 않지만 상대는 자유롭게 차원의 벽을 넘어설 수 있는 능력이 있는 게 틀림없었다.
‘지금으로선 원래의 출신 차원과 지구, 그 둘을 왕복하는 것만 가능한 모양이지만.’
그것만 해도 대단하다는 건 틀림없었다.
이미 신의 반열에 오른 회주를 제외하면 그런 이적은 지금껏 한 번도 보고된 적이 없었으니까.
다만, 지금 그녀의 골치를 썩이는 문제는 단순히 그런 사실만이 전부가 아니었다.
“하필 그런 쓸데없는 말을 해서···.”
나직한 불평과 함께 미간이 찌푸려졌다.
그가 자신의 정체를 밝히며 꺼낸 말이 그녀를 이렇게 고심에 빠뜨린 원인이었다.
전 차원의 멸망을 획책하는 악의 무리.
지구에 뿌리내린 그 은밀한 세력을 처단한다는 것.
그것이 하인리히라는 저 이계의 성자가 내세운 대의였다.
그 대상으로 지목된 조직이 바로 그녀가 소속된 번천회였고.
‘놈이 우리에 대해 뭘 얼마나 알고 있는지부터 확인해야 한다.’
지그시 눈을 감은 그녀가 미간을 주물렀다.
상당히 쓸 만해 보이는 인재였기에 처음엔 그를 끌어들이는 게 목적이었으나, 이미 회주와 충돌까지 한 마당에 계속 그쪽 노선을 고수할 수는 없었다.
“조사대의 수장이 제이슨 사제였지.”
타협을 모르는 기질에 다소 다혈질이면서도 모순적으로 냉정한 이성을 중시하는 성기사.
그에 대해선 그녀도 익히 잘 파악하고 있었다.
이미 그 성격을 이용해 그를 원하는 데로 유도한 것도 한두 번이 아니었으니까.
‘잘 될지 모르겠군. 조금이라도 시간을 벌 수 있으면 좋으련만.’
그녀는 얼마 전 제이슨 사제와 통신을 통해 나눴던 대화를 떠올렸다.
그의 합리성을 자극하고 백기사에 대한 신뢰도를 떨어뜨릴 만한 말 몇 마디를 해주긴 했는데, 그게 얼마나 효용성이 있을지는 확신이 서지 않았다.
“성자··· 성자라···.”
그렇게 가볍게 테이블을 두들기며 혼잣말을 중얼거리던 서기관.
그러다 갑자기 멈칫한 그녀가 잠시 가만히 있더니, 이내 저 혼자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문득 지금 하는 고민이 하등 쓸모없게 느껴진 것이다.
스으으—
그녀의 몸에서 노을과도 같은 신성력이 번져 나왔다.
그녀는 가만히 자신의 손 위에 맺힌 기운을 바라보다 입꼬리를 비틀었다.
그가 진짜 이세계인이든 아니든 이제 와선 한참 늦은 일이었다.
이계의 신이 직접 온 것도 아니고, 그 꼭두각시일 뿐인 성자 하나가 할 수 있는 일엔 한계가 있었으니까.
그녀가 따르는 이는 명실상부한 지구의 신.
지금 이 고민들도 괜한 노파심에 하는 쓸데없는 걱정일 뿐이었다.
“그래도 이대로 가만히 있을 순 없지.”
지금 백기사에게 향한 세간의 관심은 그만큼 그의 존재를 쉬이 납득할 수 없기에 생긴 것이었다.
그런데 알고 보니 그가 한 말 대부분이 거짓이었고, 심지어 자기 말을 제대로 증명할 수도 없다면···.
‘핑계야 얼마든 댈 수 있다. 놈이 뭐라 변명해도 그렇게 몰아가면 그만.’
정말 도저히 부정할 수 없는, 확고부동한 증거를 대지 못한다면 그의 주장은 자연스레 힘을 잃게 될 것이다.
놈을 처리하는 것은 그 다음이 될 터.
천천히 고개를 끄덕인 서기관이 자리에서 일어나 집무실 밖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어쩌면 일이 생각보다 쉽게 끝날지도 모르겠군.’
자리에 남은 노을빛 신성력이 어지러이 흔들리며 흩어졌다.
***
하인리히가 준비된 자리에 앉은 이후부터 시작된 대화는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대충 서로에 대해 어느 정도 알고 있었던 데다가, 그가 보인 실력에 대해서도 충분히 인정하고 있다 보니 딱히 마찰이 일어날 일이 없었던 것이다.
지금 대중에 대한 하인리히의 인기는 쉽게 무시할 수 없는 수준이었다.
정부를 비롯한 다른 기관에서도 그와 쓸데없이 척지는 건 바라지 않는 게 당연한 일.
그들은 일단 그 화제의 인물과 안면을 트고 서로 대화의 창구를 마련했다는 사실만으로도 충분히 만족하고 있었다.
“···그런데 하인리히 형제님께선 자유로이 두 세계를 오갈 수 있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물론 하인리히란 인물 자체가 워낙 뜨거운 감자다 보니 대화 주제가 그에 관련된 것에 집중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갈색 머리와 짧은 수염을 멋들어지게 면도한 중년 사내, 미국 판테온 총본부에서 파견 나온 제이슨 사제가 꺼낸 화두에 모두의 얼굴에 흥미진진한 기색이 어렸다.
사실 이들의 가장 큰 관심사가 바로 그것이었으니까.
“저도 들었습니다. 차원 왕복이라니! 정말 그럴 수 있으리라곤 상상도 못 했었는데 말입니다.”
“정말 대단한 일이죠. 어떻게 그게 가능한 건지···. 역시 그건 신의 권능 덕분에 가능한 거겠지요?”
“얼마나 자주 오가실 수···.”
“시차는 어떻게 되는···.”
기다렸다는 듯 눈을 빛내며 질문을 쏟아내는 이들에게 하인리히가 부드럽게 미소를 지으며 차근차근 답해주었다.
“···사실 제가 자주 모습을 드러내지 못하는 것도 시차 때문이지요. 아무래도 저는 저희 세상에 집중할 수밖에 없으니까요.”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서 오가는 문답.
그 중엔 사실도, 사실을 섞은 거짓도, 완전한 거짓도 있었으나, 하나같이 현대의 상식을 송두리째 뒤엎는 내용들이라는 것만은 분명했다.
그리고 당연하게도—.
“···으음, 그것에 대해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만.”
그런 한쪽만의 일방적인 주장은 다른 사람들에게 쉽게 받아들여지지 않을 수밖에 없었다.
“형제님께서 대단한 능력을 지니셨다는 것은 알겠습니다. 그 신실한 신앙에 이렇게 가만히 마주 앉아 있기만 해도 살이 떨려올 지경이니까요.”
조용히 이야기를 듣던 제이슨 사제가 입을 열자 주변의 시선이 그에게로 집중되었다.
성직자들 사이에서 신성력이란 자신의 믿음을 증명할 수 있는 가장 확실한 방법.
그것을 이렇게 직접 대면해 확인한 이상 그 부분에선 감히 뭐라 말을 꺼낼 수 없었다.
물론 그것과 지금 말하고자 하는 바가 완전히 별개라는 게 문제였지만.
“하지만, 그 외의 말씀에 대해선··· 아직 잘 모르겠군요. 특히 하인리히 형제님께서 이세계인이라고 하셨던 것 말입니다.”
그 말 안에 깃든 선명한 불신에 하인리히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익히 예상했던 반응이었다.
그것은 이미 이십여 년이 넘게 지구인들의 상식으로 자리매김한 상태였다.
그런 와중에 자신을 이세계인이라고 주장하는 이가 갑자기 모습을 드러냈으니 쉽게 믿을 순 없겠지.
고작 이십여 년이라고 할 수도 있겠으나, 실상 대격변이 일어나고 역사상 처음으로 발생한 일이었으니 그리 짧다고만 할 수도 없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분명 신의 뜻에 따라 악을 뿌리 뽑기 위해 지구로 오셨다 하셨지요. 전 차원을 멸망으로 몰아가기 위해 암약하는 조직이 이 지구에 숨어 있다고··· 허허.”
그리 말을 잇던 제이슨이 너털웃음과 함께 고개를 내저었다.
그리곤 다시 좌중을 훑어보곤 똑바로 하인리히를 직시하며 재차 입을 열었다.
“그런 단체가 있다면 지금은 왜 가만히 있는 겁니까? 하나둘도 아니고 다수의 차원을 멸망으로 몰아갈 정도의 능력을 지녔다면 지구 정도야 그리 어렵지 않을 터인데.”
“아우테리카에 대해서도 알아봤습니다. 오래전 정말 세상을 멸망 직전까지 몰아갔던, 불사왕이라는 존재와 명운을 건 전쟁을 하는 중이라고요. 그런데 그 정도 규모의 재앙까지 그 악의 조직이라는 이들이 획책했다는 건···.”
차분하게 말을 잇던 그의 말이 조금씩 격앙되기 시작했다.
처음엔 냉정하게 사태를 하나씩 짚는 듯하던 그의 말투가 점차 추궁하는 것처럼 변해갔다.
“부끄럽지만 저희 판테온은 결속력이 그리 좋지 않을지언정 그 규모는 전 세계를 아우를 정도로 거대합니다. 그 영역은 세계 귀환자 협회와도 그리 다르지 않을 정도지요.”
“그런 세력이 있다면 우리가 모를 리가 없습니다. 아니, 굳이 저희가 아니더라도 다른 곳 어디에서도 들어보지 못했지요. 하인리히 님께서 말씀을 꺼내기 전까지는 말입니다.”
모두가 침묵하는 가운데 계속해서 이어지는 제이슨의 한마디 한마디.
하인리히는 그의 확신 어린 주장에 주변의 모두가 침묵으로 동조하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사실 말만 하지 않았을 뿐이니, 모두가 그와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는 뜻이었다.
‘···이거 위험한데. 예상했던 것보다 불신이 더 컸던 모양이군. 내가 너무 쉽게 생각했나.’
사실 자신이 한 모든 주장은 그가 정말 신의 뜻에 따라 이세계에서 왔다는 것을 전제로 하고 있었다.
그 기본 조건이 신빙성을 잃는다면 그가 내세운 주장도 모두 공허한 외침이 되는 건 당연한 일.
‘따지고 보면 난 진짜 지구인이기도 하고.’
사실 지금도 그의 말을 전적으로 믿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았다.
그저 이제까지 하인리히가 보인 압도적인 능력에 더해, 그의 격에서 풍겨 나오는 ‘믿음’에 영향을 받은 이들이 중립을 자처하는 터라 표면에 드러나지 않고 있을 뿐이지.
‘결국 내 주장의 신뢰도를 올리기 위해서는 내가 이세계의 차원 이동자라는 것을 확실히 증명해야 하는데···.’
문제는 지구는 온갖 특이한 능력을 가진 이들이 한자리에 모여드는 곳이라는 것이었다.
그가 어떤 능력을 써서 자신을 증명하던 굉장히 높은 확률로 그것을 반박당할 터.
‘시간이 좀 더 있다면 모를까.’
시간이 흘러 아우테리카에서 귀환한 이들이 그의 주장에 힘을 실어 준다면 설득력이 더 올라갈 수 있을 것이다.
물론 그것도 그가 두 세계를 오갈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할 수 있을 뿐, 그가 정말 이세계인이라는 것을 증명하는 것은 아니겠지만.
‘지금은 그 시간도 아까워.’
결국 차원을 오갈 수 있는 건 지구인 각성자뿐이라는 사람들의 고정관념을 깨는 게 중요했다.
하지만 대체 어떻게 해야 할까?
절대로 부정할 수 없는, 누구나 보자마자 인정할 수밖에 없는, 확고부동한 그런 증거.
세상에 그런 편한 방법이···.
“그렇군요. 그럼 보여드리도록 하지요.”
“음?”
“네?”
···있었다.
아니, 사실 생각할 것도 없었다.
그런 것 정도야 그에겐 너무나도 쉬운 일이었으니.
‘이 세상은 이세계로 넘어간 인간이 흡혈귀나 늑대인간이 되어 돌아오는 것도 그리 드물지 않지. 아예 다른 존재로 변신하는 능력이 있기도 하고.’
그러나 그것에도 한계는 있는 법이었다.
그리고 그중 가장 효과적인 것은···.
‘그래, 이렇게 된 이상 갈 때까지 가 보자. 괜히 어설프게 하는 것보다 싹 다 충격으로 뒤덮어버리는 게 더 낫겠지. 믿기 싫어도 억지로 믿을 수밖에 없게 만들어주마.’
주변 사람들이 당황한 가운데, 어느새 눈을 감고 손을 맞잡은 하인리히가 경건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신께서 응답해 주셨습니다. 그분께서 자신의 다른 종복을 이 땅에 내려주시겠다 하시는군요.”
“네?”
뜬금없는 그 말에 당황해 저들끼리 시선을 교환하는 사람들.
하지만 그들이 뭐라 반응하든 말든 상황은 갑작스럽게 급물살을 타기 시작했다.
“그럼 바로 불러 보도록 하지요.”
“아, 아니···.”
“저기, 하인리히 님?”
생각할 틈도 주지 않으려는 듯, 그는 머뭇거리며 자신을 부르는 이들을 무시하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 성큼성큼 걸음을 옮겨 한편의 창문을 활짝 열어젖혔다.
“하인리히 님? 부른다니··· 무엇을···?”
“이 세계엔 절대 있을 수 없는 존재.”
그는 맑은 하늘을 우러르며 찬미하듯 말을 이었다.
“차원의 파수꾼이자 균형의 조율자. 그리고 신의 뜻에 따라 세상을 관조하는 수호자.”
그 말에 반응하듯.
파지직—!
맑은 하늘의 한복판에 스파크가 튀었다.
그것은 한두 번으로 그치지 않고 연달아 이어지며 점차 그 영역을 넓혀 나가기 시작했다.
척 보기에도 심상치 않은 반응에 앉아있던 이들이 일제히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어, 엇?”
“자, 잠깐만요! 지금 여긴 서울 한복판···!”
그러나 그 이상 상황에 불길함을 느낀 누군가의 외침이 채 끝나기도 전.
파아앗—
눈부신 황금빛 광채와 함께.
[크오오오오——!]어마어마한 존재감이 담긴 포효가 사방을 휩쓸었다.
이상 현상이 발생했던 장소에 등장한 것은.
아름다운 금빛 물결에 뒤덮인— 수십 미터 크기의 거대한 생명체였다.
-위이이잉—! 위이이잉—!
그와 동시에 요란한 사이렌 소리가 도심에 울려 퍼졌다.
평화로웠던 도시가 혼란에 빠져들고, 여기저기서 터져 나온 소란에 일대가 난장판이 되었다.
‘조금 미안하긴 한데···, 그래도 이 정도는 해 줘야겠지.’
방금 오간 논란은 단순히 여기 있는 이들을 설득하는 걸로 끝나는 게 아니었다.
자신은 말은 여러 매체를 통해 전 세계로 퍼진 상태.
그럼 그들 모두를 납득시키고 자신의 말을 진지하게 받아들이도록 만들려면, 이참에 아예 세계인들의 머릿속에 똑똑히 박아 넣어야 하지 않겠는가?
그리고 슬쩍 시선을 돌려 조금 전까지 자신과 대화하던 이들을 바라본 하인리히는 자신의 노림수가 적중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저게, 대체···?”
“허!”
하나같이 입을 쩍 벌린 채 멍하니 창밖을 바라보는 이들.
저 존재를 마주한다면 누구나 직감적으로 느낄 수밖에 없었다.
저것은··· 저 생명체는 절대 인위적인 방법으로 흉내 낼 수 있는 존재가 아니라고.
환상이나 변신 능력 따위로는 절대로 넘볼 수 없는, 압도적인 격(格)과 종(種)의 차이가 혼을 짓눌렀다.
[크오오오오——!]펄럭— 펄럭—
유학 생활을 하며 열심히 학업에 열중하던, 여의주를 문 골드 드래곤이 재차 울부짖었다.
머리도 식힐 겸 오랜만에 외유를 나온 이 지구에 자신의 존재를 각인하듯이.
< 판테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