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overeign of the Infinite Clones RAW novel - Chapter (347)
노을빛 광채에 휘감긴 익숙한 인간의 형상.
앞서 몇 번이나 마주한 건 물론, 그때마다 치열한 사투를 벌여야 했던 숙적이 눈앞에 있었다.
‘번천회주.’
위기감이 치솟으며 해리스의 머릿속에 경종이 울렸다.
분명 쉽게 움직이지 못 하리라 예상하고 있었는데 이렇게 갑자기 모습을 드러낼 줄이야.
그것도 주변에 설치한 진법에 어떤 전조도 감지되지 않을 정도로 갑작스러운 등장이었다.
“칫.”
파앗—
단 한 번의 발구름으로 멀찍이 뒤로 물러난 그가 활을 강하게 움켜쥐며 긴장감을 끌어올렸다.
불러냈던 정령들도 어느새 그의 주변으로 모여들어 철통같은 방어 태세에 들어간 뒤.
정령 궁수 타입인 해리스의 주특기는 회피를 적극적으로 활용한 원거리 저격이다.
이렇게 가까운 거리에서 저 정도 강적과 대면하는 건···.
‘잠깐, 저건···?’
그렇게 쉴 새 없이 온갖 상념이 스쳐 지나가던 도중.
이대로 물러날지 증원을 불러서 제대로 붙어볼지를 고민하던 해리스의 눈이 가늘어졌다.
헬멧에 가려진 그의 별빛 동공이 연신 반짝거리며 갑작스러운 상황에 놓쳤던 단서들을 면밀히 분석하기 시작했다.
“아.”
공격이 막힌 직후 뒤로 물러나 상황을 파악하기까지 불과 수 초 남짓.
그러다 마침내 위화감의 정체를 깨달은 해리스가 나직이 불평을 토해냈다.
“···진짜 깜짝 놀랐잖아.”
서기관의 앞에는 여전히 빛을 휘감고 있는 번천회주의 형상이 있었다.
하지만 자세히 살펴보니 확실히 알 수 있었다.
저건 진짜 놈이 아닌 그 그림자, 사념의 일부를 투영한 것일 뿐이라는 걸.
‘과민반응이었군. 신성력을 이용한 성법의 일종인가.’
어쩌면 정말 번천회주 본인이 나설지도 모른다고, 그 가능성까지 상정하고 있었기에 생각 이상으로 긴장했던 모양이다.
물론 그렇다고 지금 상황이 낙관적인 것만은 아니었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저것은 등장만으로도 그의 전력을 담은 공격을 가뿐히 막아냈으니까.
[아델라인.]“아아—! 나의 주이시여! 이 미천한 종복이 주인을 뵙나이다!”
[귀찮은 놈이 엮인 것 같구나.]“죄, 죄송합니다! 제 능력이 부족한 탓에···!”
웅웅 울리는 목소리가 퍼져 나가며 무거운 존재감이 사위를 짓눌렀다.
서기관은 이미 해리스 쪽엔 관심도 주지 않고 그 존재 앞에 무릎 꿇고 앉아 연신 머리를 조아리고 있었다.
분명 번천회주 본인이 아닌 그로부터 투영된 파편의 일부일 뿐일진대.
[미안하지만 지금은 때가 좋지 않다. 하필 신성이 손상되는 바람에 지구의 간섭이 어느 때보다 강한 상태이니.]“면목 없습니다, 주이시여. 이 또한 제게 내려진 시련. 당당히 이겨내고 저의 가치를 증명하도록 하겠습니다!”
[흐음···.]신성력으로 이루어진 인간의 형상, 번천회주의 사념체가 고개를 돌려 해리스 쪽을 바라보았다.
주변에 수많은 정령들을 두르고 날을 세우고 있는 수상쩍기 그지없는 복장의 이방인을.
‘···날 알아봤나?’
조심스럽게 상황을 살피던 해리스가 침을 삼켰다.
이전 아우테리카에서 벌어진 싸움에 그도 한몫 거들었던 만큼, 번천회주가 그를 알아보더라도 그리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아무리 그가 초장거리 저격만으로 상대해 직접 얼굴을 마주한 적은 없다 해도, 놈 정도 되는 수준이라면 기운만으로도 상대를 식별하는 건 일도 아닐 테니.
[슬슬 투영을 유지하는 것도 한계로군. 남은 시간이 많지 않구나.]하지만 그의 예상과는 달리 놈은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그저 내색하지 않는 것뿐인지, 아니면 본체가 아니라 뭔가 제약이 있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놈은 다시 자신에게 경배를 올리는 서기관을 내려다보며 엄숙하게 말을 이었다.
[아델라인, 나의 사도여. 네게 영체를 허락하도록 하겠다. 네 손으로 직접 개벽을 방해하는 자를 처단하고 그 영육을 제물로 바치도록 하라.]“아아! 은혜에 감사드립니다, 주이시여!”
그리곤 갑자기 나타났을 때처럼, 그 몸이 한순간에 빛으로 분해되며 그 앞에 무릎 꿇고 있던 그녀의 몸으로 흡수되기 시작했다.
신성력에 대해선 성자급 지식을 가지고 있는 해리스는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지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강신(降神)?’
서기관은 번천회주를 신으로 모시는 사제이자 그에게 직접 힘을 내려받은 사도.
최고위 성직자 중에서도 선택받은 몇몇만 행할 수 있다는 그 의식에 그녀의 신성력이 한순간에 폭증하며 거세게 끓어올랐다.
“아아! 주께서 나와 함께하심이 느껴지는구나! 영광되고 거룩하도다!”
강력한 파동이 주변으로 번져나가며 그녀가 몸에 두른 신성력으로 이루어진 무구들에서도 용암과도 같은 뜨거운 기운이 타올랐다.
이전과는 확연히 달라진 그 기세에 해리스가 슬쩍 눈살을 찌푸렸다.
‘어쩐지 쉽게 끝나진 않을 것 같더라니. 2페이즈인가?’
의식의 영향으로 그녀가 가진 신성력의 양과 질 모두 기존의 서너 배 이상 폭발적으로 성장하기 시작했다.
단순히 신성력만 따져 봐도 그 정도였으니 다른 능력까지 포함한 종합 전투 능력은 그보다 훨씬 더할 터.
강신 상태에 접어든 서기관은 해리스조차 승리를 장담하기 어려운 강적이 되어가고 있었다.
다만— 게임 등의 매체와 현실 사이엔 결정적인 차이점이 하나 있었으니···.
‘지금!’
바로, 그는 상대가 변신을 전부 끝마칠 때까지 기다려 주는 친절한 적이 아니라는 것이었다.
우우웅—
해리스의 별 모양 동공이 빛나며 「은하수의 관찰자」가 강신 의식의 빈틈을 포착했다.
물론 이렇게 대놓고 선보일 정도인 만큼 의식 자체에 철저한 보안이 걸려 있긴 했으나, 그 정도로는 신성력 쪽에도 일가견이 있는 해리스의 시선을 완전히 속일 수 없었다.
고오오—
「세계수의 적자」, 「자연 동화」, 「자연의 부름」, 「자연지체」, 「요정 사법」, 「조화의 선율」, 그리고 「무유팔괘비공(改)」까지.
그가 가진 모든 능력이 한데 어우러지며, 번천회주의 등장부터 지금까지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며 은밀하게 끌어모은 힘이 일제히 폭사되었다.
———!
아직 채 준비를 끝마치지 못한 서기관에게로.
***
“헥타르!”
쿠르르릉!
해리스의 외침과 함께 바닥에서 거대한 석벽이 치솟았다.
단순한 돌이 아니라 자연의 기운이 듬뿍 담겨 어지간하면 금 하나 가지 않을 정도로 단단한 바윗덩어리.
그것은 순식간에 덩치를 키우며 한 인영의 앞길을 막아섰지만.
콰아앙!
곧이어 날아든 커다란 해머의 공세에 오래 버티지 못하고 산산조각 나고 말았다.
그저 처음 기대했던 대로 아주 잠깐 상대의 발목을 잡을 수 있었을 뿐.
‘생각보다 더 까다롭네. 진법 때문에 운신의 폭에도 제한이 있고.’
그에 해리스가 혀를 차며 인상을 찌푸렸다.
그는 연신 뒤로 물러나면서도 상대를 견제하기 위해 쉬지 않고 손을 놀리며 활시위를 튕겼다.
불그스름한 빛을 줄기줄기 흩뿌리며 탱크처럼 저돌적으로 달려드는 여전사, 서기관을 향해서.
쉬익—! 쐐액!
쿠웅! 콰앙!
하늘에서 떨어져 내린 벼락이 방패에 가로막히고, 사방을 집어삼키던 불길이 해머의 풍압에 밀려났다.
날카로운 칼날 바람 또한 단단한 갑주의 표면을 긁고 지나갈 뿐.
노을빛 광채에 휩싸인 채 묵묵히 모든 방해를 뚫고 전진하는 그 모습은 말 그대로 하늘의 신장 그 자체였다.
‘쯧, 그래도 처음 예상했던 것보다는 훨씬 할 만하긴 한데···.’
그것도 전부 강신 의식 도중에 허를 찌르듯 가해진 전력을 다한 기습 덕분이었다.
예상했던 대로 그 의식은 강대한 신성에 의해 보호받고 있었으나, 처음부터 작정하고 냅다 내리꽂은 필살기에 전혀 영향을 받지 않을 수는 없었다.
아예 그걸로 끝이 났다면 금상첨화였겠지만 그 정도까지 바라는 건 너무 큰 욕심이겠지.
“감히! 감히! 죽여주마, 불신자 놈이!”
물론 상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것 같았지만.
이전까지 하던 존대는 어디로 갔는지, 얼굴 전체에 잔뜩 핏대가 솟은 채로 거친 말을 쏟아내는 서기관의 모습에 해리스가 절레절레 고개를 내저었다.
“흥분을 조금 가라앉히시는 게 어떠십니까? 그거 건강에도 별로 좋지 않을 텐데···.”
“영광된 의식을 방해하다니! 내 반드시 네놈을 산 채로 불태워 주께 번제해 주마!”
“아니, 제가 뻔히 앞에 있는데도 무시하고 당당하게 일을 벌이기에 자신 있는 줄 알았죠. 안전 불감증도 정도가 있지, 그렇게 중요한 거였으면 어디 안전한 곳에서 하든지 해서 좀 더 보안에 신경을 쓰셨어야···.”
“닥쳐, 닥쳐라! 기필코 그 혀를 뽑아주마!”
조목조목 사실을 적시하며 처우의 부당함을 토로해 봤으나, 흉신악살 같은 얼굴로 한껏 눈이 돌아간 상대는 그 말을 들어줄 생각이 없는 듯했다.
뭐, 애초에 말을 꺼낸 것도 도발하려는 목적이 더 크긴 했지만.
‘그나저나 이대론 곤란한데. 생각 이상으로 시간이 너무 오래 걸리고 있어. 강신으로 인한 강화에도 시간제한이야 있겠지만···.’
문제는 강신이 채 끝나기도 전에 이번 일에 대한 타임아웃이 먼저 올 것이라는 점이었다.
객관적으로 보면 자신은 판테온의 수뇌부를 습격한 테러리스트에 불과하지 않던가?
사실 지금까지 지체한 것만 해도 상당히 부담 가는 일이었다.
‘자연지기를 이용한 진법으로 최대한 흔적을 위화감 없게 감추긴 했는데.’
당연히 그것도 영원히 갈 수는 없었다.
내부에서 누적된 충격에 의해 결국 진법이 붕괴하든, 외부에서의 수색에 의해 들통나든, 조만간 이 상황도 파탄에 이르게 되겠지.
지금은 당장 미국 가디언들이 들이닥치더라도 조금도 이상할 게 없는 상황이었다.
‘···그렇게 둘 순 없지. 이 절호의 찬스를 놓치면 언제 다시 기회가 올지 모르니.’
음지에서 활동하던 율령자와 자발적으로 함정으로 끌어들였던 공작, 닥터와는 사정이 달랐다.
서기관은 엄연히 양지에서··· 그것도 판테온이라는 종교계의 거두로서 활동하는 인물.
이번 일에 위협을 느낀 그녀가 작정하고 양지의 껍데기를 뒤집어쓰고 버틴다면 자신도 함부로 건들 수 없게 된다.
자칫하다간 여론이 악화되는 건 물론, 힘을 합쳐야 할 이들 사이에 괜한 분열만 야기할 수 있었으니까.
“바라옵나이다, 나의 주이시여! 개벽의 길을 막아서는 불신자에게 심판을 내릴 수 있는 힘을!”
그때, 기어이 갖은 방해를 뚫고 해리스에게 접근한 서기관이 그를 향해 거대한 해머를 휘둘러왔다.
『차원 장벽 완화』로 정령에게 가해진 제약이 제법 풀리긴 했지만, 그 정도로는 한껏 고조된 상대의 기세를 억누를 수 없었던 것이다.
애초에 신성력 자체가 더욱 상위의 에너지이기도 했고.
쐐애액!
“흐읍!”
“읏? 무슨···!”
하지만 공기를 가르며 쇄도한 커다란 전투 해머가 목표에 적중하는 일은 없었다.
커다란 궤적을 그리며 휘둘러진 그것이 그 파괴력을 제대로 터트리기도 전, 기묘하게 뻗어진 해리스의 손길에 의해 자연스럽게 그 궤적이 비틀려 버렸으니까.
쿠웅!
결국 해머는 빈 바닥을 찍고 말았고.
그는 쩍쩍 갈라지고 뒤집어지는 대지의 틈새에서 뜨겁게 타오르는 노을빛 신성력을 피해 뒤로 물러나며 인상을 찡그렸다.
한 손으론 공격을 흘린 손목을 연신 주무르면서.
‘···무겁군. 최대한 유(柔)의 묘리로 흘렸는데도 이 정도라니.’
그동안은 자연력과 정령을 보조하는 데에 주로 사용하고 있었지만, 그가 익힌 「무유팔괘비공(改)」은 엄연히 무공의 한 갈래였다.
그것도 종합 등급이 무려 S급에 달하는, 한 차원에서 가히 최고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절세 무공.
휴고의 「만류귀종」을 통해 무(武)의 이치를 맛본 그에게 그것을 응용하는 것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효율이 조금 떨어지긴 하겠지만 말이지.’
그보다 일이 이렇게까지 되니 마음이 더욱 확고해졌다.
제약을 안은 상태로도 저 정도의 저력을 보여주는 상대다.
이대로 살려 보냈다간 분명 백 퍼센트 후환이 되어 돌아올 터.
“쫄래쫄래 잘도 도망치시는군요. 하지만 언제까지 그럴 수 있을까요?”
그때, 방금 전의 공격으로 머리에 뻗친 열이 어느 정도 가라앉았는지 폭주 기관차처럼 날뛰던 서기관이 차분하게 입을 열었다.
거친 폭언을 내뱉던 말투도 다시 처음의 정중한 가식을 뒤집어쓴 채로.
“이 결계, 진법을 이용한 거죠? 분명 무림계에서 파생되었다고 알고 있는데 정령사가 사용하다니 신기하군요. 그 두 가지 신비가 섞인 차원은 그리 흔치 않을 텐데···.”
잠시 이맛살을 찌푸리고 고민하던 그녀는 곧 고개를 내젓다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이제 와선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듯이.
“어쨌든, 이제 끝입니다. 결계류의 신비는 아무리 공을 들여도 한계가 있는 법이죠. 생각 이상으로 견고해서 시간이 조금 걸리긴 했지만.”
그 자신만만한 태도에 해리스의 표정이 굳어졌다.
그녀의 말대로 누적된 충격에 결국 진법이 흔들리며 상당한 균열이 발생하고 말았으니.
그것을 파악한 직후 곧바로 전력을 다해 다시 수복하긴 했으나, 원래 보안이란 것은 백번 잘하더라도 한 번 뚫리는 순간 그 가치를 상실하는 법이었다.
“앞으로 많아 봐야 10분. 그쯤이면 판테온과 가디언 정예들이 일대를 완전히 봉쇄하고 이곳으로 들이닥치겠지요. 당장 당신을 제 손으로 직접 으깨주지 못하는 건 아쉽지만···. 뭐, 시간이 조금 미뤄지는 것뿐이니까 말이죠.”
말을 끝마치고 화사한 미소를 짓는 서기관.
붉은빛이 감도는 신성력을 두른 채 웃는 얼굴로 태연하게 살벌한 소리를 내뱉는 그 모습은 신의 사도라기보단 악마의 하수인으로 보일 정도로 섬뜩하기 그지없었다.
“많아 봐야 10분인가요···?”
물론, 공포심 따윌 느낄 리가 없는 해리스는 그런 위협 따위엔 전혀 아랑곳하지 않았다.
가만히 주변을 살펴보다 가볍게 고개를 끄덕인 그가 천천히 말을 이었다.
“조금 빠듯하긴 하지만···. 음, 그 정도면 충분하겠죠.”
“···하?”
그 태연한 반응에 서기관이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그러다 이내 그것이 단순히 허세일 뿐이라고 생각했는지 금세 평온을 되찾곤 입가에 조소를 머금었다.
가소롭다는 듯이 비틀린 입가에 오만한 눈빛이 서늘하게 번들거렸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의 그런 모습은 허세도, 자기 과신도 아니었다.
그도 그럴 것이—.
「개체 집결」
“카하하핫! 이거 오랜만인데! 좀 느긋하게 즐기고 싶은데, 시간이 없다는 게 아쉽구만!”
“···조금 여유를 두는 게 좋겠군. 5분 안에 끝내도록 하지.”
그에겐 정말로 믿는 것이 있었으니까.
정의의 용사들에게 대대로 전해져 내려오는 유구한 전통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