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overeign of the Infinite Clones RAW novel - Chapter (385)
툴크 왕국 북부에 위치한 타라크.
“흐읍~ 하아— 역시 이쪽 동네 공기는 끝내주는군. 아무리 맡아도 질리지 않아.”
거리를 거닐던 검은 머리의 평범한 청년이 깊게 심호흡하며 만족스럽게 미소 지었다.
인간일 적의 모습으로 의태 한 악마, 미야모토 켄.
그는 즐거운 기분으로 바쁘게 돌아가는 도시를 감상하며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역시 오길 잘했어. 벌써부터 돌아가기 싫어지는군.’
온통 마이너스 에너지가 가득한 마계의 환경은 인간이자 지구인이었던 그에겐 여간 고역이 아닐 수 없었다.
물론 악마가 되어버린 지금의 육체엔 오히려 이로운 여건이라 할 수 있었지만···.
‘그래도 난 그쪽의 퀴퀴한 공기보단 이쪽이 더 마음에 든단 말이지.’
오랜 시간 거주하며 마계의 환경에도 제법 익숙해졌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이렇게 밖으로 나와 보니 그간 무뎌졌던 감각이 한꺼번에 되살아나는 기분이었다.
‘내가 마계에 떨어진 지도 벌써 이십 년이 넘었나.’
그리고 그건 그가 이 거지 같은 세상에 전송된 지 삼십여 년이 다 되어간다는 소리였다.
그러다 문득.
우뚝 발걸음을 멈춰 선 켄이 인상을 찌푸렸다.
갑작스럽게 떠오른 화두에 머릿속이 간질간질해졌다.
제대로 귀환만 했다면 자신은 지금쯤 지구에서 남부럽지 않게 살고 있었을 것이다.
그 정도 능력은 있었으니까.
그런데 어쩌다 지금 이런 꼴이···.
“···뭐, 됐나. 마침 쓸 만한 능력을 가진 녀석도 찾았고.”
하지만 들불처럼 솟구치던 상념은 언제 그랬냐는 듯 순식간에 사그라들었다.
불씨가 피어오르기 무섭게 물 한 바가지를 끼얹은 것처럼.
한결 편안한 표정이 된 켄이 어제의 만남을 떠올렸다.
모종의 임무를 받고 이곳 대륙에 파견되어 정보를 조사하던 그는 깜짝 놀랄 만한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이 아우테리카에선 볼 수 없으리라 여겼던 지구산 물품이 대놓고 유통되고 있었던 것이다.
물론 아직은 고위층 사이에서만 거래되고 있기는 하지만, 사실 그것만 해도 대단한 일이었다.
‘그 수가 한두 개가 아니었으니까.’
전송된 지구인의 소지품 몇 개가 나도는 수준이 아니었다.
거대 상회가 직접 나서서 행하는 대규모 유통.
거기다 그 과정에서 입수한 물건도 보통이 아니었다.
딸깍— 칙!
어느새 인적 없는 뒷골목에 들어선 켄이 주머니에서 금속 라이터를 꺼내 뚜껑을 열어 불을 지폈다.
은은한 기름 냄새와 함께 작게 타오르는 불씨.
휴버트라는 이름의 각성자가 유통하고 있는 ‘지구산 상품’ 중 하나였다.
“···설마 이런 것까지 가지고 올 수 있을 줄이야. 거참, 신기한 능력이 다 있군.”
지구에서는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는 물건이었으나, 이 세계에선 말 그대로 이계의 신문물이나 다름없는 물건이었다.
그런데 그런 걸 이렇게 마음대로 무한정 가지고 올 수 있다니.
그는 면전에서 갓 만든 지구의 음식들로 진수성찬을 차리던 그의 모습을 떠올리며 입맛을 다셨다.
“···역시 그냥 내버려 두기엔 아깝지.”
전날 그가 상대가 원하는 정보까지 풀고 순순히 물러난 것은 단순한 호의 때문이 아니었다.
그저, 그땐 아직 준비가 다 끝나지 않았기에 상대를 안심시키려 했을 뿐.
‘그 정도 능력은 고유스킬 외엔 생각할 수 없다.’
악마가 된 이후 자신은 사용할 수 없게 된 고유스킬.
그것은 어떻게 빼앗을 수 있는 종류의 능력이 아니었다.
가장 좋은 방법은 사로잡아서 노예로 부려 먹는 것인데, 그건 상대가 ‘귀환’을 이용해 지구로 도망가 버릴 수 있다는 위험이 있었다.
그렇다고 언제까지 자기가 옆에 붙어서 감시할 수도 없는 노릇이고.
‘역시 이럴 때 가장 좋은 방법은 정신 조작이지.’
애초에 도망갈 생각도 하지 못하도록, 철저하게 자신에게 봉사하며 능력을 사용하도록 만들면 다른 고민은 할 필요가 없었다.
물론 언젠가 휴버트도 정착자가 되어 그 유용한 능력이 사라져 버리겠지만, 그가 아우테리카에 온 지는 십 년도 채 되지 않았다고 했으니 아직 남은 시간은 충분했다.
‘문제는 내가 그쪽 방면엔 재주가 없다는 건데···.’
그 때문에 시간이 필요했던 것.
하지만 그 문제도 막 해결된 참이었다.
“왔군.”
뒷골목에 퍼져 나가는 켄의 목소리.
“쯧, 한창 바쁜 와중인데 꼭 이렇게 오라 가라 하셔야겠소?”
그 말에 대답하듯 늙수그레한 노인의 음성이 골목 안쪽에서 흘러나왔다.
이어서 뚜벅뚜벅하는 발소리와 함께 한 노신사가 모습을 드러냈다.
순백의 양복을 입고 매끈하게 가공된 나무 지팡이를 든 그가 하얀 장갑을 낀 손으로 하얀 중절모를 살짝 들치며 켄을 흘겼다.
“아무리 그대라도 공짜는 없소. 대가는 알고 있겠지?”
“이미 다 끝난 얘기 아닌가? 계약대로 할 테니 이제 가 보자고.”
“쯔쯔쯧.”
마계에서 이 땅으로 파견된 건 켄 혼자만이 아니었다.
그중엔 정신 계통에 능한 악마도 있었고, 그에겐 상대에게 협조를 요청할 수 있는 수단도 있었다.
‘뭐, 대신 나도 이놈의 일을 좀 도와줘야겠지만. 그 정도야 충분히 감수할 만하지.’
삼십 년 만에 MSG가 잔뜩 쳐진 지구의 음식을 접한 그는 눈이 돌아간 상태였다.
당연히 휴버트와 협조하며 물품을 제공받을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명색이 자신은 마계의 백작급 악마.
그런 자신이 고작 인간 장사치 나부랭이에게 알랑방귀를 뀌며 먹이를 받아먹을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또 언제 놈이 지구로 돌아갈지도 모르고 말이야.’
모르긴 몰라도 저렇게 상회를 키우며 벌어들인 카르마의 양 또한 어마어마할 것이다.
신체 능력도 준수한 데다 별다른 딜레이 없이 고유스킬을 남발하는 걸 보니 사용한 포인트도 상당해 보이나, 언제든 지구로 돌아갈 포인트 정도는 쟁여져 있다고 보는 게 좋을 터.
“내가 앞장서도록 하지.”
“그러시오.”
우호적인 분위기 속에 이뤄진 전날의 방문으로 상대가 방심하고 있을 지금이 적기였다.
그렇게 잠깐의 시간이 흐른 뒤.
두 명의 악마가 휴버트의 집무실로 들이닥쳤다.
***
전날 식사와 함께 정보를 교환하는 평화로운 만남이 이루어졌던 자리.
“···이게 무슨 짓이지?”
바닥에 서류 뭉치가 흩어져 어지럽혀진 그 공간에서 딱딱하게 굳은 음성이 흘러나왔다.
집무실 의자에서 벌떡 일어선 휴버트가 자신의 앞에 재차 등장한 불청객들을 노려보며 이를 갈았다.
“뭐, 보는 대로지.”
그런 상대의 반응에 넉살 좋게 대꾸한 켄이 빙글빙글 웃으며 어깨를 으쓱였다.
그 표정과 어울리지 않는, 도망치려 드는 순간 주저 없이 목을 베겠다는 살기를 물씬 풍기면서.
습격은 한순간이었다.
그는 이미 아무도 모르게 집무실에 숨어든 전적이 있는 몸이었다.
자신이 떠난 후에 다시 보안을 재정비했는지 어제보다 조금 까다로워지긴 했으나, 이 정도쯤이야 그에겐 오십보백보일 뿐이었다.
“호오, 이 아이는···? 이거 굉장히 흥미롭군.”
그의 뒤편에서 순백의 노신사가 바닥에 기절해 쓰러진 소녀를 유심히 바라보며 자신의 턱수염을 쓰다듬었다.
상회주의 비서로서 아래층에서 자잘한 업무를 수행하던 디아나.
그런 그녀가 지금 이곳에 있는 이유는 다 그 예민한 후각 때문이었다.
침입자의 방문을 알아차리는 것이 늦었던 어제와는 달리, 한 번 기억한 냄새에 민감하게 반응한 그녀가 이상을 눈치채고 휴버트에게 경고를 하기 위해 서둘러 달려왔다가 함께 변을 당한 것이다.
“왜? 그 꼬마한테 뭐라도 있나?”
“···아아, 인간치곤 자질이 굉장히 뛰어난 아이라서 말이오. 제자 삼아서 잘만 가르치면 훌륭한 전력이 될 것 같군. 허허헛.”
“쯧, 그런 건 나중에 알아서 하고. 일단 이쪽 일부터 마무리하자고.”
노신사는 아무렇지 않게 거짓말을 내뱉으며 어깨를 으쓱였다.
아무리 한배를 탄 사이라지만 이런 보물에 대한 정보를 공유할 생각은 없었으니까.
‘허어, 설마 마지못해 따라온 곳에서 신의 파편을 품은 아이를 발견할 줄이야. 저 멍청한 놈 덕분에 뜻하지 않게 횡재했구나.’
살아온 시간이 고작 수십 년에 불과한 데다 무투파인 켄과는 달리 그는 천 년이 넘는 세월 동안 신비를 연구한 몸이었다.
비록 무력이 부족하여 아직 자작급 악마에 불과하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안목에 차이가 있을 수밖에 없는 노릇.
흥분되는 마음을 연륜으로 가라앉힌 그는 태연함을 가장하며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는 이 집무실의 주인에게 다가갔다.
‘좋구나, 좋아. 이걸로 저 무도한 놈에게 빚을 씌우고 신의 파편까지 손에 넣는다면···.’
깊은 곳에서 끓어오르는 검은 욕망에 노신사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동시에 괜스레 상회주라는 인간에 대한 호감이 치솟았다.
이게 다 저자 덕분이지 않은가?
‘뭐, 그렇다고 봐 줄 생각은 없다만. 적어도 아프진 않게 해 주지.’
그것이 그가 해 줄 수 있는 최대한의 호의였다.
갑작스러운 상황에 혼란에 빠진 듯 굳어있는 휴버트의 앞에 선 노신사가 자신의 중절모를 치켜올렸다.
그리고 그의 눈에서 보랏빛 광망이 번뜩인 순간.
“큭, 대체 무엇을···!”
“허허허, 금방 끝나니 저항하지 말게나. 괜히 자네만 힘들어져.”
「명경지수」를 비롯한 정신 방벽이 속절없이 무너져 내리기 시작했다.
비틀거리며 뒤에 놓여있던 집무실 의자 위로 맥없이 쓰러지는 휴버트.
뇌리로 파고든 사악한 기운이 앞을 가로막는 모든 것들을 거침없이 분쇄하며 내부로 깊숙이 침투했다.
‘제법이군. 이 정도 정신력이면 어중간한 대마법사보다 오히려 나은 것 같은데. 이자가 진지하게 수련에 정진했으면 언젠가 초월에 닿았을지도.’
별다른 무력도 없는 주제에 정신력만은 극의에 이를 정도다.
술사가 자신이 아니었다면 아마 대부분 단단한 벽을 뚫지 못하고 역풍을 맞아 정신에 타격을 입었겠지.
과연 이만한 대상회를 꾸린 게 우연은 아닌지 그야말로 비범하기 이를 데 없는 정신력이었다.
‘프흐— 안타까운 일이야. 이 프란체스만 아니었다면, 시간만 있었다면 필히 영웅이 되었을 인재가 이렇게 꺾이게 되다니. 비극이로다, 비극이야.’
그러나 그런 생각과는 달리 그의 만면엔 지금 상황이 즐겁다는 듯 은근한 웃음이 걸려 있었다.
한껏 점잔을 떨곤 있으나 그 역시 타인의 파멸을 즐기는 악마였으니까.
‘좋아, 그럼 슬슬 작업을 시작해 볼···.’
하지만 그 웃음은 오래 가지 못했다.
거침없이 저항을 분쇄하며 도달한 내면세계.
그곳에 그가 한평생 본 적이 없는 장엄한 광경이 펼쳐져 있었던 것이다.
“···뭐냐, 저건···?”
성채.
아니, 그냥 벽인가?
보고도 이해할 수 없었다.
좌우로 길게 뻗은 장벽은 그 끝이 보이지 않았고, 위로는 하늘에 닿을 정도로 치솟아 있었다.
마치, 차원을 나누는 경계선처럼.
‘어떻게 저런 게 있을 수 있지?’
프란체스는 저 벽을 직시하는 순간 단번에 깨달을 수 있었다.
저건 단순히 규모만 큰 게 아니라는 걸.
백날 부딪쳐 봐야 작은 흠집을 내기도 전에 자신의 몸이 먼저 박살 나 버리리라.
그야말로 물 샐 틈 하나 없는 난공불락의 방벽.
아무리 이곳이 실체가 없는 정신세계라 하나, 저건 자신이 상상할 수 있는 한계를 훌쩍 넘어선 무언가였다.
이런 게 일개 상인의 내면세계일 리가···.
‘···물러난다.’
제대로 상황을 파악하진 못했지만 프란체스는 그 이상 망설이지 않고 직감에 따라 빠르게 움직였다.
뭔가가 잘못되었다는, 전에 없이 강렬한 위기감이 거칠게 뇌리를 울렸다.
하지만.
“후후, 벌써 가려고?”
빠르게 물러나기엔 그는 이미 너무 깊이 들어와 있었다.
얼마 빠져나가지도 못한 그의 앞을 막아서는 ‘무언가’.
그것을 정면으로 마주한 순간, 프란체스의 혼이 거세게 뒤흔들렸다.
‘큭! 이게, 무슨···!’
이곳은 오직 정신력만으로 우열이 가려지는 동시에 서로의 정신이 가장 취약해지는 세상.
루비처럼 빛나는 한 쌍의 붉은 눈과 마주하자, 악마 프란체스를 이루는 존재의 근간이 뒤틀리며 재조립되기 시작했다.
‘아, 안 돼···!’
그는 최대한 저항하기 위해 노력했으나, 시간조차 의미를 잃는 이 공간 속에서 그 발버둥은 뜻을 이루지 못하고 흩어져 버릴 뿐이었다.
그렇게 억겁과도 같은 찰나의 시간이 흐르고.
“기껏 여기까지 왔는데 우리 잠깐 대화 좀 하지 않을래?”
앞을 막아선 존재의 달콤한 목소리에.
“···기꺼이”
멍하니 있던 노신사가 감격에 겨운 듯 들뜬 어조로 답했다.
“명에 따르겠나이다···.”
뭔가에 홀리기라도 한 것처럼.
***
“···프란체스?”
켄의 눈꼬리가 꿈틀거렸다.
그리고 다시 조심스럽게 옆의 동료를 불렀다.
“왜 그러지? 문제라도 생겼나? 작업은 어떻게 됐지?”
걱정보다는 짜증이 섞인 의문이었지만, 가볍게 몸을 떨던 프란체스는 그렇게 재촉받는 와중에도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아니, 뭔가 변화가 있긴 했다.
휘청— 휘청—
이제는 숫제 취하기라도 한 듯 제자리에서 몸을 비틀거리는 순백의 노신사.
그가 손에 쥐고 있던 나무 지팡이는 이미 바닥을 뒹굴고 있었고, 힘없이 흔들리는 머리에 얹어진 중절모는 떨어질 듯 말 듯 위태롭게 매달렸다.
“···젠장.”
그쯤 되니 켄도 뭔가 이상이 생겼다는 걸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정신계 능력은 강력한 효과를 가진 만큼 그 페널티도 막대한 기술.
도저히 믿기지 않지만 아무래도 저 노인네가 정신 조작에 실패한 모양이었다.
별다른 무력도 가지지 못한 일개 상인 나부랭이를 상대로.
‘죽여야겠군.’
켄의 시선이 여전히 고개를 푹 숙이고 있는 휴버트에게로 향했다.
아깝지만 어쩔 수 없다.
정신 조작이 실패한 이상, 저런 불확정 위험 요소를 방치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으니.
그렇게 아쉬움에 망설이던 그가 끝내 손을 쓰기 직전.
연신 휘청거리던 프란체스의 몸이 뚝 멈춰 섰다.
정지 버튼이라도 누른 듯 제자리에 딱딱하게 굳은 노신사.
“후우— 이거 실례했군.”
그리고 다음 순간, 얼음이 녹아내리듯 부드럽게 움직이기 시작한 그가 한숨을 푹 내쉬며 몸가짐을 바로 했다.
바닥에 떨어진 지팡이를 주워 들고, 삐뚤어진 중절모를 바로 했으며, 흐트러진 양복을 가다듬었다.
“···프란체스? 정말 괜찮은 건가?”
“아아, 걱정하지 마시오. 지금 난 그 어느 때보다 멀쩡하니.”
“정신 조작은? 제대로 끝냈나?”
“허허허, 나 프란체스요. 아무 문제 없소.”
켄이 평소처럼 느긋하게 대답하는 노신사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확실히 그에게선 별다른 이상이 느껴지지 않았다.
연신 몸을 비틀거리던 게 마치 환상이라도 되는 것처럼.
“그런데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아깐 왜 그런 거냐?”
그렇기에 도저히 묻지 않을 수 없었다.
정신 조작 과정에서 어떤 문제가 있었던 건지.
대체 무엇 때문에 저 위험한 힘을 다루는 악마가 그런 반응을 보였던 건지.
“아, 별거 아니오.”
그렇기에.
돌아온 대답을 들은 켄은 인상을 찌푸릴 수밖에 없었다.
“잠깐 나의 주인을 뵙고 왔을 뿐이니.”
“···뭐?”
“아아— 혹시 질투하시는 거요? 허허허, 걱정하지 마시오. 그분은 우리 모두의 주인이시니, 그대도 곧 그분의 용안을 뵐 수 있을 거요.”
엉뚱하기 그지없는 동문서답.
그 뜬금없는 헛소리에 뭔가 싸늘함을 느낀 켄은 다시 유심히 프란체스를 바라보았다.
하얀 중절모, 하얀 양복, 하얀 장갑과 하얀 구두, 그리고 윤기 나는 나무 지팡이.
평소처럼 단정한 노신사의 모습이었지만.
그중에 한 가지, 아까와는 달라진 것이 있었다.
그 이질적인 요소가 그의 눈에 선명히 파고들었다.
‘표정이···.’
평소처럼 무언가 꿍꿍이를 숨긴 속을 알 수 없는 표정이 아니었다.
부드럽게 휜 눈매와 살짝 치켜 올라간 입꼬리.
우상이라도 만난 듯 상기된 그 얼굴엔 주체하지 못한 기쁨과 환희가 넘쳐흐르고 있었다.
“···X발.”
켄의 입에서 욕설이 흘러나왔다.
아무리 봐도 멀쩡한 게 아니었다.
돌아버려도 단단히 돌아버렸다.
그리고 그 원인은 그가 직전까지 정신 조작을 시도하던 상회주, 휴버트일 터.
‘지금이라도 놈을 처리하면!’
그에 다시 집무실 의자가 있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린 그는.
“하?”
그 찰나의 순간, 갑자기 일변한 세상에 헛숨을 토해냈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상회의 집무실이었던 공간.
그곳이 어쩐지 익숙한 풍경으로 바뀌어 있었다.
보랏빛이 감도는 하늘과 검게 물든 대지, 나무 한 그루 없는 너른 황야와 피부를 스쳐 지나가는 메마른 바람.
그리고 대기에 가득 한 음에너지까지.
“···마계?”
그 모습은 마치, 마계에서도 가장 황폐하다는 버려진 대지를 연상케 했다.
그리고—.
“어때? 나의 「마천의 세계」는.”
영혼을 뒤흔드는 매혹적인 목소리와 함께, 그 한가운데에서 갑자기 모습을 드러낸 그 존재는.
이상할 정도로 이 세상과 잘 어울렸다.
“어서 와. 나의 세계에.”
분명 어울리지 않아야 하는데.
한없이 아름답고 끝없이 고귀하며, 당장이라도 심장을 뽑아 바치고 싶은 저 절세가인과는.
“자, 그럼 이제···.”
사막 한가운데에 피어오른 한 송이 꽃처럼.
고독하며 오롯한— 세계의 왕이 미소 지었다.
“좋은 말로 할 때 꿇어. 뒤지기 싫으면.”
그 고운 목소리와 어울리지 않는, 조금 거친 언사와 함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