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overeign of the Infinite Clones RAW novel - Chapter (390)
한순간에 주변의 공기가 일변했다.
“······.”
“···허어.”
함부로 입을 열어선 안 될 것 같은 무거운 기류.
하지만 그 와중에도 계속해서 시선을 잡아끄는 흡입력.
꿀꺽.
현장에 있던 이들이 저도 모르게 마른침을 삼키는 동안에도 그 존재의 발길은 멈추지 않았다.
사뿐사뿐 가볍게 내딛는 것 같으면서도 보보마다 공간을 찍어 누르는 듯한 패기가 담긴 발걸음.
묘한 긴장감이 어린 공기는 그녀가 이 자리에서 가장 높은 지위에 있는 이의 앞에 도달하고서야 사라졌다.
그 얼굴에 걸린 해사한 미소에 의해.
“후후, 이렇게 만나게 되니 반갑네. 내 이름은 헬라야. 앞으로 잘 부탁해?”
단지 웃으며 몇 마디 내뱉은 것뿐이었다.
그러나 그 모습은 이 자리에 있는 이들의 뇌리에 아까와는 다른 의미로 깊이 각인될 수밖에 없었다.
···아니, 사실 머리보다는 가슴에 새겨진 것이 더욱 컸다.
‘말 그대로 마성(魔性)이로구나.’
한 손을 가슴 위에 댄 드림 워커의 대모가 속으로 나직한 감탄사를 토했다.
이쪽 방면으로는 차원 제일이라 자부하는 만큼, 그 내성 덕분에 어지간한 유혹엔 꿈쩍도 하지 않는 심장이 평소의 배는 빨리 뛰고 있었다.
자신이 이 정도인데 다른 이들은 오죽하랴.
“오호호, 반갑습니다. 저는 현재 드림 워커를 이끌고 있는 리리아나라고 합니다. 번거로움에도 불구하고 이 먼 곳까지 일부러 찾아와 주신 점, 진심으로 감사를 표합니다.”
하지만 그녀는 겉으로 내색하지 않고 태연하게 상대의 말을 받았다.
처음부터 반말로 일관하는 상대와 대조적으로 귀부인이라도 된 듯한 예스러운 태도를 보이며.
“그런데 여기는 대화하기 적절하지 않아 보이는군요. 일단 안쪽으로 가실까요? 귀한 손님을 맞이하기 위해 맛있는 다과를 준비해 두었답니다.”
그러고는 여전히 어수선한 주변을 쓱 둘러보곤 헬라를 안쪽으로 인도했다.
이곳은 병력 운송의 핵심이나 다름없는 중요 시설.
항상 긴장한 채로 운용해야 할 곳이지 지금처럼 다른 데에 정신이 팔려 있어도 될 장소가 아니었다.
‘그나저나···.’
그녀는 자리를 옮기면서 시아나와 재회의 인사를 나누는 헬라를 흘깃 훔쳐보았다.
이미 완숙한 초월지경에 다다른 그녀는 그것만으로도 많은 정보를 읽어낼 수 있었다.
상대의 보폭과 거기에 실린 무게, 호흡의 주기와 깊이, 말할 때의 표정 변화와 눈동자의 움직임, 본인조차 인지하지 못하고 있던 습관과 제스쳐 등.
그 모든 요소를 종합한 끝에 나온 결론은 하나였다.
‘···후, 역시 르레이에일 리가 없지.’
바로 본인의 착각이었다는 것.
굳이 세세한 점까지 따지고 들어갈 필요도 없었다.
애초에 외모는 물론이고 체형부터 마력의 성질까지 많은 부분에서 자신이 알고 있던 마왕과 차이가 있었으니까.
‘하지만 닮았어.’
그것만큼은 그녀조차 차마 부정할 수 없었다.
무엇보다 처음 마주한 순간 한눈에 그 이름부터 튀어나올 정도이지 않았던가?
무어라 딱 꼬집어 말할 순 없었으나, 상대의 주위를 감도는 묘한 분위기는 리리아나가 오래전에 동경하던 군주와 놀랍도록 흡사했다.
‘거기다 저 눈과 뿔도 그렇고. 확실해. 이자는 르레이에의···.’
그녀의 눈길이 헬라의 얼굴로 향했다.
검은 바탕에 붉은 눈동자의 역안과 살짝 구부러진 채 높게 솟은 검은 뿔.
다른 건 다 그렇다 쳐도, 저건 아무리 봐도 전대 마왕의 상징이지 않나!
그렇게 대모가 한창 상념에 잠겨 있던 도중, 문득 그 신비로운 역안과 정면으로 눈이 마주쳤다.
머릿속을 헤집는 복잡한 생각 때문에 시선을 제대로 수습하지 못한 작은 실수였다.
“후훗, 묻고 싶은 게 많아 보이네?”
무슨 말을 하려는 지 다 안다는 표정.
하지만 헬라는 그에 대해선 더 이상 입을 열지 않았다.
그저, 막 도착한 응접실의 문을 먼저 열고 안쪽을 향해 한쪽 팔을 뻗으며 싱긋 미소 지을 뿐.
“대화는 서로를 이해하기 위한 가장 효율적인 소통 수단이지. 보아하니 딱히 여유도 없어 보이는 데 괜히 시간 낭비하지 말고 바로 본론으로 넘어가자.”
그러고는 자연스럽게 그 내부로 사뿐사뿐 걸어 들어갔다.
마치, 자기가 이곳의 주인이라도 되는 것처럼.
***
‘여기가 드림 워커의 본거지인가? 과연 전대 마왕을 배출한 명문이구나. 그동안 접한 어중이떠중이들과는 차원이 다르네.’
헬라가 내심 감탄을 터트리며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겉으로 내색하진 않았지만 그녀는 지금 상황에 굉장히 만족하고 있었다.
‘이 정도면 내 일에도 상당히 도움이 되겠어. 아무래도 난 후발주자인 만큼 기반이 튼튼하면 튼튼할수록 좋으니까.’
마계에 행사할 수 있는 영향력이 강할수록 자신의 능력으로 인한 세력의 확장 속도 또한 더욱 빨라진다.
드림 워커가 지금 진행되는 작업에 도움을 준다면 이른 시일 내에 강력한 세력을 구축할 수 있을 터.
거기다가 리리아나라는 서큐버스의 대모는 그간 마계에서 본 인재 중 단연 최고라 할 수 있지 않은가?
‘악마족들의 힘이 마계 내부에서 더 증폭된다는 건 감안해야겠지만···. 후작급이 이 정도라면 공작급은 대체 얼마나 강하다는 거지?’
물론 지금 상태로도 일대일로 상대할 자신은 있다지만, 휘하의 세력까지 끼어들 걸 생각하면 아직 제대로 맞붙는 건 시기상조였다.
그것을 위해 필요한 게 바로 이곳 드림 워커를 온전히 자신의 수중에 넣는 것.
‘이들은 매혹 내성이 강해서인지 지금까지처럼 강제로 복속시키는 게 힘들 것 같긴 한데.’
물론 이들에겐 그렇게까지 할 필요가 없었다.
이미 자신과 그 무엇보다 끈끈한 인연으로 이어져 있는 사이였으니.
응접실에서 마주 앉은 헬라와 리리아나, 그리고 시아나.
양측 모두 여유를 부릴 때가 아니었던 만큼 이야기는 빠르게 진전되었다.
공적인 사안부터 시작해서 다소 개인적인 내용까지.
“···‘글쎄’라니, 그게 무슨 뜻이죠?”
그렇게 대화가 오가는 와중 리리아나가 어이없다는 듯 미간을 찌푸렸다.
정말 꼭 듣고 싶었던 의문에 속 시원한 답변이 돌아오지 않아 답답해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하지만 헬라는 그저 가볍게 어깨를 으쓱일 뿐.
“물론 전대 마왕과 뭔가 연관은 있겠지? 나 같은 존재가 자연 발생하진 않았을 테니까. 그런데 사실 난 의식이 생긴 것도 얼마 되지 않은 데다, 마계에 온 건 이번이 완전 처음이라···.”
자신의 태생에 대해 묻는 질문에 그저 모르쇠로 일관했다.
이 상황에서 어떻게 솔직하게 다 밝히겠는가?
자신이 전대 마왕의 유해를 매개체로 사용해서 제작된 수많은 아바타 중 하나라는 것을.
그러면서도 말을 빙빙 돌려 확답하는 것을 피하며 거짓말만큼은 하지 않았다.
저 정도 수준의 악마라면 말에 담긴 거짓을 간파하는 것 정도는 간단할 테니.
‘그게 나한테까지 통할지는 모르겠지만 아직은 최대한 조심하는 게 좋겠지.’
최근에 완전히 적응했다고는 하나 헬라는 탄생한 지 얼마 되지도 않은 풋내기 개체였다.
만약의 사태에 대비하는 건 당연히 해야 할 일.
거기다 이렇게 모호한 태도로 모든 가능성에 여지를 남겨 두면···.
“···설마 사전에 뭔가 안배를 해두었던 건가? 자신들이 죽은 후를 대비해서···? 으음, 퀸의 정수를 가지고 있는 것도 그렇고. 어쩌면 그 둘이라면 정말로···.”
저렇게 알아서 납득이 가도록 앞뒤 상황을 맞춰 시나리오를 짜줄 테니까.
괜히 자신이 골머리 싸맬 필요가 없었다.
“그러고 보니 나도 궁금하네? 리리아나 대모님은 14대 마왕이랑 서큐버스 퀸과는 무슨 관계야? 말하는 걸 보니 잘 아는 사이 같은데.”
헬라가 가볍게 던진 질문에 미간을 찌푸리며 고민하던 대모의 몸이 멈칫했다.
일순간 흐르는 침묵.
하지만 곧 언제 그랬냐는 듯 대수롭지 않게 입을 열었다.
묘한 눈초리로 헬라를 지그시 바라보면서.
“···친자매와 어머니랍니다.”
그 말과 함께 조곤조곤한 설명이 뒤를 이었다.
마치 헤어졌던 가족에게 옛날이야기를 들려주듯, 오랜만에 만난 조카에게 과거의 가정사를 고백하는 것처럼.
같은 서큐버스 퀸을 어머니로 두었던 르레이에와 리리아나.
그중에서도 르레이에는 매우 특별한 존재였다.
그냥 평범한 서큐버스로 태어난 리리아나와는 달리 부친의 유전자가 과하게 발현되며 ‘서큐버스 혼혈’이라는 돌연변이로 태어났던 것이다.
원래 서큐버스란 종족에게 남성체란 그저 먹잇감이자 착취의 대상일 뿐이었기에 일반적으로는 있을 수 없는 일이었으나, 그 부친이 되는 이의 힘을 생각하면 완전히 불가능한 일도 아니었다.
그가 바로 당대 최강이었던 13대 마왕이었으니까.
‘부친이 13대 마왕에 모친이 서큐버스 퀸이라.’
생각보다 대단한 혈통이었다.
하긴, 그러니 온갖 흉악한 괴물들이 판을 치는 마계에서 마왕의 자리에까지 올라갈 수 있었겠지.
“이젠 당신이 이어받은 그 눈과 뿔도 13대 마왕이 물려준 특징이었죠. 르레이에는 너무 튄다고 별로 좋아하지 않았지만요. 정말, 나를 포함해 다른 애들이 얼마나 부러워한 줄도 모르고.”
한숨을 내쉰 리리아나가 한 뼘 남짓한 자신의 뿔을 만지작거렸다.
그 옆에 조용히 앉아있는 시아나도 마찬가지.
그리고 짧게 간추린 그녀의 이야기는 곧 14대 마왕 르레이에와 그 간부인 퀸의 대륙 침공으로 이어졌다.
마왕을 배출한 건 물론 전대 마왕과 관계를 가지며 공작급으로 성장한 퀸 덕분에 드림 워커 영지는 대단한 성세를 누리게 되었으나, 그들은 그대로 현실에 안주하고만 있을 수는 없었다.
이 척박한 대지를 벗어나 풍족한 자원을 약탈하고자 하는 마음도 있었지만, 그보다는 그들에게 꼭 해결해야 할 사명이 한 가지 있었던 것이다.
“···마신의 뜻이라고?”
“초대 마왕이 탄생했을 때부터 전해 내려오는 의무라고 하더군요. 뭐, 사실 그런 게 없었어도 달라지진 않았을 테지만요. 저희에게 그 기름진 땅은 잘 차려진 밥상이나 마찬가지였으니.”
일정 주기로 대륙을 침공해 인간의 기세를 꺾는 건 물론 그곳에 모종의 조치를 취하는 것.
그 말을 듣는 순간 헬라의 뇌리로 하나의 가정이 번뜩이고 스쳐 지나갔다.
‘마신이 인간신의 부활을 주기적으로 방해하고 있었구나!’
왜 다른 신도 아니고 오가기도 힘든 마계에 격리된 마신이 그런 역할을 맡았는지는 모른다.
어쩌면 그냥 둘 사이가 나쁘기 때문일 수도 있고, 혹은 자신이 아직 알지 못하는 법칙 때문일 수도 있겠지.
중요한 것은 그동안 그 의식이 대륙 침공이라는 형태로 나타났고.
그것이 14대 마왕을 마지막으로 뚝 끊어져 버렸으며.
결국 불사왕을 비롯한 인간신의 안배들이 하나둘 눈을 뜨기 시작했다는 것이었다.
‘와··· 진짜 집념 하나는 대단한 놈이네. 심연에 처박히고도 수천 년 이상을 포기하지 않고 계속 도전해서 결국 성공했다는 거 아냐?’
그러면서 줄곧 자신을 방해하던 마신에게 역공을 가해 복수하기까지 하다니.
심연에 봉인되기 전엔 대체 얼마나 대단한 힘을 가지고 있었을지 가늠조차 되지 않을 지경이었다.
하긴, 그러니 어지간하면 나서지 않는 주신이 직접 손을 쓴 거겠지만.
“어머니는 르레이에를 돕기 위해 동행을 자처했죠. 다른 공작 놈들의 견제가 너무 필사적이었거든요.”
그만큼 14대 마왕이 지니고 있던 매혹의 힘은 매우 위협적이었다.
그녀에게 시간이 조금만 더 있었더라면 모든 고위 악마들을 모조리 찍어 누르고 절대 권력을 완성할 수 있었을 정도로.
물론 그건 이미 지난 일이었고 결과적으로 마왕 르레이에는 물론 서큐버스 퀸까지 대륙 침공 도중에 전사하고 말았다.
그 과정에서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혹시 다른 공작들이나 인간신의 수작이 있었던 건 아닌지는 알 수 없었지만···.
“···그런데 아무래도 저희에게 다시 한번 기회가 온 것 같네요.”
동화를 들려주듯 잔잔히 이어지던 리리아나의 목소리에 기묘한 열기가 어리기 시작했다.
그녀의 두 눈에선 이미 전에 없던 불길이 타오르고 있었다.
“당신을 저의 자매이자 14대 마왕 르레이에의 딸로 인정하겠습니다. 설령 직접 낳지 않았을지라도 그 힘과 의지는 제대로 이어진 것 같으니.”
그리고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중앙에 놓인 테이블의 옆면을 툭 건드렸다.
그 가벼운 손짓에 다과가 올라간 무거운 테이블이 벽면까지 쭉 밀려났지만, 여기서 그쪽에 관심을 주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저 드림 워커의 대모 리리아나와—.”
“—그 딸 시아나는.”
여태 조용히 있던 시아나가 리리아나의 뒤를 이어 입을 열었다.
그녀가 대모의 딸이었다는 사실에 뭐라 반응할 겨를도 없이, 나란히 선 두 사람이 헬라의 앞에 천천히 무릎을 꿇었다.
““헬라 님께 충성을 맹세하겠습니다.””
언어가 공명하며 마력이 깃든 파동이 무겁게 흘러넘쳤다.
그와 동시에 리리아나는 물론 불사왕의 권속인 시아나와도 이중계약이 맺어졌다.
아마 마계의 악마족으로서 상위 계급의 휘하에 들어가는 건 밖에서 체결한 계약과 별개로 취급되는 모양.
“저희가 원하는 것은 오직 한 가지.”
그때, 이마를 바닥에 댄 리리아나가 격정 어린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헬라를 조카로 인정했으나 그런 사사로운 관계보다는 자신들의 뜻을 이루어 줄 군주로 받드는 걸 우선하겠다는 듯, 여전히 공손한 그 말투는 한 치의 흐트러짐도 보이지 않았다.
“—그 추악한 공작 놈들을 모조리 처단하고 헬라 님께서 마계의 정상에 오르시는 것입니다!”
엎드린 채로 고개를 치켜든 그녀의 눈과 헬라의 시선이 마주쳤다.
피곤함에 찌든 얼굴로도 가려지지 않는, 분노와 복수심에 타오르는 눈빛.
가만히 그것을 들여다보던 헬라의 입가에 부드러운 미소가 맺혔다.
물론 그에 대한 대답은 이미 정해져 있었다.
***
“···이, 이건.”
미야모토 켄이 꿀꺽 마른침을 삼켰다.
[끄르륵! 끄륵!] [아아···! 이 상쾌한 피! 더! 더 줘!]그의 눈앞에서 도저히 정상적인 생명체라곤 볼 수 없는 이형의 존재들이 꿈틀거렸다.
눈, 코, 입은 물론 팔다리와 머리까지.
어린아이가 부품을 대충 조립한 것처럼 붙은 위치도 개수도 제각각인, 보는 순간 본능적인 거부감이 치밀어 오르는 새하얀 괴물들이었다.
“흐음, 놀랐나 보군.”
“예, 조금···.”
켄의 뒤에서 인자한 목소리의 주인이 천천히 다가왔다.
그리곤 그의 어깨를 몇 차례 툭툭 두들기며 흐뭇한 시선으로 전방의 전경을 바라보았다.
“어떤가? 멋지지 않나?”
인자함이라는 포장으로도 가려지지 않는 끈적끈적한 욕망.
그에 켄이 뭐라 대답하기도 전에 목소리의 주인이 재차 입을 열었다.
“이들이 바로 우리를 승리로 이끌어 줄—.”
빛 한 점 들지 않는 심연 같은 눈을 초승달처럼 휘면서.
“신의 병사들일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