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overeign of the Infinite Clones RAW novel - Chapter (394)
어브노말 습격 작전은 속전속결로 마무리되었다.
역시 몸값 비싼 아우테리카 최고의 용병을 불러온 보람이 있는지, 본거지 타격부터 시작해 괴랑 공작의 사망까지 고작 몇 시간도 채 걸리지 않은 것이다.
‘「마천의 세계」에 약간의 시간 배속 조절 기능이 있었던 것 덕분이기도 하지만.’
그걸 감안하더라도 이런 속도는 파격 그 자체였다.
그렇게 모든 일이 번갯불에 콩 볶아먹듯 끝나다 보니, 거대 파벌인 어브노말 내부에서도 아직 상황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이들이 적지 않았다.
딱 본거지가 습격당하고 있다는 소식까지만 전해 듣고 최신 정보를 제공받지 못한 소속원들.
설마 이미 모든 일이 끝났을 거라고는 생각지 못하고 지원을 위해 쫄래쫄래 파견 나온 휘하의 병력들.
그들을 통째로 집어삼키는 작업은 누워서 떡 먹기나 다름없었다.
“너 이름이 뭐라고 했지?”
“···타부르 포칸입니다.”
“그래, 타부르. 이제 상황은 대충 이해했지? 아니면 아직도 더 설명이 필요해? 아니면 뭐, 아직도 어떻게든 복수하고 싶다던가?”
영혼을 홀리는 매혹적인 목소리에 호랑이를 닮은 거구의 악마가 몸을 비틀거렸다.
처음엔 어떻게든 버텨 보려 했지만···.
이제 그는 확실히 이해하고 있었다.
눈앞의 이 절대자에게 저항한다는 것 자체가 부질없고 불경한 짓일 뿐이라는 것을.
그는 냉철하게 상황을 판단했다.
어차피 마계는 강자존의 세상이지 않나!
그런데 간악한 괴랑 공작을 처단하신 왕께서 지금 자신의 앞에 있었다.
흑암도, 마룡도 아닌 진정한 마계의 왕이.
이것이 운명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쿵—
결국 끓어오르는 충동을 참지 못한 그는 그 자리에 무릎을 꿇었다.
앞에 있는 상대에게 극도의 공경을 담아 고개를 조아리며.
“천부당만부당한 말씀이십니다! 저 타이노 족의 타부르 포칸! 앞으로 헬라 님께 충성을 바치겠습니다! 헬라 님께서 가시는 길의 선봉엔 항상 제가 설 것입니다!”
충성심을 과시하듯 쩌렁쩌렁 외치는 용맹한 모습.
그에 헬라가 흐뭇하게 미소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걸로 또 한 명의 백작급 고위 악마가 휘하에 들어왔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하나를 ‘설득’하는 데에 상당한 시간과 수고가 필요했다는 것을 생각하면, 이건 그녀에게도 상당히 유의미한 변화라 할 수 있었다.
‘역시 괴랑을 처치한 직후에 떠올랐던 메시지와 연관이 있는 거겠지.’
소꿉놀이가 아닌 이상 인간 세상에서도 왕을 자칭하려면 국제 사회의 인정이 필요한데, 그게 마계라는 한 세계의 정점에 선 마왕이라면 오죽할까?
그런 의미에서 ‘마왕으로서의 영향력 확대’는 그녀에게 있어서 모든 능력치가 강화되는 성장 이벤트나 다름없었다.
육체와 마력을 아우른 전투 능력은 물론이고, 매력과 카리스마를 비롯한 군주로서의 역량까지 전부 포함한.
‘어쨌든 시작이 좋은데? 이대로 쭉쭉 가보자고.’
그렇게 어브노말의 요직에 있던 요인들의 적극적인 협조가 더해지자 흡수 작업은 더욱더 탄력을 받았다.
한층 강해진 영향력으로 변수를 통제하는 한편 미리 대기하고 있던 인원들이 나서서 혼잡해진 교통을 정리했다.
그리고 상황이 그렇게까지 흘러가자, 굳이 매혹이 아니더라도 이쪽에 가능성을 느끼는 이들도 하나둘 늘어나기 시작했다.
“벌써 이 정도라고? 이만한 조직 장악력이라니. 수완이 대단한데?”
“무너져 가는 성에서 언제 빠져나갈지 눈치만 보고 있었는데, 이거 어쩌면···.”
“또 다른 기회가 될지도 모르겠군.”
사실 괴랑 공작에 대한 충성심이 그리 크지 않았던 어브노말의 기존 소속원들에게도 썩 나쁘지 않은 이야기였다.
드림 워커를 비롯한 많은 외부 세력들이 추가되어 파벌의 규모가 더욱 커진 데다가, 새로운 수장 또한 공작급 악마를 척살해 그 자리에 오름으로써 자신의 능력을 증명하지 않았던가?
‘이제 와서 다크 네스트로 넘어가 봤자 대우가 그리 좋진 않겠지.’
‘여기서 공을 세워서 새로운 마왕의 측근이 될 수 있다면···!’
‘마룡 공작은 영 껄끄러웠는데 잘 됐군.’
그렇게 기존 어브노말의 대부분을 고스란히 흡수한 거대 파벌, ‘헬헤임’이 전면에 모습을 드러냈다.
어브노말과 연계하던 흑암 공작의 데모니악을 제치고 단번에 마계 파벌 규모 2위를 차지하면서.
슬슬 전쟁의 종막에 접어들고 있던 마계의 판도를 바꾸는 갑작스러운 변화.
당연히 급변한 상황에 촉각을 곤두세우던 다른 파벌들도 민감하게 반응할 수밖에 없었다.
한순간에 동맹 세력의 선장이 바뀌어 당황스러워하는 데모니악은 물론.
코앞으로 다가온 패권에 한창 기세등등하던 다크 네스트까지.
***
다크 네스트의 본거지 지하.
긴장한 표정의 미야모토 켄이 천천히 발걸음을 옮겨 칠흑 같은 어둠 속을 가로질렀다.
‘후우, 여기가 바로···.’
얼마 전 후작급 악마의 정수를 진상한 그는 다크 네스트의 심부에 성공적으로 안착할 수 있었다.
애초에 후작급 악마는 마계 최대 규모를 자랑하는 그들의 파벌에서도 단 넷밖에 없는 존재.
그만큼 귀하디귀한 물건에 대륙 침공 당시의 유산이라는 역사적 가치까지 더해지자, 단번에 공작의 신임을 살 정도의 공을 세우게 된 것이었다.
‘뭐, 그것도 내가 백작급이나 되는 고위 악마가 아니었다면 어림도 없었겠지만. 그동안 조직 생활에 무관심하고 조금 겉돌아서 그렇지, 내가 어디 가서 대접 못 받을 수준은 아니거든.’
그리고 그 과정에서 그는 자신이 파견되었던 원인인 ‘지상에 퍼져나간 마계의 물건’이 왜 필요했는지 그 이유도 알 수 있었다.
수백 년간 이어져 온 전쟁에서 마침내 다크 네스트가 압도적인 우세를 점할 수 있도록 만들어 주었던 원동력—.
‘설마 그게 그 괴물들을 불러들이기 위한 재료였을 줄이야.’
마계에서 만들어졌지만 마계 바깥에서 오랜 세월 업을 쌓아 온 물건들.
그것이 바로 그 미지의 괴물들을 이곳으로 불러오는 매개체였다.
그가 가져온 후작급 악마의 정수도 마찬가지였다.
아마 다른 일반적인 매개체보다 훨씬 강하고 많은 괴물들을 불러오는 데 사용되겠지.
그리고 그건 마룡 공작을 마왕 레이스의 최종 승자로 만드는 데 상당한 영향을 끼칠 것이다.
‘···그렇게 둘 순 없지.’
한껏 긴장했던 켄의 표정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어둠 속에서 한 쌍의 안광이 매섭게 타올랐다.
지금은 비록 다크 네스트의 중진에 속해있는 몸이었으나, 그의 마음은 이미 다른 곳을 향한 지 오래였으니.
‘헬헤임이라···.’
최근 뜨겁게 화제가 되고 있는 신생 파벌.
갑자기 등장한 헬라라는 초고위 악마가 괴랑 공작 시파르를 살해하고 그의 모든 것을 빼앗아 만든 그 세력은 다크 네스트에서도 초유의 관심사였다.
‘마음 같아선 나 역시 당장이라도 그곳으로 떠나고 싶지만···.’
아직은 그럴 수 없었다.
지금 그는 오직 자신만이 할 수 있는, 헬헤임에 합류해 한 손 거드는 것보다 더욱 중요한 일을 하고 있었으니까.
‘마룡 공작은 헬라 님께서 마왕의 자리에 오르시는 데 가장 큰 걸림돌이다. 거기다 아직 그가 무엇을 더 숨기고 있는지 전부 파악하지도 못했어.’
켄은 그 마룡 공작이 숨긴 수를 알아내는 첨병이자 헬라가 은밀히 찔러 넣은 치명적인 비수였다.
그는 자기야말로 주군의 뜻을 가장 잘 헤아리는 충신이며, 그분께서 가장 신임하는 수하 또한 자신이라는 사실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다 왔군.”
그렇게 상념에 잠긴 채 걸음을 옮긴 지 얼마나 되었을까.
그는 마침내 어둠에 휩싸인 통로를 지나 목적지에 도착할 수 있었다.
“후우.”
가볍게 심호흡을 한 그가 눈앞의 철문을 열고 천천히 안으로 들어섰다.
그 직후 그의 눈에 들어온 것은.
뼈와 두개골, 장신구를 비롯한 온갖 제구(祭具)들과 잡동사니, 그리고 피로 그려진 마법진이 가득한 공간이었다.
“으음.”
당장이라도 소환된 악마가 튀어나올 것 같은 흉악한 분위기에 그가 나직한 침음을 흘렸다.
그러다 본인이 그 악마라는 사실을 상기하고 가볍게 입맛을 다셨다.
‘여기 있는 책임자에게 물건을 전달하면 된다고 했는데. 잠깐 어디 간 건가?’
이곳은 그 ‘문’을 여는 데 필요한 의식을 행하는 장소 중 하나였다.
어찌 보면 마룡 공작에게 가장 중요한 곳이라 해도 과언이 아닌 공간.
그는 책임자가 자리를 비웠다는 사실에 내심 쾌재를 부르며 천천히 주변을 둘러봤다.
혹시 뭔가 중요한 정보를 얻을 수 있지 않을까 기대하면서.
‘지금은 제물을 전달하는 심부름 때문에 들어올 수 있었지만, 언제 다시 여기까지 올 수 있을지 모르니까.’
무려 백작급 고위 악마를 심부름꾼으로 써먹는다는 데서부터 이곳이 얼마나 철저하게 관리되는 곳인지 알 수 있었다.
이번에 그가 올 수 있었던 것도 귀한 물건을 구해 옴으로써 보안 등급이 상승했기 때문이겠지.
그렇게 애써 태연함을 가장하며 의식장을 둘러보던 그는 커다란 기둥 뒤편으로 돌아간 순간 흠칫할 수밖에 없었다.
“···저건?”
그곳엔 어떤 거대한 존재가 처참한 몰골로 간신히 숨만 내쉬며 구속되어 있었다.
온갖 기이한 문자가 새겨진 붕대와 쇠사슬을 비롯해 수많은 구속구들이 자유를 속박하고, 몸 곳곳엔 말뚝과 가시, 호스와 전선 같은 것들이 빼곡하게 틀어박혀 어딘가로 연결되어 있었다.
도무지 멀쩡한 곳이 없어 보이는 그 모습은 보기만 해도 눈살이 찌푸려질 정도였으나 진짜 문제는 따로 있었다.
“일반적인 사이즈보다 두 배는 되어 보이는 커다란 발록. 거기다 네 쌍의 뿔이라면 설마···.”
투마 공작 카라쿨.
한때 마계를 네 등분했던 거대 세력의 주인 중 하나가 끔찍한 몰골로 이 지하에 갇혀 있었다.
정체를 알 수 없는 의식의 산제물이 된 채로.
‘이미 죽었다고 생각했는데 아직도 살아 있었나.’
켄이 멍하니 그 존재를 바라보았다.
설마 그 투마 공작이 이런 곳에서 이런 꼴이 되어있을 줄이야.
‘···하긴 공작급 악마 정도 되면 이런저런 조건을 다 떠나서 제물로선 최상급이지.’
어쨌든 이걸로 마룡 공작이 뭔가를 더 꾸미고 있다는 건 확실해 보였다.
그렇게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던 켄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다른 곳으로 향했다.
사실 아까부터 유독 눈에 들어오던 것이 하나 있었다.
구속된 투마 공작 뒤편의 커다란 기둥에 보이는 문 한 짝.
이 의식장은 구조적으로 구획은 나뉘어 있을지언정 따로 구분된 공간 같은 것은 없었기에 유독 신경이 쓰였다.
‘왜 저기에만 문이 있는 거지? 안에 뭐가 있기에?’
저도 모르게 침을 삼킨 켄이 천천히 앞으로 나아갔다.
단순히 호기심 때문만은 아니었다.
알 수 없는 무언가가 자신을 부르는 기분이었다.
육체가 본능적으로 저곳으로 향하고자 하는 느낌.
그는 어째선지 점점 거칠게 뛰기 시작하는 심장 박동을 느끼며 문 앞에 멈춰 섰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그 손잡이를 쥔 순간—.
“경고. 당신은 아직 그 내부를 허가받지 않았습니다.”
켄의 귓가로 무감정한 목소리가 흘러들었다.
그의 감지를 무력화하고 들려온 음성.
그에 흠칫한 그가 급하게 뒤를 돌아보았다.
어느새 그곳엔 피곤해 보이는 인상에 후줄근한 가운을 걸친 여성이 퀭한 눈으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사과. 놀라게 했다면 미안합니다. 소개. 통성명이 아직이었군요. 저는 소디안입니다. 당신에 대한 이야기는 이미 들었습니다.”
기이한 말투로 자신을 소개하며 정중하게 인사를 해오는 여성.
하지만 그 표정은 가면이라도 쓴 것처럼 티끌만큼도 미동하지 않고 있었다.
‘로봇 같은 여자로군.’
하지만 그런 모습들을 우습게 볼 수는 없었다.
그녀야말로 이 장소의 책임자이자 유일한 연구원인 후작급 악마였으니까.
하물며 장소마저 마법 계열로 보이는 그녀의 홈그라운드라는 걸 감안하면···.
“안내. 그건 그만 놓고 이쪽으로 오시죠.”
켄은 순순히 문손잡이를 놓고는 앞서 걷기 시작한 그녀의 뒤를 따랐다.
조금 아쉽긴 해도 어쩔 수 없었다.
지금은 아무리 저항해봤자 절대 이길 수 없는 상대였으니.
그는 슬쩍 고개를 돌려 뒤쪽을 응시했다.
철저하게 구속된 채 숨넘어가기 직전인 거대한 발록 한 마리와 그 뒤편에 자리한 문 한 짝.
잠시 물끄러미 그것을 바라보던 그는 다시 뒤돌아 소디안에게 따라붙었다.
굳이 지금 급하게 움직일 필요는 없었다.
아직 시간은 충분히 남아 있었고, 기다리다 보면 기회는 언젠가 찾아올 테니까.
***
화르륵—
새빨간 불꽃이 피어올랐다.
불과 얼마 전에 겪어봤던 불길.
하지만 그 사용자는 완전히 바뀌어 있었다.
“오! 대단한데? 데이비슨.”
그에 감탄한 헬라가 흡족하게 끄덕이며 자신이 타고 있던 괴생물체의 등판을 탁탁 두들겼다.
그 직후, 그의 입에서 재차 새빨간 불길 한 줄기가 뻗어져 나왔다.
괴랑 공작의 거대한 몸뚱이를 모조리 먹어 치운 후에 얻은 「지옥불」이었다.
‘이건 뜻밖의 수확이네. 설마 이런 걸 얻을 수 있을 줄은 몰랐는데.’
이젠 죽고 없는 시파르에 대한 고마움이 물씬 솟구쳤다.
그가 자신에게 남겨준 것이 너무나도 많았으니.
아무리 봐도 이 정도면 아낌없이 주는 나무 그 자체였다.
“크흠.”
그때 옆에서 안내하는 이의 입에서 불편하다는 듯한 헛기침이 터져 나왔다.
아무래도 데이비슨의 입에서 뿜어진 불줄기가 위협적으로 느껴진 모양.
‘뭐, 사실 위협이란 것도 틀린 말은 아니지. 무력시위도 겸하고 있으니.’
헬라가 가볍게 어깨를 으쓱였다.
지금 그녀가 있는 곳은 최근 빠르게 성장하고 있는 헬헤임의 구역이 아니었다.
이곳은 그 영역에서 약간 떨어진 곳인—.
“공작님, 손님을 모셔 왔습니다.”
흑암 공작의 데모니악이 점거한 영토였으며.
그녀는 지금 그곳의 주인을 만나기 위해 직접 찾아온 상태였다.
“안에 들이게.”
끼이익—
천천히 문이 열렸다.
그 너머에서 조용히 자리에 앉아있는 상대가 눈에 들어왔다.
치렁치렁한 검은 로브를 늘어뜨린 채 머리엔 산양 두개골을 뒤집어쓴, 지극히 수상쩍어 보이는 외견의 인물이 천천히 이쪽을 돌아보았다.
그 눈구멍에서 푸른 귀화를 이글이글 피워 올리면서.
“후후, 재밌네.”
데이비슨의 넓은 등판에 드러눕듯 올라타 있던 헬라가 폴짝 뛰어내렸다.
그녀의 입가에 화사한 미소가 맺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