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overeign of the Infinite Clones RAW novel - Chapter (397)
그날도 평범한 하루였다.
아침에 일찍 일어나 사랑하는 가족들과 식사를 하고 ‘상회 직원 거주 구역’ 내에 세워진 초등 교육 시설에 등교했다.
“아론, 좋은 아침~!”
“오! 아론 왔어? 그 소식 들었어? 이번에 미샹 거리에서···.”
“오늘도 일찍 왔구나. 역시 아주 성실한 학생이야.”
그곳에서 아론은 굉장한 인기인이었다.
같이 교육을 받는 아이들은 물론 선생으로 고용된 강사들에게까지.
사실 그것도 당연한 것이었다.
이 시설은 하나부터 열까지 전부 휴버트 재단에서 만들고 운영하는 곳이었으며, 이곳에 다니는 아이들의 부모는 대부분 휴버트 상회에서 일하는 직원이었으니까.
‘그리고 난 상회주님의 최측근인 비서의 친동생이고 말이지.’
말이 비서지 실질적으론 이인자나 다름없었다.
상회주가 그만큼 신뢰하고 권한을 몰아주고 있었으니.
그의 입가에 희미한 쓴웃음이 맺혔다.
대단한 누나 덕분에 이런 대접을 받는다는 사실에 어깨가 으쓱거려지기도 하지만, 그만큼 밀려드는 부담감 또한 적지 않았던 것이다.
이곳에 오기 전까지만 해도 그는 하층민이나 다름없는 삶을 살아오지 않았던가?
‘지금 생각해도 도무지 실감이 나지 않아. 내가 이렇게 살고 있다는 것이.’
이제 상계에서 휴버트 상회의 위치는 아무도 대체할 수 없었다.
타라크와 인근 상권은 물론 툴크 왕국을 넘어 전 대륙에서도 첫손가락에 꼽힐 정도로 성장했으니 당연한 일.
단순히 재력만 대단한 것이 아니라 막강한 정치력까지 갖춰, 타라크가 소재한 아오니아 백작가는 물론 툴크 왕가에서도 함부로 대하지 못할 정도였으니 더 말할 필요도 없었다.
‘그 이상으로 많은 혜택을 안겨 줘서 오히려 좋아한다고 듣긴 했지만.’
그를 바탕으로 휴버트 상회는 재단까지 세워 이 타라크에 많은 투자를 하기 시작했다.
아론이 다니는 교육 시설을 포함해 수많은 시설이 세워지고, 공공기관 또한 재단의 후원으로 전보다 더 쾌적한 업무를 볼 수 있게 되었다.
그러면서 경제는 나날이 활성화되고 치안 또한 한밤중에 돌아다녀도 될 정도로 안정적이니, 도시 전체가 휴버트 상회로부터 직접적인 혜택을 받게 된 셈이었다.
그런 상황이었으니 아론이 이렇게 과한 대접을 받게 된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심지어 어쩌면 상회주의 처남이 될지도 모른다는 소문까지 도는 마당이었으니 더더욱.
‘별로 실감은 안 나지만. 상대가 아저씨라면 나도 찬성이긴 한데···. 누나는 어떻게 생각하려나?’
사실 그는 이미 알고 있었다.
상회주인 휴버트가 자신들을 구해준 그 ‘아저씨’라는 걸.
처음엔 상상도 할 수 없었던 일인지라 미처 알아채지 못했지만, 평생을 함께해 온 누나의 태도를 보고 있자니 자연스럽게 깨달을 수밖에 없었다.
극한의 환경에서 살아남기 위해 눈치를 키워야 했던 건 그 역시 마찬가지였으니까.
‘뭐, 마법이나 그런 거겠지.’
원래 사업할 땐 별의별 일을 다 겪는다지 않던가?
휴버트 상회쯤 되는 초대형 상단의 주인이 안전을 위해 신분을 위장하는 것 정도야 그리 이상한 일도 아니었다.
“다녀왔습니다.”
“옵빠아아!”
“억!”
친구들과 하교하고 집으로 돌아온 아론의 품에 작은 인영이 전력으로 몸통 박치기를 날려 왔다.
예닐곱 살 정도 되어 보이는 활기찬 여자아이.
그의 사촌 동생인 라피였다.
“나 할머니 집에 갈 건데 같이 가자!”
“···나 숙제부터 해야 하는데.”
“얼른! 빨리빨리! 할머니가 고기 쿠키 만들어 준댔단 말이야! 오빠도 꼭 데려오랬어. 비실비실 약해 보여서 걱정된다고!”
“아니, 나 정도면 그리 약한 건 아니···.”
하지만 결국 그는 동생의 재촉에 한숨을 내쉬며 다시 밖으로 발걸음을 옮길 수밖에 없었다.
숙부 내외와 누나가 일할 때 라피 돌보기를 도맡았던 그는 이 작은 아이의 부탁을 도저히 거부할 수 없었다.
“끌끌끌··· 마침 딱 맞춰 왔구먼. 막 쿠키가 구워진 참이니 거기 앉아서 기다리거라.”
“네에!”
“전 마실 거 준비할게요.”
“그려, 그럼.”
두 사람은 이웃에 사는 주술사 할머니의 집으로 향했다.
얼굴에 문신이 가득한 이 할머니는 겉으론 무섭게 보였지만, 그들 가족이 이 도시에 이주해 온 초기부터 친해진 친절한 이웃이었다.
특히 거리가 가까워 시도 때도 없이 이곳을 찾아온 라피는 그녀를 친할머니처럼 여길 정도.
“잘 먹겠습니다.”
“우물우물— 할모니, 마이써!”
“흘흘흘··· 녀석, 많이 만들었으니 갈 때 싸가려무나.”
“감사합니다!”
입 안 가득 쿠키를 쑤셔 넣고 웅얼거리는 라피의 말에 노파와 아론의 얼굴에 미소가 맺혔다.
안온한 일상.
평화로운 나날.
밖은 불사왕과의 전쟁이니 뭐니 하는 이야기로 시끄러웠지만, 타라크는··· 그들이 있는 동네는 그런 소란조차 비켜 나간 듯 평온하기 그지없었다.
설령 큰 전쟁이 일어나더라도 이곳만큼은 안전할 거라고.
아저씨와 누나를 비롯한 많은 사람들이 지키고 꾸려 나가는 이 공간만큼은 절대적인 울타리가 되어줄 거라고.
그런 근거 없는 믿음 속에서 평소와도 같은 하루가 저물어 갔다.
그리고—.
똑똑—
“실례합니다.”
갑작스러운 노크 소리와 함께 낯선 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정중한 말투로도 가려지지 않는 여린 음성.
마침 시간이 늦어 서둘러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 라피와 함께 현관에 섰던 아론이 조심스럽게 문을 열었다.
“누구신가요?”
“아, 죄송합니다. 제가 급히 찾는 사람이 있어서요.”
문틈으로 보이는 건 어린 소년이었다.
기껏해야 아론의 또래쯤 될까?
어찌 보면 그보다 더 어려 보이는 아이가 문 앞에서 생글생글 웃고 있었다.
“···혹시 찾는 사람 이름이라도 알려주시면 도움을 줄 수 있을 것 같은데요.”
그러나 아론의 입에서 절로 존댓말이 튀어나왔다.
딱히 의도한 것은 아니었다.
그저 본인조차 인지하지 못한 사이에 본능적으로 나온 말이었을 뿐.
“아··· 이름은 모르고요.”
그렇게 말끝을 흐린 상대가 가늘게 뜬 눈으로 그들을 훑어보았다.
마치 뱀처럼 순식간에 전신을 핥고 지나가는 서늘한 눈초리.
사아—
그와 동시에 아론의 전신에 소름이 돋고 긴장감이 치밀어 올랐다.
침이 바짝 마르며 식은땀이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어느새 라피는 그의 뒤에 숨은 채 바들바들 떨고 있는 상태. 근원을 알 수 없는 공포와 불길함이 그들을 옭아매기 시작했다.
“···씁, 이번에도 꽝이네. 좀 더 가까워진 건 틀림없는데···.”
앞에 선 소년이 짜증 섞인 말투로 중얼거렸지만 아론은 차마 한 마디도 뻥긋할 수 없었다.
저 말에 담긴 감정이 자신을 향한 게 아니란 걸 아는데도 그에 압도되어 도무지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아론? 라피? 왜 아직도 안 나가고 있는···.”
그때, 부엌에서 정리를 마치고 나온 노파가 현관에 서 있는 그들을 발견하고 다가왔다.
자연스럽게 문 앞에 서 있는 소년에게로 향하는 그녀의 눈길.
그 직후.
후웅—
실내에 바람이 일었다.
그리고 어느새 뻣뻣하게 굳어있던 아론의 몸이 조금씩 풀리기 시작했다.
“어?”
정신을 차려 보니 그는 어느새 현관과 멀찍이 떨어진 벽면에 등을 기댄 채, 품 안에 라피를 안고 멍하니 앉아있었다.
자신의 앞을 가로막고 선 할머니의 등을 바라보며.
“흐음? 어떻게 알았지?”
재차 들려오는 낯선 이의 서늘한 목소리.
그러나 주술사 노파는 대답하지 않았다.
지금은 말 한마디 꺼낼 여유도 없었으니까.
“···아아, 하필이면 이런 곳에 대주술사가 있을 줄이야. 이거 곤란하군. 소란을 일으키고 싶진 않은데.”
정체불명의 소년은 고민하는 것처럼 보였다.
지금 상황을 어떻게 해결하는 게 좋을지.
물론 그 결정이 어떻게 내려지든 그게 다른 이들에게 그리 좋지 않을 거라는 것만은 분명했다.
그런데 그 결론이 내려지기 직전, 다시금 상황이 일변했다.
“할머니! 아론이랑 라피 여기 왔나요? 죄송해요, 애들이 늦게까지 들어오질 않아서···?”
아론에게 매우 익숙한, 사랑하는 누나의 목소리가 들려온 순간.
“···찾았다.”
그쪽을 바라보는 소년의 입꼬리가 길게 찢어졌다.
활짝 벌어진 입가로 보이는 날카로운 송곳니.
새빨갛게 물들기 시작한 한 쌍의 짐승 같은 눈동자.
그와 마주한 직후 순간적으로 아론의 정신이 아득해졌다.
시야가 이리저리 흔들리며 귓가에 이명이 울렸다.
도저히 어찌할 수 없는 공포를 마주하며 깊숙이 가라앉아 있던 트라우마가 수면 위로 떠올랐다.
“디아나! 아론과 라피를 데리고···!”
“하! 놓칠 것 같···.”
“할머니···!”
귓가로 시끄러운 소리가 흘러들고 누군가가 자신의 몸을 움직이는 게 느껴졌으나, 적대적인 마력에 노출된 그는 아무런 사고도 할 수 없었다.
주술사 노파가 미리 수를 써 두지 않았더라면 아예 정신에 영구적인 손상이 남았을 터.
그래도 그것 덕분인지 조금씩 정신이 돌아오기 시작하며 잠깐잠깐 상황을 인지할 수 있었다.
“안 돼!”
누나의 비명과도 같은 외침과 함께 라피를 품에 안은 할머니가 피를 토하며 쓰러졌다.
왜 그렇게 됐는지는 이해할 수 없었지만 그는 서둘러 달려가 두 사람을 끌어안았다.
“흐하! 귀찮은 것들이 번거롭게 하기는. 그래도 이걸로···.”
이어서 언제 나타났는지 모를 빛 덩어리들이 오색찬란한 광채를 흩뿌리기 시작했다.
아름답게 반짝거리는 빛무리.
그와 동시에 포근한 기운이 퍼져 나가며 아론의 정신이 조금 더 명료해졌다.
“···정령? 아니, 하이 엘프라고? 어째서 여기에···.”
소년의 목소리에서 약간의 당황이 묻어나왔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뿐.
그는 곧 여유를 되찾고 갑작스럽게 난입한 이를 몰아붙였다.
‘누나···.’
사방에 황혼만이 내려앉은 공간 속.
품 안에 노파와 여자아이를 끌어안은 소년이 멍하니 멀리 떨어진 곳을 바라보았다.
그곳엔 그의 하나뿐인 누나가 미동도 없이 바닥에 쓰러져 있었다.
‘어떻게··· 어떻게 해야···!’
머리가 굳어 잘 돌아가지 않는다.
하지만 그런 상태에서도 지금 상황은 이해할 수 있었다.
갑자기 끼어들어 소년을 막아선 여성도 그리 오래 버티지 못할 거란 걸.
이젠 잊었다고 생각한 절망감이 스멀스멀 고개를 치켜들었다.
그와 동시에 그의 머릿속에서 세상에서 가장 듬직한 이의 얼굴들이 떠올랐다.
절망이 일상이었던 순간, 처음 만났을 때의 순박하고 진지한 모습.
라피와 식료품점이 위기에 처했을 때 짠하고 나타나 모든 문제를 해결해 주었던 차갑고 카리스마 있는 모습.
마지막으로 그들이 이 도시에 잘 정착할 수 있도록 이런저런 배려를 해 주었던 섬세하고 이지적인 모습.
그동안 도움만 받았기에 뻔뻔하다는 건 알지만, 지금 아론의 머릿속에 떠오르는 이는 온통 그밖에 없었다.
혀가 잘 움직이지 않아 입술을 짓씹은 아론이 속으로 외쳤다.
이래봤자 상대에겐 닿지 않을 것이라는 걸 알면서도.
‘아저씨—!’
그러나 그때.
아무도 예상할 수 없었던 기적이 일어났다.
쩌적—!
그의 부름에 화답하듯 하늘에 금이 가고.
콰아아앙—!
세상이 무너져 내렸다.
그와 동시에 사방을 뒤덮었던 황혼이 여명의 빛에 의해 빠르게 사그라들었다.
“어···?”
아론이 멍하니 고개를 들었다.
그의 뇌리에 그 순간의 장면이 깊숙이 틀어박혔다.
빛의 날개를 활짝 펼친 천사가 지상에 강림했다.
***
난장판이 된 현장의 중심에 서 있는 십 대 초반의 소년, 테미란 맥클레어.
그 뒤편에 기절한 채 쓰려져 있는 디아나를 본 하인리히가 미간을 꿈틀거렸다.
‘그래, 이제 와서 생각해 보면 조금 마음에 걸리는 게 있긴 해.’
그동안은 리에스타 성녀가 감지했던 게 당연히 헬라라고 생각했다.
다른 가능성을 생각하기엔 관측 시기와 장소가 너무 절묘하게 딱 맞아떨어졌으니까.
‘그런데···.’
마계에 대해 잘 몰랐던 그때는 그냥 그러려니 했지만 이제는 확실히 알고 있다.
생성한 지 얼마 되지도 않았던 당시의 헬라는 좀 특별한 고위 악마족일 뿐, 온전한 마왕이라고 볼 수 없었다.
태생적인 혈통 덕분에 곧바로 초월체로 탄생할 순 있었으나, 진짜 마왕이라 하기엔 반드시 필요한 요소가 결여되어 있었던 것이다.
실제로 마신의 시선을 받게 된 것도 마계로 넘어가고 시간이 조금 지난 이후이지 않았던가?
괴랑 공작을 처치하고 어브노멀을 흡수한 이후에 일어났던 변화까지 생각하면 더 말할 것도 없었다.
“후우! 짜증 나게 뭐 하나 제대로 풀리는 일이 없네. 이 개 같은 상황이 우연일 리는 없고···. 이래서 처음부터 줄을 잘 타야 하는 건데. 윗분들의 파워 게임에서 밀리니까 이렇게 행적이 줄줄 새는 거잖아?”
저 앳된 소년의 불경스럽기 그지없는 태도를 보니 더욱 확실해졌다.
성녀가 관측했던 대상은 처음부터 테미란이었다는 걸.
그 시기의 절묘함을 보면 반쪽짜리 마왕이었던 헬라의 등장이 어떤 계기가 된 것 같긴 하지만.
‘···그래, 무늬만 성자인 나와 달리 리에스타는 진짜 성녀지. 주신의 뜻을 세상에 전달하는 메신저. 그리고 우리는 그런 성녀의 말에 따라 이곳 타라크까지 온 거고.’
즉, 지금 이 상황은 모두 주신의 인도라는 소리였다.
또 그렇게 생각하고 보니 한 가지 더 짐작 가는 부분이 있었다.
그때 분명 리에스타는 ‘언데드보단 악마 추종자에 더 가까운’ 느낌이라고 첨언했었다.
악마가 아닌 악마 추종자.
그 말대로라면 테미란은···.
빠르게 생각을 정리한 하인리히가 굳은 얼굴로 소년을 향해 나직이 입을 열었다.
“테미란 맥클레어. 지금 마계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들. 거기도 네가 관여한 건가? 마룡 공작이 심연의 괴물을 불러낼 수 있도록?”
“···뭐야? 그것까지 알고 있어? 주신교단에서 마계 사정을 대체 어떻게 알고 있는 건데?”
“주신의 눈은 어디에나 있는 법. 그것은 마계라고 해도 예외가 아니다.”
“미쳤네. 너희 광신도가 원래 이렇게 유능했었나?”
뒷머리를 거칠게 헤집은 테미란이 짜증 어린 표정으로 투덜거렸다.
아무래도 이제 와서 숨길 생각은 없는 모양이었다.
하긴, 심연의 괴물들이 마계에 나타나기 시작한 타이밍을 보면 발뺌해 봐야 소용없다는 걸 알고 있는 거겠지.
“쯧, 역시 명색이 주신의 개라는 건가? 불사왕한테 이리저리 치이기만 하기에 호구인줄 알았는데 말이야. 그 조심성 과하고 철두철미한 선배가 실패한 이유가 있었어.”
“잘못 알고 있구나. 우리는 절대 그냥 당하기만 하지 않는다. 덕분에 인류는 지금 이 순간에도 조금씩 그 위협에서 멀어지고 있지.”
“자신감도 대단하고 말이야.”
선배라 함은 이전 사도였던 혁명가를 말하는 것일 터.
놈이 테미란의 실종에 관여했다는 사실을 파악한 후부터 어느 정도 짐작하고 있었으나, 아무래도 혁명가는 본격적으로 일을 벌이기 전에 먼저 자신의 후임을 준비해 두려고 했던 모양이었다.
‘대체 무엇 때문에 그가 선택되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당사자에겐 불행한 일이었다.
뭔지 모를 자질을 타고난 것 때문에 납치되어 뱀파이어가 되어버린 건 물론, 이십여 년간 감금당한 채로 줄곧 세뇌되어 왔을 테니.
“···네가 모시는 신도 참 부지런하군. 죄를 지어서 심연에 처박혔으면 얌전히 반성하면서 지낼 것이지. 그 와중에도 사방에 손을 뻗어 여러 사람 피눈물을 뽑고 있었다니.”
“그치? 나도 그렇게 생각해. 이왕 할 거면 제대로 하던가? 괜히 고생은 고생대로 하고 이게 무슨 꼴이야? 하여간 그 양반은 남을 부려 먹기 전에 본인부터 좀 더 분발할 필요가 있어.”
어딘가 핀트가 어긋난 대답.
하인리히가 가늘게 뜬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지만 소년의 얼굴엔 여전히 짜증만이 어려 있을 뿐이었다.
하긴, 어린 시절부터 납치되어 줄곧 세뇌되어 왔을 테니 제정신인 게 더 이상했다.
“순순히 투항해라. 얌전히 아는 것을 모두 털어놓으면 목숨은 살려주도록 하지. 네 어머니가 아직도 널 기다리고 있다.”
“···킥, 어머니라···.”
하인리히가 찬란한 광검에 휩싸인 성검을 내밀며 경고했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상대는 뱀파이어.
제아무리 신에게 선택받은 사도라고 해도 성검을 쥔 성자와의 상성은 최악이나 다름없었다.
정면으로 맞붙으면 결국 재가 되어버릴 테고, 도주를 시도해도 「대축복 : 광휘의 날개」와 「축복 : 도약」을 지닌 그를 따돌리긴 쉽지 않을 거다.
본인도 그걸 알고 있으니 아까부터 저렇게 계속 위협을 하고 있는 거겠지.
‘···역시 인질을 잡고 있는 상대는 까다롭군. 조금 더 빨리 눈치채고 왔으면 좋았을 텐데.’
하인리히가 괜히 입만 털고 있는 게 아니었다.
아까부터 몇 번이고 손을 쓸 기회를 노렸지만, 놈은 그때마다 뒤편에 기절해 있는 디아나에게 위협을 가하고 있었다.
아마 그가 작은 낌새라도 보이는 순간 놈도 곧바로 움직일 터.
아무리 그가 대단하다고 해도 이 거리에선 디아나를 구하고 놈만을 처치할 자신이 없었다.
‘그래, 하인리히는 말이지.’
신성력을 사용하는 성자인 하인리히는 뱀파이어와 상극이었다.
하지만 세상엔 그와 다른 의미로 뱀파이어와 상극인 존재도 있었다.
예를 들어···.
동족 포식의 업을 통해 신성을 일깨우고 있는 흡혈귀의 왕이라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