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overeign of the Infinite Clones RAW novel - Chapter (421)
타오르는 횃불 (2)
커다란 전자기기들이 가득 들어차 있는 방.
우우웅—
삐빅— 띠디디딕!
지지직— 지잉—
이미 에어컨이 최대 출력으로 돌아가고 있음에도 후끈한 열기가 느껴지는 그 공간에, 냉각기 돌아가는 소리와 전자음을 비롯한 온갖 잡음이 한데 섞여 들었다.
그렇게 시끄러운 소음들만이 계속해서 이어지던 어느 순간에—.
“···드디어 접촉했네. 아직까진 순조롭군.”
갑작스럽게 한 사내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값비싼 슈퍼컴퓨터들이 잔뜩 늘어선 방 한가운데.
그 기기들과 연결된 여러 선들을 금속 슈트에 주렁주렁 매단 채, 푹신한 안락의자에 드러눕다시피 한 존재가 있었다.
마치 전자회로처럼 은은한 빛이 흐르며 신비롭게 발광하는 쇳덩이를 전신에 두른 사내.
“과연, 이게 『오딘의 눈』인가. 생각보다 쓸 만한데?”
아공간에서 불러온 티탄으로 완전 무장한 헤스페론이었다.
「기계안 : 캘리카스」를 통해 해킹한 위성 영상을 바라보던 그가 나직이 혀를 내둘렀다.
실험도 해볼 겸 상점이 업그레이드되며 새로 생겨난 『오딘의 눈』을 위성 시야와 연계해서 잠깐 사용해 봤는데, 확실히 이 정도면 카르마를 지불하더라도 종종 사용할 만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지간한 신비는 모조리 꿰뚫어 볼 수 있는 데다, 여기엔 앤드류의 「궤적 관측」의 제약인 격이 높은 이는 훔쳐볼 수 없다는 한계도 없으니까.’
이쯤이면 상당히 여러 차례 강화된 고유스킬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이런 걸 카르마만 지불하면 얼마든지 쓸 수 있다니.
지구에서만 한정된 능력인 데다가 막 쓰기엔 지속적으로 소모되는 카르마의 양이 제법 부담스럽다는 문제가 있었으나, 지금처럼 다른 수단들을 병행해서 쓴다면 최대한 효율적으로 활용할 수 있으리라.
방금도 앤드류가 수집해 온 정보를 바탕으로 삼아 생각보다 수월하게 일을 끝내지 않았던가?
‘정보들을 최종 확인하는 데에만 쓸 수 있어도 충분히 그 값어치는 한다고 볼 수 있지.’
안구에 비친 베트남 변방의 한 폐가를 바라보던 그가 지그시 눈을 감았다.
그리곤 오른팔과 연결된 「맹약의 사슬」을 통해서 켄의 오감에 집중하며 의지를 전달했다.
-저쪽에서 시비 건다고 너무 요란하게 싸우면 안 되는 거 알지? 일단 적당히 달래고 다음으로 지정해 주는 장소로 같이 이동해. 가면서 어느 정도 친목도 다져 놓고. 저래 봬도 제법 능력 있는 사람들이니까.
-···끄응, 거참 아무리 봐도 막 부려 먹는 게 딱 우리 마왕님 스타일인데. 이런 주인들과 엮이는 것도 내 운명인가···?
숨 쉬듯 자연스럽게 내리는 명령에 툴툴거리며 답하는 켄.
그러나 거기엔 딱히 면식도 없는 이에게 명령받았다는 것에 대한 불쾌감은 크지 않았다.
그야 그럴 수밖에.
전후 사정이 어찌 되었든, 그가 지금처럼 다시 지구의 땅을 밟게 된 건 전부 자신을 소환해 준 헤스페론 덕분이지 않은가?
‘거기다 일을 제대로 끝마치면 보상으로 지구에서의 자유행동을 어느 정도 보장해 주기로 했으니까.’
문득 처음 지구에 소환되었을 때 혼란스러워하던 그가 떠올라 피식 웃음을 흘렸다.
혹시 자신이 어디서 정신 공격을 당한 건 아닌지, 여기가 진짜 지구가 맞긴 한 건지 몇 차례나 확인하던 그 모습이란···.
「맹약의 사슬」을 사용해 적당히 제지하지 않았으면 목적지로 출발하기까지 한참은 더 걸렸을 것이다.
‘상대가 악마라고 하니까. 켄 정도면 적의 수준을 좀 더 확실히 파악하는 데 도움이 되겠지. 만일의 사태가 발생하더라도 시간 정돈 충분히 벌 수 있을 거고.’
그에 더해 적도에 가까운 동남아에서 바쁘게 돌아다녀야 하는 귀찮은 잡일들도 그에게 떠넘기고 말이다.
그렇게 얼마간.
시킨 대로 열심히 움직이는 켄의 시야를 통해 ‘타오르는 횃불’의 일원들을 바라보던 헤스페론이 눈을 뜨고 천천히 주변을 둘러보았다.
평범한 이들은 구하기 힘든 대규모 연산 장치와 서버를 비롯한 전자기기들이 가득한 공간.
이곳은 오로지 그만을 위해 마련된 작업 장소였다.
그의 능력 중 하나인 「기계안 : 캘리카스」를 최대한 효율적으로 사용하기 위해 공들여 만들어 놓은.
‘적의 적은 친구인 법. 그들이 이대로 무너지게 놔둘 순 없지.’
그 은밀하면서도 강대한 세력을 지닌 번천회의 존재를 눈치채고, 그에 대항해 지금까지 살아남았다는 것만 해도 능력은 입증된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들과 연계하는 것만으로도 지금까지보다 더 효율적으로 싸워나갈 수 있는 건 물론, 자신이 알지 못하던 추가 정보들도 입수할 수 있을 터.
하지만 처음 그들에게 접근하려 했을 때의 상황은 그리 여의치 못했다.
최근 번천회와의 싸움에서 밀리길 반복하며 거의 와해될 지경에 처한 지도부가 사방으로 흩어져 꼭꼭 숨어들었다는 게 문제였다.
그렇지 않아도 게릴라처럼 숨어서 움직이는 게 일상인 이들인데, 상황이 이렇게 되었으니 그 위치를 특정하기 힘들어진 건 당연한 일이었다.
당장의 생존이 걸린 그들로선 필사적일 수밖에 없었으니까.
‘그래서 어떻게든 번천회보다 먼저 그들을 찾아야 했는데···.’
그리고 거기서 활약한 게 바로 헤스페론과 그를 위해 미리 준비해 둔 이 최첨단 시설이었다.
휘하의 세력들을 통해 비밀리에 확보해 두었던, 지구로 흘러들어온 이세계의 소자와 기술이 접목된 슈퍼컴퓨터까지 포함된 복합 데이터 센터.
그만큼 가격 또한 끔찍한 수준이었지만 돈은 자신에게 큰 문제가 되지 않았다.
이미 하워드 인더스트리라는 양지의 회사를 통해 탄탄하게 입지를 다지고 있었기에 이런 비밀 거점 몇 개쯤 마련하는 것도 그리 어렵지 않았고.
우웅—
삐비빅!
중앙의 티탄과 연결된 수많은 선을 통해 발광하는 빛이 사방의 전자기기들로 퍼져 나갔다.
헤스페론의 「기계안 : 캘리카스」는 그와 일체화되어 함께 성장하는— 일종의 ‘기계의 정령’이나 다름없는 신비의 결정체.
그리고 거기에 동기화된 티탄 또한 어디 내놓아도 절대 뒤지지 않는 마도 공학의 정수였다.
주변 기기와의 연결이 단순히 전기 신호를 주고받는 것뿐만이 아닌, 이능의 영역에 닿아 원래 한계 이상의 성능을 발휘하도록 끌어올리는 것도 그리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역시 중요 시설의 방비는 장난이 아니네. 저걸 뚫으려면 좀 더 준비가 필요하겠어. ···하긴, 공격 수단이 발전할수록 방어 수단도 발전하는 법이지.’
물론 이계의 기술을 지구에서 구현하는 데는 그만큼 막대한 자원이 소모되기에 그런 방비가 갖춰진 시스템은 극소수에 불과했다.
그가 주시하는 지역과 관련된 모든 정보가··· 우주의 위성과 유선 인터넷은 물론 전파를 비롯한 무선 통신망을 통해 수집된 정보들이 끝도 없이 밀려들었다.
그 과정에서 어지간한 슈퍼컴퓨터로도 분석할 수 없을 정도로 파편화되어 쓰레기나 다름없어진 정보의 찌꺼기들.
하지만 오버테크놀로지 그 자체이자 실시간으로 진화하는 인공 정령인 기계안은 자신과 연결된 기기들을 총동원해 그 정보의 홍수를 빠르게 처리해 나갔다.
이세계에서보다 적당한 수준의 과학 문명을 지닌 지구에서 더 큰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는 존재.
헤스페론이 지그시 눈을 감았다.
「기계안 : 캘리카스」의 성능을 최대한 끌어올려, 쉴 새 없이 쏟아져 들어오는 막대한 정보에서 단 하나의 단서도 놓치지 않기 위해.
***
슬쩍 고개를 돌려 분주하게 움직이는 네 명의 남녀를 바라본 켄이 뒷목을 주물렀다.
‘번천회··· 그리고 타오르는 횃불인가.’
오랜만에 지구로 돌아온 그에겐 어느 쪽이든 처음 들어보는 이름이었다.
물론 만약 마계에 납치되지 않아 제때 돌아올 수 있었다고 해도 저런 비밀스러운 조직들과 엮일 것 같진 않았지만.
‘대체 그자는 정체가 뭐지? 어떻게 마계에 있던 나를 이 지구에 소환할 수 있었던 거야? 그리고 지금 하고 있는 일들도···.’
그런 의미에서 그를 소환한 헤스페론이란 사내는 여러모로 베일에 싸여 있는 존재였다.
그와 처음 만났던 시기를 생각해 보면 지구로 귀환한 지 얼마 되지도 않은 것 같은데, 자신을 소환해 일을 시키는 것이나 비밀 조직들에 대처하는 거나 전부 너무 능숙하지 않은가?
마치 이미 오래전부터 지구에서 저들을 상대해 왔던 것처럼 말이다.
‘설마 두 세계를 마음대로 오갈 수 있을 리는 없고.’
상식에 따라 자연스럽게 정답을 배제한 그가 거칠게 뒷머리를 헤집다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하긴, 이제 와선 어찌 되든 상관없는 일이었다.
그날 신전에 갇혀있던 저주가 그 사내의 손아귀에 넘어간 순간부터 그에게 선택권은 없어졌으니.
오히려 그것 덕분에 이렇게 지구의 공기를 다시 맡을 수 있게 되었으니 켄에겐 오히려 잘된 일이라 할 수 있었다.
‘가족들은 잘 있으려나 모르겠네. 이제 와서 찾아가면 깜짝 놀라겠지? ···물론 그걸 위해선 일단 이 일부터 확실히 끝내야 하지만 말이야.’
다행히 첫 대면 직후 갑작스럽게 벌어졌던 싸움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기습적인 공격을 어렵지 않게 받아낸 켄이 별다른 반격을 하지 않고 계속해서 대화를 시도한 것 덕분이기도 했지만, 소란을 듣고 서둘러 복귀한 동료들을 본 호세가 냉정을 되찾은 것도 하나의 이유였다.
“뭐야? 이게 대체 무슨···!”
“안 님! 호세 님! 괜찮으십니까? ···헛? 누구냐! 어떻게 여기까지 들어온 거지?”
“···베키? 똘라? 너희들 무사했던 건가?”
정찰을 나간 동료들이 이미 당했다고 판단한 것이 선공을 한 가장 큰 원인이었다.
그게 아니라면 자신들이 있는 중심부까지 불청객이 소리 소문 없이 찾아올 리 없다고 생각했으니까.
남이 사는 곳을 방문하는 데 벨을 누르지 않고 몰래 침입했다는 것부터가 뭔가 켕기는 게 있다는 뜻이지 않겠는가?
‘씁, 맞는 말이라 뭐라 할 말이 없군.’
그저 악마로서의 본능 때문에, 그리고 일을 빨리 해결하고 싶은 마음에 외곽 정찰을 무시하고 잠입해 들어왔던 켄으로서는 괜히 오해만 산 셈이었다.
“···그러니까, 당신은 그저 심부름꾼일 뿐이다?”
“그렇지. 사실 난 당신들이나 번천회라는 조직에 대해서도 이번에 처음 들었거든. 공동의 적인 번천회에 대항해 손을 잡아야 한다는 게 내가 아는 전부다.”
“그런 거라면 당사자가 직접 와야 하지 않나? 심부름꾼이랑 무슨 대화를 나누라는 거야?”
“그거야 댁들이 멀쩡한 상태였다면 그랬겠지만··· 지금 이 상황에서?”
그들 일행의 대표자 격인 안이라는 여성과 대화를 나누던 켄이 어깨를 으쓱였다.
그러곤 눈길을 돌려 슬쩍 주변을 둘러보았다.
변변찮은 본거지는커녕 민가 하나 보이지 않는 외진 산골.
거기다 아무리 간부급이 포함되어 있다곤 해도 고작 넷밖에 되지 않는 인원수까지.
사실상 도망자나 다름없는 신세인 그들과의 연계를 위해 상대가 직접 찾아오길 바라는 건 욕심이나 다름없었다.
“쯧.”
그 말엔 차마 할 말이 없는지 안도 혀를 찰 뿐이었다.
무엇보다 자신은 뿔뿔이 흩어진 간부 중 하나일 뿐, 타오르는 횃불의 대표도 아니지 않은가?
“안, 정말 괜찮나?”
그때, 다시 인간으로 돌아온 모습으로 시종일관 그녀의 곁에 붙어있던 호세가 나직이 입을 열었다.
아직도 켄을 경계하는 기색이 역력한 채로.
오래 소란을 부려봤자 자신들에게도 좋을 건 없기에 잠깐 싸움을 멈췄을 뿐, 그의 눈은 처음부터 끝까지 단 한 시도 켄에게서 떨어지지 않고 있었다.
“괜찮아. 일단 지금까지 한 말 중에 거짓말은 없어. 번천회를 적대하는 것도 맞고, 호의를 가지고 접근한 것도 맞아.”
“하지만 상대는 악마야. 그 녀석과 같은···.”
“물론 전부 믿을 생각은 없어. 말하지 않은 비밀이 얼마나 있는지도 모르고. 하지만 지금 우리 처지가 그런 걸 하나하나 다 따질 상황은 아니잖아?”
“···하긴, 나보다 강자인 건 분명하니까.”
바로 앞에 장본인이 있는 걸 알면서도 자기들끼리 대놓고 쑥덕거리는 두 사람. 그에 켄의 입꼬리가 삐뚜름하게 비틀어졌지만 거기에 대고 뭐라 하지는 않았다.
오랜 시간 악마들과 한데 어우러져 살아온 만큼, 그 자신도 악마에 대한 세간의 인식이 그리 틀리지 않다는 걸 아주 잘 알고 있었으니.
그도 「사고 전이」 덕분에 자아가 어느 정도 고정되지 않았으면 지금의 인간적인 모습 따윈 진즉에 마모되고도 남았을 것이다.
“한창 대화 중에 미안한데, 방금 들어온 급한 소식이 하나 있다.”
“소식?”
물론 그렇다고 그 논담을 가만히 지켜보지도 않았다.
어쨌든 그가 받은 명령은 이들을 도와 안전한 곳까지 피신시키는 것.
지구에서의 자유를 위해서라도 이 임무는 어떻게든 성공적으로 완수해야 했다.
“번천회로 추정되는 무리가 이곳으로 접근 중이라는군. 그 처형자라는 악마는 없는 것 같으니 싸움 자체는 큰 문제가 아니겠지만···. 저들에게 발목이 잡히는 건 곤란하겠지?”
당연한 이야기였다.
지금 그들의 신분은 도망자.
추격자에게 위치가 발각된 순간부터 생존율은 기하급수적으로 떨어질 수밖에 없지 않은가?
“···그걸 어떻게 안 거지?”
다만 문제는 지금 이 말을 하는 악마— 켄을 얼마나 믿을 수 있느냐는 것이었다.
섣불리 믿었다가 그것이 함정이라도 된다면 정말 모든 게 끝이었으니까.
그런 그들의 마음을 짐작이라도 한 듯, 피식 웃음을 흘린 켄이 손가락으로 하늘을 가리켰다.
“내 고용주께서 하늘에서 지켜보고 계시거든. 이미 이 근방은 그분의 손바닥 안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지.”
“하!”
누가 들어도 장난스러운 말.
하지만 일행을 이끄는 안은 그 말을 그냥 흘려들을 수 없었다.
그녀가 지금까지 살아남을 수 있도록 도와주었던, 번천회를 상대로 버텨올 수 있도록 해주었던 고유스킬이 귓가에 속삭였다.
지금 자신이 해야 할 선택은 오직 하나뿐이라고.
“어떻게 할 거지? 나를 믿고 따라오겠나?”
“······.”
당연히 그녀의 결정은 이미 정해져 있었다.
***
파스텔톤의 운무가 가득 피어오른 방안.
“후우— 흐름이 바뀌었네.”
그 한가운데의 좌식 소파에 기대앉은 여인의 입가에서 하늘색 연기와 함께 한숨과도 같은 말이 새어 나왔다.
몽롱하게 풀린 그녀의 시선이 허공에서 아롱아롱 흔들리는 연기를 바라보았다.
“드디어 나타났구나, 대적자.”
운명의 흐름을 뒤트는 존재.
미래를 불투명하게 만드는 존재.
장막 뒤에 숨어 세상을 조롱하는 존재.
“그럼 우리도 응당 그에 맞는 준비를 해야겠지.”
손가락 사이로 모래가 빠져나가듯.
완벽히 숨통을 움켜쥐었다 생각했던 ‘타오르는 횃불’의 잔당들이 속속 빠져나가기 시작한 어느 날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