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overeign of the Infinite Clones RAW novel - Chapter (424)
마스커레이드 (2)
초월자.
그것은 무궁하게 쌓아 올린 업을 통해 자신이라는 존재를 규정하는 한계를 넘어선 이들을 칭하는 말이었다.
단련으로 만들어 낸 궁극의 육체나 정신적 수행으로 이룬 달관, 그것도 아니면 무한한 마력이나 극에 이른 기술이라도 상관없었다.
중요한 것은 틀을 탈피함으로써 기존의 제약에서 벗어나 자신만의 정의를 세우고 새로운 길을 개척하는 것.
때문에 그들이 사용하는 힘은 평범한 이능을 넘어선 권능에 가까웠으며, 그 벽을 넘어서지 못한 이들에겐 가히 절대자나 다름없는 존재로 군림할 수 있었다.
그렇기에 초월자.
신격으로 향할 자격을 증명한 세상의 정점에 선 자였다.
“큭! 말피! 얼른 이쪽도···!”
“후우, 안. 넌 아직 괜찮니?”
“···전혀 안 괜찮지만, 그렇다고 여기서 주저앉으면 죽어버릴 테니 어쩔 수 없지. 이대로 그냥 다 포기할 수는 없잖아?”
“좋은 마음가짐이야. 그 정도면 아직 멀쩡한 것 같네.”
“말피··· 안···!”
하지만 세상 모든 일들이 다 그렇듯.
그런 위대한 경지에 오른 이들 사이에서도 서로 간의 우열은 있는 법이었다.
상충되는 정의가 정면으로 충돌할 때 더욱 강한 쪽만이 살아남는 것처럼.
벽을 넘어섰다고 해서 모든 초월자들이 동등한 것은 아니었다.
“호세! 괜찮아? 앞으로 30초 정도만 더 버틸 수 있겠어?”
“···우습게 보지 마. 아직 1분 정도는 여유로우니까.”
“그래? 그럼 1분으로.”
“그래도 최대한 빨리 끝내줬으면 좋겠네. 버틸 수는 있지만 팔다리 하나씩은 날아갈 것 같으니.”
따지고 보면 초월의 벽을 넘어선 순간부터 모든 제약이 사라진 무제한 레이스의 스타트라인에 선 것이나 다름없었다.
이곳엔 이미 저 앞에서 달려 나가고 있는 선배들도 있었고, 온갖 마개조를 통해 중무장한 경쟁자도 있었으며, 그들이 뿌려놓은 푸짐한 대전차 지뢰도 있었으니까.
“후우.”
그래도 나름 그 레이스의 초입부는 벗어났다 자부하는 안이 깊게 숨을 들이쉬었다.
그리고 그것을 천천히 내뱉으며, 자신의 내면에서 흐르던 차크라의 방향을 비틀었다.
‘지금은 오라클을 신경 쓸 때가 아니야. 우선 피해를 최소화하고 시간을 버는 게 우선이다. 말피가 공간 봉쇄를 해결하고 퇴로를 확보할 때까지.’
처음엔 총통이 당했다는 사실에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올랐지만, 시간이 조금 지나고 나니 어느 정도 냉정을 되찾을 수 있었다.
어쨌든 복수도 일단 살아있어야 할 수 있는 법.
한없이 불리한 이 자리에서 사생결단 내겠다고 매달리는 것보단 어떻게든 빠져나간 후에 기회를 노리는 게 훨씬 합리적이었다.
‘그나마 다행인 점은 이곳이 말피가 구축한 영역이라는 것. 탈출로는 막혔지만 나머지 수단은 건재하니 쉽게 무너지진 않을 거야.’
서로 간의 전력 차가 아득한 만큼 공간을 이리저리 뒤틀고 함정을 발동하여 어떻게든 정면 승부를 방해하는 것만으로도 큰 도움이 되었다.
또 한 가지 불행 중 다행인 사실은, 조력자인 켄이 번천회 측에서 가장 강한 전력인 처형자를 막아주고 있다는 것이었다.
말 그대로 막고만 있었기에 상황이 그리 좋아 보이진 않았지만···.
쐐액—!
콰아앙!
불길에 휩싸인 채 채찍처럼 휘둘러진 꼬리를 맞은 켄이 전신으로 검은 기운을 흩뿌리며 뒤쪽의 벽에 처박혔다.
[과연, 아주 튼튼하구나. 이 정도면 조금 아쉽긴 해도 그럭저럭 심심풀이 정도는 되겠어.]“끄으으!”
무너진 벽의 잔해에서 비틀거리며 나온 켄이 머리를 이리저리 흔들었다.
내면에서부터 지금껏 가져보지 못한 힘이 끊임없이 샘솟고 있었으나, 처형자라 불리는 악마는 여전히 아무렇지도 않게 그를 압도하고 있었다.
그나마 「사고 전이」를 이용해 새로 주입된 기운과의 동화율을 억지로 끌어올리지 않았으면 이렇게까지 버티지도 못했을 터.
‘이 힘을 온전히 다룰 수만 있었어도 어떻게 비벼볼 수 있었을 텐데!’
지금은 상대가 그에게 흥미를 보이고 있었기에 어찌어찌 맞서고는 있지만 그게 그리 오래 갈 것 같진 않았다.
그리고 그 흥미가 완전히 떨어지는 그때야말로 파국의 문이 열리는 순간이겠지.
‘이 망할 고용주! 뭘 하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제발 빨리 좀···!’
그런 켄과 처형자 쪽의 상황을 확인한 안이 다시 정신을 집중했다.
당장 무너질 것 같진 않지만 시급을 요하는 건 이쪽이나 저쪽이나 마찬가지였다.
“안! 아직 멀었··· 큭!”
“으음.”
말피가 이리저리 공간을 움직여 유리한 구도를 만들고 도저히 어쩔 수 없는 상황에선 호세를 비롯한 전투원들이 나서서 시간을 벌고 있었으나, 압도적인 전력 차 앞에선 모든 것들이 중과부적이었다.
어떻게든 돕겠다고 나선 간부들이 하나둘 희생되는 가운데, 시시각각 악화일로로 치닫는 이 위기 상황을 타파할 가능성이 조금이라도 남은 건 오직 그녀의 능력뿐이었다.
우우우웅—!
안의 몸속에서 맹렬하게 회전하던 기운이 세상과 공명했다.
차크라는 내면의 소우주를 통해 개념과 현상에 개입하는 이능.
그녀의 소우주가 활짝 열리며 오롯한 의념이 주변 현상을 강제하기 시작했다.
안이 개방한 차크라는 ‘운명’.
그것이 고유스킬 「확률 조작」과 어우러지며 그동안 오라클의 시선을 피할 수 있게 해주었던, 동시에 그녀가 초월의 벽을 넘어설 수 있게 해 주었던 힘이 발현되었다.
—운명 조작.
끈질기게 버티는 타오르는 횃불의 간부들에게 짜증 어린 공격을 내뻗던 번천회 일원 하나가 눈살을 찌푸렸다.
“음? 이건···.”
그리곤 가늘게 뜬 눈으로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곤 천천히 주변을 재차 훑어보았다.
그런 행동을 보이는 것은 그 하나뿐만이 아니었다.
맞아야 할 공격이 맞지 않는다.
의미 없다 생각한 반격이 어느 순간 위협적으로 다가왔다.
그렇지 않아도 귀찮게 하던 지형 변화는 더욱 까다로워졌고, 그 방해를 헤치고 놈들에게 다가가는 과정은 더 번거로워졌다.
“쯧, 조금 시간이 걸리겠군.”
타오르는 횃불을 정리하는 일은 다른 일행들에게 맡긴 채, 처형자가 혹시 켄을 죽이지 않을까 노심초사하며 주시하던 나가라자도 상황을 파악하고 혀를 찼다.
하지만 그것뿐.
이내 대수롭지 않게 귀를 판 그는 다시 처형자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초월의 영역에 다다른 강자 다수에게 영향을 끼칠 정도라는 건 확실히 대단하긴 하나, 이렇게 간접적으로 할 수 있는 일에는 엄연히 한계가 있었다.
기껏해야 지금처럼 귀찮게 하며 시간이나 끄는 게 고작일 터.
“굳이 나까지 나설 필요는 없겠지.”
그가 직접 나서면 일이 더 빨리 끝나겠지만 그럴 생각은 없었다.
어차피 결과는 이미 정해져 있었고, 지금의 이 공간 봉쇄는 시간 좀 지난다고 풀릴만한 것이 아니었으니까.
그보단 지금처럼 만약의 사태에 대비하는 것이 낫다는 게 그의 판단이었다.
그 생각이 딱히 틀린 건 아니었다.
‘뭐지, 이건?’
아무도 예상할 수 없었던, 매우 특별한 변수가 발생하지만 않았더라면.
‘대체 뭐야? 무엇이기에 운명이 이렇게나 날뛰는 거지···?’
번천회를 상대로 버티는 일행들에게 도움을 주는 한편, 봉쇄를 풀 확률을 끌어 올리기 위해 차크라를 운용하던 안의 표정에 묘한 기색이 어렸다.
외부에서 시작된 어떤 변화의 흐름이 ‘가능성’을 찾아 헤매던 그녀를 끊임없이 자극하고 있었다.
「확률 조작」으로 감지되는 수치가 마구잡이로 널뛰는 것과 동시에 근원이 어디인지 알 수 없는 운명이 그녀를 유혹하며 손짓했다.
네가 원하는 것이 바로 여기에 있노라고.
다만 문제는 그것의 정체가 무엇인지 도무지 짐작조차 가지 않는다는 것이었는데···.
그러나 한동안 이어지던 그녀의 고민은 길지 않았다.
‘이게 무엇이던 지금보다 상황이 더 나빠지진 않겠지.’
그녀의 능력 덕분에 잠깐 시간을 벌긴 했지만 그건 궁극적인 해결책이 아니었다.
이 일로 나중 일이 어떻게 되든 당장은 변수를 만들어내기 위해 뭐라도 해야 하는 상황.
우우우웅—
결국 그녀는 자신에게 남은 여력을 총동원하여 직감이 이끄는 대로 ‘운명 조작’을 발현했다.
이 알 수 없는 변수가 자신들에게 도움이 되길 기도하면서.
그렇게 그녀가 바깥에서 노크하던 운명의 끈 한 가닥을 움켜쥐고 내부로 끌어당긴 순간.
파아앗—!
지근거리에서 일어난 눈부신 광채와 함께.
아름답게 빛나는 칼날 하나가 공간을 꿰뚫고 튀어나왔다.
“···검?”
그에 당황할 겨를도 없었다.
잠시 그 자리에서 꿈틀거리나 싶던 검날이 그대로 아래로 쭉 그어지며 허공에 기다란 균열이 만들어진 것이다.
그리고 그 틈새에서.
“···음? 뭐지? 갑자기 저항이 약해졌는데? 덕분에 생각보다 쉽게 뚫었군. 외부 침입에는 좀 약한 편인가?”
낯선 사내의 목소리가 흘러들었다.
철커덩— 철컥—!
금속이 부딪치는 묵직한 소리와 함께.
‘저건···!’
상황을 지켜보던 안의 눈이 서서히 커졌다.
이 밀폐된 공간을 가르고 갑작스럽게 난입해 들어온 존재.
그가 등장하면서 주위의 밝기가 몇 단계는 올라갔다.
단순히 기분 탓이 아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저렇게 대놓고 후광을 흩뿌리고 있지 않은가!
동시에 그녀는 깨달을 수 있었다.
지금 이 상황을 단번에 뒤집을 만한 변수가—.
“뭐, 아무래도 상관없나. 어쨌든 들어오긴 했으니까.”
—아니, 기적이 강림했다는 것을.
다만 한 가지 예상할 수 없었던 것은···.
“크하핫! 누가 우리 신참 괴롭혔냐!”
“아··· 공기가 탁해서 어지러운데. 역시 괜히 왔나? 토할 것 같으니까 빨리 끝내고 돌아가야지···.”
“호오, 이거 오랜만에 포식 좀 하겠군.”
그 수가 좀 많았다는 사실이었다.
***
‘어디 보자, 상황은···.’
순백의 갑옷으로 빈틈없이 무장한 하인리히가 천천히 주위를 둘러보았다.
당연하지만 싸움은 이미 소강상태에 접어든 뒤였다.
‘그럴 만도 하지.’
이렇게 요란하게 등장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심지어 이곳은 아무도 드나들 수 없도록 철저하게 봉쇄된 구역이지 않은가?
지금은 순식간에 아물었다곤 하나 성검에 「공간 베기」까지 사용하고도 애를 써야 했을 정도니 말 다 했지.
그런 곳에 하나같이 개성적으로 차려입은 일단의 무리가 예고도 없이 난입했으니 주변의 시선을 끌지 않는 게 오히려 이상한 일이었다.
“···뭐냐, 대체 어떻게 들어온 거지?”
그때, 줄곧 여유로운 태도였던 나가라자가 굳은 얼굴로 나직이 입을 열었다.
이미 기다란 창을 뽑아 든 채 임전 태세로 들어간 그에게선 이전의 느긋한 모습이라곤 눈을 씻고 찾아봐도 보이지 않았다.
뱀처럼 샛노랗게 변한 그의 두 눈이 갑작스러운 이방인들을 순식간에 훑어 내렸다.
“이계의 성자에 팬텀, 그리고···.”
순백의 갑옷에 투구를 눌러쓰고 전신에서 후광을 발산하는 백기사.
단정한 검은 양복을 갖춰 입고 얼굴엔 새하얀 반가면을 걸친 팬텀.
이미 익히 알고 있던 두 사람을 거친 그의 시선이 나머지 둘에게로 향했다.
‘역시 성자도 놈들과 한패였나. 그런데 저 둘은···.’
반쯤 벌거벗은 몸에 머리에는 흉측한 짐승탈을 뒤집어쓴 거인과 반대로 펑퍼짐한 의복과 장갑, 오토바이 헬멧을 눌러써 공기와 맞닿는 곳이 하나도 없는 괴인까지.
한 구역의 지부장으로서 다양한 정보를 접했던 그의 머릿속 데이터베이스가 팽팽 돌아갔다.
‘저 헬멧의 인상착의. 서울 테러 때 등장해서 구호 활동을 벌이고 사라졌다는 놈과 동일하군. 다른 놈은···.’
함정을 준비하면서 의심스러운 이들의 인적 사항도 숙지하고 있었으나 딱히 짐작 가는 바가 없었다.
사실 이미 거하게 활동한 이력까지 있었지만, 닥터의 기억이 온전히 전해지지 못하면서 관련 정보가 누락되어버린 탓이었다.
그런데 그런 그의 반응을 어떻게 받아들였는지, 등장하자마자 이리저리 몸을 풀던 반라의 거구가 한 걸음 앞으로 나서며 위풍당당하게 소리쳤다.
“카하하핫! 이 몸이 누구냐고 물으신다면야! 내가 바로 마스커레이드의 일좌! ‘사자탈’ 님이시다!”
“아··· 뭐··· 전 아무래도 좋으니까 그냥 마음대로 부르세요···.”
거기에 그 뒤를 잇는 의욕 없이 축 늘어진 헬멧 사내의 목소리까지.
그 긴장감이라곤 눈곱만큼도 없는 자기소개에 나가라자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저건 그만큼 자신들을 무시하고 있다는 뜻이지 않은가?
[흐으— 이거 참, 굉장히 흥미롭군.]그에 발끈한 그가 한 마디 하려던 순간, 그 사이로 목소리 하나가 끼어들었다.
이변이 발생한 즉시 상대하던 켄을 멀찍이 날려버리고 돌아가는 상황을 조용히 주시하던 악마.
처형자가 어느새 그가 있는 곳으로 다가와 있었다.
[솔직히 여기까지 오면서 조금 기대하긴 했는데···. 이건 예상했던 것 이상이구나. 설마 이 정도나 되는 놈들이 이렇게 한꺼번에 찾아올 줄이야.]입꼬리를 삐죽 올리며 빼곡한 이빨을 드러낸 악마가 뜻밖의 선물이라도 받은 듯한 태도로 난입자들을 천천히 둘러보았다.
상대에게서 풍겨 나오는 온몸이 저릿해질 정도의 무거운 존재감.
여럿의 기세가 하나로 합쳐지면서 느껴지는 감각이 아니었다.
비록 번천회주보단 부족할지라도, 그 하나하나가 자신조차 경시할 수 없는 경지에 오른 극강의 강자들이었다.
[푸흐흐흐!]투쟁에 절여진 그의 육체가 거칠게 꿈틀거렸다.
그에게 다수의 강자들에 대한 두려움 따윈 없었다.
그저 피와 살점이 튀는 싸움에 대한 기대감만이 흘러넘칠 뿐!
[좋구나, 아주 좋아! 생존이 달린 투쟁! 목숨을 건 싸움이야말로 살아가는 존재가 추구해야 할 최고의 가치! 조금 실망스럽던 참이었는데 역시 여기까지 온 보람이 있었구나!]“파핫! 이거 나랑 마음이 통하는 친구구만! 그래, 잘 지내보자는 의미에서 내가 선물 하나 주도록 하지!”
[흐음? 선물이라?]“암, 내가 아주 좋아하는 거라고? 맛이 기가 막히거든.”
의아해하는 상대에게 히죽 미소를 지어 보인 할리가 성큼성큼 가까이 다가갔다.
그렇게 어느 정도 거리가 가까워졌을 때.
“카하하핫! 남기지 말고 잘 받아먹으라고!”
그는 잠시도 망설이지 않고—.
콰아아앙—!
“우리 신참 몫이니까!”
상대에게 커다란 선빵을 선물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