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overeign of the Infinite Clones RAW novel - Chapter (425)
마스커레이드 (3)
“끄응···. 이거 이러다 제명에 못 죽을 것 같은데···.”
만신창이가 된 채 부서진 벽의 잔해에서 엉금엉금 기어 나온 켄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이미 전신을 가득 채웠던 끝 모를 힘은 다시 온데간데없이 사라진 뒤였다.
‘무리한다면 좀 더 버틸 순 있겠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급격하게 육체가 무너져 가는 상황에서 괜한 만용을 부릴 필요는 없었다.
이젠 굳이 그렇게까지 할 이유가 없어졌으니까.
“후우, 그런데 저들이 진짜 그 마스커레이드의 일원이란 말이지?”
몸에 묻은 먼지를 툭툭 털어내던 그의 시선이 멀찍한 곳에서 발발한 폭풍의 핵으로 향했다.
갑작스럽게 공간을 찢고 난입해 들어온 네 명의 인영.
통일감이라곤 눈곱만큼도 없는 개성적인 차림새를 한 저들이 바로 그 지원군이 틀림없었다.
어떻게든 조금만 버텨보라던 고용주가 보내준!
“그런데··· 설마 그 지원군이 저 정도 수준일 줄은 몰랐는데.”
머릿수 자체는 그리 많다고 할 수 없었다.
그러나 그 수준을 따져 보면 저만한 전력이 한자리에 모여 있는 게 얼마나 말도 안 되는 건지 알 수 있었다.
‘처형자와 마찬가지로 제대로 가늠할 수 없는 상대가 셋···. 거기다 다른 하나도 나보다 강하다.’
그런 괴물들이 전부 하나의 조직에 소속되어 움직이고 있다니.
대체 그 마스커레이드라는 비밀 조직은 뭐 하는 곳이란 말인가?
솔직히 말해서 그들이 은밀하게 세계 정복을 꾸미고 있다고 해도 납득할 자신이 있었다.
당장 마계에 있었을 자신을 소환해 부리는 고용주만 해도 앉은 자리에서 전 세계의 정보를 속속 들여다볼 정도의 능력자이지 않나?
자신의 의지와 무관하게 어쩌다 보니 그 조직의 신참이 되어버린 켄으로선 영 신경 쓰일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성자라고? 설마 내가 아는 아우테리카의 그 성자는 아니겠지···?’
자신이 악마여서일까.
가면의 뱀파이어를 비롯한 다른 이들보다 찬란한 후광과 함께 짙은 신성력을 흩뿌리는 존재가 더욱 신경 쓰일 수밖에 없었다.
설마 같은 편이 된 자신을 정화하겠다고 칼을 들이밀지는 않겠지만.
“카하하핫! 남기지 말고 잘 받아먹으라고!”
그때, 한창 기세가 솟구치는 현장에서 들려오는 커다란 웃음소리가 그의 귓속에 틀어박혔다.
그 뒤를 잇는 커다란 폭음을 동반한 충격파.
몸을 틀어 그것을 해소한 켄이 미간을 찌푸렸다.
‘···저 웃음소리, 뭔가 굉장히 익숙한데.’
단순히 웃음소리만이 아니었다.
목소리만 차이가 있을 뿐 그 말투 역시 기시감이 느껴질 정도로 친근했다.
바로 얼마 전에 그와 함께 목숨을 건 모험을 떠났던 머리 셋 달린 친구가 떠오를 정도로.
‘···기분 탓이겠지?’
다짜고짜 주먹을 날린 우락부락한 근육질의 거구를 물끄러미 응시하던 켄이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역시 기분 탓일 것이다.
그 뽀송뽀송한 털을 가진 귀여운 강아지가 저런 흉측한 야만인일 리가 없으니까.
약 이십 년 동안 마계에 거주하면서 완전히 악마족의 감성에 물들어버린 켄이 시선을 돌렸다.
갑작스럽게 커다란 선빵을 한 아름 선물 받은.
조금 전까지 그와 한창 치고받고 싸우던 악마가 있던 곳으로.
***
마스커레이드라는 이름을 달고 파견된 네 명의 아바타들.
그렇게 과한 전력을 보낸 데에도 나름의 이유는 있었다.
애초에 이곳은 번천회가 함정이랍시고 준비한 무대였다.
괜히 딱 맞는 전력에 보냈다가 놈들이 꺼낸 비장의 수단에 일을 그르치느니, 아예 무슨 수를 쓰더라도 소용없도록 손이 비는 전력을 몽땅 투입하는 게 낫다고 판단한 것이었다.
‘이미 어느 정도 지구에서 활동하며 대충 존재가 드러난 녀석들이기도 하고.’
마침 적당한 자리도 마련되었겠다, 어느 정도는 이쪽의 전력을 과시할 필요도 있었다.
그렇게 하는 것이 ‘타오르는 횃불’을 완전히 흡수하는 데에도 유리할 테니.
‘···수장을 잃으면서 거의 와해되다시피 한 지금은 조금 계륵 같아지긴 했는데.’
아무리 그래도 없는 것보다는 나을 터.
번천회에 대항해 세계적인 활동을 이어가기 위해선 세력의 존재가 필수였다.
조직원들의 수도 상당한 데다 초월자들까지 끼어있으니 일단 거둬 두면 어떻게라도 쓸 일이 있겠지.
“흐음?”
그렇게 보내진 아바타 중에 한 명.
온갖 차원을 넘나들며 트러블이 발생하는 곳마다 끼어드는 용병의 귀감이자, 이미 몇 차례나 악마와 상대해 보았던 악마 사냥꾼 할리가 고개를 갸웃했다.
개체의 성향도 그렇겠다 적절한 핑계거리도 있으니 거침없이 선빵을 후려갈긴 건 좋은데···.
[허, 굉장히 단단하군. 아니, 이건 단순히 그 정도가 아닌데? 넌 대체 뭐 하는 놈이지? 애초에 생물이긴 한 거냐?]어째서 자신의 어깨에 손가락만 한 구멍들이 나 있는 걸까?
그나마도 본능적인 직감을 따라 몸을 틀지 않았으면 어깨가 아니라 심장에 구멍이 뚫렸을 것이다.
물론 이 정도 상처쯤이야 할리에겐 별것도 아니라지만, 문제는 직접 당하고서도 그 공격이 언제 어떻게 들어왔는지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다는 것에 있었다.
“거참, 이런 경우는 처음인데. 내 감각을 속이고 회피한 것도 모자라 반격까지 했다고?”
[그건 이쪽이 할 말이다. 설마 그 순간에 치명상을 피하고 그 정도 상처에 그치다니. 과연, 아주 훌륭하구나!]“응? 치명상? 상처?”
상대의 말에 「생체 오러」와 「투왕의 각인」은 물론 「광제심결(改)」까지 발동해 감각을 극도로 끌어올리던 할리가 눈을 끔벅였다.
물론, 이미 그의 어깨에 새겨져 있던 구멍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없었다.
[······? 뭐냐? 내 공격으로 입은 상처를 그렇게 빨리 재생했다고?]흘러내린 혈액조차 고스란히 흡수해 흔적 하나 남아있지 않은 모습.
그 광경에는 처형자도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물론 그간 처리해 온 사냥감 중엔 재생력이 없는 쪽이 오히려 더 드문 편이었다.
개중엔 아주 작은 살점만 남아있어도 순식간에 원상태로 복구하던 괴물까지 있었으니 말 다 했지.
‘하지만 그런 놈들도 내 공격에는 속수무책이었거늘.’
자신과 동급의 상대라 ‘격’으로 압살할 수 없다 해도 마찬가지였다.
그것이 그가 이계에서 대악마의 자리에 오르며 획득한, 불멸의 존재인 신좌에게까지 도전할 수 있게 해주었던 특전이었으니까.
그런데도 저렇게 멀쩡하다는 소리는···.
“어우, 겨우 그거 가지고 배가 확 꺼지네. 이거 연비가 최악이잖아? 이러다 근손실이라도 오면 곤란한데.”
투덜거리는 상대의 목소리에 처형자의 입꼬리가 꿈틀거렸다.
그와 동시에 당황했던 마음 위로 투지가 스멀스멀 기어올랐다.
그의 전신에서 일어난 불꽃 같은 에너지가 순식간에 사방을 살라 먹기 시작했다.
[흐흐흐··· 그래, 그 정도는 되어야지. 좋군, 아주 좋아!]애초에 그가 바라던 것이 바로 이런 싸움이었다.
자신이 가진 모든 전력을 이용해 맞부딪치는, 목숨과 영혼과 신념이 충돌하는 치열한 사투.
평소의 그는 고유스킬을 사용하는 걸 최대한 자제하고 악마로서 쌓아 올린 힘만을 주로 활용하고 있었다.
방금 전에야 먼저 기습을 가해온 상대에게 조롱 겸 경고의 의미로 쓰긴 했지만, 그것도 진지하게 목숨을 노릴 각오로 사용한 건 아니었다.
이유는 간단했다.
[푸하핫! 그래, 이러면 시시하게 끝날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되겠구나!]여태껏 고유스킬까지 사용한 그를 상대할 수 있었던 건 번천회주 말고는 아무도 없었으니까.
오히려 가진 능력을 총동원할 수 있는 상대가 나타났다는 사실에 기껍기까지 할 정도였다.
다음 순간.
활화산 같은 기세를 뿜어내며 웃음을 터트리던 처형자의 모습이 사라졌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엇?”
푸확—
반사적으로 몸을 뒤튼 할리의 가슴팍이 갈라지며 핏물이 튀어 올랐다.
「궁극의 진화 생명체」로서 핵폭탄의 폭심지에서도 상처 하나 없을 몸뚱이 위로 새겨진 네 줄기의 깊은 상처.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찌직— 촤악! 우드득—!
불길처럼 타오르는 파괴적인 에너지에 단단한 피부가 깎여나간다.
공간조차 일그러뜨리는 손아귀에 질긴 근육이 뜯어졌다.
날카로운 무언가에 손가락이 잘려 나가고, 그것을 채 재생하기도 전에 손목이 끊어졌다.
[오호? 이것까지? 그럼 이건 어떠냐! 이것도 피해 봐라. 자, 자!]“크으! 이 친구 이거 아주 저 혼자 신났구만?”
그 모든 일들이 폭풍처럼 지나가는 와중에도 할리는 반격은커녕 공격을 제대로 회피할 수조차 없었지만···.
그래도 나름의 수확은 있었다.
감각을 최대한 끌어올린 상태로 직접 몸으로 굴러가며 당하길 반복하다 보니, 마침내 자신이 무엇에 당하고 있었는지 확실히 파악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거 설마.’
물론 그건 제삼자의 입장에서 상황을 지켜볼 수 있었던 다른 아바타들 덕분이기도 했다.
「통찰」을 사용해 주변에 발생한 인과의 뒤틀림을 분석하던 하인즈 2세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그건 「은하수의 관찰자」를 비롯한 자연 친화계 스킬들을 총동원해 대기의 흐름을 읽던 해리스도 마찬가지였다.
“···시간 정지라고?”
미간을 찌푸린 하인리히가 나직이 읊조렸다.
천사라는 한 차원 높은 존재로 다시 태어나며 트인 눈에 세상의 부자연스러운 무언가가 감지되었다.
제대로 인지할 수 없는 시간 속, 모든 것이 정지된 세상에서 자유롭게 움직이는 단 하나의 예외.
그 존재가 움직임을 멈추고 자신의 손끝에 묻은 할리의 피를 만지작거렸다.
[허! 정말 대단하군. 공격이 몸에 닿는 그 찰나의 순간에 반응한 건가?]물론 할리가 지닌 격도 그리 낮지 않은 만큼 그 능력도 완전하진 않았다.
그의 몸에 공격이 닿는 찰나의 순간만큼은 처형자가 발동한 ‘시간 정지’가 제대로 먹히지 않았던 것이다.
‘하지만 그것만으로 놈을 잡긴 힘들겠지.’
그제야 놈이 왜 저렇게 여유로웠는지 알 수 있었다.
전투에서의 활용성도 활용성이거니와, 위험한 순간에 저 능력을 사용한다면 언제든 안전하게 몸을 뺄 수 있을 테니 위기감을 느끼지 못한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쯧, 거 재미없게 싸우는구만? 말하던 거에 비해서 하는 짓은 영 얌체 같은 것이···.”
[이런, 내 너무 흥이 났나 보구나. 이해해 줬으면 좋겠군. 지구로 돌아온 뒤론 내 전력을 받아줄 수 있는 게 회주밖에 없어서 말이야. 그동안 조금 욕구불만이었거든. 그나마 가능성이 있는 놈들은 회주가 소속원들끼리의 싸움을 금지하면서 마주치기도 힘들어졌고.]하긴, 이세계에서 저 정도까지 성장했다면 수급한 카르마의 양도 어마어마할 것이다.
당장 자신의 「아바타」만 봐도 그렇듯 고유스킬은 잠재된 가능성이 무궁무진한 이능이지 않은가?
그것이 신성을 획득하면서 권능의 영역에까지 도달했다면···.
‘그나저나 덕분에 한 가지 더 정보를 얻었군. 어쨌든 가능성이 있는 놈들이 더 있긴 하다는 거지?’
멈춰진 시간 속에서 가해지는 공격에 대응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놈들이 보통 수준이 아니라는 건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
자세한 사항은 앞으로 차근차근 알아 가면 될 터.
그가 그런 생각을 하고 있자니, 순식간에 시작되고 끝난 탐색전에 뒤쪽에서 관망하고 있던 아바타들을 한 차례 쭉 둘러본 처형자가 대수롭지 않게 입을 열었다.
[다 쉬었으면 슬슬 본격적으로 시작해 보자고. 흐음, 한꺼번에 상대하긴 좀 버거워 보이지만···. 뭐, 상관없나. 이런 기회가 또다시 오진 않을 테니까. 극한으로 자신을 몰아붙이며 한계를 알아보는 것도 좋은 경험이 되겠지!]어찌나 자신이 넘치는지 아예 협공을 가정하고 이어질 전투를 대비하는 처형자.
그 태도를 보고 있자니 슬슬 배알이 뒤틀리기 시작했다.
놈의 능력이 대단하다는 거야 충분히 인정하는 바였으나, 그것과 자신들을 만만히 보는 건 전혀 다른 문제이지 않은가?
‘물론 처음부터 그럴 생각이긴 했는데!’
소수에 대한 다수의 협공, 속칭 ‘다구리’는 역사와 전통이 증명하는 훌륭한 전술이었다.
그 효율성을 따져보면 사용할 수 있는 여건이 될 땐 적극 활용하는 게 좋다는 생각은 지금도 변함이 없었다.
하지만···.
‘···그래, 생각해 보니 놈의 말마따나 이것도 다 경험이잖아? 저 정도 수준에 저런 위험한 능력을 지닌 적수를 쉽게 만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그 과정에서 얻는 게 있다면 조금 계획을 바꿔도 상관없을 터.
자신의 진정한 상대는 놈보다 훨씬 강한 번천회주였다.
즉, 지금은 경험치를 쌓아 레벨업을 해야 할 때였지 쉽게 쉽게 다음 스테이지로 넘어갈 때가 아닌 것이다.
‘다양한 경험 또한 전투로 얻을 수 있는 훌륭한 가치 중 하나지. ···보는 눈도 많은데 영 모양새가 좋지 않기도 하고.’
결정했다.
일단 어떻게든 한방 먹이기 전까진 할리 혼자 해보기로.
푸쉬익— 끼기기깅—!
천천히 앞으로 나서는 그의 몸이 서서히 달아오르며 뜨거운 수증기가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그와 함께 울려 퍼지는 쇠가 비틀리는 듯한 금속성.
그 체구도 어느새 상대를 내려다볼 수준으로 커져 있었다.
“킁! 거 됐으니까 이번에야말로 제대로 붙어 보자고! 이제야 좀 몸이 풀린 거 같으니까!”
[음? 너 혼자 싸울 생각인가? 뭐, 나야 그래도 상관없다만.]혼자 성큼성큼 다가오는 할리를 바라본 처형자의 시선이 다른 아바타들이 있는 곳으로 힐끔 움직였다.
말은 그렇게 했어도 어지간히 신경 쓰이는 모양.
물론 할리에겐 그 모습도 자신을 우습게 보는 것으로 느껴질 뿐이었다.
“푸흐흐··· 형씨, 내가 인생의 진리를 하나 알려줄까?”
그의 몸에서 검붉은 기운이 물씬 솟구쳤다.
가까이 접하는 것만으로도 존재가 오염될 것 같은, 생체력도 오러도 아닌 이질적인 기운.
그동안 온갖 제어 수단을 통해 한껏 억눌러져 있던—.
「광기의 씨앗」을 쥐어 짜내듯 뽑아낸 순수한 심연의 ‘광기’가 조금씩 주변을 잠식해 나가기 시작했다.
“바로, 자신만만하게 혓바닥 놀리다가 털렸을 때만큼 부끄러운 게 또 없다는 거지!”
콰앙—!
할리의 육중한 거구가 순식간에 전면으로 쇄도했다.
[나와는 관계없는 이야기로군.]그와 동시에 처형자가 자신의 고유스킬을 발동했다.
————!
세상이 슬로우 비디오처럼 서서히 느려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마침내 모든 것이 멈춰 섰을 때.
이 정지된 세계에서 움직이는 존재는 오직 그, ‘영겁의 대악마’ 하나뿐이었다.
‘흠, 확실히 고유스킬이 없었더라면 정면으로 싸워서 이기긴 힘들었겠군. 이 이치를 벗어난 끔찍한 육체가 놈이 품은 신성의 근원이겠지?’
어느새 야수탈을 쓴 괴인이 코앞까지 다가와 있었지만 그는 눈 하나 깜짝이지 않았다.
지금 상황에서 상대가 자신에게 해를 끼칠 수 있는 수단은 아무것도 없었으니까.
‘그게 대단하다는 건 인정한다만. 그러나 상성 상 그것만으로는 절대 나를 이길 수 없다.’
솔직히 이 정도로 말도 안 되는 육체를 상대하는 건 그도 처음이었다.
설마 공간 그 자체를 찢어발기는 공격에 노출되고도 상처 좀 나는 수준에서 그치다니.
대체 존재를 구성하는 밀도와 외부 간섭에 대한 저항력이 얼마나 강하면 그게 가능하단 말인가!
심지어 그나마도 그리 오래지 않아 재생할 정도였다.
나름대로 최선을 다한 공격도 고작 손목을 날려버리는 수준에 그쳤으니, 아무리 일방적으로 공격할 수 있는 상황이라곤 해도 앞으로 얼마나 더 두들겨야 재생력 이상의 피해를 줄 수 있을지 감이 오지 않았다.
‘하지만 나에게 시간은 무한한 자원일 뿐이니. 계속 두들기다 보면 언젠간 부서지겠지.’
처형자의 손아귀에서 이글거리는 에너지가 피어올랐다.
정지된 세계 속에서 기운을 운용하는 건 그에게도 상당히 부담이 가는 일이었으나 이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제대로 된 상처조차 낼 수 없을 테니까.
이변이 발생한 건 그때였다.
모든 공격 준비를 마치고 허공에 박제된 거한에게 다가간 순간.
무언가를 목격한 그의 눈가가 꿈틀거렸다.
‘하?’
머리 전체를 감싼 커다란 사자탈의 눈구멍.
그 사이에서 비친, 적광과 녹광을 흘리는 한 쌍의 눈동자가.
정확하게 그를 응시하고 있었다.
‘어떻게?!’
아주 살짝 위쪽으로 휜 눈매에 진득한 웃음기를 담아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