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overeign of the Infinite Clones RAW novel - Chapter (430)
다크 사이드 (2)
많은 일이 있었던 밤이 지나고.
갑작스러운 소동에 한바탕 몸살을 앓았던 태국 남단의 작은 도시에도 아침이 밝았다.
어쩌면 도시 전체가 사라졌을지도 모를 사건이 벌어진 게 고작 몇 시간 전.
하지만 죽지 않고 살아남은 이상 앞으로의 삶을 유지하기 위해서 어떻게든 일상으로 돌아가야 했던 만큼, 도시의 시민들은 언제 소란이 있었냐는 듯 평소처럼 분주하게 움직였다.
“이봐, 자네도 봤지? 그 밤에···.”
“물론이지. 허 참, 나는 내가 꿈을 꾸고 있는 줄 알았다니까?”
“혹시 전쟁이라도 시작된 건가 싶어 얼마나 놀랐는데···.”
물론 모든 게 평소와 똑같진 않았다.
삼삼오오 모여 수군거리는 이들의 어수선한 분위기와 잠을 제대로 이루지 못한 탓에 얼굴 가득 드리운 피로는 그들이 전날 일을 얼마나 신경 쓰고 있는지 여실히 드러내고 있었으니.
비단 그런 반응은 해당 지역에 거주하는 이들에서 그치지 않았다.
시대가 시대인 만큼 당시의 상황을 생생히 기록한 영상들이 인터넷에 쏟아지며 여론의 관심을 끌어모았다.
이능 테러야 늘 있는 일이지만, 이만한 규모에 이렇게 화려한 사건은 그리 많지 않았던 것이다.
드높은 상공에서 연달아 터지는 어마어마한 폭발과 빛살처럼 하늘을 누비며 그것을 하나하나 요격하는 신비한 존재는 누구나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는 소재이지 않은가?
-영상으로 보는데도 위압감 장난 아니네. 폭발이 일어날 때마다 주변 공간이 일그러지는데?
└진짜네;; 저게 전부 도시에 떨어졌으면… 근데 갑자기 왜 갑자기 이런 일이 일어난 거지? 저 후진 동네에 뭐가 있기에?
-저거 천사 맞냐? 너무 멀리서 찍혀서 잘 안 보이는데.
└고배율로 클로즈업해서 찍힌 사진 있음. 날개 세 쌍에 갑옷 입은 천사임.
-갑옷이 뭔가 낯이 익은데… 설마 저거 그 하인리히라는 이세계 성자 아니냐?
└어? ㄹㅇ이네?
그중엔 천사의 정체가 하인리히라는 것을 유추해 낸 이들도 적지 않았으나, 오히려 이번 일을 이용할 생각도 있었던 만큼 그것까지 숨길 생각은 없었다.
물론 이번 일이 왜 일어났고 어떻게 진행되었으며 어찌 마무리되었는지까지 아는 이들은 그리 많지 않았다.
“그럼 정식으로 인사드리도록 하지요. 저는 타오르는 횃불의 대표, 프레이라고 합니다. 마스커레이드의 도움에 다시 한번 감사드립니다.”
지금 이 자리에 모인 사건의 당사자들을 제외한다면.
전투가 진행되는 내내 기절해 있던 총통 프레이가 정중하게 고개를 숙이며 감사를 표했다.
마스커레이드의 대표자로서 마주 앉은 하인리히와 처음부터 타오르는 횃불과 함께한 인연으로 동석하게 된 켄을 향해.
그에 하인리히가 부드럽게 미소 지으며 그녀의 인사를 받았다.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한 것일 뿐입니다. 번천회는 누구 일부의 문제가 아닌, 우리 모두가 함께 대응해야 할 인류의 적이니까요.”
그리고 그 ‘인류’에 포함되는 건 지구인만이 아니라고 말을 이은 그가 묘한 눈으로 프레이를 바라보았다.
“그런데 몸은 좀 괜찮으십니까? 그 미믹이라는 자에게 상당히 오랫동안 육체를 빼앗기셨던 거 같은데.”
“아, 많이 나아졌습니다. 이게 다 하인리히 님 덕분이지요. 사실 운이 좋기도 했죠. 고유스킬 덕분에 완전히 흡수되지 않고 버틸 수 있었으니까요.”
쓰게 웃은 그녀가 손을 쥐락펴락했다.
그간 총통으로서의 위엄을 위해 턱수염 가득한 장정 행세를 하던 사람답지 않게, 그 몸짓은 여느 아가씨 못지않게 여성스럽기 그지없었다.
“설마 외견을 바꾸는 게 전부인 줄 알았던 제 고유스킬에 그런 부가 효과가 있을 줄은 몰랐지만요.”
“고유스킬 쪽엔 별로 투자하지 않으셨나 봅니다?”
“···이세계인이시라 들었는데 상당히 해박하시군요. 전 고유스킬보단 에테르를 단련해서 벽은 넘어선 케이스입니다. 뭐, 수련에 적합한 완벽한 육체를 조성하고 성별 시비에 휘말리지 않게 된 건 제법 도움이 되었지만요.”
막 공동의 적을 상대로 승리를 거둔 직후인 만큼 양측의 대화는 부드럽게 진행되었다.
불편한 태도로 하인리히를 힐끔거리던 켄과 걱정하는 눈빛으로 프레이를 바라보던 안까지 몇 마디씩 꺼내기 시작하자 분위기는 더욱 화기애애해졌다.
켄이 아쉽다는 듯 한 마디 툭 내뱉기 전까진.
“그나저나 그 처형자라는 놈을 놓친 건 아깝네. 그런 위험한 적은 기회가 왔을 때 확실하게 처리해 뒀어야 하는데.”
그 말이 끝나기 무섭게 프레이와 안의 안색이 눈에 띄게 어두워졌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직접 그를 맞상대하다 사로잡혔던 프레이는 물론 지척에서 전투를 직관했던 안도 적의 무서움을 잘 알고 있었으니까.
당장 그가 돌아왔을 때 어디부터 노릴지는 불을 보듯 뻔했으니, 여러모로 걱정될 수밖에 없었다.
사실상 타오르는 횃불만의 힘으로 그를 막는다는 건 거의 불가능한 일이지 않은가?
“아, 제가 말하지 않았던가요?”
하지만 그런 그들의 고민은 오래가지 않았다.
“처형자는 저희 쪽에서 확실하게 마무리했으니 더는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하인리히가 대수롭지 않게 내뱉은 다음 말이 모든 우려를 깨끗하게 휩쓸어 버렸던 것이다.
“···엇? 정말입니까?”
“대체 언제···?”
그 말엔 팬텀의 부재를 깨달았던 안을 포함한 모두가 놀랄 수밖에 없었다.
혹시나 하고 기대하는 마음이 없었다면 거짓말이겠지만, 그래도 설마 이렇게 빨리 정리할 수 있을 거라고는 미처 예상치 못했으니.
처형자와 직접 싸워보기까지 했던 프레이와 켄도 비슷한 생각을 하긴 마찬가지였다.
‘역시 이곳에 온 전력이 마스커레이드의 전부가 아니었다는 거겠지? 대체 이런 이들이 그동안 어디서 뭘 하고 있었던 건지···.’
깊게 가라앉은 눈으로 하인리히를 바라보던 프레이가 한숨을 내쉬었다.
이계의 성자이자 천사인 존재까지 소속된 비밀 조직이라니.
그녀가 번천회의 위협을 깨닫고 활동을 시작한 지도 이미 몇 년이 지났지만 저런 세력이 있는 줄은 정말 꿈에도 모르고 있었다.
‘···그래도 당장 번천회와 적대하고 있는 건 틀림없으니 일단은 믿어 보는 수밖에.’
수상쩍기 그지없는 그들을 전적으로 신뢰하는 건 지양해야 하나 지금은 다른 대안이 없었다.
여태 자신을 믿고 따라온 이들을 위해서라도 가장 가능성이 높은 곳에 걸어볼 수밖에.
굳게 마음먹은 그녀가 옆자리의 안과 시선을 마주하며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좌중의 반응을 가만히 지켜보던 하인리히가 입가에 자신만만한 웃음을 머금었다.
‘세력 과시는 확실하게 했군. 그 셋이 직접 나서고도 놓친다는 건 말이 안 되지.’
어쩌다 보니 아바타의 다크 사이드까지 지구에 파견되면서 ‘마스커레이드 총집결!’ 같은 모양새가 되고 말았지만··· 이것도 썩 나쁘진 않았다.
그렇게 올인한 만큼 얻은 것도 적진 않았으니까.
번천회를 무너뜨린다는 대의를 위해서나.
비밀 결사 마스커레이드의 비상이란 측면에서나.
***
“후우, 좋아. 이걸로 동남아 파견 목적은 전부 달성했다고 보면 되겠군.”
타오르는 횃불과의 관계 구축은 순조롭게 마무리되었다.
아직까진 독립적인 두 세력의 동맹에 가까운 형태였지만, 당장은 지금 이 정도만 해도 충분했다.
조직이 입은 피해가 워낙 컸기에 저들은 생존을 위해선 이쪽에 의지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 만큼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자연스럽게 상하관계가 정립되어 따로 뭘 하지 않아도 하위 세력으로 자리 잡게 될 것이다.
‘번천회 동남아시아 지부도··· 뭐, 그 수뇌부를 모조리 사로잡은 시점에서 이미 정리된 것이나 마찬가지지.’
그들을 영혼까지 탈탈 터는 작업은 마침 현지에 파견된 한스에게 맡기면 될 터.
그 과정에서 다른 초월자들이 소속된 지부에 대한 정보도 얻을 수 있을 테니, 이미 소기의 목표는 한참 초과 달성한 거나 다름없었다.
‘지구에 온 아바타들은 차차 하나씩 다시 돌려보내면 될 테고.’
평소처럼 안마의자에 앉은 나는 지그시 눈을 감으며 지구에 남아 있는 아바타들을 쭉 훑어보았다.
가장 먼저 돌려보낸 아바타는 하이 엘프 해리스였다.
헬멧은 물론 의복 전체가 공기 정화를 비롯한 효과가 깃든 마도구였으나, 겨우 그 정도로는 주변 자연 그 자체를 느끼면서 생기는 답답함을 억누를 수 없었던 것이다.
‘참으려면 참을 수 있지만···. 뭐, 굳이 그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겠지.’
자연과 동화되어 매사 느긋한 해리스는 내게 있어서 일종의 정신 안정제 같은 존재였다.
다수의 아바타를 운용하면서 조금씩 쌓일 수밖에 없는 스트레스를 완화해 주는 건 물론 편안한 숙면에도 영향을 주는 아바타.
거기에 아름다운 음악 소리가 사방에서 끊이지 않고 들려오는 환경에 있다 보니, 그냥 그 자리에 늘어져 있는 것만으로도 도움이 되는 개체였다.
‘어디 보자, 그럼 다음은—.’
제일 처음 지구로 소환되었던 헤스페론은 지금도 열심히 업무에 매진하고 있었다.
복합 데이터 센터 내부에 가득한 슈퍼컴퓨터들은 물론 티탄과 「기계안 : 캘리카스」까지 총동원해서 이번 사건과 관련하여 번천회에 대한 위기의식을 더욱 고조시키는 여론을 만들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역시 이것도 그리 만만치 않네. 그동안 줄곧 수면 아래에서 드러나지 않았던 이유가 있었단 말이지.’
한창 화제가 되고 있는 사건과 엮었음에도 불구하고 생각만큼 큰 효과가 나오지 않았다.
하긴, 현대 지구에서 세계 정복을 꾀하려면 이 정도 정보전은 기본 중의 기본일 터.
기술 분야의 최고봉이나 다름없는 닥터까지 함께하고 있으니 그리 어려운 일도 아니었을 것이다.
“인터넷에 놈들에 관한 정보가 하나도 없었을 때부터 알아봤지만···. 굉장히 철저하네.”
어쩌면 이쪽처럼 개조된 인공지능이 있을지도.
혹시 모르니 헤스페론이 이용하고 있는 데이터 센터의 보안을 좀 더 신경 써야 할 것 같았다.
방심하다 역으로 추적당하지 않도록.
‘하인리히는 그동안 대외적인 업무로 돌리고. 그럼 남은 녀석들은···.’
빛과 어둠 양측을 오가는 중립 용병 할리.
그리고 확실한 다크 사이드라 할 수 있는 한스와 하인즈 2세, 그리고 헬라였다.
***
온갖 부정적인 기운이 휘몰아치는 공간.
“흐음, 이걸로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끝났군.”
처형자를 사로잡는 데 일조했던 다크 사이드의 일원, 하인즈가 입가를 닦으며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곤 의미를 알 수 없는 사념이 메아리치는 공간을 벗어나 완벽하게 격리된 이면 세계 바깥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다른 두 아바타와는 달리 피에 관한 부분 말고는 개입할 여지가 없었기에 맡은 일도 금방 끝났던 것이다.
[크흐흣! 역시 명색이 신성을 품은 존재라는 건가? 생각보다 오래 버티는구나. 좋아, 아주 훌륭해!]“흐흥~ 이거 잘만 뽑아내면 내가 쓸 수도 있을 것 같은데? 이런 점은 흡혈귀와 다를 바가 없네. 차원이 달라도 공통 분모는 있다는 거겠지.”
뒤쪽에서 신난 아바타들의 목소리가 들려오는 와중.
인공적으로 조성된 공간 바깥으로 빠져나온 하인즈가 깊게 숨을 들이쉬었다.
‘역시 저쪽 공기는 영 맞지 않는다니까.’
「드래곤 레어」에 다른 생명체도 넣을 수 있었다면 좋았을 텐데.
마기가 오히려 더 친숙한 둘과는 달리 오직 피만을 선호하는 그였던지라 찝찝한 건 어쩔 수 없었다.
그래도 처형자의 피에 담긴 힘을 빨아들이고 분석하는 일이 끝났으니 앞으로 다시 저곳에 갈 일은 없겠지.
‘그 과정에서 제법 소득도 있었고.’
영겁의 대악마라고 했던가.
아무리 악마의 피가 흡혈귀에게 썩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할지라도, 그 정도 되는 상대를 흡혈했다는 인과는 신혈의 성장에 적잖은 도움이 되었다.
‘물론 다른 둘에 비할 바는 못 되겠지만.’
‘마왕’으로서 쌓아온 업을 통째로 뽑아내 집어삼키려는 헬라와 그 영육을 심연으로 절여 꼭두각시로 만들 생각을 하고 있는 한스.
그에 비하면 피에 담긴 힘 조금과 인과 약간만을 챙긴 하인즈는 양반이라 할 수 있었다.
그 대신 생포된 다른 초월자들을 죽지 않을 만큼 양껏 흡혈하긴 했지만.
당장 맡은 일을 끝낸 그는 곧바로 ‘자신의 구역’으로 이동했다.
한국의 서울에 자리하고 있는, 그의 이름 아래 보호받고 있는 장소.
“아, 오랜만에 오셨네요, 로드!”
“음.”
자신을 반기는 진소란의 인사에 막 사무실로 들어선 하인즈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곳은 혈맹에서도 중심이나 다름없는 곳.
로드인 하인즈를 대신하여 조직을 이끄는 진소란이 근무하는 헤테로시스의 건물이었다.
‘이젠 음지 조직으로서의 면모는 찾아볼 수도 없군.’
천천히 주변을 둘러본 하인즈가 고개를 끄덕였다.
작은 빌딩 한 채를 통째로 사용하는 이곳의 풍경은 여느 회사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낮에도 커튼을 쳐서 전체적으로 어두컴컴한 건 물론 직원들 대부분이 밤에 일한다는 것만 빼면.
“그래도 보고는 매번 확인하고 있었다. 여전히 일이 많은 것 같던데.”
“으음, 그래도 요즘은 많이 나아졌어요. 하워드 인더스트리가 본격적으로 출범했을 땐 이러다 정말 죽는 게 아닐까 싶었는데···. 확실히 전문 경영인을 세우니 다르더라고요.”
그때만 생각하면 식은땀이 난다는 듯 한숨을 내쉰 그녀가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그래, 모든 일을 다 네가 할 필요는 없다. 선장은 선원들이 일을 제대로 하고 있는지 확인만 잘하면 되는 법. 세상엔 한 가지 분야만 파고든 전문가도 많고 유능한 인재들도 많으니까.”
“···로드께서 말씀하시니까 정말 설득력이 넘치네요.”
그렇게 갈려 나가는 선원 중 한 명인 진소란이 떨떠름한 기색으로 하인즈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다시 한번 굳게 다짐했다.
저 모습을 본받아 자신도 어떻게든 유능한 부하들을 끌어모아서 귀찮은 일들을 떠넘기고 말겠노라고.
“당장 큰 문제는 없는 것 같은데. 뭔가 특이 사항은 없나?”
“특이 사항··· 아! 저번에 보고드렸던 프로젝트! 그걸 시행할 준비가 드디어 전부 끝났어요.”
“프로젝트?”
또 뭐가 있었더라?
하인즈가 지난 기억을 되짚어보며 턱을 쓰다듬고 있을 때.
그의 앞에서 생글생글 미소 짓던 진소란이 눈빛을 번뜩이며 말을 이었다.
“흡혈귀에 대한 인식 개선 프로젝트.”
그러자 그의 뇌리에 하나의 기억이 스치고 지나갔다.
하워드 인더스트리가 출범하며 살짝 덜해진 감이 있긴 하지만, 한국은 물론 유럽의 암흑가를 통째로 집어삼킨 흡혈귀 클랜— 혈맹에 대한 해외의 인식은 그리 좋지 못했다.
오죽하면 그 본거지인 한국을 욕하는 여론까지 공공연히 대서특필되고 있을까.
그리고 그에 대한 대책으로서 전권을 위임했던 안건이 바로···.
“연예계 진출이죠!”
혈맹의 연예계 진출로 인한 대외 정책 수립에 관한 건.
—이라는 이름의 프로젝트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