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overeign of the Infinite Clones RAW novel - Chapter (438)
소집 (2)
흑룡회.
지금은 번천회에 밀려 이렇다 할 존재감도 남아있지 않은, 곧 사라진다고 해도 전혀 이상하지 않은 이름이었다.
그나마 아직도 명맥이 끊어지지 않은 것은 그들이 대격변이 일어나기 전부터 최소 수십 년간 중국의 음지에 존재해 온 유서 깊은 조직이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것도 이젠 완전히 옛말이 된 지 오래였지만.
‘흑룡회라···. 생소한 이름인데도 데이터베이스에 남은 정보는 굉장히 많은데?’
그만큼 과거에 이름을 떨쳤던 세력이라는 뜻일 것이다.
막 귀환자가 하나둘 등장하던 초창기.
그들은 운 좋게 핵심 간부 중 하나가 화경의 고수가 되어 돌아온 덕분에 성공적으로 체질 개선을 하며 상당한 성세를 구가할 수 있었다.
그 과정에서 내외부적으로 엄청난 피가 흐르긴 했으나, 그거야 권력의 이동이 있을 때마다 항상 반복되었던 일이니 그리 특별한 것도 아니었다.
정작 조직을 뒤엎은 그 화경의 고수 역시 채 몇 년이 가기 전에 자기보다 더 강한 이에게 목숨을 잃기도 했고.
‘중요한 건 그 과정에서 흑룡회가 몇 가지 특색을 가지게 되었다는 거지.’
그중 대표적인 게 바로 신비 중에서도 ‘무공’을 사용하는 무림계 귀환자를 더 우대하게 되었다는 점이었다.
물론 거기엔 현실적인 이유도 있었다.
어떤 이유에서인지 중국 출신의 귀환자 중에는 무림계로 분류되는 차원 출신의 비율이 굉장히 높았던 것이다.
사실 무림계로 전송되는 이의 대부분이 동양인이라는 점을 생각해 보면, 각성자의 무의식이 대상 차원을 선정하는 데 어떤 영향을 주는 것일지도 몰랐다.
‘유독 유럽 쪽에서 흡혈귀들이 강세를 보이는 것도 그렇고.’
또 지구로 귀환하면서 더 이상의 성장이 정체된 그들이 더욱 강해지기 위해서는 동류와 교류하여 기술을 갈고닦는 수밖에 없었기에, 흑룡회가 무림인들을 주축으로 구성된 건 그리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뭐, 결국 그렇게 극단적인 방향성을 추구한 탓에 더 허무하게 도태된 감이 있긴 하지만.
“···그래서 저희는 한국으로의 이주만이 흑룡회를 회생시킬 유일한 기회라고 판단했습니다. 한반도는 이전부터 이상하리만치 번천회가 관심을 두지 않았던 영역이니까요.”
한국으로 투입된 번천회의 전력은 중국 본토에 비하면 새 발의 피만도 못한 부스러기에 불과했다.
그래서 그들이 끝내 구역을 내주고 완전히 철수했다는 소리를 듣고도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았노라고— 그리 말한 흑영이 조용히 고개를 숙였다.
‘까놓고 말해서 그냥 한국의 음지를 대표하게 된 혈맹을 완전히 무시했다는 소리잖아?’
중국인이 한국을 소국이라 깔보는 거야 하루 이틀 일도 아니었으니 새삼스럽지도 않았다.
초월자인 팬텀이 아무리 대단하다 한들 혼자서는 이번 일처럼 음험하게 뻗어오는 음모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할 것이라 여겼으리라.
“그래, 동기는 확실하게 이해했다.”
하인즈 2세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흑영은 그 사전 작업을 위해 파견된 선봉대였다.
계획이 모두 성공해 혈맹이 완전히 무너져 내리면 더할 나위 없고, 설령 그렇게 되지 않더라도 그들이 다른 일에 신경 쓸 겨를이 없도록 만들기 위해.
“그러니까 네 말은···.”
그런 공작 임무에 흑영 정도 수준의, 화경의 끝자락에 선 고수가 파견되었다는 것만 해도 그들이 이 일을 얼마나 중요하게 여기고 있는지 알 수 있을 정도였다.
“그 일을 지시한 흑룡회의 우두머리가 바로 저곳에 있다는 소리지?”
“···그렇습니다, 로드.”
그러고도 정작 상대측의 역량을 잘못 파악해도 한참 잘못 파악했다는 치명적인 실수를 저지르긴 했지만.
한 손을 앞으로 뻗어 저 멀리에 보이는 도시를 지목한 하인즈 2세가 자신의 손가락이 향한 방향을 바라보았다.
중국의 동쪽 끝에 위치한 흑룡강성, 그곳에서 가장 큰 대도시 중 하나— 하얼빈 시.
‘좋아, 그럼 어디 책임자의 얼굴이나 한 번 확인해 볼까.’
이번 사태의 확실한 마무리를 위해 몸소 나선 그의 눈에 도시의 야경이 아름답게 흐드러졌다.
***
현재 지구상에서 초월자라 불리는 이의 수는 약 백 명 남짓으로 추정되고 있었다.
그 숫자가 확실하지 않은 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모든 이들이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고 공개적으로 활동하는 것도 아니었을뿐더러, 여러 가지 이유로 지역 자체가 외부와 연락이 닿기 힘들어진 곳도 적지 않았으니까.
무수한 군벌들이 난립해 야만의 땅이나 다름없어진 아프리카나 초인 카르텔의 영향력이 정부를 넘어선 남미, 극단주의 테러리스트들이 득실거리는 중동 등은 특별한 수단이 없다면 정보를 접하기가 불가능에 가까운 곳이었다.
그저 인구수 대비 초월자의 비율을 따져 봤을 때 그 정도쯤이 되지 않을까 예상하는 것이 전부일 뿐.
다만 세간 사람들이 미처 예상치 못한 사실이 한 가지 있다면.
그렇게 외부와 교류가 차단된 지역에는 하나같이 동일한 배후 세력이 존재한다는 사실이었다.
애초에 그런 혼란스러운 정세에 불을 지핀 게 그들이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그게 아프리카든, 남미든, 중동이든··· 아니면 또 다른 어떤 지역이든 마찬가지.
그런 의미에서 오늘은 굉장히 특별한 날이었다.
지금까지 줄곧 그 장막 뒤에서 세상을 움직이던 흑막의 회합이 있는 날이었으니까.
온통 새하얀 대리석이 깔려 있는 건 물론 곳곳에 유려한 문양이 새겨져, 마치 신전과도 같은 엄숙한 느낌이 물씬 풍기는 이면 세계.
끼이익—
작은 소음과 함께 바깥과 이어진 문이 활짝 열리고, 멋들어진 카이저수염과 눈가를 가로지르는 흉터를 가진 히스패닉계 중년 사내가 내부로 성큼성큼 들어왔다.
그는 가볍게 주변을 둘러보곤 곧바로 중앙의 원탁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철컥! 철그럭— 철컹!
그가 한 걸음 내디딜 때마다 육중한 금속음이 사방에 울려 퍼졌다.
투구 없이 전신을 감싼 두꺼운 금속 갑옷과 그 손에 들린 성인 몸뚱이만 한 크기의 전투 망치, 그리고 등에 매달려 이리저리 흔들리는 큼직한 대구경 산탄총까지.
금방이라도 전투를 벌일 듯 완전 무장한 사내가 원탁 가까이 다가오자, 이미 진즉에 도착해서 자리 하나를 꿰차고 앉아있던 흑인 사내가 입꼬리를 비틀어 올리며 이죽거렸다.
“거 요란하게도 등장하는구만? 독재자 나리. 가장 늦은 사람답지 않게 말이야.”
그는 상대와는 달리 이렇다 할 무구는 물론 장비도 없었다.
몸에 걸친 것이라고는 뼈나 깃털 따위를 한데 엮은 듯한 장신구들이 고작.
하지만 주술로서 초월에 이른 그에겐 이런 제구(祭具)야말로 진정한 무기라 할 수 있었다.
“껄껄껄! 이거 미안하게 됐군! 내 관할지에서 작은 소란이 생기는 바람에 말이야. 아무래도 사업이라는 게 신경 써야 할 것들이 많단 말이지? 기껏 벌어준 돈을 까먹기만 하는 전쟁 중독자들과는 달리 말이야.”
히스패닉 중년이 품속에서 두꺼운 시가 하나를 꺼내 들었다.
그리곤 끝부분을 이빨로 물어뜯어 바닥에 퉤 뱉어 버리곤, 이내 불을 붙인 그것을 힘껏 빨아들이곤 흑인 사내 쪽으로 천천히 내뱉었다.
동시에 주변 공기가 서서히 긴장감으로 고조되기 시작했다.
“···흐! 마약쟁이가 밀수로 돈을 버는 게 뭐 그리 자랑스럽다고 당당하게 떠드는 건지.”
“무의미한 전쟁만 벌이면서 돼지 새끼들처럼 처먹기만 하는 것보단 낫지 않나? 안 그런가? 자칭 해방자 씨.”
“무의미? 지금까지의 투쟁으로 수탈에서 벗어난 민족의 수가, 자유를 되찾은 마을들이 수두룩하거늘. 이 더러운 독재자 놈이··· 지금 우리의 성전을 무의미하다고 했느냐?”
“······.”
“······.”
두 사람 사이를 흐르는 싸늘한 정적.
그건 그리 오래 가지 못했다.
후우우웅—!
거센 기운의 유동과 함께 휘몰아치는 사나운 폭풍.
어마어마한 에너지가 깃든 대구경 산탄총의 총구가 해방자에게 향하고, 허공에서 모습을 드러낸 무언가가 독재자에게 이빨을 들이밀었다.
금방이라도 충돌할 듯한 일촉즉발의 상황.
“둘 다 뒤지기 직전까지 맞고 싶지 않으면 거기까지만 하지?”
그러나 이 자리에는 그들만 있는 게 아니었다.
어딘가 나른한 듯한 여성의 목소리에 두 사람의 몸이 움찔했다.
소란 속에서도 미동도 하지 않은 채, 처음과 마찬가지로 원탁에 고개를 처박고 있는 부스스한 금발 머리.
하지만 이 자리에서 그녀의 경고를 무시할 수 있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아무리 그들 또한 초월자이고 각각 남미와 아프리카를 책임지는 지부장이라 한들, 그 모든 것을 넘어서는 절대적인 힘 앞에서는 몸을 사릴 수밖에 없었으니까.
“쯧, 운 좋은 줄 알아라.”
“하! 내가 할 소릴.”
결국 둘은 기운을 거두고 각자 가장 떨어진 원탁의 끄트머리에 가서 앉았다.
물론 그 상황에서도 눈은 계속 서로를 노려보고 있었다.
애초에 사상도, 성향도 극과 극인 두 사람이었기에 함께하는 자리에서 마찰이 생기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래도 지금까진 서로의 활동 영역이 떨어져 있었던지라 부딪칠 일도 많진 않았었는데···.
‘아, 벌써 피곤해지는 거 같네.’
테이블에 머리를 박은 금발의 여성, 심판자가 깊은 한숨을 토해냈다.
사실 그녀가 개입해 저지한 싸움은 이번이 첫 번째가 아니었다.
서로 마주한 지 얼마나 지났다고, 이미 앞서 몇 번의 마찰이 더 있었던 것이다.
‘다들 개성과 자존심이 좀 강해야 말이지. 거기다 애초에 동료애라는 것도 바닥을 치는 상황인데 오죽할까.’
모두 각자의 이유를 품고 번천회와 함께하게 됐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누군가는 목숨의 구함을 받았다거나 성장에 도움을 받는 등 갚기 힘든 빚을 져서, 누군가는 스스로의 야망을 이루기 위해선 이쪽에 붙는 게 유리할 거라 판단해서, 또 누군가는 번천회주라는 절대자에게 겁을 먹거나 경외감을 느껴서 등등···.
생각만 같아선 싸우든 말든 그냥 내버려두고 싶었지만, 회주의 말도 있는데 간부들끼리 사생결단을 내려는 걸 그냥 방치할 수도 없었다.
마침 그녀와 동격인 동료가 회주의 명을 이행하기 위해 자리를 비운 상태였기에 더욱더.
그리고 또···.
그녀의 시선이 지금은 주인이 사라져 텅 비어버린 몇몇 빈자리들로 향했다.
‘이야기를 들어서 알고는 있었는데···. 이렇게 직접 보니 더 확실히 실감이 가네.’
지금의 이 회합은 번천회주가 직접 소집한, 지부장 이상의 고위 간부라면 반드시 참여해야 하는 자리였음에도 여전히 다수의 자리가 텅 비어 있었다.
‘율령자부터 시작해서 공작과 서기관, 그리고 나가라자까지···.’
아니, 그뿐만이 아니었다.
무력으로는 회주 다음 가는 이인자나 다름없는 처형자는 물론이고, 오라클과 함께 회주의 한쪽 팔이나 다름없는 닥터까지 놈들에게 당하지 않았는가?
또 처형자가 제때 몸을 빼지 못한 것엔 지원 폭격을 담당했던 그녀의 책임도 아주 약간은 있는 만큼, 지금 사태를 단순하게 보고 넘어갈 수는 없었다.
‘분명 확실하게 몸을 빼는 것까지 확인하고 폭격을 중단했었는데. 대체 왜 그런 사기적인 능력을 가지고서도 제대로 도망치지 못한 거야?’
처형자가 무능했던 건지, 마스커레이드 측이 지나치게 유능했던 건지.
그렇게 몇 차례 속으로 불평불만을 터트리던 그녀가 가볍게 숨을 골랐다.
아무리 개인적으로 싫어하던 이였다고 한들 공과 사는 철저하게 구분해야 했으니.
그만큼 적의 세력··· 마스커레이드의 전력이 강하다면 그들과 적대하고 있는 자신들도 서둘러 대책을 세울 필요가 있었다.
끼이익—
그렇게 머릿속을 오가는 복잡한 생각으로 한창 고민에 잠겨있을 때.
다시 외부와 연결된 문이 열렸다.
나이와 성별, 인종을 막론하고 심상치 않은 기세를 풍기던 고위 간부들 열댓이 일제히 그곳을 돌아보았다.
간부 중에 올 수 있는 이들은 이미 다 온 만큼, 지금 등장한 이가 누구인지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던 것이다.
“기다리게 했군.”
그리고 그 기대대로.
문이 있는 방향에서 모두가 기다리고 기다려왔던 존재의 목소리가 나직이 흘러나왔다.
“아아!”
“회주님께서 오셨다.”
“회주님!”
신격을 싹틔운 심판자로서도 제대로 인지할 수 없는, 평범한 청년인 것 같기도 하고 비범한 노인 같기도 한 모호한 음성.
그녀는 침을 꿀꺽 삼키곤 어느새 송골송골 맺힌 손바닥의 땀을 옷자락에 닦아냈다.
“흐음, 다들 얌전히 있었던 거 같네. 장한데?”
그 뒤를 이어 약간의 웃음기가 서린 오라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슬쩍슬쩍 그녀가 있는 곳을 쳐다보는 걸 보니, 이미 이 자리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전부 파악한 듯싶었다.
‘알면서도 전부 나한테 떠넘긴 건가. 악취미군.’
예상하지 못한 변수가 등장한 것은 바로 그때였다.
“우호홋! 다들 오랜만이군요! 그동안 무탈하셨습니까? 아아··· 그러고 보니 저도 소식은 들었습니다. 처형자가··· 그 처형자가···! 크흡!”
하이톤의 촐싹거리는 말투로 시작했다가 진심으로 비통하다는 듯 울먹거리더니, 눈물을 뚝뚝 떨어뜨리며 진심으로 통곡하기 시작한 회갈색 머리의 중년인···으로 보이는 사이보그.
부활한 육체의 개조를 위해 잠적했던 ‘닥터’였다.
“으허허헝—! 꺼흑! 끅!”
이전에 보았던 것 이상으로 오락가락하는 반응에 모두가 그를 멍하니 바라보고 있을 때, 그 요동치는 감정선은 거기서 멈추지 않고 계속해서 변화를 거듭하고 있었다.
“아아악! 이건 말도 안 됩니다! 대악마를, 대악마의 육체를 놈들에게 빼앗겨 버리다니! 아직 안 해본 실험들이 얼마나 많은데 그 귀한 최상급 실험체를 이렇게 잃는다니요옷!! 부러워부러워부러워! 용납할 수 없습니다!”
분노에 이은 질투.
동료를 잃은 비통의 방향성이 다른 건 어쩔 수 없었다.
애초에 그는 평생을 그렇게 살아온 사내였으니까.
“···후우, 그래도 다행입니다. 혹시 몰라 처형자 몰래 호문쿨루스를 만들어둬서요. 그것마저 없었으면 전 정말 미쳐버렸을 겁니다. 후후후후!”
그리고 그 폭주의 끝은 모두를 어이없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처형자는 주기적으로 번천회주에게 도전을 반복해 왔었고, 그 결말은 언제나 간신히 회생할 수 있을 정도의 심각한 부상이었다.
닥터는 그럴 때마다 그의 재생을 적극적으로 도왔었는데, 말하는 걸 들어 보니 그 와중에도 할 수 있는 실험은 이미 전부 다 하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심지어 허가도 없이 소재를 채취해 호문쿨루스를 만들 정도였으니 말 다 했지.
아마 그걸 처형자에게 들켰다면 결코 간단히 끝나지는 않았을 거다.
신격을 지닌 이를 똑 닮은 인조 생명체의 존재는 그 자체만으로도 쌓아온 신성을 위협할 수 있는 약점이나 다름없었으니까.
이제 와서는 아무 상관 없는 이야기일 뿐이지만.
“응? 왜들 그렇게 보십니까?”
그러나 정작 닥터는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릴 뿐이었다.
“저희가 이곳에 모인 목적이 있지 않습니까! 자아, 자아! 어서 시작하지요!”
그리곤 방긋 웃으며 즐겁게 박수를 치며 활기차게 외쳤다.
“마스커레이드 전원을 실험체로 잡아들이기 위한 작전 회의를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