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overeign of the Infinite Clones RAW novel - Chapter (439)
흑룡회 (1)
‘큭, 저항할 수 없다.’
흑영이 이를 악물었다.
일이 이렇게 될 줄은 꿈에도 예상하지 못했다.
계획했던 대로 한국의 음지를 지배하는 혈맹을 흔들어 틈을 만들기는커녕, 오히려 역으로 당해서 이런 꼴이 되어 버릴 줄이야!
설마 자신이 직접 혈맹의 주인인 팬텀을 흑룡회의 비밀 거점으로 안내하게 될 줄 누가 알았겠는가?
‘흡혈귀화가 이루어지면서 몸 안에 들어찬 피의 농도는 그리 높지 않다. 그런데 어째서? 어째서 강제력을 거부할 수 없는 거냐!’
하인즈 2세가 그에게 사용한 어마어마한 양의 「정제혈정」의 대부분은 그 저항력을 뚫는 데에 소모되었다.
정작 흑영의 육체 구조를 변화시키고 그를 피의 구속으로 옭아매는 데 들어간 흡혈인자는 그리 많지 않다는 소리.
실제로 지금 그의 뱀파이어로서의 경지는 그리 높지 않은 편이었다.
아우테리카의 기준으로 보면 아슬아슬하게 잔혈을 벗어나 순혈에 이른 수준이었으며, 지구 기준으로 따져 봐도 4~5레벨을 오가는 정도에 불과했으니까.
화경의 끝자락에 달한 그의 전투력이 8레벨 흡혈귀와 대등하다는 것을 생각해 보면, 무인으로서의 흑영이 흡혈귀화로 인한 정체성을 압도해야 정상이었다.
하지만 현실은 정반대.
어찌 된 일인지 그는 피의 구속을 도저히 무시하지 못하고, 자신을 이렇게 만든 이의 명령을 순순히 따를 수밖에 없었다.
다른 어떤 수작도 부리지 못한 채 성심성의껏 최선을 다해서.
“커헉!”
“으윽, 흑영! 당신이 어째서!”
“이 기운··· 설마 흡혈귀가 되어버린 건가? 화경의 고수가 어떻게?”
그 결과가 바로 지금의 모습이었다.
갑작스러운 아군의 습격으로 난장판이 되어버린 비밀 거점.
살수인 그는 무인이 주가 되는 흑룡회 내에서도 이질적인 존재였지만, 그 경지만 따져보면 우두머리인 흑룡주 다음이라고 할 수 있는 이였다.
심지어 직업 특성상 그는 본거지에 설치된 진법과 함정 등을 이미 훤히 꿰고 있었으며, 얼마 전까지만 해도 동료였던 이들의 사소한 습관과 약점 같은 것들도 본인들보다 더 잘 알고 있었다.
그런 그가 작정하고 그들을 ‘공략’하고 나섰으니···.
차아앙!
“이게 무슨 짓이죠? 흑영!”
“···연화검.”
지금처럼 그와 맞설 수 있는 최소한의 자격조차 갖추지 못한 이들은 그저 속수무책으로 나가떨어질 수밖에 없었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처음부터 죽일 의도는 없었던 만큼, 다들 한동안 푹 쉬면 회복할 수 있는 수준에 그쳤다는 점일까.
흑영이 작은 한숨을 토했다.
불꽃이 타오르는 듯한 붉은 검을 자신의 낫과 맞대고 일갈을 터트리는 젊은 여인.
그와 마찬가지로 화경의 경지에 오른 흑룡회의 무인이었다.
“진정하시게, 연화검. 자네도 지금 흑영의 상태가 어떤지는 알지 않은가?”
“말도 안 돼. 초극을 눈앞에 둔 흑영이 피의 오염을 이겨내지 못하고 흡혈귀가 되어버렸다고? 어떻게 그럴 수 있는 거지?”
“확실히, 아무리 팬텀이 초월에 이른 흡혈귀였다고 해도 그렇지···.”
그 뒤를 이어 한 무리의 무인들이 두 사람을 둘러쌌다.
녹색 도복을 입고 언월도를 든 긴 수염의 중년인과 힙합 패션에 쌍검을 쥔 호리호리한 사내, 온몸에 명품을 두른 날카로운 인상의 중년 여성, 그리고 저 멀리서 커다란 활을 겨누고 있는 근육질의 남자까지.
그들 모두가 무너져 가는 흑룡회를 어떻게든 지탱해 왔던 화경의 고수들이었다.
“수라권왕은? 무사한가요?”
“목숨엔 지장이 없더군. 독에 중독된 상태긴 하지만 워낙 튼튼한 친구니 알아서 털고 일어날 테지.”
“···그런가요.”
언월도를 든 중년인의 대답에 숨을 고른 연화검이 천천히 뒤로 물러났다.
그녀 또한 화경의 경지에 오르긴 했으나, 일대일로 흑영을 상대할 자신까진 없었다.
아무리 그가 암습에 특화된 살수라고 한들 화경 내에서도 수준 차이는 있기 마련이었으니.
‘하지만 우리 다섯이라면!’
사실 굳이 다섯까지도 필요 없다.
흑영이 주특기인 암습을 계속해서 이어갈 수 있다면 모를까, 이미 완전히 모습을 드러낸 지금은 둘 정도만 되어도 필승을 장담할 수 있었다.
그들 다섯과 흑영, 그리고 당직 때문에 가장 먼저 습격을 받고 쓰러진 수라권왕까지 포함한 일곱은 흑룡회의 칠룡이라고까지 불리고 있지 않은가?
그런데도 그들이 모두 나선 건 어디까지나 흑영을 확실하게 생포하기 위함이었다.
혹시 그를 원래대로 되돌릴 방법이 있을지도 몰랐으니까.
지금까지 사망자가 아무도 없었다는 것 또한 그 희망에 불을 지핀 요인 중 하나였다.
“얌전히 항복하시게나, 흑영. 그럼 어떻게든 원래대로 돌아올 방법을 찾을 테니. 자네도 그렇게 하는 게···.”
“그렇게 말한다고 듣겠어? 그게 마음대로 됐으면 이렇게 난장을 피우지도 않았겠지.”
점잖게 말하는 중년인의 말을 끊고 쌍검의 사내가 성큼 한 걸음 앞으로 내디뎠다.
“이렇게 되어 버린 거, 이제 남은 건 실력 행사뿐이지! 반항하지 못하게 두들겨 패고 꽁꽁 묶어서 가둬두면 되잖아?”
“으음.”
“흐흥~ 틀린 말은 아니네. 흑영이 저렇게 된 걸 보니 한국에서 진행되던 작전도 전부 파토 난 것 같은데. 일단 제압한 다음에 흑룡주께서 돌아오실 때까지 잡아두면 되지 않겠어?”
그의 말에 명품을 두른 미부가 수긍하고 나섰다.
흑영이 실패했다면 흑룡주가 따로 준비하던 이주 계획 역시 중단될 수밖에 없었다.
이미 연락은 취해 뒀으니 돌아올 때까지 그리 오래 걸리지도 않을 터.
그렇다면 자신들이 할 일은 이미 정해져 있는 것과 다름없었다.
“···좋네. 이 이상 소란이 커져서 좋을 게 없으니, 그럼 최대한 빨리 끝내도록 하지.”
말이 끝남과 동시에 매섭게 공기를 가른 언월도가 정면을 겨누었다.
“쯧, 협공은 마음에 안 들지만 어쩔 수 없지.”
날카로운 예기를 흘리는 쌍검과 불꽃이 일렁이는 듯한 붉은 검 또한 마찬가지.
명품 백에서 튀어나온 날카로운 비도들이 손가락 사이에서 날카로운 예기를 발했다.
하지만 정작 흑영은 다수의 무기가 자신을 겨누는 와중에도 아무런 반응도 하지 않았다.
상대들을 무시하려는 의도는 아니었다.
그저, 이제 굳이 이렇게 앞으로 나설 이유가 없어졌을 뿐.
그가 지그시 눈을 감았다.
그리고.
“흐음, 역시 수장은 자리를 비운 건가? 타이밍이 엇갈렸나 보군.”
일순— 공기가 얼어붙었다.
갑작스럽게 들려온, 거대한 위압감이 담긴 제삼자의 목소리.
움찔한 화경의 고수들이 황급히 몸을 움직여 그 근원지를 바라보았다.
그곳에 그가 있었다.
새하얀 오페라 가면을 쓰고 하나하나 그들을 둘러보는··· 지금 흑룡회에 일어난 사건의 원흉으로 지목되는 존재가.
‘언제?’
‘어떻게?’
누구도 알 수 없었다.
대체 언제부터 저기에 있었는지, 어떻게 모두의 감각을 속인 건지.
그리고 자신들은 대체 왜, 이 피부가 저릿해질 정도로 피비린내 나는 기세를 여태 눈치채지 못했던 건지!
툭!
그때, 긴장감으로 딱딱하게 굳은 그들 사이로 육중한 한 인영이 떨어져 내렸다.
이 자리에서 그게 누구인지 모르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궁귀···!”
정신을 잃고 축 늘어진 근육질의 사내.
자신들과 같은 칠룡의 일원이자, 방금 전까지만 해도 가장 후방에서 활을 겨누던 동료였다.
아무리 그의 주력이 활이라고 해도 그렇지, 명색이 화경씩이나 되는 존재가 이렇게 아무런 기척도 없이 제압될 줄이야!
‘아니, 그것보다 그가 저렇게 될 때까지 아무것도 알아채지 못한 우리는···?’
등골에 싸늘한 소름이 치달았다.
그와 동시에 본능적으로 깨달을 수 있었다.
지금 저곳에 있는 서 있는 인물은, 지금까지 그들이 접해왔던 초월자들과는 뭔가가 다르다고.
단순히 수준이 더 높은 정도가 아니었다.
그 이상의··· 존재로서의 격 자체가 차원이 다른 듯한···.
“흐음, 확실히 다들 제법 쓸 만해 보이는군.”
얼어붙은 이들을 품평하듯 태평하게 바라보던 하인즈 2세가 나직이 읊조렸다.
정작 그들은 최고조로 치솟은 긴장감에 함부로 경거망동하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거늘!
그러나 하인즈도 괜히 흑영에게 모든 일을 떠넘기고 「존재부정」을 사용해 조용히 관찰하던 게 아니었다.
그들을 거둘 가치가 있는지, 앞으로 어떻게 이용하는 게 좋을지 확실히 판단하기 위해서는 이 방법이 가장 효율적이었던 것이다.
‘괜히 소란 피우면서 도망치기라도 하면 곤란하기도 하고.’
아무리 이곳이 중국에서도 변방이라고 해도 엄연히 번천회의 영역에 속한 곳이었다.
흑룡회를 어떻게 활용할지 결정하지도 않았는데 괜히 놈들의 시선을 끌어봤자 좋을 건 없었다.
‘···하지만 역시 이 녀석들도 흡혈귀로 만들어 부리는 건 너무 비효율적이야.’
그가 슬쩍 흑영을 돌아보았다.
지구에서는 인간을 흡혈귀로 만드는 것과 별개로, 그 흡혈귀의 수준을 끌어올리는 데에도 역시 어마어마한 양의 「정제혈정」이 소모되었다.
괜히 흑영이 저 정도 수준에 그친 게 아니었다.
‘그게 그렇게 쉽게 됐으면 진소란 뿐만 아니라 헤테로시스의 모두를 몽땅 다 8레벨로 끌어올렸겠지.’
그렇게 혈맥의 힘에 비해 개인의 경지가 더 높아지면 피의 구속력 또한 약해질 수밖에 없지만 그에겐 큰 상관이 없는 문제였다.
신혈로서 지닌 격도 격이거니와, 「피의 종주」와 「종속 지배」를 비롯한 여러 스킬들이 그 모든 것들을 보조해 주니까.
‘뭐, 그래도 너무 순도가 낮으면 통제가 잘 안될지도 모르니 저 정도 투자는 해야겠지만.’
하지만 이 이상 투자하는 건 그에게도 낭비였다.
이미 내공을 단련하고 무리(武理)를 쌓아 올려 경지에 오른 이상, 흡혈귀로서의 심도(深度)가 깊어진다고 해서 전투력이 극적으로 상승하지도 않을 테고.
‘오히려 균형이 어긋나 더 약해지지 않으면 다행이지.’
흑영이야 살수 출신으로서 흡혈귀와 궁합이 썩 나쁘지 않았으나 다른 이들은 이야기가 달랐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이 녀석들을 효율적으로 부릴 수 있을···.
까아아앙—!
그의 상념을 끊어내듯, 요란한 쇳소리가 울려 퍼졌다.
강기가 가득 실린 채로 하인즈의 목을 향해 전력으로 휘둘러진 언월도가 손가락 하나에 막히면서 발생한 소음이 공간을 휩쓸었다.
기습적인 공세는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쉬이익—
급소를 향해 번개처럼 날아드는 십여 개의 비도들.
동시에 세 자루의 검이 빈틈을 노리고 무방비한 몸을 파고들었다.
짙은 살기를 품고 거세게 타오르는 파괴적인 강기가 공간을 헤집었다.
“호오? 제법.”
그에 하인즈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어?”
“쿨럭!”
“이, 무슨···!”
그리고 시간을 잘라낸 듯, 자신이 어째서 쓰러졌는지도 모르고 바닥에서 꿈틀거리는 이들을 내려다보며 피식 미소 지었다.
격차를 느낀 상황에서도 저항하고자 하는 정신은 가상하다만, 심검(心劍)에도 이르지 못한 수준으로 감히 자신에게 손끝 하나라도 댈 수 있을 리가 없지 않은가?
‘그래도 이 녀석들, 생각했던 것보다 더 수준이 높은데? 내 위압을 뚫고 기습을 시도한 것도 그렇고. 단순히 품고 있는 기운 이상이야.’
그가 묘한 눈으로 바닥을 나뒹구는 이들을 훑어보았다.
하필 상대가 하인즈였기에 허무하게 제압당한 것일 뿐, 이들은 객관적으로 봐도 일반적인 화경의 고수를 웃도는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단순히 고유스킬을 비롯한 시스템의 영향이 아니라 그 이상의 무언가가 진하게 느껴졌다.
‘그러고 보니 흑영도 그랬지. 끝자락이든 뭐든 겨우 극의 수준으로 할리와 한동안 술래잡기를 했다는 것 자체가···.’
턱을 쓰다듬으며 고민하던 그가 결론을 내렸다.
역시, 이놈들은 그냥 버리기에는 아까운 인재들이라고.
‘생각해 보면 흑룡회는 번천회의 영역권 안에서 이십 년이 넘도록 끝까지 살아남은 조직이지.’
그것을 가능하게 만든 이유가 있을 것이다.
타국으로 이주해야 할 정도로 힘든 상황에서도 무림계 귀환자들이 끝까지 지지를 보내는 것까지 포함해서.
‘이거 월척의 향기가 나는데.’
슬그머니 시선을 피하는 흑영을 바라본 하인즈가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아무래도 저 신입 흡혈귀가 묻지 않았다고 털어놓지 않은 사실이 제법 있는 듯했으니.
충성심이 없는 상태로 강제로 종속을 시도했을 때 감수해야 할 문제이긴 했으나, 막상 그런 상황을 마주하니 빈정상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흑룡주란 녀석도 빨리 봤으면 좋겠군.’
이 인연은 자신에게도 적잖은 도움이 될 것이다.
단순히 함께 번천회와 적대하는 세력으로서뿐만 아니라···.
또 다른 자신이 마주한 벽을 넘어서는 데에도.
***
“하 공자? 괜찮으세요?”
잠깐 생각에 잠겼던 그의 귓가로 조심스러운 여성의 목소리가 흘러들었다.
그에 잠시 멍하니 있던 하승훈— 휴고가 씩 미소를 지으며 그쪽을 돌아보았다.
“아, 잠깐 생각난 게 있어서 말이죠. 괜찮습니다, 제갈 소저.”
“···그, 제가 뭔가 방해한 건 아니죠? 깨달음의 순간이었다던가 그런···.”
“그런 건 아니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냥 이쪽 일도 끝났으니 다음엔 어디로 가는 게 좋을까 생각해 본 거니까요.”
“휴우, 다행이네요. 아까 부르고 나서 아차 했어요. 그럴 땐 그냥 가만히 기다리는 거라고 듣긴 했는데, 제가 이렇게 밖에 나와서 다른 사람과 돌아다닌 경험이 없다 보니까···.”
그의 평온한 대답에 안도의 한숨을 내쉰 제갈혜미가 재잘거리며 입을 열었다.
세계 수복을 위한 의식에 참여한 여파로 브릿지라도 넣은 것처럼 곳곳이 하얗게 탈색된 머리를 찰랑거리면서.
“뭐야! 왜 치사하게 둘만 놀고 있어? 난 열심히 땀 흘리면서 일하고 왔는데!”
그때, 활동성을 위해 머리를 비녀로 고정한 소녀 하나가 그들의 사이로 끼어들었다.
건강미 넘치고 활기찬 분위기를 풍기는, 장난기 가득한 커다란 눈망울을 반짝거리는 십 대 후반의 소녀.
“미안해, 소란아.”
“히힛, 사과했으니까 용서해 줄게! 대신에 알지?”
“후후후, 알겠어.”
“정말, 예전엔 언니 없이 어떻게 여행을 했나 모르겠어. 제때 씻을 수만 있어도 이렇게 삶이 달라지는데 말이야!”
실제 나이보다 훨씬 어려 보이는 제갈혜미를 품 안에 끌어안고 재잘재잘 떠드는 남궁소란을 본 휴고가 피식 웃음을 흘렸다.
확실히 용의 도술을 자유자재로 사용하며 마음대로 물을 불러낼 수 있게 된 제갈혜미는 여러 가지 의미로 일행에게 없어선 안 될 존재가 된 지 오래였다.
그녀가 아니었으면 자신도 강호행을 하면서 거지꼴을 면치 못했겠지.
‘뭐, 사실 일이 이렇게 될 줄은 나도 예상하지 못했지만.’
어느새 자기들만의 세계에 빠진 두 여인을 번갈아 바라본 그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